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28)화 (328/340)

(328)

사람들은 도망친 왕자가 동료를 모으고 험난한 모험을 이겨낸 끝에 아버지의 복수를 해내고 왕좌를 되찾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제이릴리스를 피해 달아난 황족들은 민중과 크고 작은 영주들로부터 기본적으로 동정과 호의를 받았다.

저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대영주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황족들을 데리고 있다가 황실의 힘이 약해지면 섭정 노릇 해보겠다고 나서야겠군.’

그러나 어쨌든 그들을 보호해준 건 사실이었다.

민중이 도망친 황족들에게 호의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워낙 계승 서열이 낮은 분이신지라 형제자매들을 경계하는 건 이해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다 죽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수도원에 감금하는 정도로도 모자랐던 건가?”

“그래 놓고 결국 제 쌍둥이 오빠는 살려줬잖아. 별 패악질을 다 저질러도.”

“쯧쯧. 저 귀하신 분이 어쩌다 여기까지. 저도 많이는 못 도와 드리지만, 일단 받아 가십시오.”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전하.”

물론 제이릴리스의 대숙청에는 합당한 명분이 있었다.

황족은 혈통의 정점이고, 여러 이종족의 피가 섞인 만큼 침식되기도 쉽다.

그 피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가는 강력한 침식자가 여럿 탄생할 것이다.

최악에는 옛것 신앙에 호의적이거나, 침식자 그 자체인 황제, 황족이 활동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다 죽여야 한다.

그러나 제국 관료 귀족들이 분석해 보건데, 무지렁이 농노들은 이런 복잡한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황족이 강력한 만큼이나 침식당하기 쉽다는 게 알려지면, 그 신성함과 존엄함이 옅어져서 신민들의 충성심이 낮아질 여지가 있었다.

그럼 사방의 대귀족들이 ‘그런 자를 따를 수 없다!’라고 외치며 군대를 일으킬 것이고.

침식에 대해 안다는 것 자체가 신민들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그 불안감은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만들며, 그 마음은 옛것을 불러온다.

따라서.

제이릴리스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다 죽여라. 아니, 다 죽이겠노라.”

신의 명령은 이해되지 않아도 따라야만 한다.

그녀는 신성 황제였고, 직접 보고 그 기운을 맞닥트린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게 누구나 인정하는 반신이었으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강자가 가득한 솔레타라스의 계보에서도 으뜸가는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강력한 제이릴리스조차도, 사람들의 마음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전하.”

“이제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그저…… 떠돌이 모험가일 뿐이죠. 아버지를 죽인 괴물이 옥좌에 앉아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겁쟁이기도 합니다. 유스티아누스면 충분해요.”

“아아. 가련하신 분.”

황족 대탈출이 있던 그날 밤.

유스티아누스는 수도 밖으로 도망쳤다.

발렌시아누스의 기대와 달리 그는 많은 영지에서 환영받았다.

“이 이론은 건국 초기 팽창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신민 보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군주가 있으면, 제국이 그 땅을 정복하고 신민들을 대신 보호해줘야 한다는 이론이죠. 매우 공격적인 사상이나, 각종 마수와 사교 집단이 세상을 떨게 하던 시절이었던지라,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도 낳았습니다.”

소년 대공은 학식이 깊었고.

“황자 시절이 그립지 않냐고요? 하하. 그때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제가 그리워하는 건 황자 대접이 아니라, 제게 친절했던 형님과 누님들입니다. 지금 셀렌느 당신이 제 곁에 있으니, 조금은 미소도 나오는군요.”

낭만적이었으며.

“모친께서 시들어가고 계신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합니다. 아. 제가 잘 아는 마법사가 있는데, 증세를 말해 주시면 치료법을 알아봐 달라 부탁하겠습니다.”

다정했다.

유스티아누스는 뭇 영애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내였다.

그는 키가 컸고, 몸매가 호리호리했으며, 서글서글한 웃음과 반짝이는 금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도망 생활로 길어진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넘겨 묶었고, 그 와중에도 피부는 희고 깔끔했으며, 언제나 단정한 셔츠와 조끼를 입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성에서 며칠간 묶고 가세요.”

“저희 아버님께서 초청을-.”

“저희도-.”

관심을 빼앗긴 공자들에게 반감을 살 만도 했지만, 그는 그들에게도 존중받았다.

“하!”

챙!

“져, 졌습니다.”

“왜 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검을 떨어트렸으니까요.”

“아니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진 겁니다. 저였으면 방금 상황에 아예 검을 제 쪽으로 던져 버리고 체술로 덤벼들었을 겁니다. 마음이 꺾이면 단련한 몸도 짐일 뿐이죠.”

“아아.”

“감복했습니다. 유스티아누스 전하.”

“전하라 부르지 않아도 좋다니까요. 벤론. 유스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친구니까요.”

그는 기품이 있었고, 검술에도 능했으며, 결고 패자를 모욕하거나 처지에 대해 불평 불만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한 지방 사교계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셀렌느. 이 밤에 무슨 일입니까?”

“어머니께서 각혈하셨어요. 저, 전 이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현지의 귀족들이 그에게 이런저런 고충을 털어놓을 정도로.

“지난 영지전에서 아버지가 무릎을 다치셨는데, 아무래도 꽤 상처가 깊으신 듯해. 옆 남작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 불안하군.”

“벤론. 실은 내가 알고 있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황궁에서 도망치는 절 도와준 분이죠. 한 번 만나 보겠습니까?”

그리고 그 손을 잡는 순간.

“예. 전하.”

“부탁입니다. 전하.”

“아닙니다. 날 도와준 대로 갚는 것뿐이에요.”

침식이 시작되었다.

* * *

그것은 만족을 모르기에, 왕이 그것에 빠지면 나라가 기운다.

“힘이 필요합니다.”

“내 아내를 구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네. 살려만 주게나!”

지독한 절박함은 오랜 시간 영지를 다스려 온 현명한 귀족의 눈도 멀게 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래. 저분은 나와 내 아내를 구해주기 위해 광명신께서 보내신 사도이시다.’

희망에 빠진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각하! 그 마법사가 남서쪽 개척촌에서 미친 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직언을 올렸지만.

“여보. 오늘 약을 마시니까 기운이 솟네요. 오랜만에 자수를 놓았어요. 고마워요.”

사랑하는 여인의 미소는 가신의 직언을 마귀의 속삭임으로 바꾸어놓았다.

“네가 감히 내 은인을 모욕하느냐! 다시 부를 때까지 이 성에 나오지 마라!”

“각하!”

그렇게 눈먼 영주가 수족을 쳐내면, 침식 교단은 순식간에 세력을 키웠다.

“유스티아누스. 오늘은 이 마을인가?”

“예. 딱히 데려갈 사람은 없으니, 모두 제물로 삼거나 변이시켜 버려도 좋습니다. 물론 식사를 즐기셔도 좋고요.”

“고맙군.”

외진 개척촌, 작은 마을부터 시작이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제들과 키틴질 갑각을 입은 기사들이 마을로 들어섰다.

“도망쳐!”

“아아아악!”

“도적 떼가 왔다!”

그들은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끌어냈으며, 약탈을 자행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끔찍하게 고문해 그 비명과 고통, 증오로부터 힘을 얻어냈다.

“죽여주세요. 제발.”

버티다 못해 죽음을 원하는 자는 집어삼켰다.

그 육신과 영혼 모두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다 죽여버릴 테다! 복수할 테야!”

간절하게 힘을 바라는 자는 그만큼 침식되기도 쉬웠다.

복수, 재화, 사랑, 힘, 평화.

모두 ‘바라는’ 것이고 그 바람 자체가 옛것을 불렀으니까.

까아아아악-!

그런 자들은 한데 모아 놓고 정신 파동을 한 번 내질렀다.

“아아. 이제야 진리를!”

“가가가각!”

운이 좋은 자는 그 자리에서 신도로 재탄생했고, 운이 나쁜 자는 이성 없는 괴물로 변했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는 나쁠 게 없었다.

타닥, 타닥.

유스티아누스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거구의 주교와 함께 불타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한없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허억, 허억.”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찰흙을 주무르듯 얼굴 표정을 바꾸었고, 이내 서글서글한 미소를 웃으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셀렌느?”

남작 영애 셀렌느.

꿈꾸던 소녀의 얼굴은 악몽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져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전하, 전하! 이게 지금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반쯤 울부짖듯 물었다.

유스티아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렇게 부를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스’면 충분합니다.”

다정하지만 서늘한 목소리였다.

셀렌느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눈앞의 소년은 그녀가 알던 유스티아누스가 아니었다.

“유스. 이거 우리 어머니를 위한 일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여전히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은 채로 답했다.

“절 못 믿는 겁니까? 영애? 실망이에요.”

그는 한 걸음 다가가 셀렌느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따듯하던 손길은 들척지근하고 끈적했다.

셀렌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거구의 주교와 마을에서 움직이는 벌레 기사들을 바라보고,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이 지방에 끌어들였는지 알아챘다.

“아, 아! 아아아아아아!”

유스티아누스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단단히 잡아 주었다.

“우리는 이미 같은 배를 탔어요.”

“이, 이 개자식!”

“미안해요.”

* * *

저녁이었다.

침식 교단이 돌아간 마을은 완전히 비었다.

흙벽돌로 쌓은 담은 무너졌고, 굵은 기둥은 주저앉았으며, 연기와 그 연기보다 독하고 더러운 침식의 기운이 풀풀 피어올랐다.

마을 중앙 광장에는 하얀 가루로 그린 마법진과 흑요석 제단이 놓인 흔적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수백 명이 누워 있었다.

그 사람들은 반반으로 나뉘어 괴물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영혼은 합일의 옛것이 가져갔고, 육신은 이 자리에 있던 침식자 주교와 사제, 기사들이 취했다.

우물은 말라붙었고, 가축은 죄다 침식되어 괴물로 변했으며, 불운한 생존자들 역시 침식되어 마을을 배회했다.

“워어어어……!”

“워어어어……!”

“워어어어……!”

그들은 헐벗은 인간의 몸에 여기저기 팔다리나 머리가 하나둘쯤 더 나와 있는 추악한 형태였다.

끝없는 영혼의 허기와 육신의 고통에 울부짖어야 했고, 다른 생명을 갈구해야 했다.

유스티아누스는 그들은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자박. 자박. 자박. 자박.

그는 침식자 사제와 같은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침식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마을의 침식자들은 그를 잡아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워어어어!”

다음 순간 유스티아누스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예리한 한손검이 단숨에 뽑혀 나왔다.

촤아아악-!

푸른 빛이 번뜩이고, 침식자 하나의 머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미안해요.”

촤아아악! 촤아악!

유스티아누스의 검에서 마나 블레이드가 은은하게 타올랐다.

“미안해요.”

셀렌느나 벤론이 들었다면 증오해 마지않았을 말이었다.

그러나 유스티아누스의 모습을 본다면,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촤아아악-!

침식자들은 조각난 채로 움찔움찔 떨다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스티아누스는 무너진 집에서 나무를 가져와 불을 피웠다.

그리고 침식된 주민들을 한 명 한 명 불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손은 분노와 자괴감,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

유스티아누스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다고 믿었으며, 권선징악이 옳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다.’

그러니 그가 아버지 황제와 황태자, 1 황자, 그 외 수백의 황족을 문자 그대로 쳐 죽이고 옥좌를 빼앗은 제이릴리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교회가 나서리라 믿었다.

파발을 돌려 제국의 대영주들과 광명신도 믿는 나라의 왕공 귀족들을 모으고, 홍의주교와 성기사가 앞장서 그 찬탈자를 끌어내리리라 믿었다.

하지만 교회는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전, 성자가 제이릴리스를 위해 지지 않는 꽃으로 성물 화관을 만들어 씌워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바꿔야 했다.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빠르게 힘을 얻을 방법은 동맹과 침식뿐이다.

유스티아누스는 둘을 섞어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멀쩡한 사람을 고문하다 죽이는 이 무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이 무리와 손을 잡은 자신도 용납할 수 없었다.

‘죽고 싶다.’

이용하는 것뿐이라 되뇌어 봐도, 양심의 가책은 사라지지 않았다.

매일 밤 그가 죽이고 그가 속인 사람들의 모습이 꿈에 나왔다.

아득.

그는 이가 부서지도록 악물며 다짐했다.

제이릴리스를 몰아내고 나면, 침식자 세력을 안에서부터 부술 것이다.

그다음에는 좋은 황족을 황위에 올리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자결할 것이다.

‘내 죄는 지옥에 떨어져 천 년간 불타도 모자라겠지. 부디 내게 상처 입은 자들보다 내가 더 아플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유스티아누스는 장례식을 마치고 마을을 벗어나 깊은 산속으로 향했다.

그는 주변 기척을 확인했고,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