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어둠 내린 숲속에서 은은한 녹색광이 빛났다.
잎 넓은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사아아아-.
유스티아누스는 가볍게 팔을 벌리며 바람의 정령을 받아들였다.
작은 녹색 불빛이 떼를 지어 그의 몸을 휘감고 올라갔다.
마치 반딧불이 수십 마리가 줄지어 모여드는 듯했다.
이윽고 그 빛무리가 유스티아누스의 눈높이까지 올라가고, 맥동했으며,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유스티아누스.”
처음으로 들려온 건 까칠하면서도 깊은 걱정이 어린 맑은 미성이었다.
“오랜만이군, 친구! 하하.”
두 번째는 거칠고 유쾌한 고함이었고.
“왜 이렇게 늦었지? 혹시 침식자 놈들에게 들통나서 우리를 판 건 아니겠지?”
세 번째는 몹시도 낮았으며, 짐승 같은 그르렁거림이 섞여 있었다.
유스티아누스는 보는 사람이 하나 없어도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엘리시아. 가린. 하트시.”
무도회에서와는 다른 편안함이 그의 표정에 어려 있었다.
세상에 쫓기는 자들, 마음 놓을 곳 하나 없는 자들 간의 지독한 유대감이었다.
“다들 미안해. 또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어서 한동안 연락을 못 했어.”
세 목소리가 연달아 말했다.
“한 번이라도 연락해주지. 걱정했잖아요.”
엘프 공주, 엘리시아가 드물게 진심을 토했고.
“크흐흐.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군.”
드워프 족장, 가린은 언제나 진심이었으며.
“흥. 네놈 따위가 죽든 말든 내가 신경이라도 쓸 것 같으냐.”
수인 귀족, 하트시는 언제나 날이 서 있었다.
이에 유스티아누스는 부정의 침음성을 흘리며 답했다.
“으음. 신경 쓸 것 같은데?”
“뭐, 뭐라고?!”
한없이 낮던 목소리가 약간 올라갔다.
“내가 죽어버리면 너희를 풀어줄 사람이 없잖아.”
그의 답에 바람의 정령이 침묵했다.
사아아…….
나무 사이로 불어오던 바람이 뚝 그쳤다.
유스티아누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다시 빛무리가 발광하고, 엘리시아의 까칠한 미성이 들려왔다.
“유스티아. 그런 걸로 농담하면 안 돼.”
그녀는 자신과 같은 음절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며, 유스티아누스를 ‘유스티아’라고 불렀다.
그는 그녀의 그런 사소한 개성을 떠올리며,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농담인 거 같아?”
우웅.
빛무리가 거세게 발광했다.
“난 언제까지 너희를 그 꼴로 놔둘 생각 없어. 천 년이나 지났어. 천 년. 이제 너희는 동화에서나 나오는 거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
“…….”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어.”
그럼 제이릴리스의 즉위도 과거의 일일 뿐이 되어 버리니까.
“하지만 천 년이면 그 과거를 용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해.”
엘리시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오랜 삶을 살아. 우리 장로들도 너희를 두려워할 거야.”
“상관없어. 내가 먼저 믿음을 보여줘야겠지. 아쉬운 건 나니까. 그래도 약속할게. 난 반드시 패륜 황제를 무너뜨릴 거고, 아버지 폐하와 어머님의 복수를 할 거야.”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단호하고 명쾌했다.
“그리고 그때 너희의 도움을 받을 거고, 제국의 정의를 바로 세운 공은 너희에게 돌릴 거야.”
세상일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지만, 그는 어려워도 하겠다는 자였다.
그것이 회귀 전의 역사에서 그가 망나니 발렌시아누스와 폭군 제이릴리스에게 끝없이 도전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의 목표를 쉽게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반드시 기회가 생길 거야. 그때 너희를 수도로 부를게. 조용히 숨어서 힘을 기르고 있어.”
다시 한번 침묵이 흘렀다.
“…….”
세 이종족으로서는 꿈결만 같은 이야기였다.
제국의 수도 솔레타라온.
세계적으로 손에 꼽는 대도시인 만큼 자생한 침식자가 수도 없이 들끓었지만, 천 년간 외부의 침략으로 함락된 적은 한 번도 없는 도시였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 했던, 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침묵을 깬 건 드워프 족장 가린이었다.
“그래!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한다니까. 자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심장이 뛰거든. 단단히 준비하고 있겠어! 그러니까 자네도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알겠지?”
“그래. 가린. 절대로 죽을 생각 없어. 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작전으로 우리 전사들을 희생시키려 한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다.”
“당연하지. 하트시. 우린 친구고, 동맹이야. 절대 너희를 소모하지 않겠어. 만약 누군가 희생한다면, 그건 나일 거야.”
“흥…….”
하트시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유스티아누스는 그게 부끄럼의 표시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따지지 않고 말을 맺었다.
“슬슬 돌아가 봐야겠어. 곧 집회 시간이거든.”
엘리시아가 말로 된 손을 뻗어 소매를 잡듯 말했다.
“그래. 유스티아. 절대 침식되지는 마.”
유스티아누스는 기꺼이 소매를 내밀어 주었다.
“당연하지. 엘리시아. 다시 연락할게.”
* * *
남부 소도시의 밤은 캄캄하고 고요했다.
수도 솔레타라온도 아직 가로등 설치가 끝나지 않은 판이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컹! 컹!
어둠 내린 거리를 돌아다니는 건 야경꾼뿐이었고, 들려오는 소리는 사냥개가 짖는 소리뿐이었다.
유스티아누스는 그 둘을 모두 비웃으며 거리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의 로브에 걸린 인식 저하 마법은 어지간한 사람은 눈앞에서 봐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고위의 것이었다.
물론 소드 유저 정도라면 누가 있다는 건 확실히 알아보겠지만, 이런 소도시에서 소드 유저가 야경꾼이나 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수도 배움의 거리에서는 소드 유저들이 모여서 패싸움이나 벌였는데.’
그는 잠시 그리운 고향 풍경을 떠올렸고, 한 집 뒷문 앞에서 멈춰 섰다.
딱, 따다닥, 딱딱, 따다다닥.
그는 정해진 박자대로 문을 두드렸고, 곧이어 문이 약간 열렸다.
끼익.
끝에 눈이 달린 촉수 다섯 개가 발아래에서 빼꼼 나와 그를 확인했고, 그다음에야 문이 완전히 열렸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알아.”
문 뒤쪽 벽에 붙어 있는 내장 같은 살덩이가 말했다.
그 살덩이의 역할은 확인되지 않은 상대가 들어오려 하면 발목을 침으로 찌르고 위에 신호를 주는 것이었다.
한때는 그것 역시 인간이었다.
유스티아누스는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좁은 나무 계단을 올랐다.
끼익, 끼익, 끼익, 끼익.
‘점조직은 보안 유지가 편하지.’
‘현지 협력자를 한둘만 구하면 안정적인 거점과 충실한 신도들을 얻을 수 있고, 만약 교회에 들킨다 해도 해당 지부가 날아가는 정도로 끝나.’
‘사제 정도는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고, 주교부터는 어지간해서는 잡힐 일이 없다. 주교가 약간만 발품을 팔면 수백 개의 점을 관리할 수 있어.’
유스티아누스는 유유히 2층에 올라섰다.
2층은 벽걸이 양초 몇 개를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고, 긴 테이블만 연달아 놓여 있었다.
테이블 안쪽 끝에는 그의 상관 격인 침식자 주교가 앉아 있었고, 같은 테이블에 현지 교단 조직을 맡은 침식자 사제 여덟 명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두툼한 로브를 입었고, 높은 삼각 후드를 썼으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쿠이트 아즈의 파편 공급이 끊어진 게 치명적입니다. 통신과 주교님들의 이동이 너무 느려졌어요.”
“하필이면 그걸 가져간 게 발렌시아누스였습니다. 엔서스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랑소와라도 제때 움직일 수 있었다면 훨씬 유리했을 겁니다.”
거대한 조직을 이루고 있는 이상, 침식자라고 해도 회의 풍경은 보통의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제들이 주교를 향해 애로사항을 늘어놓았고, 주교는 그걸 해결해줄 만한 방안을 이야기했다.
“당장 통신과 이동 방법을 바꾸기는 어렵다. 일단 추가 공급에 전념해야겠군. 시약 상인들을 통해서 상아탑 쪽을 공략해 보겠다. 마법사 한둘을 형제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니.”
그들의 사악함은 회의 방식이 아니라 회의에서 논의하는 내용과 그 실행 방안으로부터 나왔다.
“그 과정에 소모될 인력은…… 사제들이 이미 구해온 듯하군.”
“예. 이 지방에서 충실한 신도들이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합일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사제들이 옆으로 이어진 테이블들을 바라보았다.
후드 쓴 침식자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사제나 기사가 아니라, 회의에 참관할 뿐인 수련생들이었다.
“늦었습니다. 주교님.”
유스티아누스는 그 수련생들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주교 뒤로 다가가 섰다.
‘침식자가 되기 위해 수련하다니. 이성을 유지한 괴물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니.’
그의 상식에서 수련이나 노력은 그런 데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끓는 기름에 튀겨버리고 싶은 놈들에게 무슨 인사를 하라는 말인가?
“아니. 딱 맞춰 왔구나. 회의 안건도 막 끝났다.”
주교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그건 무심한 태도가 아니라, 아직 회의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 다들 합일께 기도합시다.”
주교의 말에 수련생들이 반색했다.
사제와 기사의 벽은 높았고, 사제에서 주교가 되는 벽은 더더욱 높았다.
그런 주교와 함께 기도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쿵. 쿵. 쿵. 쿵.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그날의 기도 제물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손목 발목이 묶이고 재갈을 문 젊은이들이었다.
“읍, 읍!”
주교의 후드 속 어둠이 일렁이고, 수십 명이 동시에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 -!”
침식자 수련생들이 따라서 기도를 올렸다.
인간은 발음할 수 없는 야만적이고 사악한 음성이 2층을 가득 채웠다.
* * *
유스티아누스는 그들이 기도하는 내내 무표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지켜야 할 신민이 비명을 토하고, 코와 입에서 하얀 연기가 빠져나오고, 온몸이 줄줄 녹아내렸다.
“오오!”
“합일이시여!”
수련생들이 그 녹아내린 육신을 입가로 가져갔다.
유스티아누스는 당장 검을 뽑아 주교의 뒤통수에 내리찍고 싶었다.
‘합일이여. 당신도 신이라면, 이런 자들의 숭배를 받고 싶은가?’
제이릴리스와 침식 교단을 공멸시키리라는 다짐만이 그의 이성과 본능을 붙들고 있었다.
카득.
주먹을 너무 단단히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갔다.
피 몇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모퉁이에 서 있던 기사들이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때 수련생 폴은 유스티아누스를 바라보았다.
“형제. 형제는 왜 후드도 쓰지 않고, 기도도 올리지 않았지?”
후드를 쓰는 건 점점 인간과 벌어지는 용모를 감추기 위함인 동시에, 합일 아래 모든 신도가 동등해진다는 교리를 의미했다.
침식 ‘교단’에서 기도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유스티아누스는 후드를 벗고 수려한 용모와 반짝이는 눈을 드러내고 있었고, 기도할 때는 차가운 무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신실한 수련생 폴로서 반감을 품기 충분한 일이었다.
그는 침식자 기사가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유망주였고, 이 자리에서 사제들 바로 옆에 앉을 만큼 인정받고 있었으며, 주교와 함께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에 매우 들떠 있었다.
“그분의 기운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군. 진정 존재를 바친 게 맞나?”
유스티아누스는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답했다.
“난 교인이 아니라 교단의 협력자다. 내가 기도를 올리고 합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 더는 교단을 위해 일할 수 없어.”
폴이 제물의 육신을 한 움큼 쥐며 말했다.
“흥.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 놈들이 배신자지. 혹시 교회나 영주의 첩자가 아닌가?”
퍽!
그 순간 유스티아누스는 폴의 얼굴에 장갑을 집어 던졌다.
“네가 감히 내 신앙심을 모욕해?”
장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폴은 사제에게, 사제는 주교에게 눈빛을 보냈다.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고, 폴은 변이를 시작했다.
뚝, 뚜두둑!
“후회할 거다.”
그의 몸에서 갑각이 돋아났고, 팔뚝이 두 배로 굵어졌으며, 턱이 좌우로 갈라지고 길어졌다.
스르르릉!
유스티아누스는 검을 뽑으며 답했다.
“그래. 후회할 거다.”
그는 한 가지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고,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주교의 곁을 따라다니고 나서부터 검 실력이 기이하리만큼 빠르게 성장했다.
분명 본인 것인데 겪은 적 없는 기억도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세 이종족 지배층에게 연락할 수 있던 것도, 빠르게 우정을 쌓을 수 있던 것도 그 덕이었다.
‘같이 가는 거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같이 가는 거야.’
‘너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야.’
‘혈통의 수치여!’
대귀족 동맹, 군사 지휘, 기나긴 투쟁, 배운 적 없는 마법, 나눈 적 없던 우정, 지금은 곁에 없는 동지, 망나니 황형과 40년간 이어진 대결…….
그 모든 것이 조금씩 생생해져 갔다.
“너 정도로는 나를 이길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