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나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제이릴리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테오스!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발렌 대공! 대공! 정신 차리십시오!”
다다다다.
마테오스가 내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그의 큰 손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턱.
그 순간 상처를 강산으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머릿속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이 방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끄으, 아아아아아아-!”
억누르던 공명의 기운이 결국 새어 나가 버렸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검붉은 빛을 내는 파동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다행히도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그 정도에 영향을 받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대여?”
제이릴리스가 손짓만으로 파동을 흩었고, 마테오스와 아르고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를 보지 않은 것과 눈치채지 못한 것 사이에는 몹시도 큰 차이가 있었다.
“대공?”
마테오스의 목소리에 서늘한 기운이 섞였다.
쾅!
다음 순간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와 판금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하!”
“성자님!”
“황제 폐하. 나오십시오! 이 방에서 정신 파동의 잔여가 느껴졌습니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
제이릴리스는 목덜미를 잡고 있었고, 아르고스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으며, 마테오스는 어쩔 줄 모르고 새까만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넓은 문은 경첩이 뜯겨 나가 흔들렸고, 신성력 타오르는 검을 뽑아 든 성기사 수십 명이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폐하! 폐하!”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의 기사, 텐티아가 왔다!”
그 뒤를 이어 아래 홀에서 미사를 보던 궁정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 텐티아 경을 비롯한 기사들까지 몰려왔다.
다시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졌다.
“아.”
조졌다.
* * *
천만다행히도 이 방에는 세계에서 최고위에 속하는 권력자가 둘이나 있었다.
“……아무 문제도 없으니 돌아가도록. 황명이니라.”
“……광명신께서 그대들에게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황제와 성자가 손을 잡고 약을 팔기 시작했다.
“다행입니다.”
“별일 아니었군요.”
“전 또 발렌시아누스 대공이 침식자였던 줄 알았지 뭡니까? 하하.”
밀물처럼 몰려온 성직자와 귀족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우리는 문짝이 멀쩡한 방으로 장소를 옮겼고, 아르고스는 주교들을 시켜 새 차와 새 커피를 준비했으며, 황제는 성자에게 끝내 사과를 받아냈다.
“짐은 짐의 조언가를 태워 죽이려 한 일에 사과를 원하노라.”
“미안합니다. 대공. 절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쿨럭쿨럭! 어서 일이나 하지요. 지난 일은 묻어 두고요. 해야 할 일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가 아닙니까?”
“고맙습니다. 대공. 그래요. 앞날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난 아몬 신전 관련 논란과 세레라지에의 침식자 대주교 관련 논란을 묻어버릴 수 있었다.
얼굴 좀 그을린 것치고는 아주 값을 잘 받은 거였다.
“흠흠. 그럼 일단 제가 본 옛것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세계의 틈에서 보았던 여섯 장의 날개가 달린 뱀, 눈동자가 호수만 한 고래, 수십 개의 다리가 자라나는 말, 너울거리며 빛나는 촉수, 배배 꼬여 있는 거대한 뱀들, 황동 황소…….
“이런 녀석들이 그 공간에 있었습니다. 성자와 교황께서는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사실 아주 상세한 대답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세계의 틈 같은 곳에서 본 걸 알리라 기대하는 게 이상한 거다.
그러나 교황 아르고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공. 누가 그들을 부르려 하는지 아주 잘 알겠습니다.”
제이릴리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응?”
아르고스가 깐깐한 인상을 더더욱 깐깐하게 만드는 안경을 슬쩍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모두 남방대륙의 아미르들이 섬기는 옛것입니다. 각 지방의 수호 옛것들이 거의 다 나왔군요.”
마테오스 역시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국가 단위로 옛것의 힘을 이용해 침식자 전사들을 만듭니다. 그 공간에 그들이 머물러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미르 토후국이 세워진 뒤로 그곳에서 천여 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제이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들은 아미르 토후국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로군.”
천 년 동안 솔레타라스 제국과 아미르 토후국은 어떠한 공식적 교류도 없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솔레타라스의 정복 군주들도 그 황무지를 넘어 총독령과 식민지를 세우지는 못했다.
나도 그들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그들이 옛것을 섬기는 미친놈들이라는 사실뿐이었다.
회귀 전의 유스티아누스도 그들과 손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고, 회귀 전 제이릴리스 역시 그들을 정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멸망 역시 우리가 주도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내전에 돌입한 제국을 연례행사처럼 침공했고, 제이릴리스는 그때마다 운석과 진노의 창으로 보복했다.
그리고 제이릴리스 즉위 34년쯤에 무슨 대규모 의식이 실패해서 나라가 사실상 망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이릴리스가 주요 대도시에 운석을 떨어트렸다.
그 흙먼지 때문에 제국 남부 지방까지 한동안 흉년이 들었을 정도였다.
끝장을 낸 건 우리지만, 의식 실패의 여파만으로도 이미 나라로서는 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어지간한 고위직인 나도 이 정도밖에 모르는데, 아무리 광명교회라고 해도 아주 그럴듯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듯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광명교회의 교황은 유유히 말을 이었다.
“무수한 선교사들이 순교 길에 올랐지요. 천 명이 가서 한 명이 돌아올까 말까 했지만, 그렇게 천 년이 흘렀습니다.”
천만다행히도 내가 틀린 모양이었다.
“음.”
“광명교회는 폐하의 생각보다 아미르 토후국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경청하도록 하지.”
제이릴리스가 호기심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아르고스가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 * *
“그들은 사실 자한 동맹보다 더 느슨한 도시국가 연맹입니다.”
“도시마다 섬기는 옛것이 다르지요. 이건 단순히 문화의 차이가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섬기는 신이 다르다는 건,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뜻입니다.”
“물론 한 명의 술탄을 섬기기는 합니다. 하지만 각 지방의 토후인 아미르와 술탄의 관계는 음…… 즉위 초기 페하와 대귀족들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같은 문화권이지만, 하나로 뭉쳐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옛것 간에도 상성이나 상극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대도시끼리 우리 신이 제일이라며 치고받으며 싸우는 게 일상이랍니다. 이래서 광명신교처럼 일신교를 믿어야 하는 것이죠. 쯧쯧. 이 미개한 놈들.”
결론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교황 아르고스는 나와 제이릴리스가 원하는 정보를 전달해주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 하면 그 악신 숭배자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을지 알려준 거다.
“폐하. 최대한 제국의 국력을 온존하는 방법을 택할 수 있을 듯하옵니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제이릴리스가 나른하고 잔혹하게 웃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노라. 갈라치기가 좋겠구나. 교황. 구체적인 정보가 있는가?”
아르고스가 주름살 짙은 눈을 보석처럼 빛냈다.
“당연합니다. 폐하.”
수십 년간 닫힌 사회의 법학자로 살아온 엘리트는 갈라치기와 협잡질의 예술가였다.
“역시 후계로 공격하는 게 제일이지요.”
제이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노라. 해봐서 아는데 다 죽여야 끝나더군.”
“지금 술탄인 바포메르는 늙었고, 무사한 자식인 딸만 하나 있다고 합니다.”
“하나?”
“다른 아들딸들은 너무 침식이 심해져서 죽었거나, 세속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아예 침식 교단에 들어갔다는군요.”
“그럼 결혼과 후계 문제로 싸우기를 기다리면 되겠군. 시간이 짐의 편인가?”
제이릴리스가 누군가에게 묻듯 말을 맺었고, 성자가 그 말에 답했다.
“광명신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십니다. 술탄을 암살하거나, 다른 아미르를 부추겨서 그 딸에게 구애하게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교도에게 잔혹한 광명교의 성자, 그것도 회귀 전 신의 분노라 불리던 검은 성자다운 말이었다.
팅. 팅.
황제가 손가락으로 찻잔을 튕기며 흡족하니 웃었다.
“둘을 동시에 진행해도 괜찮겠군, 분명히 내분이 일어나겠지. 그때 정화병과 헬레나 대공을 보내면 정복 자체는 수월하겠어.”
교황 아르고스가 사람 좋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물론 그 내용은 결코 좋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시카리우스 대공의 아들을 그 딸과 결혼시키지요. 그럼 계승권을 제국이 빼앗아 놈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제이릴리스가 약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는 듯 혀를 찼다.
공작은 언 듯 전쟁만큼이나 피로한 듯했다.
“그럼 그냥 짐이 운석을 떨구면 안 되겠는가?”
하지만 둘 다 많이 해본 사람으로서, 사실 전쟁이 훨씬 더 피로했다.
나는 다급하게 혀를 놀렸다.
“황제 폐하. 외부의 거대한 적은 내부를 뭉치게 만듭니다. 갈라치기를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나라가 망한다고 민족이 망하는 건 아니다.
지금 상대하는 침식자와 앞으로 상대하게 될 이종족도 막막한데, 그 사막 잡신들까지 제국에 숨어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귀찮아질 듯하구나.”
“운석으로 적국을 정복할 수는 있어도 지배할 수는 없사옵니다. 지배를 위해서는 어차피 헬레나 대공을 보내야 하옵니다. 똘똘 뭉친 적에게 보내는 것보다는, 사분오열된 적에게 보내는 게 낫사옵니다.”
성자와 교황은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마테오스가 장중하게 단언했다.
“맞습니다. 폐하. 그 이교도들이 우리를 원망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왜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어야 합니다.”
“저도 성자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뭉칠 명분을 줘서는 안 됩니다.”
아르고스 역시 단언했고, 제이릴리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모두 그렇게 말한다면, 짐 역시 이해하겠노라. 술탄의 후계 구도부터 갈기갈기 찢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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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일련의 대화를 들으며 묘한 생각을 했다.
아니, 원래 이건 망나니인 내가 할 일 아닌가?
왜 이런 소리를 성자와 교황이 하고 있지?
우리 제국 괜찮은 건가?
“대공.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직도 통증이 있으십니까?”
마테오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망나니 대공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머뭇거렸다.
“웃지 말아 주십시오. 아주 잠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습니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이 모두 다른 반응을 보였다.
제이릴리스는 나른하니 웃었다.
“짐은 무죄무치니라. 무엇이든 해도 되지.”
마테오스는 화를 냈다.
“그런 소리는 홍등가 뒤부터 그만 봐주고 하십시오! 아니. 절 두 번이나 납치한 대공이 이교도 따위를-.”
아르고스는 사람 좋게 웃더니, 뼈 있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전하. 싸우다 보면 닮는 법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래.
그렇지.
내가 그 산 증인이었다.
옛것들과 싸우다 보니 이제 정신 파동을 터뜨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예. 교황 성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럼 일단 설교로 여론 조성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하루 이틀 뒤에 시작할 전쟁은 아니지만, 증세와 징발의 명분은 깔아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르고스가 미소를 지었다.
“시카리우스 쪽 주교들을 불러들여야겠군요.”
“헌금은 다음 주에 하고 가겠습니다.”
마테오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주에 하시죠. 오늘 할 헌금을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루디 편으로 적잖게 보냈는데-.”
“신시가지 건설 중에 더위 탓에 쓰러지는 일꾼들이 줄을 섰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도 못 받고 있습니다.”
소위 ‘더위 먹는다’라고 하는 그 증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병이었다.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치료를 위해서는 막대한 신성력이 필요했고, 이는 막대한 헌금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으며, 그럴 돈이 있는 사람은 이 날씨에 밖에서 일하지 않았다.
마테오스가 위엄 있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성력만으로는 치료가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서늘한 곳에서 쉬게 하는 게 제일이더군요. 임시로 냉기 마법사를 잔뜩 고용할 겁니다. 최근에 홍등가에서 또 은화 몇 수레 올라왔잖습니까? 헌금하십시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 당당함과 뻔뻔함 사이의 미소가, 참 성자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