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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릴리스의 사두마차는 바깥을 하얗게 칠했고, 금장 장식을 했으며, 붉은 기를 걸었다.
그녀는 백금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 탔고, 나는 내 마차를 부르려 했다.
“그대여?”
제이릴리스가 마차에 한쪽 발을 올린 채로 왜 안 따라오냐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에 순수한 의문이 어려 있었다.
“예, 예?”
순간 내 머릿속에 무수한 계산이 내달렸다.
우리는 너무 친해 보여도 안 되고 너무 불편해 보여도 안 된다.
아무리 쌍둥이라 해도, 장성한 남녀가 같은 마차에 타는 건 아주 친해 보이는 일이다.
이곳은 주일 대성당 앞이다.
무수한 인파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황제가 대공을 마차에서 내쫓았다, 라거나 대공이 황제와 함께 마차를 타는 걸 거절했다, 같은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탁.
문을 닫는 순간까지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들려왔다.
“황제 폐하가…… 발렌시아누스 대공을 자기 마차에 태우셨군.”
“그대로 홍등가로 내달려 다시 죄악을 쌓지 못하게 막으시려는 것 아니겠는가?”
“오오. 역시 황제 폐하시군. 아무리 친족이라 하셔도 제멋대로 날뛰게 놔두실 분이 아니지.”
생각보다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아니면…… 바람잡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대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제이릴리스가 날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렇게 대답했다가는 왜 사람들 따위의 생각을 고민하냐는 답이 돌아올 거다.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답했다.
“생각해 보니 폐하의 마차는 제 마차와 색감이 정반대이옵니다.”
그녀가 고개를 주억였다.
“수도의 검은 마차에 관한 소문은 짐도 들어 보았느니라. 검게 칠했고 금장 장식을 했으며 작은 보라색 깃발을 걸었다지. 생각해보니 짐의 복식과 같은 색감이로구나.”
제이릴리스는 금실로 자수를 놓은 검은 드레스와 보라색 보석을 좋아했다.
“아. 묻겠노라. 혹시 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싶은 내면의 바람이 반영되었느냐?”
“!?”
나른한 목소리에 묘한 장난기와 중후한 압박감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붉은 입술이 슬쩍 위로 말려 올라가 송곳니가 드러났다.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가는 대역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물어 고약한 일거리를 받겠지.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 마차는 하얀 바탕에 금장 장식을 했고, 붉은 기를 걸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그것이 폐하가 저를 질질 끌고 다니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다고 하는 자는 없사옵니다.”
“하. 어찌 알았느냐? 정확히 그런 마음을 반영했노라.”
“폐하께서는 그런 마음을 마차에 투영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이미 현실에서도 저를 질질 끌고 다니거나 이리저리 보낼 수 있지 않으시옵니까?”
회귀 전의 지식에 비추어 보자면, 제이릴리스가 저런 가학적인 미소를 지을 때는, 놀랍게도 몹시 무료한 거였다.
무료하다고 해서 방탕한 연회를 벌이거나, 콜로세움에서 마차 경기를 열거나, 전쟁을 일으키던 역대 황제들과 비교하자면 썩 건전한 표출 방식이었다.
……무료하면 전쟁하고 싶어 하는 건 제이릴리스도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운석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나는 잠시 고개를 저어 잡념을 틀어냈다.
여하간 이럴 때는 재미없게 답하다 보면 그녀가 금세 흥미를 잃는다.
“북부의 제일 높은 산부터 남해의 심연까지. 폐하가 원하시는 어디든 갈 테니 마차 색깔로 소신을 몰아붙이지 말아 주소서.”
* * *
내 예상대로 제이릴리스는 더 이상 마차 색깔 가지고 날 대역죄인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대신 등받이에 등을 묻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숨 자는가 싶어서 부스럭 소리가 나지 않게끔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그때 그녀가 나른하니 중얼거렸다.
“성자가 현명하구나. 황실의 힘을 빌려 아미르 토후국을 정복하려 하다니.”
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예. 제대로 이용당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옵니다.”
“옛것을 섬기는 이상 언젠가는 짐과 부딪힐 것이니라. 짐은 이 땅에서 그것들을 뿌리 뽑을 생각이니까.”
누군가 듣는다면 서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확인한다고 생각할 듯했다.
“침식자와 이종족부터 정리한 다음 치자고 간언해도 듣지 않으시겠지요.”
“잘 아는구나. 짐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룰 생각이 없노라. ……게다가 그것들은 이자가 불어나듯 점점 더 강해질 것이야. 아직 짐이 더 강할 때 끝내야 하노라.”
그건 제이릴리스의 말이 맞았다.
“지당하십니다.”
숫자가 말하고 있었다.
매년 발생하는 침식자의 수, 마경의 수, 마경에서 나오는 이물들의 수까지 모두 늘어나고만 있었다.
천 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고, 100년과 비교해도 확연히 증가했다.
……마치 이 세상 자체가 옛것을 상대로 점점 취약해지는 듯했다.
“교회가 전쟁 여론을 만드는 동안 내부를 정리해야 하겠지.”
“적기제독과 인어들을 말하는 것이옵니까?”
“천 년의 맹세를 모두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니라. 허튼소리. 짐도, 선황도 잊지 않았느니라. 1년에 대여섯 번씩 황제가 바뀌던 내전기에도 그 맹세는 잊힌 적이 없었느니라.”
“침공에 뱃길도 이용하실 생각이시군요.”
제이릴리스가 머리를 뒤로 젖힌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날 바라보았다.
목을 길게 뺀 그 자세가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래. 그래야 바다와 육로 모두를 이용해 압박할 수 있노라.”
그녀가 양손을 들어 허공에 제국 남부와 남방대륙을 연결하는 사막지대를 그렸다.
“동쪽으로는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사막이 있지. 그 사막을 통과하면서는 도저히 보급선 유지가 불가능하다. 남방대륙의 동쪽 해안을 점령하며 나아가야 해.”
“폐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는 알겠으나, 허공에 손을 내저으신다고 하여 선이 그어지는 게 아니…… 오러를 그런 데 쓰지는 마시옵소서.”
“손을 줘 보아라.”
탁.
그녀가 이쪽을 보지도 않고 내 오른손을 낚아챘다.
나는 다급하게 ‘보이지 않는 손’ 마도구 장갑을 체내로 흡수했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아 ‘7’ 모양을 만들었다.
소드 마스터의 완벽한 몸답게, 그녀의 손은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융단처럼 부드러웠다.
그녀가 낭랑하니 말을 이었다.
“이 튀어나온 반도가 최대 격전지겠지. 그곳을 공략하는 동시에 저 아래 해안을 따라 파고 들어가야 할 것이야.”
“천창 함대와 그대가 새로 들였다는 사략 함대가 둘 다 필요할 듯하구나. 이번에는 짐도 친정하겠어. 절대로 말리지 말도록. 황명이니라.”
“그때는 그대야말로 황궁에 머물러라. 짐이 수도를 비우면 온갖 잡것들이 다 기어 나올 테지. 그 벌레들을 때려잡도록 하라.”
* * *
솔직히 고백하는데, 손을 잡은 순간부터 아무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난 마지막 말만 간신히 알아듣고 답했다.
“폐하. 제가 수도에 홀로 남는 순간 온갖 의심의 눈초리가 달라붙을 것이옵니다.”
제이릴리스가 혀를 찼다.
“그대가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이제 듣기 질리는구나. 그대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짐이 마경 속으로 사라졌을 때 진작 그랬을 터.”
“폐하.”
그녀가 무심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원한다면 한 번은 황제를 칭해 보거라. 남방대륙을 쑥밭으로 만들고 돌아와 짐의 자리까지 되찾으면 그만이니까. 그대는 사면권까지 가지고 있으니, 정말로 한번은 해보아도 좋지 않겠느냐? 성공하면 이 세상의 정점에 앉는 것이요, 실패해도 목숨은 부지할 텐데?”
전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세계 따위.
그녀의 눈에 이 세상은 설탕으로 만든 공예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나는 그 기세에 전율하며 머리 숙였다.
“그런 말씀은 농담으로도 하지 마시옵소서. 황망하옵니다.”
그녀가 재미없다는 듯 쳐들고 있던 손을 툭 늘어트렸다.
“그래. 알겠노라.”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쥔 그대로 마차 좌석에 떨어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런데 폐하.”
“무엇인가?”
“제 손을 놓지는 않으실 것이옵니까?”
아무래도 그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답한 듯했다.
생각하고 답했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춥노라.”
지금은 열사병 환자가 창궐하는 8월이고, 제이릴리스는 한서 불침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인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 이곳이 보는 사람 하나 없는 마차 안임을 떠올렸다.
“예. 폐하. 저도 춥사옵니다.”
“하?”
제이릴리스의 입에서 말이 되지 못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황금빛 눈동자는 사백안으로 변했고, 붉은 입술 역시 파르르 떨렸다.
기억에 박제해두고 싶은 모습이었다.
이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곤하구나. 돌아갈 때까지는 깨우지 말아라.”
“예. 폐하.”
그녀의 목과 귀가 이상하리만큼 붉게 달아올랐다가, 혈관 속에서 혈마법 특유의 빛이 반짝이더니, 빠르게 하얀색으로 돌아갔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손을 꼭 잡은 채로.
서서히 기대 오는 어깨의 무게는 모르는 척하고.
* * *
내 입으로 내 선조들을 욕보여 봐야 제 얼굴에 침 뱉기일 뿐이다.
그러나 난 이미 내 얼굴에 침을 꽤 많이 뱉었으므로, 그냥 솔직히 말하겠다.
솔레타라스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깡패 중의 깡패들이었다.
그들이 타국을 정복하고, 패전의 충격에 전쟁 포로들이 침식되어 침식자로 변하지 않도록 다 죽이고, 대귀족들과 협잡질하며 민중을 쥐어짜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았다.
당장 초대 황제부터 그랬다.
그는 용과 결혼해 혼혈 귀족 혈통의 정점에 섰고, 오랫동안 이어졌던 종족 전쟁을 인간의 승리로 마무리 지었으며, 솔레타라스 제국을 건국했다.
당연하지만 당시 모든 인간은 이종족의 폭압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축제 분위기였다.
‘인간 만세!’
‘드디어 해방이다.’
‘이제 우리도 잘 살 수 있어.’
그는 그런 상황에서 이제 인간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어날 걸 예견하고, 이를 대비해 이종족을 살려두었다.
‘평화는 거짓이고, 양심은 모일수록 비정해지지. 결국 열망만이 존재한다. 인간끼리 모인다고 폭력과 억압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군.’
‘기사도 마법사도 모두 혼혈로 만들어진 인종들이다. 만약 전쟁 과정에서 기사와 마법사들이 소모된다면 다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해.’
이게 수천 년간 이어진 이종족의 폭압을 끝내고 인간의 세상을 연 황제의 사고방식이었다.
평생을 싸워 온 만큼 자신이 만들어낸 평화에 취할 만도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종족을 보전해 인종으로서의 기사들을 만들었고, 광명신교를 퍼트려 전 대륙에 거친 문화적 패권을 잡았으며, 상아탑을 후원해 진귀한 지식을 보전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속법을 뜯어고쳐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장자상속제를 법제화, 상속을 둘러싼 내전을 억눌렀다.
그 덕에 우리 솔레타라스는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대국으로 군림 중이다.
인간으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황제로서는 최고였다는 말이다.
그는 다양한 형태로 이종족을 이 땅에 묶어두었다.
많은 원성을 산 엘프는 인적 드문 미개척지의 깊은 숲으로 들여보냈고, 수인은 타국과의 국경에 자리 잡게 해 일종의 중립지대를 형성하게 해주었으며, 드워프는 따로 자치령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인어는 조금 달랐다.
사실 인어는 앞의 세 종족과 달리 사회적으로 인간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뭍으로 올라와 해안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을 잡아간 사례가 여럿이라지만, 사람도 사람을 잡아먹는 안타까운 시대였으며, 그마저도 다른 이종족에 비하자면 천사였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땅에 살고, 인어는 바다에 사는 만큼, 다른 이종족에 비해 엮일 일이 적기도 했다.
그러나 초대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제국은 넓어질 테고, 강과 바다를 지배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인어의 왕을 몰아붙였다.
황제의 반려는 그 위대한 권능으로 가장 깊은 바닷속까지 부글부글 끓였다.
결국 그는 인어의 왕을 성소로 불러냈고, 보름달 휘영청 뜬 밤 맹세시켰다.
앞으로 천 년간 뭍에 올라오지 마라.
앞으로 천 년간 우리의 바다를 지켜라.
앞으로 천 년간 황족을 적대하지 마라.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깊은 바닷속에서 꿈꾸며 기다리고 있다.
우리 역시 잊지 않았다.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역시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