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33)화 (333/340)

(333)

전쟁은 종이로 시작해 종이로 끝나고, 그 준비만 한세월이다.

황제가 출정을 명하노라! 하고 칼을 뽑아든 순간 십만 대군이 착착 걸어 나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일례로 지금 나는 전쟁에서 해군을 사용하기 위해서 사실 인어 공주인 적기제독을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따지자면 준비의 준비인 셈인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어떤 미친 자가 저기에 15층짜리 석조 건물 건설 허가를 내준 거냐!”

“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성벽과 너무 가깝잖아! 밀수꾼이나 첩자가 제국 시가지를 훤히 내려다보게 할 셈이냐? 내가 가서 무너뜨리기 전에 설계 변경해 오라고 해!”

신시가지 건설로 수도 전체가 복작복작하다.

이참에 한탕 해보려는 부르주아들, 그 부르주아들의 등골을 빼먹으려는 궁정 귀족들, 시가지 확장 이야기를 듣고 수도에 몰려온 유민들, 이권 두고 싸우는 각종 장인 길드들…….

거기에 어떻게든 수도에 들어오려 발악하는 침식 교단의 사제들, 제국 대귀족들과 각국의 왕공 귀족들이 일상적으로 보내는 첩자들, 그 외 불만 세력들을 억누르는 것까지 내 일이다.

즉, 이쪽을 어떻게든 해결해 놔야 남부로 출발할 수 있다.

준비의 준비의 준비인 셈이다.

생각만 해도 막막해졌지만, 울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빳빳하게 다린 제복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서 수도 곳곳을 쏘다니며 수작질을 부릴 수밖에.

“적가면. 신시가지 쪽에도 신규 점포 개설을 허가하겠다. 그쪽에서 깡패짓하는 삼류 용병들이랑 모험가들을 다 잡아다가 담궈. 침식자 있으면 바로 날 부르고.”

“코넬. 도시 계획 위원회 상임 위원으로 추천하겠다. 재개발은 이미 해봤으니 땅값으로 장난질하는 놈들도 잡아 봤지? 감찰권을 줄 테니까 싹 다 잡아넣어. 뒷돈 좀 받아도 별말 안 할 거니까 챙길 건 알아서 챙기고. 잘할 수 있지?”

“진. 그 근처 공방 몇 개가 신시가지로 내려갈 거다. 부지를 싸게 넘겨줄 테니까 대형 캠퍼스 몇 개만 올리자. 언제까지 생도들이 교수 자취방에 가서 수업을 들을 수는 없는 거잖냐. 학생회에서 그 근처에 맴도는 수상한 시약 상인들 단속 좀 해주고.”

이렇게 쓰기 위해 길러 놓은 사냥개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용병 주제에 실력이 나쁘지 않군. 혹시 황제 폐하를 섬기는 군인이 될 생각이 있나? 네놈과 네놈의 용병단을 통째로 편제에 넣어 주겠다.”

“저, 정말이십니까? 언제나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습니다!”

“환영한다. 이제 넌 제국의 백인대장이다. 이 추천서를 들고 황동 기사단의 헬레나 대공에게 가도록. 숙소는 그쪽에서 구해줄 테고, 연봉은 알아서 협상해 봐라.”

새로운 사냥개를 들이고.

“위장을 할 거면 좀 제대로 해라! 이 곰팡이들아! 황립 마도 공방 납품 기록이 세 번도 없는 상단이 갑자기 마법 시약을 바리바리 싣고 들어오면 당연히 의심하지 않겠냐!”

“끄아아악!”

주제 모르는 침식 사제를 태워 죽였고.

“대공 전하! 신시가지 지하수로 공사 중에 지하에 잠들어 있던 이물이 깨어났습니다. 현재 사망자 122명. 침식자 325명입니다.”

“새벽 3시에 누가 날……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수도 함락 사태 당시 척살에 실패한 이물 같습니다.”

“당장 가겠다.”

자연재해 같은 공격에 맞섰다.

* * *

“발렌시아누스 대공. 괜찮으십니까?”

무슨 회의인지도 모르겠는 회의에 들어가자 한 관료 귀족이 말을 걸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거울을 펴 보았다.

거울 속에 뺨이 홀쭉하고 눈가가 그윽한 사내가 넋 나간 듯 웃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몇 시에 잤지?

먼동이 트는 걸 보면서 침대에 들어갔던 거 같은데.

“……피로 해소의 물약이 아주 효과가 좋군. 공도 지치면 하나 먹어 보시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 워낙 인기가 좋아서 저 같은 말단은 살 기회도 없습니다.”

“그건 안 될 일이지. 그래. 이참에 아예 궁정 복지의 일한으로 정기 납품받는 것도 좋겠군. 서류를 만들어 오면 결제해 주겠으니, 만들어 오시오.”

“하하. 여기서 서류를 더 만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도 그렇군. 하하.”

실없는 소리만 주고받고 있으려니, 헬레나가 들어왔다.

“발렌시아누스.”

“오랜만이야. 누나.”

대공이 둘이나 모인 걸 보면 꽤 중요한 회의인 모양이다.

아마 제이릴리스에게 직통으로 보고되는 회의겠지.

누가 이 회의 내용을 보고하는 중책을 맡게 될지 궁금할 뿐이다.

이 정도 회의면 내용 정리만 몇 시간은 걸릴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대신들이 모여들었고, 헬레나가 발표를 시작했다.

“정예병 조련은 잘 진행되는 중이다. 구체적으로 소드 유저 급 병사들을 330명 확보했고, 그 외의 병사들도 무의식적으로는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수준이다. 징집병들과의 교환비는 19대 1 정도 나온다. 최종적으로 25대 1까지 끌어 올리는 게 목표다.”

그녀가 커다란 종이에 각종 도표를 적어 놓고 발표를 이어갔다.

“내년 봄이면 모든 병사가 원정이 가능한 수준이 될 듯하다. 특히 최근 급증한 용병들을 끌어들이는 게 꽤 효과적이었다. ……거친 놈들이라서 수도의 치안 유지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합당한 지적도 치안총감으로부터 들어왔다. 이는 종군 사제들을 통해 제어 중이다. 거친 삶을 살아온 놈들이라서 신앙심이 깊더군.”

그다음에 나온 건 하드리탄이었다.

대공이 둘이 아니라 셋이었군.

회의 정리가 더 복잡해지겠다.

“재무 상황도 아주 양호하다. 신시가지 건설 때문에 재정 불건전성이 심해질 듯했지만, 최근 개통한 운하 통행료 등으로 메울 수 있었다. 부르주아들의 적극적인 투자 덕에 외곽 성벽 건설까지도 문제없을 듯하다. 건설 규제를 약간은 풀어줬으면 하는 게 그쪽의 주장이니 참고해주었으면 한다.”

그 둘을 시작으로 고위 행정 귀족들이 입을 열었다.

“신성 가로등 설치가 약 60% 이상 진행되었습니다. 규제 완화는 하드리탄 전하가 말씀하신 대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각 지방 대영주들에게 신성 가로등과 양산 성물의 회로도를 전달하는 작업이 끝났습니다.”

“치안총감입니다. 수도 침식자 색출은 안정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대형 교단 소속의 침식자와 자연 발생 침식자가 모두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연 발생 침식자의 증가 원인은 수도 함락 사태로 인한 불안감이라 추정됩니다. 이에 본 치안총감은…….”

“근위대 정보부 보고입니다. 최근 도로이센 수도 일대에서 벌어지는 반 제국 정서의 근원지가 침식 교단으로…….”

제국 전체를 넘어 대륙의 정세까지 이 자리에서 논해지기 시작했다.

그 규모에 지쳐 잠시 정신을 놓고 있으려니, 시종장이 와서 내 앞에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쿵!

‘쾅!’ 도 아니고 묵직한 ‘쿵!’ 소리가 났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이제 폐하께 보고를 부탁드립니다.”

“어, 어? 뭐라고 했나?”

“이제 폐하께 보고해 주시면 됩니다.”

행정 귀족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

나는 그제야 이 회의의 보고자가 나였음을 떠올렸다.

세상.

* * *

집무실 뒤 통유리창으로 늦여름 햇살이 쏟아졌다.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황제의 백발은 광명신의 시선을 받아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색으로 빛났다.

“이만하면 몹시도 평화롭구나.”

내 보고를 들은 제이릴리스가 나른하니 중얼거렸다.

나는 기겁하며 내가 숫자를 잘못 읽었는지 확인했다.

“예? 막 남부지역에서 대형 마경이 범람해 사상자 총합 5만이 나왔고, 폐문 과정에서 기사 열둘이 죽었다는 보고를 올렸사옵니다.”

“그런 일이야 언제든 생기지 않느냐? 제국 신민이 수억이야. 하루에 늙어 죽는 사람만 몇십만 명은 넘을 텐데, 마경이 범람했다는데 5만 명 정도면 잘 끝낸 것이지.”

잠시 고민해 보니, 제이릴리스 말이 맞았다.

마경이 터졌는데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 5만 명 죽고 끝났으면, 대처 과정을 출판해서 모범 대책 사례로 공유해야 할 정도로 잘 끝난 거였다.

아무래도 졸려서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그 기사들의 이름을 불러라. 짐 이름으로 추도문이라도 써서 보내야겠구나.”

“예. 폐하. 올려놓겠사옵니다.”

그리고 신민 수만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기사 열둘이 죽었다는 소식이 더 중요했다.

슬프지만 그랬다.

“그럼 폐하. 소신은 이제 적기 제독에게 다녀오겠사옵니다.”

준비의 준비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준비의 준비를 할 때였다.

제이릴리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같이 가자꾸나.”

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그녀가 눈을 얇게 뜨며 물었다.

“그럼 적기제독의 충성 맹세를 그대가 받을 생각인가?”

“…….”

이 물음은 다소 중의적이었다.

우리는 적기제독의 정체가 인어 공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황실 제독으로서의 적기제독과 이종족 군주로서의 적기제독을 동시에 대해야 하니, 아주 복잡해질 게 뻔했다.

그리고 난 그 복잡함을 단칼에 풀어낼 자신이 있었다.

회귀 전 적기제독은 아주 눈에 띄는 세력은 아니었다.

‘백상아리’ 카리오사, ‘드높은’ 시그나인, ‘북부 대공’ 세베릭, ‘황금의’ 그레이스, ‘철혈당주’ 마커스, ‘열사암후’ 체사르가 죄다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남부의 제독 하나가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우리의 시조가 그랬듯, 합리적으로 풀어가면 그만이었다.

이를테면 산란지를 인질로 잡고 대화한다거나?

그러나 제이릴리스는 감히 그녀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 상대에게 칼 정도가 아니라 멸망의 수레바퀴를 쳐들 게 뻔했다.

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자니,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턱을 쳐들었다.

이 와중에 그녀의 승리감 어린 미소는 전쟁 신의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저걸 보고 살 수 있는 건 피로 해소의 물약보다 좋은 복지가 확실했다.

“짐이 짐의 총독과 제독을 만나는 게 뭐가 이상한가?”

“송구하오나, 가서 다짜고짜 죽이실 생각이시잖사옵니까?”

“짐을 무슨 괴물로…… 아니. 괴물이 맞지. 그래도 짐은 남쪽 바다가 보고 싶구나.”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적의 논리였다.

그녀가 보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

* * *

사야 옌은 별궁에 있는 루디의 옆 방에서 살았다.

본래라면 그녀 같은 암살자가 황궁 안에 머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흑마법 계약을 통해 황실 일원과 루디에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게 되었고, 황궁 담 안에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늦었군.’

그녀의 하루는 루디처럼 새벽에 시작했다.

검은 머리 암살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사용인들의 욕실로 향했다.

촤악, 촤아악!

암살자는 미세한 체취까지 지우는 게 아주 중요했기에, 사야 옌은 아침마다 전용 약재를 우린 물로 머리를 감았다.

머리를 닦을 때도 꽃향기 나는 사용인들의 수건이 아니라, 햇볕에만 말린 전용 수건을 썼다.

짧게 잘린 머리는 이제 간신히 묶일 정도로는 자랐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묶었다.

옷은 검은 바지와 빳빳한 면 셔츠, 그리고 검은 조끼를 입었다.

바지는 주머니 안쪽을 개조해서 작업에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갈 수 있게 해놓았고, 조끼 역시 안쪽은 하네스처럼 되어 있어 단검을 숨길 수 있었다.

단추 두 개를 채우고 나니, 이국적이고 중성적인 외모의 시종이 거울 속에 서 있었다.

수도 사교계에서는 몇 년마다 수행 시녀, 시종에게 이성의 옷을 입히는 문화가 유행했다.

지금도 그 문화가 유행 중이었기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중성적인 차림으로 루디를 따를 수 있었다.

“준비됐나요? 사야.”

어느새 준비를 마친 루디가 그녀를 불렀다.

“예. 루디 각하.”

딱히 누구에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사야 옌은 루디가 두려웠다.

“그럼 가죠.”

그녀는 저 나긋나긋한 목소리 너머에, 저 상냥한 녹색 눈동자 너머에, 저 기품 있는 몸동작 너머에 깃든 무언가를 느꼈다.

그건 제 주인의 명령이라면, 차를 준비하는 일과 사람의 죽이는 일을 같은 무게로 대하는 사람 특유의, 유쾌한 광기였다.

“예.”

귀족은 식사도 일이었다.

루디가 오전에 초대받은 곳은 모 배지 귀족의 브런치 파티였는데, 최근 황실의 정책에 찬동하는 의원들이 결집해 있었다.

“부르주아들의 투자는 받아야 하지만, 놈들이 돈을 벌겠다고 제멋대로 날뛰는 꼴까지 볼 수는 없잖아요?”

“부지를 장기 대여 형식으로 묶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한 동맹에 사절을 보내 대출 이자율을 조정하자고 제안하지요. 그리고 그 정보를 흘리면 알아서 사릴 겁니다.”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아예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써먹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사야 옌은 다른 귀족들이 데려온 수행 시녀, 시종들과 친분을 쌓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안녕하십니까.”

“오. 제국어에 능통하시군요.”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국적인 미모의 여인은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녀는 손수건을 여러 장 받았다.

‘이걸 왜 주는 거지?’

사야 옌은 아직 그게 휴일 애프터 신청이라는 걸 몰랐다.

오후에는 재화 귀족들의 다과회가 있었다.

“신시가지 공방 건설 구역을 넓혀 주십시오. 사람들이 모여들면 일자리는 꼭 필요합니다.”

“상아탑 서쪽의 볕이 안 드는 부지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요. 제가 거기서 일할 것도 아니…… 농담입니다. 하하.”

좋게 말하자면 기름칠, 나쁘게 말하자면 협잡질.

귀족들의 세상은 동부나 이곳이나 그리 다르지 않았다.

퍽!

“히이이힝!”

인적 드문 창고 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 돌멩이가 날아오고 마차가 멈춰 섰다.

루디가 히히 웃으며 말했다.

“습격이네요. 노상강도일 수도 있고, 돈 못 벌어서 화난 부르주아일 수도 있고, 침식자 세력의 큰 음모일 수도 있죠. 상관없어요.”

이런 것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다 죽여버려요.”

‘다 죽여버려.’

사야 옌은 지금은 그녀 곁에 없는 주군, 타르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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