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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공방에도 퇴근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물론 공방 내부의 수면실과 막대한 연구 과제 탓에, 제자들 사이에서 퇴근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게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가물에 콩 나듯 그 개념을 현실에 불러오는 사람도 있었다.
“퇴근해보겠습니다.”
“그래. 2주 만이구나.”
“세상 참 좋아졌네. 우리 때는 100일 전까지는 나갈 생각도 못 했는데.”
“어허. 저 후배가 나가면 네가 다시 실험 기재들을 닦아야 하는 거 알아 몰라? 더 잘해줘도 모자랄 판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화사한 인상의 젊은 제자가 종합공방 밖으로 나섰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배움의 거리를 향해 나았다.
팟! 팟!
해가 완전히 떨어진 순간, 거리 여기저기에 환한 가로등이 켜졌다.
낮에 모아둔 태양 빛과 옅은 신성력을 뿜는 신성 가로등이었다.
배움의 거리는 치안과 거리가 먼 곳이었고, 학생회장 진은 발렌시아누스에게 어떻게든 신성 가로등을 우선 설치해 주십사 울부짖었으며, 발렌시아누스는 충실한 협력자이자 연상 조카가 되는 사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물론 사야 옌은 그런 속사정 같은 건 몰랐다.
‘더 다가갔다가는 들킬 수도 있겠네.’
그녀는 내심 혀를 차며 땅을 박찼다.
젊은 제자의 뒤에서 두 걸음 거리였다.
퍽!
사야 옌은 젊은 제자를 질질 끌고 루디의 마차로 향했다.
“잡아 왔어요?”
“예. 각하.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젊은 제자를 좌석 가운데에 앉혔다.
머리카락 포박.
츠츠츠츠.
그녀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나며 젊은 제자의 옷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팔다리가 묶이고, 굵은 혈관 위에 머리카락 끝이 바늘처럼 들이밀어졌다.
두근, 두근.
젊은 제자의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가학적으로 웃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서 잘 대답하고 내일 다시 가서 싹싹 빌래? 아니면 여기서 나한테 천 번 찔려 죽을래?”
낮고 중성적인 목소리가 뼈를 긁듯 파고들었다.
“으흐으.”
젊은 제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사지가 묶인 채로 천 번 찔려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다운 태도였다.
그녀는 내심 흡족하니 웃으며 물었다.
‘그래. 이게 날 마주한 사람의 정상적인 반응이지.’
가슴속이 충만해졌다.
“누가 널 보냈지?”
“연, 성 공방입니다.”
사야 옌은 얼굴과 목의 혈류, 표정의 미세한 변화, 눈동자 움직임, 심장 박동 등을 읽어 상대가 하는 말의 진위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루디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루디가 둘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활달한 연극 어조로 말했다.
“연성은…… 자한 동맹 쪽에서 투자한 마도구 공방이네요. 그때 그렇게 당하고 나니 종합공방의 마도 공학이 궁금해졌던 모양이죠? 요새 부르주아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만, 역시 그랬네요.”
“알고 계셨습니까?”
“이 녀석이 잡혀서 이렇게 말하는 것까지 작전이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됐어요. 이제 풀어줘요. 세레라지에 전하가 알아서 하실 거예요. 평소 행실에 따라 다시 실험복을 입게 될지 실험체가 될지 결정되겠죠.”
죽이지는 않는 겁니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사야 옌은 루디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고, 곧바로 마차 문을 연 뒤 젊은 제자를 집어 던졌다.
휙.
“조금 살살 내려 주지 그랬어요.”
루디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야 옌은 그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에 대해 10분도 넘게 고민했다.
루디가 연두색 드레스 자락 사이에서 마총 아가테를 빼 들고 장전했다.
“자. 그럼 이제 가보죠.”
연성 공방은 종합공방 못지않게 담이 높았고, 열 마리의 키메라와 수십 명의 정예 용병으로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크르르르.”
“1층에 쥐뿔도 없음!”
그리고 사야 옌은 10분 만에 단 한 마리의 키메라에게도 들키지 않고 공방장의 목을 가져왔다.
“잘했어요.”
내려와 보니 루디는 공방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용병들은 부둥켜안고 벌벌 떨고 있었고, 키메라 열 마리는 죄다 머리가 터져 나갔다.
시체를 보아하니 하나같이 눈과 뒤통수가 뚫린 형태였다.
‘다리 힘이 좋은 괴물들이야. 투검이든 쇠뇌든 직선으로 쏴서 잡기는 힘들다고. 대체 시력이 얼마나 좋은 거지?’
사야 옌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림자밟기를 써도 그녀의 눈을 피할 수는 없을 듯했다.
“빨리 와요. 끝났어요.”
루디가 리볼버 마총을 재장전하고 손짓했다.
사야 옌은 순순히 마차로 돌아갔다.
* * *
루디는 마차에 타자마자 정밀한 해도를 두 장 꺼냈다.
“받아요. 사야. 선물이에요.”
발광 마도구가 마차 안을 밝히고 있었으니, 시녀 백작의 갈색 머리카락 뒤로 후광이 비쳤다.
그 후광은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사야 옌은 언제나처럼 압도되는 기분으로 해도를 받았다.
한 장은 제국 동쪽 바다에서 남쪽으로 오는 바닷길을 그려 놓았고, 한 장은 제국 남쪽 바닷길을 상세히 그려 놓았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걸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이 정도로 상세하다면, 군사 기밀일 게 분명했다.
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야. 발렌 님의 말씀이에요. 잘 들어 받들도록 하세요.”
“예. 각하.”
사야 옌은 그 순간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과거 살수 훈련을 받을 때도 이런 적이 있었다.
일상 아닌 일상을 누리게 한다.
일도 시킨다.
기회를 얻었다는 흥분과 긴장으로 자연스럽게 가면이 벗겨지고,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살수가 받는 마지막 평가였다.
루디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타르티에게 10월까지 지도에 표시된 해역으로 배와 무사들을 끌고 오라고 하세요. 어인족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요.”
사야 옌의 얼굴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각하. 전 그와의 연락 수단이 없습니다.”
루디가 상냥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찰칵.
어느새 그녀의 손아귀에는 마총 아가테가 들려 있었다.
사야 옌은 그 마총이 장전되어 있던 걸 똑똑히 기억했다.
루디가 물었다.
“무아몽중(無我夢中)인가요? 아니면 심심상인(心心相印)? 전안(傳眼)?”
“각하.”
사야 옌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무아몽중은 꿈을 통해 기억을 공유하는 비술이었고, 심상상인은 감정을 공유하는 비술, 전안은 보는 광경을 공유하는 비술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녀 역시 모두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국 시녀인 루디가 도대체 어떻게 그 기술들을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디가 그런 생각을 다 읽었다는 듯 웃었다.
“발렌 님은 똑똑하기도 하시지요. 동방 대륙의 기이한 비술도 모두 알고 계시거든요. 하루빨리 전달하세요. 그분의 인내심도 무한하지 않으니까요.”
사야 옌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각하.”
‘다 알고 있었어…….’
서늘한 공포가 등골을 내달렸다.
루디가 한 손을 들어 사야 옌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가시덩굴 문신이 새겨진 목.
부드러운 손이었지만, 그녀는 그 손이 면도날처럼 느껴졌다.
“저는요. 그분을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맹세했어요. 지옥 끝까지 따라가겠다고요.”
“예. 각하.”
“사야도 그런 주군이 있겠지요?”
“…….”
“그럼 내 마음 이해할 거 아니에요.”
사야 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루디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오늘 고생했어요. 많은 의문을 느꼈지만, 침묵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비밀을 숨기고 있던 건 괘씸하지만, 그래도 살려 줄게요.”
그러니까.
“고개 들어도 좋아요. 사야.”
사야 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루디가 마총을 드레스 자락 속으로 집어넣었다.
“잊지 마요. 나한테 빚진 거예요.”
* * *
별궁 거실 소파에 앉아서 통유리창 밖으로 밤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멋들어지게 뻗은 상록수들 사이로 신성 가로등 빛이 창백하게 빛났다.
루디가 내 옆으로 다가와 얼음 넣은 상그리아를 내밀었다.
“발렌 님.”
더운 날씨를 증명하듯 유리잔에 이슬이 잔뜩 맺혀 있었다.
나는 잔을 기울이며 그녀의 보고를 들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액체가 기분 좋은 서늘함을 띄고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꿈이라. 무아몽중이었구나. 대단하네. 미리 영혼의 파장을 맞춰 두면 이 거리에서도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니.”
“제가 멋대로 용서해버려서 죄송해요.”
루디가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잘했어. 차라리 앞으로도 사야 옌에게는 그런 다정한 모습을 많이 보여줘.”
“네?”
“사야 옌은 죽어도 나를 안 따를 거야. 감정적으로 그게 될 리가 없잖아.”
“그럼…… .- 죽일까요?”
루디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내 눈치를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고마운 동시에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하늘 아래 누굴 탓할까, 이게 다 내 죄였다.
“아니. 널 따르게 만들어.”
“아!”
그녀가 알았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나는 나른하게 말을 이었다.
“이 멀리까지 와서 꼴 보기도 싫은 놈의 명령을 듣는 게 얼마나 한스럽겠어. 같이 내 뒷담도 하면서 친밀감을 쌓아. 그렇게 사야 옌을 이용해. 넌 네 봉신이고, 걔는 네 봉신인 셈이지.”
루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발렌 님. 뒷담은 하기 싫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래. 종합공방 쪽 일은 이렇게 마무리된 거야?”
“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진에게 연락이 왔어요.”
나는 다시 잔을 들려던 손을 멈칫했다.
“진에게? 신성 가로등 설치랑 캠퍼스 부지 둘 다 문제없이 진행되었을 텐데?”
“네. 다른 건이에요.”
“또 뭐지?”
그쪽과 엮이면 언제나 큰일이 터졌다.
나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루디의 보고를 기다렸다.
“동부에서 대귀족 학생 하나가 입학하겠다고 해요. 내년부터 다닐 거래요. 어마어마한 대귀족의 사촌이라는데요? 황실과 뭐 거래한 게 있나 여쭤봤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동부의 어마어마한 대귀족이면…… 아세노르타일 거고. 카리오사 사촌이면…….”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상큼하면서도 다정한 인상의 소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영혼주술사 로렐라이.
제 사촌 누나이자 왕이 된 공작을 연적으로 생각하던 소년.
난 그 애가 날 바라보던 슬픈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빨리 남부로 가야겠네. 그다음에는 영지로 가야겠다.”
“빚이라도 지신 거예요?”
“……묻지 마.”
* * *
늦여름이 초가을로 변할 무렵이었다.
마커스가 날 1년 내내 늦여름인 세상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니벨룽겐을 정비했다.
깡! 깡!
위이이잉!
치이이이익!
그는 제자들과 프로펠러를 조였다 풀고, 맞지 않는 부품을 교환하고, 증기를 불어넣어 관을 청소했다.
제이릴리스는 그 광경이 매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 옆에 앉으며 물었다.
“폐하. 정녕 수도를 비우셔야겠사옵니까?”
“그러하노라.”
“그럼 제가 최선을 다해 모시겠사옵니다.”
그녀가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 이상, 그게 최우선이었다.
……사실 나 역시 그녀 곁에 있고 싶었고.
“그래. 그대의 에스코트를 기꺼이 받겠노라.”
황제가 태양처럼 웃었다.
햇살이 쏟아져 하얀 이를 빛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 근위대와 기사들은 어디 있사옵니까?”
제이릴리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대가 짐의 근위고 짐의 기사인데 무엇이 문제겠느냐? 애초에 짐에게 문제가 생길 상황이면 그대라고 살 수 있을 듯하느냐?”
……사실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난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마커스가 니벨룽겐에 기계 갑옷을 싣는 걸 가리켰다.
“저게 기계 갑옷이옵니다. 폐하.”
2m도 훌쩍 넘는 기갑이 전용 수레에 조각별로 실려 비공정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좋아 보이는구나. 저들이 마총 사수들이고?”
척. 척. 척. 척.
다음으로 마총 사수 2백 명이 발맞춰 비공정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 역시 마커스가 설계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사옵니다.”
제이릴리스가 비공정과 기계 갑옷, 마총 사수들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양산이 안 되는 게 아쉬울 뿐이로구나.”
마커스가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와 의안을 반짝였다.
정중한 얼굴에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예산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폐하. 약간만 증세하신다면 제가 폐하께-.”
“닥치게!”
나는 그의 입을 다물게 하고, 제이릴리스와 함께 비공정으로 올라갔다.
“이곳에 마나를 불어넣어야 ‘엔진’이라는 기관이 예열되옵니다.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니 저와 함께-.”
우우우웅.
제이릴리스가 손짓 한 번으로 엔진을 예열했다.
마커스가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안색 하나 안 바꾸고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적잖게 들어가기는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