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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겐은 거대한 범선의 바닥을 평평하게 개조하고, 강철 다리를 여덟이나 달아 뭍에 착륙할 수 있게 했으며, 네 개의 ‘프로펠러’와 ‘마나 엔진’을 단 비공정이었다.
돛대도 없고, 닻도 없고, 노도 없는 만큼 본래 배와는 많은 모습이 달라졌지만, 그대로인 부분도 많았다.
1층 갑판에 서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앞으로 뻗은 긴 장대인 바우스프릿 앞에 서면 어디든 갈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밤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쏟아질 듯 찬란하게 빛나는 것도 배와 같았다.
나는 몇 주간 카리오사의 템페스타에서 동거하며 동고동락했고, 배에서 즐거움을 찾는 데에 익숙해졌다.
물론 니벨룽겐은 비공정인 만큼 낚시 대회 같은 건 할 수 없었지만, 제이릴리스와 함께 뱃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하하하하!”
제이릴리스는 비공정도 와이번도 없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마법사였지만, 그런 그녀도 마나 한 줌 쓰지 않고 하늘을 난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발렌시아누스. 즐겁구나.”
뱃전에 선 그녀의 입가에서는 맑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것 보아라. 그대여.”
그녀가 뱃머리 난간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사아아아!
백발이 휘날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나는 기겁하며 그녀를 만류했다.
“폐하! 이곳은 하늘이옵니다.”
“짐이 하늘인데 무엇이 무섭겠느냐?”
그녀는 난간을 타 넘었고, 바우스프릿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150m가 넘는 비공정의 바우스프릿은 당연히 거대수였고, 그 두께는 여덟 사람이 팔을 둘러도 다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따라서 제이릴리스가 그 위를 걸어도 외줄타기 같은 위태로운 느낌은 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하늘을 날 줄 아는 마법사니, 만에 하나 발이 미끄러진다 해도 곧바로 날아 올라올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고 해서 말리지 않을 수 없는 게 나였다.
“폐하!”
나는 애타게 울부짖었고, 조타실에 있던 마커스 역시 의족을 짚으며 헐레벌떡 달려왔다.
“죽고 싶으면 민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뛰어내리라고 내가 말했…… 폐하?!”
나는 제이릴리스의 등을 보며 물었다.
“후작. 저런 짓, 아니. 저렇게 노는 병사나 조수들이 많았습니까?”
마커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호기로운 사내들은 언제나 담력을 시험해보고 싶어 안달이지요. 비행 중 저런 짓을 하다 걸리면 밧줄에 묶어 배 아래로 던져서 매달아 놓는 게 규율입니다만…….”
그는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바우스프릿 끝까지 걸어간 제이릴리스가 허공으로 붕 날아올랐다가, 저 아래까지 자유낙하한 다음, 다시 비공정 옆으로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역시 하늘이 좋구나. 어? 후작. 그대도 바람을 맞으려고 나왔는가?”
그녀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커스는 잠시 말을 골랐다.
“예. 폐하.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목숨과 출셋길을 보전하는 데에 유리할 판단을 내렸다.
내가 생각해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 * *
솔레타라온은 비교적 북쪽에 가까운 도시였고, 남부 끝자락 적기제독의 항구까지는 비공정으로도 한 세월이 걸렸다.
니벨룽겐은 와이번과 달리 쉴 필요가 없어서 밤새 날 수 있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텐티아 경, 제이릴리스와 함께 뱃머리에 서서 발아래로 풍경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언젠가부터 키 큰 침엽수와 뾰족한 산이 사라지고,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와 비교적 작은 활엽수 숲만 보였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 새로운 마을이 보였다가 머지않아 저 뒤로 사라졌고, 손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구름이 둥둥 떠다녔으며, 광활한 밀밭에 중간중간 거대한 바위나 나무가 뜬금없이 솟아 있었다.
“장관이로구나.”
“그렇사옵니다.”
비공정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찬란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태양이 하늘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며 초원 아래로 떨어져 내릴 때면, 제이릴리스의 하얀 머리카락도 노을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녀는 마지막 붉은빛이 사라지고 달이 뜰 때까지 그곳에 서서 무심한 눈빛으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가 점점 노란색으로 변하고, 다시 창백한 푸른빛을 담아가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나는 그녀 곁에 나란히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옆자리를 지켰다.
그럼 제이릴리스는 아직도 남아 있었느냐? 같은 의문 어린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이내 흡족하다는 듯 씩 웃으며, 선실로 들어가서 고급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주는 것이다.
“들라.”
“예. 폐하.”
그런 나날이 며칠이나 지났을까?
마커스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했다.
“잠시 착륙해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저도 이렇게 오랫동안 비행해본 적이 없어 선체에 얼마나 무리가 갈지 모릅니다. 한번 점검하고 다시 비행하겠습니다.”
“점검은 며칠이나 걸리지?”
“짧으면 하루, 길면 나흘까지도 걸릴 듯합니다. 저는 정비할 테니, 전하와 폐하께서는 근처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십시오.”
나흘 정도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커스는 근처 평야에 니벨룽겐을 착륙시켰다.
사방이 밀밭이라 공터를 찾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하. 그냥 깔아뭉개고 물어주면 안 됩니까?”
“후작. 황제 폐하 앞일세. 말을 가리도록.”
“두 배로 물어주면 되지 않겠느냐? 아까부터 프로펠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던데.”
“폐하!”
다행히 우리는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
난 텐티아 경, 제이릴리스와 함께 니벨룽겐에서 내렸다.
땅에 발이 닿은 순간 텐티아 경이 비틀거렸다.
“어엇!”
나 역시 적잖은 어지럼증에 휘청였다.
“경. 조심하게. 육지 멀미로군.”
경력 많은 뱃사람에게 자주 나타나는 증상인데, 너무 오래 배를 타다 보면 흔들림 자체에 적응해서 육지에서 어지럼증을 느낀다.
카리오사가 그렇게 말해 주었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제이릴리스가 별 황당한 증상이 다 있다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잠시 후 나와 텐티아 경은 간신히 대공과 백금 기사의 품격에 맞는 걸음걸이를 되찾았다.
“이런 추태를 전하 앞에서 보이다니. 송구하옵니다.”
“나 역시 폐하 앞에서 추태를 보였네. 내가 누굴 나무라겠는가?”
나는 하늘에서 보았던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폐하. 저쪽으로 4km 정도 걸으면 마을이 나옵니다. 규모를 보아하니 주민은 2천 정도 되어 보였는데,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시옵니까?”
제이릴리스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마을까지 시찰하게 될 기회가 올 줄은 몰랐구나.”
20분이나 걸었을 즈음이었다.
텐티아 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날 불렀다.
“전하. 연기입니다.”
그 마을 쪽에서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아아아악!”
“살려주십시오!”
아득한 비명도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다음 순간 텐티아 경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구를 눌러썼고, 제이릴리스는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나 역시 비늘을 일으키며 땅을 박찼다.
* * *
마을은 도축장이 되어 있었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싹 다 불태워 정화하십시오!”
“이 괴물 같은 것들이 우리를 다 죽이려 해!”
축제가 열렸을 공터에는 화형대가 올라갔다.
이미 화형대 네 개는 불타고 있었다.
다정했을 마을 사람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손에 쥔 손도끼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더 찾아봐!”
“끌어내!”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늙은 촌장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집단 광기의 분출에 앞장섰다.
다섯 번째 화형대에 걸린 건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 소년이었다.
“엄마!”
소년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촌장의 발치에 엎드려 애원했고, 소년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내는 이미 두들겨 맞았는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제이릴리스는 하늘에서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였고, 나는 마을 사람들을 밀치며 그 한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이게 웬 소란이냐!”
목청 높여 외치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날 바라보았다.
“누구시지?”
“딱 보면 몰라? 귀족이시잖아.”
“우리 영주님은 아니신데?”
묘한 술렁거림이 퍼져나갔고, 그들은 하나둘 머리를 조아렸다.
세베릭이니 마테오스니 하는 완벽 초인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렇지, 난 평민들보다 머리 하나 반 이상 큰 장신이었다.
거기에 온갖 이물을 흡수하며 강해졌으니, 마나를 끌어올리지 않더라도 저들이 내게서 신비로운 위압감을 느끼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촌장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나리께서는 누구이십니까?”
나는 직접 대답하는 대신, 텐티아 경에게 손짓했다.
쿵!
그녀가 크게 발을 구르며 시선을 모았고, 늠름한 외침으로 날 소개했다.
“제국의 대공이자, 황제 폐하의 고문이시며, 합법적이고 정의로운 치안감이자, 종합공방의 총수이시고, 수도 함락 사태 당시 멸망의 이물을 사냥하신, 발렌시아누스 대공 전하시다!”
그 순간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존경심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충격과 공포가 매웠다.
“발렌시아누스 전하!?”
“그, 그 망나니?”
“성자를 납치하고, 대귀족을 겁간했으며, 동방 대륙의 이주민 40만 명을 죽였다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까지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촌장. 내가 발렌시아누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싶은데?”
촌장이 벌벌 떨며 입을 열었다.
“남작 나리의 명령대로 침식자를 색출하는 중이었습니다.”
“저 애가 침식자고?”
내가 소년에게 눈길을 보낸 순간, 소년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내 발밑으로 몸을 던졌다.
얼굴은 눈물와 콧물, 피로 범벅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부모 된 자의 사랑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전하! 저 아이는 결백합니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과 격양된 욕설을 퍼부었다.
“저, 저, 저!”
“전하. 듣지 마십시오! 옛것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곰팡이들이 광명의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괴물 새끼를 낳은 마녀 따위가-.”
나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조용!”
마을 사람들이 울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텐티아 경을 향해 눈짓했고, 그녀를 허리춤에서 회중시계처럼 생긴 판별 마도구를 들어 보였다.
세레라지에가 아즈의 결정을 이용해 반경과 정확성은 넓히고 크기를 줄였다고 한다.
반경 300m 안에 침식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주고, 있으면 몇 명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빗금으로 표시해 알려주었다.
그녀가 소년에게 다가가며 마도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상아탑의 마법사가 만든 마도구가 있다. 침식자를 분별할 수 있는 물건이지. 지금 직접 판별해주겠노라.”
띠. 띠. 띠. 띠.
긴장 넘치는 소리가 울리고, 마도구 안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꿀꺽.
마을 사람들이 침을 삼켰고, 소년의 부모와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삐-.
다음 순간 마도구 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빛으로 된 바늘은 정확하게 소년을 겨누고 있었다.
텐티아 경이 나를 돌아보았다.
면갑 너머 그녀의 황당한 표정이 눈에 선했다.
진짜 침식자였어?
“역시 저 꼬맹이는 침식자였습-.”
촌장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치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때 마도구에서 추가적인 판별음이 울렸다.
삐-. 삐-. 삐-. 삐-.
삐-! 삐-! 삐-! 삐-!
회중시계 같은 마도구 유리 안에 수십 개의 붉은 바늘이 떠올라 빙글빙글 돌았다.
“…….”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촌장.”
저건 둘 중의 하나였다.
세레라지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도구가 고장 났거나.
이 마을이 이미 침식자 소굴이 되었거나.
“하하. 그런 마도구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촌장의 목소리 높낮이가 일그러졌다.
팍, 파바박!
그의 눈이 곤충 같은 겹눈으로 변이했고, 그의 등에서 기괴한 곤충의 다리 수십 개가 자라났다.
파바바박! 파박!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 변이하고 있었다.
묶여 있던 소년도 울부짖던 부모도 씩 웃으며 지네 같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히히히히!”
“들켰네요!”
“꺄하하하!”
이런 촌극을 한두 번 벌인 게 아닌 듯했다.
이렇게 다른 지방에서 온 여행자나 용병, 수도자들을 잡아먹어 왔겠지.
화르르륵!
나는 불꽃을 피워 올리며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 나도 너희 같은 괴물 새끼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공명의 기운을 느꼈는지, 촌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