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촤아아아-!
제국 남부의 끝.
‘끝자락의 항구’라 불리는 거대 군항에서 남쪽 바다로 출항해 파도를 가르기를 일주일.
촤아아아-!
거대수로 만든 불침 전함 급 군선이 다섯 개의 돛을 모두 펴고 파도를 갈랐다.
후우우욱-!
탑처럼 높은 중앙 돛대 위에 붉은 바탕에 검은 창과 검은 촉수를 그려 넣은 깃발이 거세게 펄럭였다.
떠다니는 섬 같은 그 전함의 이름은 ‘태고의 영면’.
제국에서 제일 강력한 함대의 기함이었다.
“갑판장님! 저기 놈들이 보입니다! 아미르 토후국의 무역선 선단입니다.”
중앙 돛대 위에서 한 선원이 목청껏 외쳤다.
“!”
다음 순간 배에 탄 모든 수병과 선원이 눈을 빛냈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려!”
“돌려라!”
들판처럼 너른 갑판 위에 수병들과 전투마법사, 기사들이 바글거렸다.
차르르르!
수병 여덟이 도르래를 돌려 거대한 발리스타를 장전했다.
그 위에 창보다 거대한 검은 화살이 놓이고, 세 명의 전투마법사가 화살을 향해 주문을 외웠다.
“단숨에, 꿰뚫는.”
“숨 막히는, 바람이.”
“순수한, 힘이여.”
상대 배를 꿰뚫기 위한 ‘관통’.
갑판과 선실 안에 난리가 나게 하기 위한 ‘마비 연기’와 ‘최루’.
순수한 위력을 높이기 위한 ‘힘의 창’.
세 개나 되는 마법이 단 한 번의 사격을 위해 준비되었다.
말을 타고 달려야 할 만큼 넓은 갑판 위로는 그런 발리스타가 열두 개나 준비되어 있었다.
“돛을 접어라!”
“노를 내려라!”
“삼두룡의 깃발을 올려라!”
장교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수병들을 독촉했고, 경험 많은 선원들은 남몰래 기도를 올렸으며, 전투마법사들은 남은 산호 시약의 양을 확인했다.
“제독 각하.”
그 생기 넘치는 긴장함과 부산함도 잠시였다.
한 여인이 선장실에서 나오자 선원과 수병들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척. 척. 척. 척.
여인이 배를 타면 재수 없다는 미신이 횡횡한 시대지만, 정작 제국의 동쪽 바다와 남쪽 바다를 쥐고 뒤흔드는 해양 군주는 둘 다 여인이었다.
사아아아-.
내리쬐는 태양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풍성한 붉은색 머리카락을 날렸다.
그녀의 붉은 머리는 망토처럼 등 뒤로 길게 드리워졌는데, 소금기 있는 바람을 매일같이 맞고 있음에도 우아한 파도처럼 사르르 흘러내렸다.
눈동자는 바다와 같은 푸른색이었고, 피부는 분을 바른 듯 희었으며, 약간 드러난 발목에 반짝이는 녹색 비늘이 언 듯 언 듯 엿보였다.
적기제독, 슈브 아르델라 아르델라, 통칭 슈브 아르델라.
그녀는 ‘태고의 영면’을 기함 삼아 천창 함대를 이끌고 남쪽 바다를 누비는 황실의 제독이었다.
주요 임무는 아미르 토후국의 무역선들을 약탈하고, 아미르 토후국 해적들을 쳐부수고, 제국 무역선들을 호위하고, 온갖 바다 이물들을 상대하는 것.
모순적이라면 모순적이었지만, 해군, 무역, 사략은 그리 먼 개념이 아니었다.
“…….”
슈브 아르델라는 토후국의 무역선 선단을 바라보았다.
촤아아아! 촤아아아! 촤아아아!
수백 척은 되어 보이는 배들이 일제히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
본래라면 당장 돛을 펴고 추격해야 옳겠으나, 태고의 영면에 탄 선원들은 모두 돛을 접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오판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분석이었다.
“각하. 놈이 오고 있습니다.”
그녀가 신임하는 부관 에리안느가 서쪽을 가리켰다.
촤아아아-!
무역선 선단 저 앞에서 남색 칠을 한 전함이 선회하고 있었다.
그 전함 역시 거대수로 만든 불침 전함이었고, 60m에 달하는 무역선들을 고래 앞의 돌고래로 보이게 하는 위용을 가졌다.
아미르 토후국이 보유한 저 전함의 이름은 ‘술탄의 자비’, 제독의 이름은 알 아지프.
‘태고의 영면’과 다섯 번이나 싸운 시대의 호적수였다.
물론 슈브 아르델라는 호적수 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 지긋지긋해.’
그녀는 원해서 이 짓을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발리스타 발사를 준비하도록. 포격 후 근접전으로 이행해 나포를 시도하겠다.”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고, 수병들과 전투마법사들이 다시금 부산하게 움직였다.
* * *
촤아아아-!
반짝반짝 빛나는 남쪽 바다 위에서 태고의 영면과 술탄의 자비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붉은 전함과 푸른 전함이 충돌할 듯 가까워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팔을 뻗으면 닿을 듯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물론 그러려면 팔이 100m는 되어야 할 것이었다.
두 배의 바우스프릿이 엇갈린 순간, 두 배의 전투마법사들은 온 힘을 다해 주문을 외웠다.
우우우웅!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발리스타의 거대한 화살에서 보랏빛이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두 배의 갑판 위가 마법사들이 끌어모은 마나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이윽고 두 배가 엇갈리며 측면을 마주보기 시작했다.
“발사!”
“퍼부어라!”
각 배의 장교기사들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외쳤다.
제국 말과 남방 대륙 말은 달랐지만, 서로 그 뜻을 알아듣기는 매우 쉬웠다.
텅!
장창 같은 크기의 화살이 집채만 한 발리스타에서 쏘아져 나갔다.
텅!
은과 흑철로 만든 대형 화살은 그 자체만으로도 값나가는 것이었고, 그 화살에 마법을 부여하는 데 쓸 마나를 개간에 썼더라면 꽤 많은 옥토를 얻어낼 수 있을 터였으며, 그 발리스타에 만든 장인들은 본래 집과 가구를 만들기 위해 망치와 톱을 쥐었던 자들이었다.
텅!
그 모든 창조의 가능성을 역방향으로 돌린 파괴의 화살은, 태어난 사명을 충실하게 해냈다.
퍼어억! 퍼어억! 퍼어억!
거대수로 만든 불침 전함의 외곽 널빤지는 두께 단위가 ‘cm’이 아니라 ‘m’이었다.
그리고 파괴술이 부여된 화살은 강화 주문 걸린 두꺼운 널빤지를 끝끝내 비집고 들어갔다.
치이이익!
파르르르!
곧이어 선체에 파고든 화살에서 고약한 연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연기는 맡으면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오거나, 몸이 굳거나, 그 둘이 동시에 일어나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미로 같은 복도와 선실, 갑판에 연기가 밀려 들어왔다.
“으아아아!”
용맹한 병사 여럿이 우르르 몰려가 숨을 참고 그 화살을 뽑아내 바닷속으로 던졌다.
“재장전!”
“재장전!”
차르르르!
수병들이 미친 듯 도르래를 돌리고, 전투마법사들이 시약과 마나를 아낌없이 써 마법을 부여하고, 장교기사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텅!
쐐애액! 쐐애액! 쐐애액!
푸른 전함과 붉은 전함이 다시 한번 공방을 주고받았다.
“아아악!”
나뭇조각이 튀고, 불우한 선원들이 쓰러졌으며, 배 측면에 깊은 상처가 늘어났다.
그러나 불침 전함은 너무나 거대했기에 ‘고작’ 장창만 한 화살로는 부서지지 않았다.
노리는 효과 역시 배를 부수는 게 아니라, 수병과 선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중독시켜서 백병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슈브 아르델라는 양측의 병사들이 미친 듯 고함을 지르는 그 광경을 무심하게도 바라보았다.
휘이이잉-!
바닷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일고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쾅!
“아아아악!”
그녀는 막 아군이 날려버린 적 발리스타나, 막 쓰러진 아군 병사가 아니라, 바다에 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오오오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사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술탄의 자비’에 있는 한 발리스타는 보라색이 아니라 검은색과 주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까르르르르-!
발버둥 치는 검은색 악령 수십 마리가 그 화살에 묶여있었다.
태고의 영면에 박히는 순간 온갖 끔찍한 저주를 선원들에게 걸어댈 게 분명했다.
‘옛것 주술인가? 강력한 침식 마법사로군.’
아미르 토후국 선장들은 언제 적기제독이 나타나 배와 화물을 다 빼앗아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항해하기를 두려워했고, 술탄의 자비에 강력한 마법사를 추가로 고용해 태웠다.
슈브 아르델라는 그런 속사정까지는 몰랐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으나, 저 화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화살이 박힌다면 이 전투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계약 위반이다.
-넌 이 바다를 수호하기로 약속했다.
기이한 두통이 신비롭고도 정열적인 인상의 미인을 떨게 했다.
“끄으으윽!”
그녀는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신음성을 흘렸고, 이내 주홍빛을 뿜어내는 발리스타를 노려보았으며,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노래했다.
“Ra, RaRaRa. RaRaRa. Ra. RaRaRa.”
들키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까운 어조였다.
촤아아악!
다음 순간 거대한 파도가 두 배 사이에서 느닷없이 일어났다.
불침 전함의 상갑판은 거의 20m에 달했는데, 그 갑판 위로 장막처럼 드리워질 정도였다.
난데없는 기적에 양측 병사들이 모두 당황했고, 파도는 무심하게 앞으로 무너져 내리며 발리스타와 마법사를 덮쳤다.
촤아아악!
“막아라!”
“마법사님을 붙들어라!”
아무리 거대한 파도라고 해도, 마음먹고 버티는 초인들의 힘을 이겨내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파도는 무너지는 그 순간 거품으로 만들어진 손 수백 수십 개를 뻗었다.
“끄아아악!”
쏴아아아-.
물결이 아미르 토후국 마법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닷속으로 돌아갔다.
치이이이…….
발리스타에서 피어오르던 주홍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마법사님!”
“이런 젠장!”
“제국의 요술쟁이가 비열한 술수를-!”
‘술탄의 자비’ 수병들이 하나같이 욕설을 퍼부었다.
“침착해라!”
“정신 차려라!”
“재선회할 것이다!”
철편 갑옷 입고 터번 쓴 아미르 토후국 장교기사들이 미친 듯 고함을 질렀지만, 수병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으아아아-!”
“키에에엑-!”
“시이이익-!”
조타수가 멋대로 키를 돌려 태고의 영면을 향해 돌진했다.
아미르 토후국 수병들의 몸이 뒤틀리고 끔찍하고도 강대한 형태로 변이했다.
으직, 으지지직!
키와 덩치가 두 배 정도는 커지는 건 기본이었다.
턱이 좌우로 갈라지고, 등에서 칼날 같은 다리가 돋아나고, 팔이 여섯으로 늘어나고, 온몸에 갑각이 생기고, 둘이 하나로 융합되고, 부풀어 오른 살덩이가 독무를 뿜었다.
슈브 아르델라는 그 모습을 보며 아주 약간 웃었다.
“Ra, RaRaRa. Ra, RaRaRa. Ra-.”
이번에는 조금 더 의욕이 어린 노랫소리였다.
“아아아아.”
“크으으윽!”
“우, 우리는 제국의 병사.”
태고의 영면에 탄 수병들과 장교기사들의 눈동자가 잠시 멍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그들의 온몸에 비늘 같은 무늬가 반짝 빛났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슈브 아르델라를 향해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이 어린 눈빛을 보냈고,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우리는, 가장 깊은 곳으로 갈 것이다!”
제국 수병들의 그림자에서 촉수가 꿈틀거리고 비늘이 반짝였다.
그들이 쥔 무기에 하나같이 은은한 물빛 파동이 일었고, 초점에 돌아온 눈빛에는 녹색 안광이 번뜩였으며, 목에는 아가미 같은 주름살이 접혔다.
인어의 축복이었다.
“와아아아!”
쾅! 쾅!
두 배 사이에 갈고리 단 널빤지가 놓이고, 괴물의 가죽을 덮어쓴 인간들과 인간의 가죽을 덮어쓴 괴물들이 충돌했다.
촤아악!
“끄아악!”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사람과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바다로 떨어졌다.
“…….”
한때는 병사들에게 정을 주기도 했고, 한때는 황실에 충성을 바쳐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흐려진 오늘날.
슈브 아르델라와 에리안느는 그 광경을 질린 듯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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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괴가 열여덟 상자, 은덩이가 예순두 상자입니다. 비단이 창고 여덟 칸이고, 하급 보석이 열두 수레, 상급 보석이 두 수레 나왔습니다. 또 각종 시약과 고급 향신료가…….”
서쪽 수평선으로 해가 떨어졌다.
부관 에리안느가 끝없이 보고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무사히 나포한 배가 138척입니다. 이중 마법 회로가 새겨진 배는 107척이고, 옛것 마법 회로가 새겨진 배를 제하면 총 55척을 올려보낼 수 있습니다.”
태고의 영면은 술탄의 자비를 이겨냈고, 그동안 천창 함대의 다른 배들은 아미르 토후국 무역선 선단을 포위했다.
슈브 아르델라는 알 아지프가 목이 베이고 바다에 던져지는 걸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괜찮네.”
“예. 제독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꼽았고, 몇 번이나 다시 계산한 뒤 말을 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어린 목소리였다.
“그 정도면 마지막 예물로 충분하겠어.”
에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천 년이 흘렀군요.”
“그래. 끔찍하게 길었어. 계약에 매여서 늙지도 죽지도 못했지.”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총독이 날 찾나?”
에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슈브 아르델라는 진저리쳤다.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에 명백한 경멸의 빛이 어렸다.
“불러와. 중간에 배가 가라앉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