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의 망나니 오빠로 사는 법 (339)화 (339/340)

(339)

슈브 아르델라가 전투를 벌인 바다는 ‘끝자락의 항구’로부터 일주일은 나가야 하는 원양이었다.

촤아아아-!

그러나 태고의 영면은 날개라도 달린 듯 바다를 갈랐고, 일반적인 배라면 칠주야를 내달려야 했을 거리를 하루 반나절 만에 주파하는 데 성공했다.

다시금 초저녁.

턱.

석양과 같은 빛으로 달아오른 붉은 갑판 위로 한 사내가 올라왔다.

그는 검은 머리를 정갈히 넘겼고, 멋들어진 콧수염을 길렀으며, 남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우연히도 이틀 전 싸웠던 ‘술탄의 자비’와 같은 색의 코트라서, 그를 바라보는 수병들의 시선이 묘해졌다.

아득히 멀리 떨어진 황실로부터 명령받아, 남부 최대의 항구 도시를 관리하는 그 사내의 이름은 카를론.

‘끝자락의 항구’를 20년째 통치해온 총독이었다.

그는 오만하리만큼 당당한 걸음걸이로 선장실에 들어섰다.

철컥!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젖히는 손길은 과격하기가 이룰 말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군.”

“……카를론 총독.”

슈브 아르델라는 셔츠 한 벌만 입고 붉은 융단이 깔린 소파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남방 대륙의 최고급 흑단 나무로 만든 테이블 위에 동방에서 온 섬세한 유리잔과 수 세기 전 당시 솔레타라스의 즉위식 때 만들어졌다는 위스키가 놓였다.

물론 잔은 슈브 아르델라의 것 하나뿐이었다.

카를론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선실을 둘러보았다.

불침 전함은 거대한 만큼이나 공간도 넓었지만, 그만큼 많은 수병이 필요했으니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하지만 선장실은 선장실이었다.

슈브 아르델라의 선실은 넓고도 쾌적했으며, 멋들어지게 꾸며져 있었다.

수 세기 동안 모아 온 찻잔, 이름도 모르는 이국의 촛대,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도 오지 않는 유리병 속의 배 장식품.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이국의 태피스트리와 색색의 수정 해골.

초대 황제의 것이라 알려진 단검, 드워프 왕이 선물했다는 샹들리에, 오래전 멸종한 맹수의 가죽, 산호 왕관…….

아주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아주아주 많은 자들을 만나며 얻어낸 물건들이 그 선실을 장식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카를론은 그 공간에 이끼 묻은 구둣발로 들어가 그녀와 마주 보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슈브 아르델라가 재차 따르던 잔을 빼앗아 한 모금 기울였다.

“정말로 향긋하군.”

“개자식. 그건 네 할아비보다도 오래된 술이야.”

“제독의 말투가 그게 뭔가?”

“바다 구더기 자식.”

“……먼 길 온 손님에게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지 않나? 난 널 만나기 위해서 내 아름다운 저택을 떠났고, 이 축축한 바다 위까지 나왔다고.”

“넌 손님이 아니라 손놈이고, 내가 뭍을 못 밟게 한 건 너희들이야.”

카를론이 자존심을 세우려는 듯 느끼하게 웃었다.

“한 마디를 안 지는군.”

슈브 아르델라가 피로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제 난 져 줄 필요가 없어.”

말라가던 식물에 한 잔의 물을 준 듯했다.

“이 바다에서 해적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지. 곧 우기니 남방 대륙 무역선들도 한동안 나오지 않을 테고. 가을까지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고 가을이 오면 내가 일할 필요도 없고.”

카를론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그런 계약이었지. 총독으로서 치하하겠어. 마지막까지 잘해 주었군.”

슈브 아르델라는 에리안느가 정리해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는 이번 전투로 얻어낸 엄청난 황금과 보물, 나포한 배들의 명단을 보고 침음성을 흘렸다.

“남아주면 안 되나?”

그는 작위적인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슈브 아르델라는 카를론을 벌레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시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그렇지. 내가 제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않는가? 그날 아버지 손을 잡고 이 배에 와서 그대를 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그대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스윽.

카를론이 슈브 아르델라의 손등을 쥐려 했다.

슈브 아르델라는 곧바로 손을 뺀 다음, 술병으로 그의 손등을 찍었다.

퍽!

“윽! 이게 무슨-.”

“더러운 손 치워라.”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카를론을 노려보며 말했다.

“알고 있다. 보물은 하루빨리 보내주지. 거기까지가 내 일이니까. 이제 내 배에서 썩 꺼져.”

“매정하군.”

“능글맞은 매력을 연기하지 마라. 넌 그런 남자가 아니야.”

카를론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슈브 아르델라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가을 뒤로는 바다에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해일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면.”

카를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촤악!

슈브 아르델라는 한쪽에 놓여 있던 상자에서 하얀 소금을 집어 뿌렸다.

* * *

초저녁이 깊은 밤이 되었지만, 태고의 영면 선장실에서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개자식.”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숙성된 술병이 하나둘 쌓여갔다.

“개자식.”

붉은 머리카락이 소파 뒤로 늘어지고, 바다색 눈동자가 한없이 풀렸다.

“바다에 나오는 순간 죽여주마.”

대함대의 제독에게 어울리지 않는 흐트러진 모습이었으나, 그녀는 이미 도시 총독까지 배에서 쫓아내 버린 다음이었다.

동족을 제외한 수병과 선원들, 기사와 전투마법사들 역시 장기 휴가를 주고 작은 배로 항구로 보내주었다.

짐까지 챙겨 가라 했으니, 만약 이 배가 당장 통째로 사라진다 해도 수장될 사람은 없을 터였다.

지금 태고의 영면과 천창 함대에는 돛대에 선 경계병 한 명도, 바다를 떠도는 정찰선 한 척도 없었다.

무슨 사달이 터져도 병사들이 다시 모이기까지는 며칠 이상이 걸리며, 만약 남방 대륙 해군이 기습이라도 가한다면 큰 피해가 날 터였다.

“드디어 끝이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사슬이 풀린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해방 노예처럼 웃으며 연거푸 잔을 비웠다.

조금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천 년이나 했다.

책임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녀는 형기가 끝나는 날만 기다리는 죄수였고, 의무소집 기간이 끝나기만 기다리는 봉신이었다.

빌어먹을 끝자락의 항구가 지금 당장 지진으로 가라앉아 버리기를, 솔레타라스 가문이 자중지란으로 멸망하기를 매일매일 기도했었다.

제이릴리스가 수백 명의 황족을 죽이고 즉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 미운 놈들이 자기끼리 죽이고 죽여 준다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할 만큼 했다. 이제 돌아갈 거야.”

똑. 똑.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자니,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에리안느? 들어와.”

남색 단발머리의 부관이 들어와 경례를 올렸다.

“각하.”

슈브 아르델라는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 하지 마. 각하도 하지 마. 꼴도 보기 싫어. 이제 다 끝났는데, 각하는 무슨 물에 빠져 죽을 각하.”

그녀의 남색 눈동자가 공허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갈매기 똥보다도 못한 호칭으로 천 년을 불렸어. 이제 싫어.”

에리안느는 주군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

슈브 아르델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에리안느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

완전히 풀려 있던 남색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소파에 문어처럼 늘어져 있던 슈브 아르델라가 몸을 일으키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카리오사. 그 괴물의 새끼가 결국-.”

말아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순수한 분노의 표출도 잠시, 그녀는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 애가 안 돌아왔다면, 그쪽 해적들과 어인족, 동방 대륙 왕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실패했다는 건가?”

동방 왕들과 해적이 동맹을 이루게 하고, 해적과 어인족이 동맹을 이루게 하고, 어인족과 해적을 배후에서 조종해서 동, 남쪽 바다 전체를 휘어잡는 세력을 이루려 했건만.

“어인족 회유는 성공한 모양입니다만, 연결고리가 되어 주어야 할 해적들이 전멸했습니다.”

“그래. 우리도 어인족이 모자란 건 아니었지.”

슈브 아르델라는 힘없이 중얼거렸고, 자세를 바로잡은 게 언제 일이었냐는 듯 다시 소파에 늘어졌다.

“몰라. 다 끝이다. 난 쉴 거야.”

에리안느가 안타깝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전하.”

“싸움도 정복도 복수도 다 질렸다. 그냥 연을 끊고 싶어. 우리 그냥 제일 깊은 심해로 들어가서 한 10년만 자자. 그다음에 어디 인적 없는 섬으로 가서 노래나 부르며 살자.”

“그럼 엘프족의 연락은…….”

슈브 아르델라가 진절머리 쳤다.

“무시해 버려. 그냥 다 무시해. 나 죽었다고 해.”

“어…….”

“내가 다시 뭍이랑 엮이면 비늘을 다 뽑는다. 천 년 전에도 진 것들이 이제 뭘 어쩌겠다고. 그것들은 너무 느려. 제국이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뭐 해보려던 거 같은데, 이미 충성 맹세까지 다 끝났다고.”

* * *

끝자락의 항구는 남부에서 제일 거대한 항구 도시였다.

“후, 하!”

“크레인 돌려!”

“배 들어온다!”

선착장에는 밤에는 가로등이 환했고, 물건을 싣고 내리는 선원과 일꾼들로 바빴다.

각종 무역으로 큰돈을 번 부호들이 즐비한 저택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사교 파티가 열렸다.

“이번에 해운 보험료가 오를 예정이오.”

“동방 해적도 없어졌는데 왜……?”

“소문으로는 적기제독과 천창 함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데.”

“그건 큰일이 아닌가? 내일 시의회를 통해 총독에 따져봐야겠군. 도시의 생명과도 같은 함대에 무슨 일이 생기게 놔두다니.”

총독은 영주와 달리 세습직이 아니다.

카를론의 가문은 운이 좋게 대대로 그 자리를 얻어 왔지만, 그는 이 도시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에 불과했다.

도시법을 만들 때는 시의회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법의 집행은 솔레타라온에서 온 법복귀족이 독립적으로 시행했으며, 그 외 온갖 길드와 상인 조합이 자체적인 규칙을 세워 가며 도시를 운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상인들은 돈으로 시의회를 움직일 수 있는 이 도시의 진짜 주인들이었다.

카를론 역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먼동이 터 오는 걸 보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밤을 지새웠지만,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는 아침 식사 자리에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았다.

금발 벽안의 아내, 마법사 조세핀.

든든한 아들 샤를, 영악한 딸 샤린.

‘적기제독의 계약이 끝나는 순간부터 이 항구 도시는 치명타를 입는다.’

‘천창 함대는 불패의 명성을 잃을 테고, 절대적인 안전 보장 아래 부흥했던 이 도시의 모든 게 흔들리겠지.’

‘망하지야 않겠지만 큰 혼란이 있을 거다.’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사랑하는 여보. 할 일이 있소. 우리 가족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될 듯하군.”

조세핀과 샤를, 샤린이 차례로 답했다.

“걱정 마요. 여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뭐든지 맡겨만 주십시오.”

“언제나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그는 감동한 듯 웃었고, 샤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곧 모든 게 흔들릴 거란다. 그리고 이 아비는 그 혼란을 기다리거나, 혼란을 온몸으로 겪을 생각이 조금도 없단다.”

샤린이 그를 닮아 검은 머리를 묶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두 가지 대책을 세워 두신 거죠?”

카를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단다. 우리 가문이 지켜 온 모든 게 사라지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잖니. 이참에 이 위기를 기회 삼아서 이 땅의 주인이 되어 보자꾸나.”

“그럼. 계약을 연장하실 거라는 뜻인가요?”

“그래. 발렌시아누스가 오기 전에 다 끝내 놓을 거란다. 그가 우리를 진짜 귀족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도록.”

샤린은 비릿하게 웃었고, 조세핀은 놀란 표정을 지었으며, 샤를은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하고 운을 떼며 카를론은 말을 이었다.

“물론 실패할 때도 생각해 놔야겠지. 샤를. 집사와 함께 재물을 정리해 놓거라. 언제든 뜰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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