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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은 아버지를 닮은 검은 머리에 어머니를 닮은 파란 눈을 가진 사내였다.
어린 나이부터 검을 연마해 검술에 능했고, 이종족의 특성이 잘 발현되어 덩치가 보통 사람 두 배만 했으며, 어지간한 나무를 뿌리까지 뽑아 던질 수 있는 장사였다.
총독의 아들로서 이런저런 자리에 참석할 일도 많았기에 눈치도 빨랐고, 도시 안에서 세력을 키워나가는 암흑가 조직 따위를 토벌하는 일에 앞장서며 담력을 키웠으며, 도시와 아버지, 그리고 적기제독의 오랜 비밀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그는 정중한 집사와 함께 별다른 특색 없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동쪽 끝 부두로.”
동쪽 끝 부두는 무역항보다는 포구에 가까운 작은 항구였는데, 그곳에 총독 가문의 비밀스러운 창고로 갈 방법이 있었다.
충성스러운 마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몰았다.
“태고의 영면이 이 앞바다에 와 있더군.”
“동부의 카리오사가 결국 왕이 되었다는데, 제국 동부와 거래를 늘려도 좋겠어.”
“10년 안에 동방 대륙과의 거래가 정상화된다는 데 내 모든 걸 걸지. 당장 배를 띄워라. 닻 군도로 찾아갈 것이다.”
“황제 폐하가 직접 개발하신 마도구가-.”
“자한 동맹의 대규모 투자가-.”
“동남부 밀림에서 엘프족을 목격했다는-.”
남부 최대의 항구 도시는 언제나처럼 북적였고, 정보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집사는 슬쩍 귀를 기울였고, 샤를은 고개를 저으며 창문에 커튼을 쳐 버렸다.
집사는 하얀 콧수염을 씰룩이며 타이르듯 말했다.
“도련님. 거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좋은 버릇입니다.”
샤를은 지배자답게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리에까지 퍼질 정도면 이미 한 물간 정보 아니겠나?”
“그래도 가끔은 옥석이 섞여 있지요. 오징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보물처럼 말입니다.”
동부와 달리 남부의 오징어는 맛이 없었고, 하층민들이 양념 맛으로 배를 채우는 음식이었다.
“그 보물을 위해 수천 마리의 오징어를 낚아 올려야 한다면 거절이네. 차라리 마음먹고 보물을 찾고 말지.”
샤를이 충분히 거절의 의사를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집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보물의 가치가 그깟 오징어 수천 마리를 거두는 수고로움을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면 어떨까요?”
성질 급한 젊은 귀족들이라면 짜증을 냈겠지만, 샤를은 총독의 아들답게 눈을 빛냈다.
“짚이는 게 있었나?”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거리에 설치 중인 신성 가로등을 가리켰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물건입니다. 회로도 공유하셨고, 아예 수도에서 만든 걸 강과 운하로 내려보내 주셨죠.”
“그렇지.”
“솔레타라온 신시가지에도 완비되지 않은 가로등을 여기부터 보내준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샤를은 오래지 않아 답을 찾아냈다.
“곧 이곳을 중요하게 쓸 일이 생긴다는 건가? 무역은 이미 정점이고…… 아. 전쟁이겠군. 남방 대륙 아미르들을 치려는 거야.”
“체사르 후작이 유목 민족에게 피의 보복을 감행 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그래. 국경 너머까지 암살자를 보내고 있다지. 무슨 배짱인지 몰라 당황했는데, 아예 솔레타라온부터 말을 맞추고 있었나…….”
“이제 거리를 보셔야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래. 충분한 보물이었군.”
샤를은 다시 창문 커튼을 열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총독 가문이 어떻게 처신해야 화를 면하고 포상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반면, 집사는 여전히 그 신성 가로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
원수를 보는 듯 꺼림직한 눈빛으로.
* * *
“도착했습니다.”
둘은 도시를 벗어난 외진 항만에 도착했다.
항만에는 고깃배 몇 척만 넘실거리고 있었고, 선착장 주변에는 험악한 인상의 어부들만 가득했다.
마차가 다가오는 걸 본 어부들은 작살이나 커틀러스를 집어 들며 눈을 빛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들 오랜만이군.”
“도련님.”
사를이 마차에서 내리자, 그들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어부가 아니라, 총독 가문이 황실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길러 온 사병의 일부였다.
어부로 위장한 사병들은 둘을 항만 끝 천연 동굴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기억하고 있네. 다섯 번째 굴이었지.”
썰물이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고, 밀물이면 배를 띄워 나갈 수 있는 해안 동굴이었다.
동굴은 큰 배가 여러 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고, 실제로도 큼지막한 범선이 다섯 대나 숨겨져 있었다.
범선의 바우스프릿 아래에는 인어 조각상이 붙어 있었는데, 실제로 적기 제독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해류의 축복을 받아 바람과 선원 없이도 항해가 가능한 마도구였다.
“저런 게 있다는 걸 알면 동부의 백상아리가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려 하겠지.”
“아니면 군대를 일으킬 것입니다. 저라면 그럴 것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샤를과 집사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배에 탔고, 창고 안에 실린 화물을 확인했다.
사르르르.
통을 열자 하얀 소금이 가득 나왔다.
샤를은 소금을 세 번 연달아 걷어냈고, 그 아래 가득 찬 금화를 확인했다.
‘금화, 보석, 금화…… 이건 시약이군. 이건 마도구고. 영체 갑주인가? 가져가야겠군.’
본래 황실에 바쳐야 했으나,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빼돌린 보물이었다.
샤를이 보물을 확인하는 동안 집사는 옆 창고로 들어갔다.
그곳의 통 아래에는 나선을 그리며 배배 꼬인 검은색 뿔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적기 제독이 남방 대륙 무역선에서 약탈해온 시약 중 하나인 ‘나선 흑각’은 악마의 뿔이라고도 불리며, 흑마법 시약 중에서 최고로 꼽혔다.
교회에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유통을 묵인받은 물건이었으며, 조금만 실력 있는 침식 사제라면 옛것의 힘을 빌려올 때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의식에 쓰기 충분한 양이다.’
집사는 수십 개의 통을 확인했고, 이걸 어떻게 수도까지 올려보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기도를 올렸다.
‘합일이시여. 그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곧 당신께 진정한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흑각 두 개를 품속에 챙겼다.
* * *
샤를이 항구에 가 있던 동안, 카를론과 샤린은 저택 후원으로 향했다.
“식객들 얼굴이나 함께 보자꾸나.”
“네. 아버지.”
저택의 후원은 샤를이 간 보물 창고와 비교해도 만만찮게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잔디와 판석 아래 황금이 숨겨진 건 아니었지만, 도망쳐온 황족들이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챙, 챙!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족 사내 둘과 황족 여인 둘이 각각 검을 맞대고 있었고, 한 사내가 그들을 향해 조언을 주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카를론과 샤린의 존재를 눈치채자마자 황족들은 검을 내리고 그들에게 인사했다.
“총독.”
“리첸티온 전하.”
카를론이 네 남녀에게 조언을 주던 사내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리첸티온이라 불린 황족은 키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 이상 컸고, 억세고도 품위 있는 인상이었으며, 푸른 머리카락과 용혈 황족 특유의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황 시절의 계승 서열로 따졌을 때 12위 안에 드는 고귀한 황족이었으며, 그에 어울리는 실력과 품격 역시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정중하지만, 황족의 품위가 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마주 목례했다.
황족의 보호자들이 원하는 건 처절한 구걸이 아니라, 자신이 저런 고귀한 이들을 지키고 있다는 자기만족이었다.
“언제나 고맙소. 총독. 모든 걸 잃어버린 우리를 이렇게 후하게 대접해주다니.”
카를론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황실의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당연할 걸 하지 않는 자들이 널린 세상이오. 내 정당한 권리를 되찾으면 반드시 크게 사례하겠소.”
“말씀만 들어도 황공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시옵소서.”
힘을 기르며, 라고 말할 때 카를론의 눈이 반짝였다.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리첸티온은 그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고, 네 남녀에게 눈짓했다.
“하.”
“흡.”
“후우.”
그들은 손바닥을 펴고 각기 다른 기합을 넣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그들의 몸에서 황금빛 아지랑이가 우우 일더니, 손바닥 위로 모여들어 굵은 고리를 이루었다.
우우우웅!
세상을 바꾸는 권능, 용언의 힘이었다.
어린 소년 황족도 고리 하나를 제대로 만들 수 있었고, 장발의 여인은 고리 두 개를 양손에 올리고 자유롭게 다뤘으며, 리첸티온은 무려 세 개의 고리를 만들었다.
“어떻소?”
카를론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전하들의 힘이 갈수록 늘어 가는 걸 보니 감격스럽사옵니다.”
리첸티온은 힘이란 사용되기 위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카를론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기로 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어디든 같이 가서 무엇이든 해주겠소.”
카를론이 환하게 웃었다.
“예. 전하.”
그가 정확히 듣고 싶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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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난 이제 들어가서 출항을 준비해야겠구나.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오늘 저녁에 황족들과 함께 나가겠다.”
“예. 아버지. 저는 바람을 조금만 더 쐬다 들어가겠어요.”
카를론은 저택으로 돌아갔지만, 샤린은 후원에 남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간 걸 보자마자 리첸티온과 함께 후원 구석으로 향했다.
다른 황족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하거나 별채로 들어가 출항에 필요한 짐을 쌌다.
후원 구석에는 등나무 덩굴이 우거져 천장을 이룬 곳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보라색 꽃이 가득 친 덩굴이 사방에 장막을 드리운 아늑한 공간이었다.
“샤린!”
“리첸티온!”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둘은 입을 맞추었고, 한참 동안 서로 끌어안았다.
초가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등나무꽃을 날렸다.
사아아아.
포옹이 끝나고, 둘은 덩굴 아래서 서로에 어깨를 기대고 앉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샤린은 침음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당신을 이용할 생각뿐이에요.”
리첸티온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의 시련이라고 생각하겠소. 내 자리를 되찾으면 그대를 황후로 맞이할 거요.”
그건 달콤하지만 허황한 약속이었고, 샤린이 듣고 싶던 말이었다.
현실을 헤쳐 나가는 건 그녀가 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꿈을 꿀 수 있을 만한 달달한 말을 바랐다.
“아버님은 적기제독의 충성을 받고 싶어 해요. 그녀도 결국 이종족이라, 생물의 정점에 선 용언을 거스르지 못하거든요.”
“으음.”
“그리고 그 힘을 빌려 작위를 얻을 생각이시고요.”
“샤린. 내게 은인을 배신하라 말할 생각인 거요? 우리를 도와준 구원자이자 당신의 아버지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금발을 날렸다.
“당신이 적기제독의 충성을 받아요.”
리첸티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그가 책임감 넘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또한 약속하겠소. 이건 모두 내 야욕 때문이 아니라 그대를 황후로 맞기 위해서요.”
샤린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듣기 좋네요. 리첸티온.”
리첸티온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오른손 손바닥을 펴 보였다.
우웅!
아주 가볍게 다섯 개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 * *
카를론은 항구에서 출항을 준비했다.
대외적으로는 다시 한번 적기제독을 만나고 일대의 해역을 순찰하기 위함이었다.
황족 다섯과 충성스러운 사병, 선원들이 배에 탔다.
집사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미 여러 번 했던 조언을 되풀이했다.
“총독께서 적기제독의 충성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그럼 카리오사가 그렇듯 왕위도 받으실 수 있겠지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카를론의 눈빛은 조금씩 흐려져 갔다.
“알고 있네. 단지 신성 황제의 분노가 두려울 뿐이야.”
“중재 세력이 되시면 그 분노도 피할 수 있습니다.”
“중재?”
집사가 슬며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남방 대륙과 제국, 인간과 이종족, 침식자와 교회. 그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위대한 조율자가 되시는 겁니다.”
일순 카를론의 눈빛이 흔들렸다.
“침식자?”
집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교단은 각하에 큰 힘이 되어줄 겁니다.”
카를론은 완전히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네.”
배가 출항한다.
황족 리첸티온과 총독 카를론, 그의 딸 샤를과 집사까지.
네 사람의 각기 다른 꿈을 싣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