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2 ----------------------------------------------
불릿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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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주십시오.”
“끄응... 귀찮은 녀석이군.”
준은 무릎을 꿇고 있는 크리스를 보며 인상을 썼다. 사실 그가 살아있는 것은 단순한 준의 변심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울컥해서 죽여버리려다가, 문득 너무 심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에 시미의 정신교란이 떠올랐을 뿐이다. 죽이지 않고도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좀 정신을 차리겠지 하고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조금 더 그 속내를 파고 들어가 보자면, 준은 그가 반성을 하든 안하든 별로 관심없었다. 그 정도 경험이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합당한 벌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게 순간적으로 여러가지 계산이 머리를 스쳤고, 그 결과로 크리스가 살아남았다. 헌데 그 일의 결론이 이런식으로 찾아올줄은 몰랐다. 그렇게 개념 없이 설치던 녀석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러 올 줄이야.
“난 함부로 무릎을 꿇는 자를 별로 신뢰하지 않아. 몇시간 전의 너와 지금의 네가 달라진 것 뭐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크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네가 이제와서 이렇게 내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이유가 뭐냐는 거다. 펠로우쉽에 다시 들어오고 싶어서가 아니냐?”
“그, 그건 아닙니다.”
“아니긴...”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입니다. 지금은 정말로 방금전의 무례를 사과하고자.”
크리스는 필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가 점점 싸늘해지고 있었다.
“시끄럽고. 일부러 살려뒀더니 사람 귀찮게 하는 법을 배워 온 모양이군. 차라리 죽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덜덜.
크리스는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말로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여 입을 열었다.
“펠로우쉽 때문이라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빌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다시 재가입 시켜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목숨을 살려주신 것에 대해서 어떻게든 감사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 알았으니까 가봐.”
“네?”
크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기 떄문이었다.
“고맙다며. 잘 알았다고. 그러니까 이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가봐. 아. 미안하다고 했지? 사과도 받을테니까. 이제 다 된건가?”
“그... 그렇긴 합니다만...”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이제 돌아가면 되겠군.”
준의 말에 크리스는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은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저기 헌데...”
“왜? 펠로우쉽 재가입 시켜달라고?”
“아,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 그런게 아닌데...”
크리스는 자꾸만 머리를 벅벅긁으며 우물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잘 모르는 듯 했다.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졸지에 펠로우쉽에서 방출되었으니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펠로우쉽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무슨 일을 시켜도 목숨을 걸고 하려고 들것이었다. 그만큼 펠로우쉽이 주는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뽕맛(?)에 물들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제와서 돌아가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 손에 넣었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힘을 잃고나니까 아주 미치겠지?”
“그런... 것도 같습니다.”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려던 크리스는 준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꽤 자존심이 있어보이는 녀석이었는데 이렇게 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 그냥 죽여 버릴 걸 그랬나.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밴디트도 아닌데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일수는...’
여기서 보낸다고 해도 어쩐지 계속해서 귀찮게 굴 것 같은 녀석이었다. 고민하던 준은 이번기회에 이 녀석을 홍보용으로 확실하게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 멜튼은 실력도 있었고, 레벨도 6에 빠르게 오른 만큼 꽤나 인지도가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을 잘만 이용하면 본보기용으로 꽤나 쓸만한 존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를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나?”
“기회라면...”
“펠로우쉽에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기회.”
“무슨일이든 시켜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습니다!”
크리스가 다시 준의 앞에 엎드렸다. 마치 준의 신발이라도 핥을 듯한 그 민첩한 몸놀림에 준은 헛기침을 하고, 검둥이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 되게 준을 사랑하나봐요.”
그리고 시미가 입을 열었다. 크리스는 갑자기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미는 준의 앞주머니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크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초리가 날카로운 것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경쟁자가 늘었어요...”
“쓸데없는 소리하지말고.”
준은 헛기침을 하고는 크리스를 향해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했지?”
“네. 무슨일이든지 시켜주십시오. 밴디트들의 한가운데에 뛰어들라고 해도 뛰어들겠습니다.”
“좋아. 그런 정신상태라면 나도 마음이 놓이는군. 그렇지 않아도 막사를 청소할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네? 잘못들었습니다만?”
“아다시피 이 막사가 엄청 큰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전투원이라는 말이야. 그래서 다들 청소같은 허드렛일은 안하려고 들거든. 앞으로 너는 펠로우쉽 군단의 전속 청소부가 되는 거다.”
준은 그렇게 말하고 인벤토리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들었다. 준이 집안을 청소할때 쓰는 도구였다.
“좀 작기는 하지만 쓸모는 있을거야. 다른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직접 구하고. 일일이 내가 신경쓸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검둥아.”
“네. 형님.”
“네가 데리고 왔으니 네가 책임 져야지?”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이 녀석은 앞으로 네 담당이다. 일을 똑바로 안하면 바로바로 보고하고. 네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네가 알아서 해. 이 녀석이 사고를 치면 전부 네 책임이라는 사실 명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믿고 맏겨 주세요.”
검둥이는 크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귀찮아 할 줄알았는데, 의외로 녀석의 눈빛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신병을 받은 선임의 눈빛이 이런 것일까. 준은 이 녀석이 의도적으로 크리스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후후후. 신입.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넌 이제부터 내 말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알겠나?”
“그... 알았어.”
“이야. 이 녀석. 아직 교육이 덜 된 모양이로군. 형님. 이 녀석에 대한 교육은 저에게 맡기시고 편안하게 쉬십시오.”
“끙. 알아서 해라.”
준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녀석들을 내보냈다. 뒤돌아선 검둥이는 꼬리를 신나게 흔들고 있었다. 자신의 밑에 누군가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은 모양이었다.
“뭐... 고생해라.”
준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읊조렸다.
크리스는 다음날부터 검둥이와 함께 돌아다니며 막사의 곳곳을 청소했다. 덩치 큰 근육질의 사내가 조그마한 소년에게 쩔쩔매며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허드렛일을 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그자가 크리스 멜튼임을 알아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저 인간 어제 죽은 그 인간 아닌가?”
“그러고보니... 맞는 거 같은데? 설마 쌍둥이었던건가?”
“크리스 멜튼이잖아. 저 녀석 나름 유명한 놈일 걸. 실력만큼 싸가지 없기로.”
“그런데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우리가 귀신이라도 보는 건가?”
“주인장이 또 뭔짓을 한 모양이지. 실제로는 안죽었다던가.”
“혹시... 죽여놓고 다시 살린거 아닐까?”
“설마. 아무리 주인장이라도 그런 짓까지 할 수 있을까?”
“모르지. 나는 분명히 저 놈이 죽은 걸 봤다고. 목이 잘려가지고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것 까지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웅성웅성.
열심히 바닥 청소를 하고 있던 크리스 멜튼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 뭐 구경났냐? 왜 자꾸 이쪽으로 몰려드는 거야?’
비장한 마음으로 준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전투에서 공을 세워 펠로우쉽에 다시 재가입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준이 그를 다시 받아줄 듯한 뉘앙스로 입을 열었을때 정말 진심으로 그에게 충성을 다하려고 마음먹었다.
비록 어리고, 싸가지 없고,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녀석이지만 녀석은 그만한 힘이 있었다. 델타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굴복한다는 것이 그리 자존심 상하는 일은 아니었다. 수천의 펠로우쉽을 실질적으로 손에 넣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평생 한번 한 적도 없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자니 성질이 뻗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필 수도 없는 것이 그의 뒤에서 매의 눈으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웬 이상한 수인 녀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자식은 대체 하는 일이 뭔데 하루종일 내 뒤를 따라다니는 거야?’
준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딱히 무슨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전투 훈련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자신을 감시하는 게 전부였다.
“후우.”
크리스는 허리를 펴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펠로우쉽이 취소되었다고는 해도 원래 가진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들은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청소나 빨래같은 이런 일들이 오히려 힘들게만 느껴졌다.
그를 지켜보던 검둥이가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자꾸 허리 펼래?”
“저기. 잠시만 쉬면 안되겠습니까?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일했는데?”
“하. 이런 개념없는 자식. 내가 소싯적엔 하루 24시간 동안 허리를 제대로 펼날이 없었어. 형님께 보고할까? 이런식이면 곧바로 쫓아낼 수도 있다고.”
“...아닙니다.”
크리스는 분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꼬마 녀석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짜증나고, 그 녀석이 하루종이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씩 내뱉었다.
“이야... 천하의 크리스 멜튼도 다됐구만. 저런 어린애에게 쩔쩔매고.”
“그러니까 왜 건방지게 주인장한테 까불어서 저런 꼴을 자처하는 걸까?”
“저 녀석도 별거 아닌 모양인데? 괜히 그동안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닌모양이야.”
그 중에는 크리스 멜튼과 같은 도시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평소에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지 일부러 보란듯이 그의 앞에가서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뿌드득.
크리스는 이를 악물며 손에 있던 빗자루를 꽉 쥐었다.
빠직.
“이 자식들아! 구경났냐! 당장 저리 꺼져!”
결국 참다못한 크리스가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우루루 물러섰다.
‘겁쟁이 녀석들이.’
그 모습에 흡족한 기분을 느낀 크리스가 손에 들고 있던 쓰레받기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다시한번 소리를 질렀다. 어울리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한방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 주먹 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어디서...”
그렇게 시원하게 내지르고 자리를 뜨려던 그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거의 천장에 닿을 듯 커진 거대한 검은색의 늑대인간이 있었다.
“헉?”
“야.”
“네...?”
“다시 붙여.”
“무, 뭘 말입니까?”
그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괴물이 방금의 그 소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겉모습은 완전히 달랐지만 말투나 분위기가 완전히 동일했던 것이다.
“빗자루. 그거 하나밖에 없는거다.”
“다, 당장 붙이겠습니다.”
크리스는 바닥에 두 동강이 난 채 버려져 있는 빗자루를 쥐고는 어떻게든 다시 붙이려고 끙끙댔다. 하지만 이미 부러진 걸 끼워맞춘다고 붙을리가 없었다.
“다시 안 붙냐?”
“네. 안 붙습니다.”
“그럼 맞아야지.”
“네?”
뿌드득.
검둥이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맞잡았다. 주먹이 꿈틀거리면서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입 꽉 다물어. 이빨 나간다.”
“흡!”
퍼억!
검둥이는 크리스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크리스가 공중으로 붕 뜨며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다리를...?”
뻑!
막 입을 여는 크리스의 얼굴에 검둥이가 주먹을 꽂아넣었다.
“커헉!”
“이빨 나간다니까. 이 녀석 참 말이 안통하네.”
쿵.
크리스는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한 채 벽에 처박혔다. 그 모습을 지켜본 펠로우쉽들은 서로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름 한가닥한다는 녀석도 저렇게 처 맞을 진데, 자신들은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은 다섯시 쯤 나갑니다. 늘 그렇지만 좀 늦을 수도 있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