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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의 비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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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니에게 맡겨둬. 일단 머리부터 좀 손보자. 너무 길잖아. 지저분해 보이고. 평소에 빗질은 하고 다니는 거야?”
“이건 머리가 아니라 풀인데요. 자르면 광합성을 못해요.”
“더 많이 먹으면 돼.”
“아. 그렇군요.”
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그, 그런데 이거 자르면 시미는 알몸이 되는데요.”
“괜찮아. 옷 입으면 돼.”
“작아지면 옷 못입어요.”
“참. 그랬지. 어쩐다...”
서은설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고민했다. 어쩔 수 없이 긴머리는 적당히 묶어서 땋아올리기로 하곤 옷을 골랐다. 에피알게나스는 자신의 옷을 수선해서 입힐 수 있었지만 시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쇼핑이나 하러가자.”
“쇼핑이요? 어디서요?”
플랫폼은 아직 완전히 기능이 복구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의 생필품들 중에서도 옷은 최상위에 놓인 물건이었고, 얼마전에 화물선을 통해서 옷가지들도 조금이지만 들어왔다. 준의 정장도 그곳에서 어렵게 찾아낸 것이다. 그중에서 시미에게 맞는 옷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보급품에서 옷가지를 고른 서은설은 시미에게 맞을 만한 푸른색 플레어 스커트와 하얀색 세라복을 골라서 입혔다.
영락없는 학생복이었다.
“역시 이거지. 클래식이 최고야.”
서은설은 자신의 선택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던 녹색 머리칼은 어깨위에서 곱게 땋아 내려져 찰랑거렸고, 처음 입혀본 옷은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머리가 약간 크긴 했지만 그 부분이 오히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로 통할까요?”
시미는 짧은 치마를 살짝 끌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수영복이나 다름없는 정도의 노출을 하고 다니다가 갑자기 옷을 입으니 오히려 더 부끄러워하는 듯 했다.
“몰라. 일단 해보는 거지.”
“와아... 기대했던 제가 바보였어요.”
시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잠시나마 이걸로 준에게 어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였던 자신이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어? 여기에 왜 여학생이 있지?”
그때 지나던 사람들이 서은설과 시미를 흘깃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기들끼리는 들리지 않게 말한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크다보니 아주 잘 들렸다.
“머리색도 특이한데...? 저거 시미 아니야?”
“에이. 설마 그 녀석은 머리칼로 몸을 꽁꽁싸매고 다니잖아.”
“크크. 그건 그렇지. 앞으로가 기대된다니까. 더 자라면 이제 머리칼로도 못 감출텐데.”
“아니. 절대적으로 지금이 좋아.”
“뭐냐. 너 그런 취향이였냐?”
“취존해주시죠?”
“헐. 설마 너 알카트뢰즈로 온 이유가...”
“아니야 임마. 나도 사람새끼라고. 그냥 2D를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일 뿐이야.”
“그래서 요즘 그렇게 싱글벙글이구만?”
“허허. 듣겠다. 내가 조금있다가 좋은 작품 소개해줄게. 이건 진짜 죽인다고.”
“너 저번처럼 귀축물 같은거 소개시켜주면 죽여버린다. 역겨워서 진짜. 내가 왜 괴물놈들 사이에서 얽혀야 되는거야?”
“이번에는 순애물이라고. 날 믿어봐.”
“끙. 알았어. 이번에도 꽝이면 구현화에 들어간 경험치 다 토해내라고 할테니까 알아서 해.”
“속고만 살았나. 대신 이번에 제대로 걸리면 한 턱 쏘는거다?”
두 사람의 델타 스피릿 직원들이 낄낄거리면서 지나갔다. 서은설이 시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의외로 인기가 있는 모양인데?”
“네에~”
시미는 힘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은설은 그런 시미를 질질 끌다시피 한 채로 플랫폼 안을 돌아다녔다. 준이 루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생각이었다.
처음은 막스였다. 그는 플랫폼 내 당구장에서 부하직원들과 내기당구를 치고 있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학생. 여기는 미성년자 출입금지 구역이야.”
“나참. 시미도 못알아 보는거에요?”
“음?”
막스는 큐대를 놓고 눈을 꿈뻑이더니 시미를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막스의 눈빛에 시미가 서은설의 뒤로 숨었다.
“그렇군. 이제 학교에 갈 나이인가?”
“어때요? 귀엽죠?”
서은설은 시미를 앞세웠다. 시미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잘 어울리는데?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가라. 그래야 준도 마음이 놓을 거다.”
“나참. 아저씨도. 얘가 무슨 대학을 가요. 사람도 아닌데.”
“어허. 사람이든 아니든 그게 뭐가 중요해? 뭐든지 배우는 게 중요한거지.”
“어쨌든 소감은?”
서은설이 마이크를 잡듯이 쥔 손을 막스에게 향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귀엽네. 준이 좋아하겠어.”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서은설은 가볍게 윙크를 하고는 시미를 데리고 당구장을 빠져나갔다. 막스가 낄낄거리면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밥이나 먹고가라.”
마스터는 뭔가 탐탁치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뭔가 시미가 갑자기 달라지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마스터. 표정 좀 풀어요. 누가보면 딸내미 시집가는 줄 알겠네.”
밥이 킥킥대며 입을 열었다.
“시끄럽다.”
마스터는 버럭 화를 내고는 주방안으로 들어갔다. 밥이 서은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바람이 분거냐?”
“왜요?”
“너 같은 여우가 괜히 시미를 치장시킨 건 아닐거 아냐.”
“뭐, 장기계획이죠.”
“별로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니 됐다. 넌 알아서 잘 하겠지.”
밥은 골치아프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알게 된지 이제 두 달이 조금 넘은 사이였지만 그 사이 서은설은 준의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기편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마스터나, 밥, 막스등은 서은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준의 마음에 들기 위한 사전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또 밉지 않다. 먼저 다가와 밝게 웃으며 스스럼없이 친밀감을 표하는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그녀는 가족이 없는 마스터나, 가족이 멀리 있는 밥의 허전한 곳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나저나 이 녀석 이렇게 보니 꽤나 자랐구나.”
성체화 된 시미를 처음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생긴 것은 시미인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그 나이대의 보통 여자애처럼 보였다.
“괘, 괜찮아요?”
“암. 괜찮지. 이제 집에가서 숙제나 열심히 하렴.”
“후에에...”
“준의 취향은 역시 글래머한 누님인가요?”
서은설이 입을 열었다. 일단 여자로서의 매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시미에게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힌 것 까지는 좋았는데, 루나의 스타일과는 너무 상이하다보니 약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녀석? 글쎄. 아마 예쁜여자면 다 좋아하지 않을까?”
“흠. 그런가요? 그러면 왜 나랑 있을때는 별 일이 없었을까요?”
“지금 자연스럽게 너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거냐?”
“사실을 적시한 것 뿐이에요.”
“예쁜 걸로 치면 끝판왕이 하나 있잖은가.”
탁.
마스터가 스프를 꺼내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서은설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그쪽은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인간이 신의 뜻을 거스를 순 없잖아요.”
“호오. 너도 인정하는 거냐?”
밥이 입을 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어떻게 인정하지 않겠어요.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하긴. 나도 결혼만 안했으면 한 번 도전해 보는건데.”
“도전정신은 아름답죠. 밥이 아름답지 않아서 그렇지.”
“뭐임마? 너도 지금 임자있는 사람에게... 험험.”
밥은 서은설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표정을 풀고는 시미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이 닿자, 약간 흐트러졌던 머리가 이내 모양을 되찾았다. 확실히 그녀의 머릿결은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헌터생활을 하면서 푸석해진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던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방법까지 쓰는 거잖아요. 좀 비겁하긴 하지만, 어때요? 중요한 건 결과지 과정이 아니라고요.”
“그거 원래 반대로 쓰는 말인데요.”
시미가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응용이라는 거야. 배워둬. 좋은 말은 외워뒀다가 자기에게 유리할 때 써먹는 거라고.”
“애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죠?”
“크크크. 너 좀 웃겼다.”
“그게 그렇게 웃겨요?”
서은설은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아무도 믿지 않고 있지만 엄연히 그녀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일전에는 그 말을 듣고 장민성이 소리내어 웃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
서은설은 갑자기 들려오는 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루나와 함께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일하는데 방해된다고 쫓겨났어.”
“지금 임신 8개월 아닌가요...?”
“하하. 그러게 당분간 연구는 쉬라고 했는데도 그게 안되나봐.”
준은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보통은 남자가 일로 바쁘고, 여자가 투정을 부려야 정상인데 루나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사실 준이 하는 일은 큰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복잡한 것들은 제임스를 비롯한 직원들이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할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는 한창 어그로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막바지에 이르러 있는 상태였다. 일전에 막스를 통해 자료를 수집한 이후, 이스카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시험기기를 동원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조금의 수정이 끝나면 정식으로 시판해도 괜찮을 물건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어? 시미?”
준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머리색으로 봐선 틀림없이 시미였는데 평소와 달리 땋은 머리를 양쪽으로 고리모양으로 늘어뜨린,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머리를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서은설의 솜씨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옷은 뭐야? 너 옷입는 거 무지하게 귀찮아 했잖아.”
“어, 어때요?”
시미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준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릎위에 올려진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준은 약간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랄까... 사람 같아.”
“아아.”
쿵.
서은설이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았다. 그녀의 반응에 준은 뭔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뭐랄까.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 어울려. 진심이야.”
끼익.
시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은설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혹시 자신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하는 늦은 후회였다.
타타탁.
그리고는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뭔가 걸음걸이가 이상했지만,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 준과 일행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웃고 있는 것 같았지...?”
밥이 입을 열었다. 서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그 정도 칭찬에 저렇게 좋아하는 거네.”
서은설은 뭐랄까, 약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옆눈으로 준을 흘깃 쳐다보았다.
“준님? 너 말이야.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나저나 저 녀석 화난 걸까?”
“너 방금 내가 우리가 한 말 못들은거야?”
“아? 뭐라고 했어?”
“아니. 됐어. 아무래도 실패한 건 아닌 모양이네.”
서은설은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남의 일은 잘 풀리는데 자신의 일은 아직도 제자리였다. 하지만 자신과 그녀들 사이에는 1년이라는 공백이 있다.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만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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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자러갑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세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