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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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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이후로도 서은설의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단 하나 달라진 것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거리낌없이 내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준도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 회피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다만 관계가 크게 진전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루나와의 관계가 예전보다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준도 루나도 서로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건조한 커플이었는데 그 사이에 서은설이 끼어들면서 느껴지는 위기감 때문인지 루나도 더욱 적극적으로 준에게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했고, 준도 기꺼이 그녀에게 더욱 애정을 퍼부었다.
어쨌거나 거대한 풍파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 그렇게 미풍처럼 지나갔다. 준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끝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안의 씨앗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루나도 대단하네. 무슨 생각으로 이 녀석을 남으라고 한 걸까?”
밥이 서은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빨대로 빨아먹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실례에요? 그보다 이거 엄청 써.”
“애초에 빨대로 먹지 말라고.”
밥이 한숨을 쉬었다. 서은설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남아있던 커피를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아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파핫. 어쨌거나 기분전환은 되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쓰지 마시죠. 아저씨?”
“요즘 젊은 것들은 정말 알 수가 없다니까. 쯧쯧.”
밥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해 결혼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요즘세태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부사이에 끼어드는 일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혼자서 끙끙앓는 그녀가 불쌍해서 나름 도움을 주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오히려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넌 어쩌려는 생각이야?”
밥이 그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준을 향해 물었다. 준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고민 중.”
“이 오빠는 여자가 먼저 달려들지 않으면 절대로 자기가 좋다는 말을 안하시는 타입이라 물어봤자 소용없어요.”
“누가 오빠냐. 게다가 왜 나의 단점을 니 입을 통해서 들어야 되는거야?”
“그야 내 입은 뚫려있으니까?”
“됐어. 잘도 그런 성격으로 사랑받겠다.”
“와. 진짜 이정도면 왕자병 아니에요?”
서은설의 말에 밥은 기가 차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니들 무슨 세트로 시트콤 찍냐? 내가 살다살다 이렇게 희안한 커플은 처음 보는구만. 난 진짜 요즘 애들 이해를 못하겠어. 안그래요. 마스터?”
“자기가 좋으면 그만이지. 남의 일에 신경 꺼.”
마스터는 유리컵을 닦으며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역시 마스터는 멋지다니까.”
“저 양반은 그냥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 뿐이야.”
밥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는 낮은 한숨을 쉬고는 컵을 바 위에 올려두었다.
“수백억의 인간이 있으면 수백억의 삶이 있는 법이다. 최선을 다해서 부딪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다가 상황이 안좋아지만 이야기 해. 적어도 엘라는 내가 봐줄테니까.”
“끙. 내 딸은 내가 키울 거거든요?”
준이 입을 열었다. 어째 돌아돌아서 자신이 공격받는 느낌이었다.
“뭐,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마스터는 표정없는 얼굴로 새 컵을 꺼내어 닦기 시작했다.
이주일 뒤. 새크리파이스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협상자는 꽤나 높은 직급의 사람이었는데 적어도 이번일이 그쪽에서 꽤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물론 협상은 결렬되었다.
준은 세 대의 함선과 300명의 승무원을 모두 풀어주는 대가로 30조를 요구했다. 쓸만한 전함 한 대의 가격이 평균 5~10조라는 점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가격은 아니었다. 물론 현재 이쪽이 가지고 있는 함선은 순양함 한 대와 전함 두 대. 감가상각을 적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출고가로 계산해도 20조면 남는 장사였다. 추가 비용 10조는 승무원의 몸값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계산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크리파이스에서 그런 돈을 그냥 턱하니 준에게 건네줄 리가 없었다. 협상단은 요지부동인 준의 태도에 욕설과 비아냥, 그리고 협박을 하면서까지 어떻게든 가격을 깎으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는 소득없이 돌아갔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는 군.”
“그래서. 마음의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양 주안이 입을 열었다. 준은 그와 일대일 대면을 위해 플랫폼 감옥에 와있는 상태였다.
“네가 일전에 제시한 방법이 썩 마음에 들어. 하지만 나로선 참모의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솔직히 말해 이 인원 그대로 승무원을 꾸린 다음 새크리파이스를 공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인원구성은 제가 새롭게 지시하겠습니다. 몇몇 사람만 잘라내고 나면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3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모두 외우고 있는 건가?”
“딱히 할 일이 없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양 주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했지만, 사실 일반 승무원의 이름을 아는 것만해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옥석을 가려낼 만큼 그들에 대해서 자세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효과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건 대단한 모험이었다. 우주선 3대와 포로 300명을 걸고 얻을 만큼 과연 양 주안이라는 사내가 가치가 있는 것일까?
준은 그렇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함대를 운용할 만한 사람이, 그것도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도박의 가치가 있었다.
“좋아. 그러면 명단을 제출해. 가능한 한 빠르게 조치하도록 하지.”
“정말입니까?”
“왜? 겁이 나는 건가?”
“아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런 걸 들어줄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봐도 너무 억지스러운 요구였습니다만.”
“감이 좋아.”
“감... 입니까?”
“그리고 너는 꽤 영리해 보이거든. 지는 쪽에 붙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것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래. 나도 하나 묻지. 항복을 한 것까지야 그렇다 치고, 어째서 내 밑에서 일하려는 거지? 새크리파이스에서 대우가 좋지 않았던 건가?”
“그것도 있습니다만. 쓸데없이 아군의 희생을 늘리는 싸움에 지긋지긋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쁘지 않은 이유로군. 지휘권을 갖고 싶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 길을 두고 멍청한 짓을 하는 상관을 모시는 것에 지쳤으니까요.”
“좋아. 그럼 간수에게 말해 둘테니까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알아서 하라고.”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가족을 데리고 와야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두고.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건 원치 않거든.”
“그것도 파악해 두겠습니다. 아니. 그 일을 가장 먼저 해야겠습니다. 저쪽에서 선수를 치기 전에 움직여야 하니까요.”
“그래. 그럼 열심히 일하라고. 월급은 확실히 챙겨줄테니까.”
“감사합니다.”
양 주안은 준에게 경례를 붙였다.
양 주안의 주도로 만들어질 함대의 이름은 간단하게 제 1함대로 부르기로 했다. 준이 움직이는 알바트로스는 함대라고 부를 수 없었기에 첫 번째 이름을 양의 함대가 받게 된 것이다. 300명 중에서 추리고 추린 200명을 다시 세 함대에 적절히 배치하고 전체 함대의 지휘권은 양에게 맡겼다. 그리고 남은 100명은 어쩔 수 없이 던전에 밀어넣어야 했다. 그나마 양 주안이 타고 있던 함선 소유즈의 승무원들은 대부분 그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덕에 던전행은 피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라고는 했지만 단 한명을 제외한 전원이었다.
“감히! 새크리파이스를 배신하고도 네 놈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던전에 집어넣기 전에 일시적으로 결박을 풀어준 마르케스 소장이 준의 곁에 있던 양 주안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양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시볼일도 없는 사람이었고, 곧 사지로 가게 될 사람을 조롱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양의 리스트에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던전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는 알지 못했지만, 준이 꺼려하는 것으로 보아선 아마도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그를 사지로 보낸 셈이라 마음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양은 모자를 벗고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한때나마 상관이었던 자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내가 살아돌아간다면 반드시 네 놈의 목부터 날려버릴테다!”
“그럴일이 있을지 모르겠군.”
준이 손짓하자, 니들건을 든 델타스피릿의 병사들이 그를 던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던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지만 대기중에 일렁이는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기운이 물씬 풍겨왔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던 죄수들 모두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준은 그들을 모두 던전에 밀어넣은 다음 병사들을 해산시켰다. 양 주안이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어디로 간 것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전에는 자신의 처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에 묻지 못했지만, 지금은 질문을 해도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곳. 어떻게 보면 군대보다도 끔찍한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까...”
던전안은 그야말로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천명이 넘는 사람들은 모두 서열이 정리되어 있었고, 수시로 전투를 벌여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했다.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서 유희라고는 싸움밖에 없었고 반복되는 전투를 거치며 그들은 인간이 태초부터 지니고 있던 야성을 깨우고 있었다. 거기에 던전의 영향으로 인해 성정도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었으니, 인간의 사회라기 보다는 야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들어간 이들이 모두 일반인임을 감안하면 던전사회의 가장 최하층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그곳에서는 이전의 계급이 소장이든, 대령이든간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