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1 ----------------------------------------------
개척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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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잠시.”
“응? 왜?”
에피알게나스가 막 로버의 던전핵을 내리치려는 준을 막았다.
“로버는 비싼 물건이야. 이대로 부수긴 아까워.”
“쓰지 못하는 병기는 짐덩이일 뿐이야. 게다가 조건이 너무 변태같잖아. 누가 이런 녀석에게 타려고 하겠어.”
“내가 타면 돼.”
“음...?”
준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그를 향해 에피알게나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16살이야.”
“음?”
“안믿는거야?”
“아, 아니. 믿고 아니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그보다 열여섯이라고? 농담아니고? 괜히 나이같은 거 속일 필요 없는데. 아니. 그보다 원래 25살 쯤 되는 거 아니었어?”
“나이를 이야기 한 적은 없는데?”
“그랬던가? 루나와 비슷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김새가 나이 들어 보인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상당히 어른스러웠기 때문에 준이 멋대로 추측한 것 뿐이었다.
[오오... 순결한 처녀... 오오...]
준은 로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인상을 썼다. 그는 녀석을 슬쩍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런 기분나쁜 녀석에게 정말로 타고 싶은 거야? 저 안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로버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끙... 모르겠다.”
준은 들고 있던 라이트세이버를 소환해제 하고는 로버의 가슴 위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에피알게나스가 천천허 녀석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계약 조건은?”
[충족되었다. 그대는 나의 마스터로서 이 몸은 파괴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그대와 함께 할 것을 맹세하겠다.]
“엄청 거창하네. 로버는 원래 1대1 계약을 맺는 식으로 탑승하는 건가?”
“내가 알기로 그런 제한은 없어. 말했지만 이건 그저 병기.”
에피알게나스의 말에 로버가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헛소리! 이 몸은 어떤 마스터도 받아들인 적 없는 순결한 몸으로...]
“시끄러워. 이 수다쟁이변태로봇같으니.”
준은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로버에 탑승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했다. 지금까지 두터운 갑주로 가려져 있던 가슴부분이 좌우로 벌어지며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은, 의자 하나와, 조작을 하기 위한 콘솔이 양쪽에 하나씩 붙어 있었다. 너무나도 심플한 구성이라, 과연 저런걸로 이 커다란 로봇을 조종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따로 조종방법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건가?”
“로버는 탑승자의 뇌파정보를 읽고 그에 맞추어 반응하는 거야. 딱히 따로 조종법을 배울 필요는 없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에피알게나스는 로버의 좌석에 앉아 조용히 양쪽 콘솔에 손을 걸었다. 커다란 방아쇠 같은 것에 손을 올리니, 제법 그럴듯한 자세가 나왔다.
“그럴거면 그 콘솔은 뭐야?”
“체내의 엑조틱에너지를 로버와 싱크로하기 위한 장치. 쉽게 말하면 이 장치를 통해서 내 안의 엑조틱에너지를 방사하는 거야. 그것만으로 엄청난 출력의 힘을 발휘할 수 있어.”
치익- 쿵.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로버의 흉갑이 서서히 닫혔다.
[오오...]
로버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장이 뛴다. 난 다시 태어났다.]
쿵. 쿠웅.
녀석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처음과 달리 움직임도 훨씬 더 인간과 비슷했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위압감이 녀석의 온몸을 흐르고 있었다. 에피알게나스의 엑조틱에너지가 활성화 된 모양이었다.
로오나 인은 인간과 달리 마나가 아니라 엑조틱에너지를 직접 사용했다. 애초에 엑조틱에너지를 주자원으로 사용하는 곳 출신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준은 한참이나 이리저리 움직이던 로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 할만해?”
[좋아. 시선이 너무 높아서 불편한 것 만 빼면 기동에는 문제가 없어. 다만 문제가 한가지 있는데.]
로버의 외부스피커를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뭔데? 혹시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하는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고. 기동시간이 턱없이 짧아.]
“얼마?”
[10초.]
“뭐? 시동 걸면 끝인거야?”
[그런 거 같아. 이래서는 제대로 운용할 수 없어j.]
"그건 누구라도 알거야.“
준은 한숨을 쉬었다. 기껏 에피알게나스가 나서서 로버를 조종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나마나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래. 이렇게 된거 어쩔 수 없지. 일단 내려. 그냥 부수는 수밖에 없겠다.”
[알았어.]
에피알게나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버에게 명령을 내렸다. 탑승자와 의식을 공유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녀가 생각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기기가 작동했다.
덜컹.
하지만 곧바로 열려야할 로버의 흉갑이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게 걸린 듯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에피알게나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음... 아무래도 나 인질이 된 것 같아.]
“끙. 그러니까 진작 부수자니까.”
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인질로 삼아서 어떻게든 생존을 도모해 보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움직이지마. 움직이면 그녀의 목숨은 없다.]
“아주 별 짓을 다하는 군.”
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라이트세이버를 뽑아들었다. 로버가 움찔하며 슬쩍 물러섰다.
[모, 못들었나? 지금 그녀의 목숨은 내 손에 있다!]
“에피알게나스. 어때? 버틸 수 있겠어? 10초면 될 거 같은데.”
[문제없어.]
에피알게나스의 특수능력은 완전회복. 그 어떤 상처나 고통속에서도 자기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남의 상처까지도 전부 고쳐버리는 판에 로버가 저 안에서 무슨짓을 한다고 해서 그녀를 위해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는데?”
[자, 잠깐.]
로버는 당황하며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뭐, 마지막 말은 들어주지.”
[노, 농담이었다. 그녀는 풀어주겠다.]
치익-
로버의 앞가슴이 열리면서 에피알게나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이 이상한 짓 안했어?”
“아무것도. 그냥 허풍이었던 것 같아.”
“하긴 애초에 탑승자를 죽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을리가 없지.”
생각해보면 괜한 걱정이었다. 오리진이 탑승병기를 설계할때 일방적으로 로버의 개성에 휘둘리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10초라. 왜 그렇게 짧은거야?”
[그녀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뿐.]
대답은 로버에게서 나왔다. 준은 그 녀석을 잠시 쳐다보다가 에피알게나스가 앉은 탑승석에 뛰어올랐다.
[아앗? 안돼!]
“안되긴 뭐가 안 돼.”
“주, 준?”
에피알게나스를 자신의 앞으로 돌려놓고, 반쯤은 안은 듯한 자세로 탑승석에 앉은 준은 방아쇠를 닮은 콘솔에 손을 올렸다.
치익-
그러자 로버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녀석의 흉갑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어떻게?]
“이렇게 하면 되는 거로군.”
준이 콘솔을 당기며 움직이자 로버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휘청이지도 않았고 완벽히 중심을 유지한 상태였다.
[있을 수 없는 일. 어떻게 나를 움직일 수 있지?]
놀란 것은 에피알게나스도 마찬가지였다. 로버의 전투는 서로간에 신경링크가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녀석이 10대의 소녀를 원한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라, 그래야만 로버와의 정신적인 교감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로버를 움직이기는 커녕 오히려 신체에 심각한 부담을 줄 수가 있었다.
“준. 설명을.”
숨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던 그녀가 준을 향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조종석은 비교적 좁았고 두 사람이 같이 있다보니 필연적으로 몸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준은 그녀에게서 풍겨나오는 청량한 향에 잠시 아찔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있으면 로버를 움직일 수 있잖아. 조종만 내가 하면 되는거지.”
“로버의 기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아아. 괜찮아. 내 직업이 ‘기사’거든.”
“기사?”
“어떤 것이든 간에, 조종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움직일 수 있지. 로버라고 거기서 벗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델타의 능력?”
“그런셈이지.”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콘솔을 잡아당겼다.
쿠웅. 쿵.
“이야. 이제 살다살다 거대로봇이 움직이는 걸 다보네요.”
검둥이가 입을 열었다. 막스는 안타까운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타보고 싶다.”
로버를 움직이던 준은 살찍 미간을 찌푸렸다.
“음. 왜 네가 10초밖에 못 움직였는지 알겠다.”
“왜지?”
“엑조틱 에너지의 소모량이 엄청나.”
준은 엑조틱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그의 기술은 오로지 마나를 이용해 발동되며 그것은 정식기술이 아닌 항력전개를 사용할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버는 엑조틱에너지를 원천으로 움직이는 병기. 즉, 로버는 준의 경험치를 뽑아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소모량은 대략 10초에 천에 달했다. 1분에 6억에 달하는 돈을 허공에 뿌리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준은 눈물나게 빠져나가는 경험치를 보며 로버의 기동을 정지했다.
[더, 더럽혀졌어... 흐윽.]
“기분나쁜 소리 하지말고 뚜껑이나 열어. 나갈테니까.”
치익-
로버의 가슴이 열리며 조종석이 드러났다. 거의 준에게 안길듯이 앉아 있던 에피알게나스가 먼저 빠져나오고 그 뒤로 이어서 준이 걸어나왔다. 조종석에서 초록색의 인계광선이 뻗어나오고, 그 빛을 따라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바닥에 착지했다.
막스가 황급히 그 두사람에게 달려가 입을 열었다.
“로봇을 탄 소감은?”
“별로. 생각보다 경험치 소모량이 너무 많아.”
“경험치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건가?”
“엑조틱 에너지를 원료로 삼는 것 같아. 대략 1분에 6000정도.”
“끙. 나는 못타겠군.”
[태워 줄 생각도 없다만.]
로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에피알게나스가 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항상 말을 할때 사람의 눈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그녀가 그러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목전에 두고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준이라고 해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방금 느꼈던 그녀의 체취를 떠올리니 더욱 목이 탔다.
“일단 부수지는 않을 생각이야. 어쨌든간에 사용할 수는 있는 것 같고. 기왕이면 혼자서도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로버를 올려다보았다.
준의 직업 스킬인 ‘기승’은 모든 탈것을 조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니까 개념의 문제였다. 준의 능력은 ‘조종’에 한정되어 있다. 일단 뭐가되었던 조종가능한 상황이 되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실험 끝에 로버는 에피알게나스가 없다면 그런 상태로 접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의도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로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준은 일단 로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애초에 우주선도 집어넣었던 인벤토리였다. 로버 정도는 넣어도 충분히 공간이 남았다.
“잠깐. 이러면 퀘스트는 실패하는 건가?”
“그런 셈이지.”
“끄응...”
막스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로버를 부수려고 했는지 이제 안거냐?”
“그러게. 난 네가 왜 그러나 했지.”
“대신 던전은 귀속시킬 수 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던전핵을 부수지 않고 아이템으로 가져간다면 던전을 귀속시킬 수 있었다. 그 방식으로 라이트세이버를 얻었고, 이번에는 로버가 된 것이다.
준은 10만의 경험치를 더 들여 공장지대를 자신의 던전으로 귀속시켰다. 이미 폐허가 되긴 했지만 잘 복구하면 어쩌면 플랫폼에 있는 공장시설을 이쪽으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던전 안의 속성상, 같은 시간동안 훨씬 많은 생산품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