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9 ----------------------------------------------
지구
**********************
각 행성과 행성의 거리는 몇 광년 단위로 떨어져 있으니, 아무리 뛰어난 슈퍼솔저라도 행성간 여행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놈이 있다면 그것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애초에 슈퍼솔저의 조건이 이성을 말살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이 놈들 급하긴 한 모양이네. 셀럼이 저 놈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니.’
조금만 생각해봐도 셀럼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즉, ‘자비스’라고 불리는 슈퍼솔저들을 연방이 스스로 만들어 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준은 굳이 그 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미 셀럼은 구출해서 데리고 간 상황이고, 자신이 할일은 이곳의 거인들을 전부 처리하고 돈이나 받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놈들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나?”
“실시간으로 탐지하고 있지. 이걸 가져가도록 해.”
피셔가 손바닥만한 스마트 패널을 건넸다. 크기는 작지만 실시간으로 자비스들의 위치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일단 가장 가까운 곳은 저쪽의 도시에서 깽판을 치고 있는 두 녀석이었다.
피셔가 입을 열었다.
“저곳까지는 셔틀로 데려다주지.”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무슨...?”
“실컷 구경하라고. 이번 기회에 나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 하는 것도 목적이 아닌가?”
“뭐, 틀린말은 아니지.”
피셔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피어올랐다. 인위적인 웃음은 아니었다. 마치, 네가 알아서 어쩔 거냐는 듯한 느낌이었다. 준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네 까짓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우리 손을 벗어 날 순 없을 것이다.’
피셔 국장의 속마음은 이러했다. 실제로 거리가 먼 연합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이번 기회에 준의 능력을 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다면 요주 인물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준의 입장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한가지 걱정이라면 로렌스와 벨트레를 잡을 때 사용했던 능력이 외부로 유출되었다면 자신과 동일인이라는 것이 알려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하나 있던 목격자는 사망했고, 위성영상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없었을 테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엑손타워의 최상층이 통째로 날아가는 와중에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에너지검침기 같은게 있다면 그거야 말로 오파츠급 물건 일 것이다.
“그럼 일단 저 놈들 부터 처리하고 오지. 기다리고 있어도 좋고.”
준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능력은 순전히 염동력에 의한 것.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중력제어를 통한 능력이다. 이 두가지 능력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건 눈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조차도 반경 1미터 안에서만 기능하기 때문에 어떤 섬세한 측정기를 가져다 대어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콰아아아!
준의 몸이 순식간에 가속하더니 빠른 속도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를 향했다.
피셔국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런 속도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모두 동원해. 저 녀석이 어떤 능력을 사용하든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그의 근처에 있던 요원들이 빠르게 통신을 연결했다.
피셔국장은 자신의 스마트패널을 열었다. 거기엔 빠르게 하늘을 나는 준의 모습이 잡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나노로봇들에서 보내어지는 영상들이다.
속도로 준을 잡을 수는 없지만, 수없이 뿌려진 로봇들을 통해 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이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칼 하나라도 놓치지 않아야 해.”
로렌스와 벨트레는 이미 비공식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은 현재, 지구에서 준 알스버그를 제외하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가 어떻게 미국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 된 바 없다.
게다가 엑손타워에 나타난 인물은 둘. 둘 다 준 알스버그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한명은 스파일리 행성에 있으니까. 모든 증거들은 엑손타워를 습격한 인물이 그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피셔국장은 반대로 생각했다.
‘준 알스버그가 습격자라고 생각하면 모든 일이 쉽게 풀린다.’
로렌스와 벨트레를 죽인 것. 3개의 크리스탈 연구소가 털린 것. 그리고 슈퍼솔저중 유일하게 셀럼만 사라진 것.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준 알스버그라고 생각하면 이런 의문점들이 전부 사라진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에 대한 정보를 모을 시기다. 이미 그를 무시했던 대가는 받을 만큼 받았다.
-인근에서 나노로봇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파괴할 수 있어?
-저는 탐지만 할 뿐입니다.
-뭐. 됐다. 어차피 눈으로 봐봤자 알 수 있는 것도 없을 테니까.
준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피셔국장을 생각하며 웃음을 흘렸다.
‘진짜 대단한 놈들이라니까. 나노로봇이라니.’
나노로봇을 허공에 날리는 것만해도 대단한 기술이다. 거기에다 카메라까지 달아서 촬영을 한다고 하면 그건 이미 현세대의 기술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도 크리스탈을 통해서 얻게 된 오파츠급 기술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 보면 성상민 회장의 스케일은 실망스러울 정도지.’
기껏 연구소를 차렸지만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연구원 전원이 배신하고 무리어미를 통해서 각자도생하는 최악의 사태까지 일으켰다. 그것에 비하면 연방은 영리하다면 영리했다. 크리스탈 안에 파편처럼 담긴 정보를 해석해서 과학력의 도약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니까.
한참을 날아간 준은 자비스들의 위치에 가까워졌음을 느끼고 속도를 줄였다.
콰앙!
와르르!
고층 빌딩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실제로 대도시가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이쪽 도시는 빠른 대피를 통해서 인명피해를 최소화 하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 제법 보였다.
‘통제도 못할 녀석들을 멋대로 만들다니.’
슈퍼솔저는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물건이다. 제어하지 못하는 기술로 병기를 만들어 봤자 돌아오는 건 대재앙 뿐. 인류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물론 이 경우는 내 책임도 없는 건 아니니까.’
준은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다친 사람들을 던전에 넣었다. 나중에 회복하게 되면 되돌려 보낼 수 있도록 빈 던전에다가 집어 넣었다.
현재 준이 가지고 있는 던전의 숫자는 대략 서른개 가량 되었다. 그중에서 사용하고 있는 건 채 열개도 되지 않는다.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1번부터 4번까지 넘버링을 한 것이고, 나머지는 헌터양성프로그램을 돌릴때 쓰는 것들이다.
그외에는 그냥 빈 던전이었다. 넘버링도 되어있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라 총 몇개 인지조차 헤아려 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남는 던전에 사람들을 밀어 넣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콰앙!
얼추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밀어 넣었지만 순식간에 백여 명이 들어가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탐색하기 위해서 시스템의 도움을 좀 받았다.
3D델타맵을 이용해서 생존자 수색을 했고, 건물 밑에 깔린 사람 들 중 살아있는 이들은 염동력을 이용해 구조했다. 염동력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깔려있는 사람들은 그냥 라이트세이버로 파고들어가서 꺼냈다.
하지만 준 혼자서 할 수 있는 구조작업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바로 이종보행로봇 A-10이었다. 엘라는 ‘프랜’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델타 내부에서는 아영이라고 불리며 사랑을 받는 인공지능 로봇이었다.
엘라의 로봇제작술을 카피해서 가지고 있던 준이 대량으로 생산해서 보유하고 있는 초기모델이기도 했다.
착착착착.
인벤토리에서 백여기의 A-10들이 쏟아져 나왔다. 준은 녀석들에게 생존자들을 안전하게 옮기도록 명령했다.
백여대의 ‘아영’이들이 흩어지고 나서야 준은 여전히 파괴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자비스들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콰앙! 쩌적!
쿵!
놈들은 묵묵하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부수면서 이동하고 있었다. 쉬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무슨 철거장비냐...’
준은 일단 열심히 해체작업을 하고 있는 두 명의 자비스들 앞에 내려앉았다.
일단 처음 느낀 감상은 크다는 것이었다.
물론 100미터짜리 괴물과도 상대해 본 준이다. 3미터짜리 거인이라고 해도 외도라고 생각해보면 그냥 괴물 중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였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또 느낌이 달랐다.
외모는 그냥 인간과 동일했다. 좀 다른 점이라고 하면 온몸의 근육이 터질 것 처럼 부풀어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도 인간성을 넘어설 정도로 기괴하진 않았다.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정말로 키가 좀 큰 인간 정도로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저 놈들이 벌이고 있는 파괴행위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수준.
일단 준은 시미와 검둥이를 던전에서 끄집어내었다.
나오자마자 시미가 투덜거렸다.
“푸하. 진짜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네.”
“미안. 깜빡 잊고 있었다.”
“형님이라면 그럴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검둥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엑손타워에 가면서 이 녀석들을 던전에다가 집어넣었는데 격렬한 전투와중에 이 녀석들의 존재를 잠시 잊은 것이다.
솔직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왜 연락 안했냐? 통신 걸면 되는데.”
“저는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형님.”
“언제까지 우릴 잊어먹고 있나 궁금해서 버텨봤어요.”
“그러냐...”
엄청 쓸데없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건 간에 그만큼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엄청 삐친 표정으로 준을 노려보고 있던 시미가 돌연 자비스들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것들은 뭐에요? 엄청 커요?”
“아. 자비스라고. 좀 센 녀석들이야. 가급적이면 너희들은 싸우지 말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어.”
“와. 진짜 좀 후덜덜 하긴 해요.”
“뭐, 너희들은 초록색 외도니까. 아마 녀석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히 크게 느껴지겠지.”
“그런데 저것들 외도로 보이진 않습니다만.”
“원래 인간인데. 개조를 시켰나보더라고. 그런데 꼭 기운이 외도에 가까워. 인간이라고 보긴 힘들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 놈들은 준 일행을 향해 별다른 적대행위를 하고 있진 않았다. 다만 놈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치우고 있을뿐이다. 하지만 준이 위협적인 행위를 한다면 곧바로 공격을 해올 거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일단 물러서 있어. 놈들의 능력을 시험해 볼 생각이니까.”
“넵. 형님.”
“네에~”
시미와 검둥이가 멀찍이 떨어졌다. 적당히 전투를 하다가 기회를 봐서 두 녀석을 써먹을 생각이다. 시미의 음파공격은 좁은 지역에 한정할 경우 파란색 외도에게도 먹힌다. 검둥이는 이 경우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되지만, 시미를 보호하는 데는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