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듀스 나노머신-69화 (69/124)

< 인맥이 좋으시네요 (2) >

MC김경규가 던진 장선화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모닥불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현장 분위기가 금세 후끈 달아오르다 못해 활활 타올랐다. MC들은 물론, 게스트인 오달민과 김강현이 경쟁적으로 장선화의 이름을 외치며, 분위기를 만드는 데 동조한다.

내 이름도 몰라서 리허설 때 몇 번이나 물어본 김경규가 장선화를 알 리가 없을 테고, 분명 담당 작가가 소스를 던져준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담당 작가가 흡족한 얼굴로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만들어놨는데, 뺄 수는 없지.

“알았어요. 저 근데, 장선화씨랑 별로 안 친해요. 개인적으로 문자나 톡도 한 번 보내본 적 없어요. 제 이름 뜨면 그분이 일부러 안 받으실 지도 몰라요.”

편집을 어떤 식으로 해놓을지 모르니 일단 약부터 쳐놨다.

괜히 내가 친분과시하려고 장선화랑 전화연결을 했다가 받지도 않으면 나만 망신이잖아.

내가 농담 섞인 웃음을 짓자, 김경규가 음흉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도리질을 한다.

“그건 또 모르는 거죠. 오히려 최강민씨한테 먼저 연락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김경규의 말을 임현경이 재빨리 받는다.

“어휴, 저 같으면 최강민씨 전화번호 받으면 그날 설레서 잠 못 자요. 그러다가 전화 오면? 바로 뛰쳐나가죠.”

“만약 그곳이 제주도라면요?”

“제주도가 문제에요? 헤엄쳐서라도 가야죠.”

누가 MC들 아니랄까봐 금세 쿵짝이 맞아서는 나를 아주 갖고 논다. 장선화라는 이름이 나온 다음부터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관계자들의 얼굴도 활짝 펴졌다.

그래, 까짓것 시청률을 위해서 내 이미지 조금 갈리는 정도쯤이야.

이젠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흘러갈지.

내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 목록을 찾아 장선화 번호를 누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걸 보고 있던 김경규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어어? 지금 전화거시는 거예요? 장선화씨에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조용.’을 외치며 다들 인중위로 검지를 가져다댄다.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지면서 카메라는 물론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받지 마라. 받지 마라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는 초조하게 신호음 가는 걸 계속 들었다. 한 열 번쯤 기다려도 신호음만 가고, 연결이 되지 않자 마음이 오히려 평온해진다.

휴, 다행이다. 안 받네.

“어, 안 받으시는데요?”

“아······.”

탄식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다.

MC김경규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스케치북이 적혀 있는 다음 이름을 보며 호명한다.

“그러면 김준호씨는요?”

“어··· 잠깐만요. 전화 걸어 볼게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대수냐? 차라리 이쪽은 남자라서 좀 편하다 싶어 내가 망설임 없이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김준호씨 매니저입니다.

아, 매니저였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저 최강민이라고 해요. 같이 드라마 촬영하고 있는.”

잠깐 동안의 침묵 후 리액션이 통화 너머로 들려온다.

-최강민씨? 오오, 웬일이에요. 저 김준호씨 매니저에요. 촬영장에서 몇 번 인사드렸죠?

“네, 잘 지내셨어요?”

-지금 준호 촬영이 있어서 촬영 중이에요. 전화 받기는 조금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제게 말씀해주시면 전해줄게요. 혹시 급한 일이세요?

“아, 아니에요. 그냥 뭐하고 있나 싶어서 전화해 봤어요. 시간되면 그냥 저녁 식사나 같이 할까 해서요.”

-식사요? 아, 그러시구나. 촬영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분위기니까 제가 준호 촬영 끝나면 전화 왔었다고 말할게요. 그래도 괜찮으시죠?

“네네, 수고하세요. 실장님.”

전화를 끊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나를 보던 시선들이 축 늘어져있다. 출연자들도, 촬영현장을 지켜보던 스텝들도 모두 표정이 한결 같다.

탄산 가득한 콜라인줄 알고, 원샷을 했는데, 김빠진 콜라를 마신 그런 표정. 전화 통화라도 연결 됐어야 조미료 좀 뿌려서 홍보 기사로라도 써먹었을 텐데, 통화조차도 불발이 됐으니 그러는 거겠지.

MC김경규가 화제를 돌리며, 상황을 수습한다.

“전화 연결이 안돼서 아쉽긴 하네요.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잠깐만 기다려보도록 할까요? 장선화씨가 부재중 전화 확인하고, 전화를 걸 수도 있는 일이고, 김준호씨도 촬영 끝난 후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까.”

그의 시선이 내 옆에 앉아 있는 개그맨 오달민에게로 향했다.

“그러면 막간을 이용해서 오달민의 친구 분과 전화 연결을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까요?”

“형님! 막간이라뇨! 저도 게스트로 나온 건데, 좀 챙겨주고 그러세요. 혹시 또 압니까? 제가 인맥이 어마어마할지?”

평소 친분이 있던 오달민이 김경규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김경규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친다.

“내가 너 인맥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어떻게 그걸 챙겨. 맨날 같이 다니는 삼총사 성민이나 정수 이런 애들 부를 거잖아. 안 그래?”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간다.

움찔한 오달민이 비수를 맞고, 그대로 찌그러진다. 여지없이 정곡을 찔렀나보다.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는 거보니까.

그리고 잠시 후, 그 누구의 기대도 없이 개그맨 오달민의 전화통화 연결이 시도됐다.

*

주위가 온통 컴컴한 저녁 9시경.

15층짜리 빌딩아래 주차장.

“으, 기 빨린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촬영한 거야.”

진이 다 빠진 듯한 얼굴로 서은채가 승합차 위로 올랐다.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최형식 실장이 재빨리 운전석으로 올라가 말을 건넸다.

“은채야 오늘 진짜 수고했어. 송 디자이너도 되게 좋아하더라. 평소에 관리를 잘했는지 옷 핏이 예술이라면서. 내년까지도 별 무리 없이 계약 연장할 거 같던데?”

“만족했다니 다행이네. 여기 송 디자이너님은 좀 까다로워서 나도 좀 어렵더라고요.”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나라 20대 연예인들 중에서 A급들 중에 너만큼 얼굴 되고, 몸매 좋은 연예인이 누가 있어? 암만 찾아봐도 없지. 그러니까 Y브랜드에서 너를 모델로 기용하지. 안 그래?”

그 말을 들은 서은채가 피식하고 웃는다.

“비행기는 됐네요. 그보다 오늘 스케줄은 이제 다 끝난 거죠?”

“응, 피곤하지? 얼른 돌아가서 쉬자.”

“으, 배고파.”

서은채가 기지개를 쭉 피더니, 미끄러지듯 쿠션 위로 축 늘어지며 힘없이 중얼거린다.

“오늘 패션 화보 찍는다고 해서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아까부터 배에서 계속 소리나요.”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배를 콕콕 찌른다.

그 익살스러운 모습에 최형식 실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우선 밥부터 먹을까? 화보 찍느라 며칠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까.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것 좀 먹자. 네가 좋아하는 초밥 먹으러 갈까? 아니면 고기 먹을래?”

차에 시동을 걸자 부드러운 엔진 음 소리와 함께 스피커를 통해 여자 라디오MC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늘도 하루 수고하셨고요. 활력 있는 퇴근을 위해 요즘 한참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곡을 띄워드릴게요. 플레어의 아임 더 베스트를 들으시겠습니다.

그걸 듣고 있던 최형식 실장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 은채 힘내라고 최애곡이 딱 나오네. 그런데 이 노래는 그렇게 들었어도 어쩜 이렇게 안 질리지? 노래 하나는 진짜 기가 막히게 뽑았다니까.”

그러더니 고개를 슬쩍 뒤로 젖히며, 서은채에게 물었다.

“은채 너도 솔로 음반 내고 싶어 했잖아. 언제 한번 강민이한테 노래 한 곡만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볼까?”

서은채는 거의 반쯤은 누운 자세로 승합차 천장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별 반응이 없자 최형식 실장이 다시 시선을 앞으로 두며, 사이드브레이크를 내리고,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메뉴는 선택했어? 초밥 별로 안 땡기면, 한우 먹으러 갈까? 가는 길에 맛있게 하는 집 아는데. 아참······.”

정면을 주시하면서 말을 하는 최형식 실장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턱을 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강민이도 고기 사줘야하는 구나. 근데 뭐, 먹을래 은채야······ 아씨, 깜짝이야!”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합류할 때쯤 메뉴선택을 물어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던 최형식 실장은 하마터면 욕을 할 뻔 했다.

뭔가 싶어 봤더니 서은채가 운전석과 보조석 사이에 고개를 삐죽 내밀고, 눈을 껌뻑거리고 있다.

“놀랐잖아!”

“뭐 그런 걸로 놀래요. 다 큰 남자가.”

가슴을 쓸어내린 최형식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물었다.

“왜!?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오빠, 오빠. 최강민씨한테 한우 언제 사주려고요?”

그건 또 언제 들었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짓던 서은채가 아니다. 질문을 던진 눈이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반짝반짝하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뜬금없이 타이밍이라 힐끔 쳐다봤는데, 서은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진지하게 대답을 해야하는 타이밍인가 싶어서, 최형식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음, 시간 나면 사줘야지. 그래도 약속한 거니까.”

“에이, 오빠 나쁘다.”

갑자기 서은채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응? 뭐가?”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요. 사람은 언행일치가 되어야 한댔어요. 고기를 사준다고 했으면 얼른 사줘야죠. 최강민씨가 무슨 죄예요? 이제나 저제나 언제사줄까 기다리고만 있을 텐데. 안 그래요? 나 같으면 자려고 누웠는데도 생각나겠다. 고기 언제 사줄까

싶어서.”

이건 또 무슨 사차원적인 생각이냐.

진짜 저 조그만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에이, 설마 그럴 것까지야······. 일봐주는 차 실장도 먹는 거에 돈 아끼고 그러는 스타일은 아니야. 알아서 잘 챙겨줄걸?”

“분명히 생각날 거예요. 전 그러거든요!”

단호하게 선을 긋는데, 아니라고 한다면 싸울 기세다.

표정이 전투적이랄까.

평소에 안 이러던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는데, 뒷말이 이어진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오늘 따라 한우가 엄청 땡기는데, 혹시 최강민씨 시간되면 같이 불러서 먹도록 할까요?”

대답을 하는 데까지 한 5초쯤 걸렸다.

이게 무슨 의도인가 싶어서.

그런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서은채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잘 닦아놓은 유리구슬 마냥. 서은채 매니저 5년차 생활로 미루어보았을 때 이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싫다고 하면 최소 일주일, 길게는 2,3주 동안은 들들 볶일게 뻔했다.

“엄청 좋은 생각이네. 그러면 그렇게 할까?”

듣고자하는 대답을 들은 서은채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강조하듯 확실하게 못 박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한우가 엄청 땡기는 날이고, 오빠 약속도 지킬겸 겸사겸사 부르는 거니까요. 그걸 명확히 해주셔야 해요. 최강민씨한테도. 절대, 절대, 절대로 오해가 없게끔요. 아셨죠?”

“암. 당연하지.”

*

오달민이 통화중이다. 상대는 그와 단짝 친구인 개그맨 추성민.

어마어마한 인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수표 같은 발언은 역시나 허풍이었다.

반전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MC들과 게스트,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작가들의 표정도 별다른 기대감 없는 표정으로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 성민아. 여기 압구정동 J커피숍인데. 와줄 수 있어?”

-당연하지. 30분이면 가. 30분이면.

이미 핸드폰과 촬영장스피커와 연결을 해두어서 통화 내용이 고스란히 다 들린다.

앞에 서 있던 작가가 스케치북에 미션이라는 단어를 적어 넣는다.

MC보다도 더 스케치북에 시선을 주고 있던 오달민이 알았다는 듯이 사인을 보내며, 핸드폰에 대고 묻는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갑자기 씨앗호떡이 먹고 싶은데, 그거 사다줄 수 있어?”

-사먹는 건 맛없지. 내가 만들어서 가지고 갈게. 무슨 씨앗을 넣어줄까? 호박씨? 민들레씨? 아니면 ‘아이씨’를 넣어줄까?

그러더니 낄낄거리며 웃는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어째 된 게 오달민보다도 더 썰렁하다.

오달민의 눈동자가 주위 반응을 체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모두가 동상이 돼서 눈만 껌뻑거리고 있자 오달민이 빨리 오라는 말과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뭐야!? 이미 촬영하는 거 다 아는 눈친데? 개그도 미리 짜놓은 거 아니야? 냄새가 나는데?”

MC김경규가 의심섞인 눈초리로 오달민을 쳐다본다.

“어······.”

잠시 떠듬거리던 오달민이 이실직고를 했다.

“오밤친에 제가 나간다는 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더라고요. 며칠 전에 저한테 와서는 자기 꼭 불러달라고, 어찌나 사정을 하든지. 오늘은 준비한 거 많다고 했으니까 재미있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아니나 다를까 오달민의 발언에 다들 표정이 뚱하다.

MC들은 또 맨날 보던 재미없는 그림을 보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PD와 작가들은 오달민 분량 편집점을 어떻게 잡아야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 보인다.

작가 한명이 PD에게 다가가더니 아주 작게 소곤거렸다.

“오늘 분량 어떻게 하죠? 진짜 써먹을 거 많지 않겠는데요?”

PD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뭐, 어떻게든 있는 거라도 살려봐야지. 최강민씨 아까 춤추고 노래한 거 최대한 길게 붙여서 내보내고, 장선화씨랑 김준호씨랑 통화한 것도 양해구해보고, 써먹을 수 있으면 그거라도 어떻게······.”

그때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핸드폰 하나가 진동을 했다.

“어? 최강민씨 핸드폰인거 같은데요?”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 인맥이 좋으시네요 (2) > 끝

ⓒ 윤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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