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춘을 즐겨라 (4) (수정) >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뭔가 싶어 봤더니, 나 피디가 꿍꿍이 있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까부터 계속 스텝들하고 모여 쑥떡거리더니, 뭔가 재미있는 걸 생각해냈나 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나 피디가 다가오는 걸 보고, 내가 김태현의 어깨를 두들기며 떨어졌다.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찍었네요. 스위트룸 숙박권이라니. 아마 방송에 나가면 시청자들 빵 터질걸요?”
“그래요?”
“알아보니까 여기 렛다트 호텔 스위트룸 하루 묶는데, 320만원이래요. 원래는 아무한테나 빌려주는 곳은 아니고, 국내외 귀빈전용으로 사용되는 스위트룸인데, 특별히 이벤트 같은 것을 할 때만 오픈한다고 하네요. 그러니 대박인거죠.”
살짝 주름진 나 피디의 얼굴에는 연신 웃음이 가득했다.
“청춘들, 두바이 스위트룸 이벤트에 당첨되다! 홍보용 티저 만들어서 뿌리면, 떡밥용으로 장난 아닐 것 같은데요. 아마 반응 엄청날걸요?”
“다행이네요. 프로그램에 그나마 도움이 돼서요. 혹시나 계획해놓은 일정 펑크 내는 거 아닌 가 내심 걱정했는데.”
“에이, 이런 게 리얼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최강민씨. 제가 한 가지 제안드릴 게 있는데요.”
살살 눈웃음을 치던 나피디가 드디어 말을 걸어온 용건을 털어놨다.
“제안이요?”
“원래는 첫날에 와서 숙소도 좀 찾고, 이리저리 헤매면서 고생하는 장면을 찍으려고 했는데요. 그런 장면들이 없으니 뭐라도 좀 재미있는 장면을 찍어야하지 않겠어요? 스위트룸 감상도 좋지만, 그래도 예능인데 뭔가 예능적인 재미도 있어야죠.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원래는 내일부터 게임을 하려고 했는데, 하루 당겨서 게임을 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어때요?”
게임이라.
어차피 나가면 돈들 게 뻔하고, 이런 곳에서 묶는 경험도 흔치 않으니 다들 호텔 안에서 죽치고 있을 게 뻔했다.
멤버들이 뭐하나 슬쩍 쳐다봤다.
수영, 사우나를 하는 것도 벌써 흥미가 떨어졌는지, 체력이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지쳐하는 기색도 보이고.
호텔 내부 풍경이야 계속해서 배경화면처럼 나올 테니, 뭔가 거기에 플러스요소를 더해줄 오락적인 요소거리가 필요한가 보다.
“음. 얘들아. 잠깐만 이리로 와봐.”
잠시 고민한 내가 멤버들에게 손짓하자 그렇지 않아도 뭐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 관심을 보이던 멤버들이 쪼르르 달려온다.
“왜요, 형?”
“피디님이 제안하실 게 있대.”
호기심 섞인 눈빛이 한대 섞여 나 피디에게로 향했다.
나 피디가 헛기침을 한번 토해내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좀 받으세요.”
나 피디가 기포 나는 녹색 병 다섯 개를 내밀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음료다 싶었는데, 꽃미남 청춘 저번시즌에서 출연자들이 주구장창 마시던 그 제품이었다.
“저희 PPL 많이 들어가는 거 아시죠? 이 제품 첫 방송에 마시는 장면 노출시켜주기로 했거든요. 지금부터 편집점 잡고, 시작할 테니 이거 한 모금씩 마시면서 다시 질문해주시면 안될까요? 원래는 사막에서 나오면 갈증 날 거 아니에요? 그때 딱 마시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했는데, 여러분들이 호텔로 그냥 도망가는 바람에. 그걸 못 찍었어요.”
“아······.”
“좀 부탁드릴게요. 저희 쪽에서는 제일 큰 투자회사라서.”
“네네. 해야 하는 거라면 당연히 해야죠.”
“어휴, 감사해요.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네.”
세수도 못해서 개기름에 쩔어 있는 나 피디의 얼굴에 웃음이 매달린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웃음이 났다.
방송국에서 권위 있는 피디들만 봐서 그런지 그런 모습들이 싫지가 않다.
출연자들. 그것도 우리처럼 새파랗게 어린 아이돌한테 저렇게 앓는 소리를 하며 부탁 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확실히 출연자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다른 권위 있는 피디와는 행동부터가 다르다. 마치 동네 옆집 형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방송초보, 예능초보들은 항상 갑과 을관계처럼 방송국 피디들 앞에서는 잘 보이기 위해 눈치를 보며, 굽신거릴 때가 많은데, 나피디 앞에서는 그런 게 없다보니, 카메라 앞에서 좀 더 자연스러워질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리얼 버라이어티의 특성상 대박
시청률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되는 거고.
이래서 다들 그렇게 나 피디, 나 피디 하는 가 보다.
잠시 동안 멈춰진 촬영이 재개됐다. 우리는 시치미를 딱 떼고, 탄산수를 한 모금씩 마시며, 내려놓았다.
“크, 시원하다.”
추임새까지 넣어줬더니 아주 나 피디의 잇몸이 봄 맞은 개나리처럼 만개했다.
“그래서 피디님, 저희는 이제 뭘 하면 되는데요?”
내 천연덕스러운 질문에 나 피디가 대꾸했다.
“음. 다트게임이나 한판 할까요?”
“다트요?”
분명 우리가 아는 그냥 시시한 다트게임은 아니겠지. 이건 나 피디표 예능이니까. 무슨 꿍꿍이를 숨겨놨을지 보기 전까지는 예측이 안 된다.
“다트판 가지고 와주세요.”
나 피디의 말에 스텝 한 명이 들고 들어온 노란색 바구니를 뒤적거리다가 사람 지름 40cm정도 되는 둥그스름한 스티로폼 판을 가지고 왔다.
“저희 제작진측이 사전조사를 좀 했는데, 이곳 두바이에서 할 만한 것들이 무척이나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칸마다 적어 놓았는데, 다트 핀을 던져서 해당하는 칸을 맞추시면 그 칸 안에 적혀 있는 일정을 소화하시면 되는 거예요. 어
때요. 재미있겠죠? 여기에 오는 관광객들이 투어상품으로 많이들 이용하는 것들인데··· 아, 물론 경비에 대한 부분은 저희 쪽에서 전액 부담을 할 예정이에요. 여러분들은 부담 없이 즐기시기만 하면 돼요.”
헌데, 다트판 칸의 크기가 다양하다.
엄청나게 큰 지분. 거의 40%가량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칸이 있어서 봤더니, 스카이 다이빙이라고 쓰여 있다.
‘팜쥬메라 위로 떨어지는 뷰가 굉장함’
설명까지 있네.
그 다음으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번지점프다.
이것도 크기가 만만치 않다. 전체지분의 30%쯤 차지하고 있다.
설마 주거 구조물 중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번지 점프대가 있다는 그 빌딩 위에서 뛰어내리라는 건 아니겠지?
이거 두 가지만 해도 전체지분의 70%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둘 중에 하나는 걸릴 확률이 70&에 해당한다는 거지.
이런 사악한.
갑자기 목덜미가 뻐근해지려고 한다. 손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며, 그 아래로 줄줄이 달려 있는 걸 확인했다.
뜨거운 공기가 가득 채워진 대형 열기구에 올라타서 사막을 약 1시간동안 횡단하는 사막 열기구 체험, 지상 50m공중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할 수 있는 디너 인 더 스카이(dinner in the sky), 두바이 크릭에서 아브라 타기, 매사냥, 사파리 낙타 체험등.
모두가 지분을 한 개씩 차지하고 있다.
이것들은 딱히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일부러 돈을 내고 하는 투어 상품들이니까.
헌데, 문제는 전체크기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스카이다이빙? 번지점프?
돈을 준대도 하기 싫다.
미쳤어? 이걸 뭣 하러 해?
애들 표정을 보니,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스카이다이빙을 문구를 본 순간부터 얼굴이 완전히 얼어붙어 있다.
“이건 강요는 아니에요. 하고 싶으면 하셔도 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셔도 되요.”
진짜? 아니, 진짜요?
나 피디의 말에 멤버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거는 생존이 달린 문제라서.
“정말요? 정말 안 해도 되는 거죠?”
“별다른 불이익은 없는 거죠? 그쵸?”
“어, 그런데, 혹시 다른 건 못 보셨어요? 저걸 보면 하고 싶어질 텐데요?”
“뭘요?”
나 피디가 검지를 들어, 다트판 한 부분을 가리켰다. 뭔가 싶어 봤더니, 스카이다이빙 칸 끄트머리에 새끼 손톱만한 스티커가 붙어 있다. 차 모양의 스티커가.
어디서 묻어왔나 싶어서 말 안한 거였는데, 이게 뭐지?
“만약에 다트 핀으로 저 스티커를 맞추면, 고급 세단 승용차를 선물로 드릴게요.”
“네?”
“진짜 차를 선물로 드린다고요. 새 차로다가. 어때요? 이제는 좀 할 생각이 들어요?”
*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멤버들을 쳐다봤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잘못들은 게 아니구나.
진짜로 차를 준다고? 그것도 새 차를?
“농담이시죠?”
나 피디가 강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 같은 얼굴로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이에요. 저 방송하면서 거짓말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에요. 단, 저 다트핀으로 저 스티커를 맞췄을 경우에요.”
“그러다가 진짜 맞추면 어떻게 하려고요.”
“진짜 드리면 되는 거죠.”
헐.
설마 저 손톱만한 곳을 맞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일단 예능적인 재미를 놓고 한번 질러보는 것 같은데······.
애들 반응을 보니,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해도 좋다는 뜻이다.
사실 스티커를 붙여놓지 않았다 하더라도, 멤버들이라면 아마도 별 불만 없이 했을 거다. 대부분 시키는 건 열심히 하려는 애들이니까.
좋다. 까짓 거, 기꺼이 물고기가 돼 주지.
“할게요.”
‘나피디가 걸려들었어.’ 하는 표정을 짓는다.
“만약에 다트 판에 안 꽂히면 다시 던지는 걸로 하는 거예요. 대신 꽂히면 무르기 없어요. 뭐든지 간에 꼭 하셔야 해요. 아셨죠?”
“네. 피디님이나 약속 꼭 지키세요.”
테이프로 바닥에 선을 표시하고, 모든 스태프가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내가 다트 핀을 잡았다. 멤버들, 스태프들 누구 할 것 없이 모든 시선이 내 손가락에 쏠려있다. 긴장 되겠지. 이 한 번에 내일 지옥이냐 천당이냐를 경험하게 될 테니까.
“제발제발, 다이빙이랑 번지점프만은 안 되게 해주세요. 저 고소 공포증 있단 말이에요!”
장요한이 거의 기도하는 두 손을 뽀개며 중얼거린다.
애들도 곧 닥쳐올 자신의 미래에 긴장되는지 지들끼리 손을 꽉 붙들어 매고 있다.
“자, 다트 판 돌리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다트 판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드디어 내 손에서 다트 핀이 던져졌다.
팍.
“어어어어······.”
서서히 멈춰지는 다트판을 보며, 누군가가 지른 소리다. 다트판의 회전이 거의 멈춰갈 무렵 여기저기에서 헉,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피디님······.”
다트 판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자작가의 나지막한 음성에 뭔가 불안함을 느낀 나 피디가 황급히 다트 판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한 나 피디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마, 말도 안 돼!”
“왜요, 왜!?”
멤버들이 앞을 다투어 다트 판 결과를 확인하고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대박!”
“말도 안 돼, 진짜!”
반응이 양쪽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좋아하는 쪽과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쪽.
물론 후자는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이다. 모두가 말이 없어졌다. 특히나 나 피디의 표정이 볼만했다. 표정이 거의 나라 잃은 백성이다.
“피디님······. 이거 어떻게 하실 거예요?”
“······.”
“피디님?”
“······.”
심장마비라도 온 듯 한참동안 서 있던 나 피디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깊은 한숨소리에 땅이 꺼질 지경이다. 처참하게 구겨진 얼굴을 손으로 문대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이다.
< 청춘을 즐겨라 (4) (수정)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