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직 비디오 (1) >
플레어 뮤비 여주인공은 서은채로 대체하기로 최종 결정됐다. 그리고 여주인공 컨셉에 대해서 다시 논의가 오고 갔다. 역중 나이를 스무 살에서 고3 수험생으로 줄이기로 한 것.
기본적인 여주인공의 컨셉은 청순, 순수함을 지닌 소녀 같은 이미지였지만 서은채와 장선화의 이미지는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그래서 메이크업, 의상, 머리카락 색과 장신구등. 스타일을 완전히 새롭게 구상해야만 했다.
얼핏 보면 간단한 문제 같아 보이지만 장선화, 서은채와 같은 탑 여배우는 광고, 뮤비, 화보 촬영등. 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협찬을 받기에, 협찬사와 그것을 조율하는 문제도 같이 진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촬영 당일 날.
“언니언니. 나 오늘 어때요? 화장이 너무 약한 거 아니에요? 입술이 너무 창백해 보이는 립스틱 좀 덧칠할까요?”
손거울을 보던 서은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차안에서 옆에 앉은 코디네이터를 붙잡고 물었다.
“어이구, 너야 뭐, 세수하고 막 나와도 굴욕 없는 민낯인데 별 걱정을 다하네. 지금 아주 예뻐. 누가 보면 조금 성숙한 여고생 같아. 이대로 교복입고 학교가면 전국에 있는 남학생들 벌떼 같이 쫓아올걸?”
“진짜요?”
최형식 실장도 운전석에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암. 당연한 소리를.”
검은색 밴이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서서히 정차했다. 문이 열리고, 길고 새하얀 다리가 비쭉 튀어나오더니, 베이지색이 맴도는 교복을 입은 서은채가 검은색 벤에서 천천히 내렸다.
이틀 전과는 달리 머리색은 갈색에서 윤기가 맴도는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메이크업도 한 듯 안한 듯 보이는 투명 메이크업이다. 액세서리는 모두 뺀 채 단화만을 착용했다. 얼핏 보면 마치 고등학생 같은 모습이다.
오기 전 머리에 엘라스틴으로 잔뜩 발랐는지, 머릿결이 찰랑찰랑하다 못해 반들반들 거린다. 파리가 앉았다가는 그대로 미끄러질 판국이다.
서은채를 본 스텝들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와, 은채씨. 이제 봤더니 완전 여신이네. 아니, 원래부터 여신이긴 했는데, 오늘은 더더욱 여신 같다고. 오늘 촬영 잘 부탁해.”
“감사합니다. 감독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학창시절에 교복 모델을 했다고 하더니, 교복핏 감이 아주 끝내주는데? 은채씨, 요즘 운동 열심히 한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몸매 라인이 아주 제대로 살았는데?”
“감사합니다. 최은미 작가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생기발랄함과 청순함.
이제 막 물오르기 시작한 여성스러움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이뤘다. 너무 오랜만에 교복을 입은 탓에 위축돼 있던 서은채는 스텝들의 칭찬에 자신감이 한층 치솟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멤버들과 모여 앉아 컨셉표를 읽고 있는 최강민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곧장 걸음을 내딛었다.
*
“강민씨!”
서은채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모델처럼 슬림하고, 군살 하나 보이지 않는 늘씬한 몸매,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다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피부는 어쩜 저리 모공하나 보이지 않고, 하얗고 깨끗한지······.
교복이 아니라 누더기를 입혀놔도 예쁠 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꽃 거지처럼 보이겠지.
그와 같은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있는 데 서은채가 그 기다란 다리로 성큼 다가와 멈춰 섰다.
“우리 되게 오랜만이죠?”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구두 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든다. 그리고는 시선을 아래로 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한다. 잠시 흔들거리는 머리 결에서 기분 좋은 샴푸 냄새가 풍겨왔다.
“그러네요. 본다본다 하면서 서로 스케줄이 바빠서.”
“하고 있는 방송은 잘보고 있어요. 꽃 미남 청춘 엄청 재미있던데요?”
“고마워요. 은채씨 드라마도 잘 보고 있습니다.”
“칫, 거짓말. 바빠서 티비 볼 시간도 없으면서.”
예의상 대꾸했는데, 바로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음······.
영삼아?
침을 살짝 묻히고, 입술을 달싹였다.
“음. 저번 화에서 준수가 어머니랑 말다툼을 하고, 집에서 뛰쳐나갔는데, 은채씨가 달래준다고, 준수 데리고 분식점에 데리고 가서 떡볶이를 사 먹였잖아요. 순대랑 튀김도 같이. 맞죠?”
“어······?”
“극중에서 입고 나온 옷이 분홍색 원피스. 그 옷 되게 잘 어울리던데, 협찬 받은 건가요?”
이쯤 되자 영삼이가 말하고 있는 건지, 내가 말하고 있는지 나도 헷갈린다. 물론 내용은 잘 모른다. 영삼이가 나에게 해주는 주입식 교육의 효과다.
그런데 예상보다 반응이 격하다.
정말로. 정말로 깜짝 놀란 표정이다.
“저 거짓말하는 그런 남자 아닙니다.”
천연덕스럽게 말을 덧붙였더니 서은채의 눈에 기쁨의 표정이 차오른다.
그 뒤로 한참동안이나 수다가 오고갔다. 꽃 미남 청춘의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곳이 인상적이었는지, 여행지에 관한 물음등. 나도 두바이에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꼭 가보고 싶다등등. 그럴 때마다 나도 적절한 말을 섞어 대꾸를 하며, 맞장구를 쳤다.
오밤친 이후 간간히 문자나 톡으로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만남이 뜸해서인지 오늘 보면 조금 어색할 것 같았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리만치 편한 기분이다.
“자자, 배우 분들 다 오셨으니, 곧장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촬영 감독의 외침에 흩어져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댄스팀과 출연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감독은 1집 때 아임 더 베스트를 찍어준 오명환 촬영 감독이었다.
작년에 한 번 호흡을 맞춰봐서 그런지, 멤버들이 잘 받는 카메라 각도나 구도 등을 단번에 짚어내서 좋았다. 무엇보다 서로의 스타일을 잘 아는 까닭에 진행이 시원시원하게 흘러갔다.
“와······.”
누군가 연기를 하고 있는 서은채의 모습을 보고 감탄성을 내뱉었다.
애잔하고 슬픈 표정으로 서은채가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별똥별 하나가 떨어진다.
아, 물론 별똥별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그림이다. 나중에 CG로 넣어준다고 했으니까.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기도하는 자세로.
확실히 여배우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가만히 눈을 감고,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하는데도, 자세 하나, 손짓 하나에도 여배우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 달까. 꼭 현세로 내려온 여신이 교복을 입고 있다면 꼭 저러한 모습일거다.
게다가 분명히 컨셉은 청순, 순수인데, 눈을 감은 모습에서 묘한 고혹미가 느껴졌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촬영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
“좋아요. 컷! 이야, 역시 배우라서 그런지 한 번 이야기해주니까 찰떡 같이 알아듣네. 방금 서은채씨. 그 표정 좋았어. 자자, 다음 씬으로 넘어갑시다.”
그 숨 막히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 스탭 둘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수군거렸다.
“방금 장면 진짜 두근두근 하지 않았냐?”
“인마, 역중 여자 역할이 19세야. 너 감방 가고 싶냐?”
“말이 그렇다고 말이! 그리고 서은채 실제로는 22살이야. 그게 뭔 상관인데?”
“아, 그런가?”
키 작은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서은채. 사귀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
“아마도?”
키 작은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남자친구 될 사람은 진짜 좋겠다. 진짜 전생에 나라를 한 열 번쯤 구했나보다.”
“야야······ 저기.”
“왜?”
돌연 키 큰 남자가 옆에 있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 시선 끝에는 서은채가 다음 씬을 위해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물끄러미 최강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키 큰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서은채가······.”
“에이, 설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어때요. 오 감독님. 이번 앨범 잘될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난 후, 차조영 실장이 감독에게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대부분 앨범의 흥행여부는 뮤비 촬영 감독이 가장 먼저 알아본다. 회사 사람들이야 고슴도치가 자식새끼 바라보는 심정이니, 객관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잘 됐으면 하는 기대심리로 보는 경우가 많고, 앨범 준비 시기상 쇼 케이스 발표 전에는 외부 사람들에게 공개되질 않으니, 내부 사람들을 제외 한다면, 가장 먼저 앨범의 흥행 여부를 객관적으로 평가 할 수 있는 사람은 뮤비 촬영 감독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플레어의 2집 뮤비를 촬영하는 오 감독은 어지간한 유명한 가수들의 뮤비 촬영은 한번씩 다 해봤을 정도로 유명한 제작자다.
점쟁이 까지는 아니어도, 점쟁이 비슷한 흉내는 낼 수 있다.
“걱정 마세요. 저번 1집 뮤비 촬영 때도 좋았지만, 이번 앨범 느낌이 더 좋으니까.”
오 감독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까칠까칠하게 솟은 턱수염 위로 푸근한 웃음이 걸렸다.
“그래요?”
“제가 댄스장르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이번 타이틀곡은 듣는 순간 이거다 싶더라고요. 중독성도 있고, 리듬도 쉽고. 아마 엄청 유행 할 거 같은데. 그리고 저기 보이시죠?”
오 감독이 슬쩍 뒤를 보며 가리켰다.
예상보다 촬영이 훨씬 더 빨리 끝났기에, 플레어 멤버들이 저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남은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풀로 뮤직 비디오 촬영 스케줄로 잡혀 있는 까닭에 남아 있는 스케줄도 없었다. 그것은 서은채도 마찬가지였고.
장요한은 촬영용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있었고, 김태현은 최근에 조립한 드론을 가져와 날려본다고 잔디위에 서 있었다. 박진우는 그걸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고. 노아는 중간고사 기간이라며, 벤치에 앉아 책을 펼친 채 열심히 공부 중이다.
그 같은 모습들을 MV메이킹 필름 팀이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며 찍고 있었다.
“메이킹 필름 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찍은 장면들이 하나같이 전부 좋아서 15초짜리로 뭘 내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그래서 말인데요. 이렇게 해보시는 건 어때요?”
“어떻게요?”
“선 공개를 하는 거죠.”
“선 공개요?”
원래 보통 MV메이킹 필름은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을 공개하는 영상이다 보니 음악이 많이 노출되기 때문에 대부분 가수들은 신곡 뮤직비디오가 발표된 후 현장의 뒷이야기를 공개한다. 그도 아니면 선 공개를 할 경우 15초 내외로 목소리가 빠진 반주 음악을 배경으로 신곡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던가.
하지만 자칫 선 공개를 할 경우 반응이 좋지 않다면, 마케팅 효과가 도리어 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예 길게 1분짜리 정도로 빼서 곡의 느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음악과 영상을 공개하는 거죠. 실력 안 되는 그룹들이야 신비주의 마케팅 한답시고, 꼴랑 15초짜리를 내보내지만, 플레어 실력이야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됐고, 뮤비도 기똥차게 나올 것 같으니. 좀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펼쳐도 먹히지 않을까요?”
“음. 그것도 괜찮겠네요. 가뜩이나 여주가 바뀌는 바람에, 우려 섞인 말들도 들리긴 할 텐데.”
차조영 실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 감독이 옳다구니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잘만 내보내면 그런 논란도 일치감치 잠재울 수 있고. 나름 이슈도 될 것 같은데. 어때요?”
솔깃한 이야기다.
허나,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판단을 내리기에는 걸려 있는 것들이 많았다.
“제가 회의 때 돌아가서 한번 의논해 보도록 할게요. 지금 당장 제가 결정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네, 그래요. 저야 플레어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씀드리는 거니까.”
< 뮤직 비디오 (1) > 끝
ⓒ 윤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