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ARS-24 (4)
호르몬.
유현은 좀 과격한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은 호르몬이야말로 인간 행동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물질이란 말을 하기도 했다.
즉 호르몬 분비 체계가 바뀌면 사람의 행태 또한 달라질 거란 말이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생각이 들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바로 며칠 전 만난 친구 놈이 화근이었다.
“어, 박 교수.”
-웬일이냐?
내분비내과 박원상.
학생 때부터 외골수 기질이 있었는데, 내분비내과로 분과를 정하고부터는 정말이지 호르몬에 미친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얼마 전 쓴 책이 ‘호르몬에 미쳐라’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좀 우스운 놈 같겠지만, 확실히 호르몬에 대해서만큼은 국내 권위자였다.
“병원이야?”
-병원이지.
“넌 결혼도 한 놈이 퇴근 안 하냐?”
-나 이혼했어, 새꺄.
“어, 진짜?”
-아니, 뻥이지. 요새 학회 관련해서 뭐 준비하느라 그냥 병원에서 자. 왜.
“아……. 내 환자 중에 말야.”
유현은 이제 막 할로페리돌, 그러니까 정신과에서 애용하는 안정제를 맞고 깊은 잠에 빠진 환자 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전히 재원과 정신과 레지던트는 활발히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뭐 같냐고요.”
“솔직히 모르겠어요. 진짜 그냥 배고픈 거 같던데…… 굶긴 거 아니에요?”
“미쳤어요, 내가? 밥도 안 주고 배고프다는 환자 이상하다고 정신과 콜 하게? 정신과 콜 하는 게 얼마나 부담되는 일인지 잘 아시면서 그러네.”
“하긴 그것도 그런데……. 잠시만요. 저도 교수님하고 통화 좀 할게요.”
“교수님? 누구요?”
“이순규 교수님이요. 이 시간에 전화 받아 줄 교수님이 더 있나요, 뭐.”
“아, 그렇네.”
보아하니 저쪽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교수에게로 통화가 이어질 것 같아 보여 다행이었다.
-야, 왜 말이 없어.
“아, 일단 이리로 좀 와 봐. ARS-24 관련한 문제야. 너 기억나지? 내가 며칠 전에 응급실 실려 왔던 환자 뇌사 판정 올릴 거라고 했던 거.”
-아, 알지. 그거…… 그거 왜.
ARS-24와 관련 있다는 말에 박원상이 보다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근 모든 의료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 바로 이 ARS-24였기에 그러했다.
이런 말 들으면 좀 이상하다 싶겠지만, 논문에도 확실히 유행이라는 게 있었다.
한창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만큼은 아니었으나 여전히 변종 관련한 얘기는 높은 점수를 지닌 학회지에 팡팡 실렸다.
“그 환자가 바이털이 돌아왔어. 아니지, 아예 살아났어.”
-뭔 소리야……. 그 환자 나도 중환자실 갔다가 봤는데. 아예 반응 없더만.
“근데 살아났다니까.”
-야, 진짜야?
“내가 이런 걸로 구라 치디?”
-아니……. 아니지. 어……. 야, 나 지금 바로 가 볼게.
“오면서 들어.”
-아, 알았어. 까칠하네?
박원상은 전화도 못 끊게 하는 유현에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전화를 끊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흥미가 동했기에 그랬다.
세상에 죽었다 살아난 환자라니.
종교의 영역 아닌가.
“일단 회복이 지나치게 빠르더라고. 사실 지금 상태만 보면 아픈 적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야. 오전에 나간 랩도 싹 정상이고.”
-그래? 진짜 이상한 일이네.
“그것뿐만이 아냐.”
-뭐가 더 있는데?
“환자가 배를 너무 고파 해.”
-배를 고파 해?
박원상은 잠시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었다 살아난 얘기에 비해 배가 많이 고프다는 얘기는 좀 너무 심심하지 않은가.
흥미가 확 식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눈치 빠른 유현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러다 이놈이 안 오면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았다.
호르몬 관련해서 이 나이에 또 공부하기는 싫었다.
“새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학생 때 생각나지?”
-때, 때리려고?
“에이, 머리 빠진 놈 때려서 뭐 해. 그냥 듣기나 하라고. 나 폭력적으로 변하기 전에.”
-알았다…….
머리 얘기에 급격하게 기가 죽은 박원상을 향해 유현이 말을 이었다.
“지나치게 배고파해. 내가 지금 간호 기록 보니까……. 점심에만 미음을 6그릇을 비웠어. 저녁에는 그보다 더 비웠고. 거기에…… 우리 주치의가 안 되겠는지 과자를 좀 가져다준 거 같거든? 그거 알지? 약간 사료처럼 생긴 거.”
-아, 병원 지하에서 파는 거. 그거 칼로리, 2천 칼로리 넘는데.
“그걸 다 먹고도 배가 고프대. 근데 내가 보니까…… 진짜 고픈 거 같아. 적어도 뇌 손상으로 뭐 전두엽 억제가 풀렸다거나 하는 문제 같지는 않아.”
-정신적으로 불안한 건 아니고?
“정신과에서도 왔지. 아닌 거 같대. 대화가 통해. 그냥 배가 고픈 거래.”
-이건 확실히 이상한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복도를 통해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 말은 곧 박원상이 이곳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머리가 듬성듬성한, 그러나 얼굴은 잘생긴 중년의 사내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환자는 어딨어?”
“지금은 자. 할돌 맞았어.”
“아니, 협진 보라고 해 놓고 재웠어?”
“말도 마라. 아까 못 봐서 그래. 할돌 안 썼으면 초크라도 걸어야 했을걸.”
“그 정도로 폭력적이라고? 근데 대화는 통하고?”
“그래, 그래서 이상하다 이거지.”
“흠.”
둘은 일단 보호의를 차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재원과 정신과 레지던트를 옆으로 치워 두고서였다.
환자는 억제대를 차고 있었는데, 어찌나 몸부림을 쳤는지 손목에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을 본 박 교수가 조금은 우려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가족 없어? 보호자가 보면 뭐라고 할 거 같은데?”
“없어,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가 자기 번호 하나뿐이더라. 그것도 이상해, 그러고 보면.”
“아……. 그래서 뇌사 판정이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구나.”
“응. 아무튼, 어떤 거 같아? 내 생각에는 호르몬 영향이 있지 않나 싶거든? 뇌 손상이라기엔 말이 너무 조리 있어.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아주 강한 욕구를 느끼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야.”
“오, 너도 호르몬 교에 투신했구나.”
“장난 아냐, 나.”
“나도 아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지. 욕구라……. 그중에서도 식욕…….”
박원상은 비닐장갑 낀 손을 꼬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목에 난 점을 만지작거리는 게 습관인데, 격리 병동에 와서 자기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지 않은가.
궁여지책으로 습관을 조금 바꾼 모양이었다.
“일단 내가 처방을 좀 내려 볼게. 혈액 검사로 호르몬 수치를 보자. 이상이 나올 수도 있어.”
“만약 나오면 어떻게 되지?”
“나오면 대박인 거지. 이 환자 ARS-24 변종 감염 의심되는 거라며?”
“응. 그렇지.”
“내가 알기로 아직까지 ARS-24 관련해서 호르몬 수치가 변했던 적은 없어. 세계 최초야. 아, 이미 죽었다 살아났으니 그것도 최초긴 하겠다만……. 그건 솔직히 주류 의학에서 받아 주겠냐? 병원 실수로 치부될 가능성이 크지. 근데 이건 아냐. 만약 네 생각이 맞다면……. 이건 진짜 최초라고.”
“오케이, 알았어. 그럼 뭐 내면 돼?”
최초고 나발이고, 유현은 일단 환자를 치료하는 게 급했다.
물론 논문도 쓰고 그로 인해 명성도 얻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유현은 환자 치료하는 게 좋아서 의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것들은 부차적이다 이 말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좀 공격적이었는데, 박원상은 그런 유현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나왔다.
“잠깐만. 나도 이렇게 행태가 갑자기 변하는 건 처음이라…… 시간이 좀 걸려. 일단 스테이션으로 가자. 덧가운 이거 안 불편하냐, 너는?”
“맨날 입는데 불편할 게 뭐 있어. 나는 이게 두 번째 피부야, 이제.”
“불쌍한 놈……. 아무튼, 가자. 머리를 좀 굴려야 해.”
“오케이.”
둘은 곧 가운을 벗어다가 폐기물 통에 집어넣고는 병동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다들 이미 ARS-24에 대한 백신을 맞은 참이고, 매 분기별로 다빈도 변종에 대한 백신도 맞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새로운 변종이 많이 나오는 바이러스이기에 적어도 의료진들만큼은 이 정도의 주의는 기울이고 있었다.
“가만있자……. 일단 호르몬 중에 식욕을 올릴 수 있는 건 그렐린(Ghrelin), 렙틴(Leptin). 이 두 개가 대표적이긴 하거든?”
“그럼 그거 내?”
“근데 이걸 처방으로 내지는 않아, 보통. 그냥 이론적으로 그렇다 알고 있을 뿐이지.”
“뭐야 그럼. 내분비내과는 뭐 해?”
“너도 한국말은 끝까지 좀 들어 줄래?”
“아, 아직 말이 안 끝났어? 말투가 절망적이길래 착각했지.”
유현은 너스레를 떨며 박원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타고나기를 장사로 태어난 데다가,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에 그냥 이렇게 두드리기만 해도 아팠다.
격려라기보다는 협박으로 느껴진달까?
아무튼, 그래서 그런가. 박원상은 재빨리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너도 알지? 내가 호르몬 관련해서는 논문 진짜 많이 보는 거.”
“알지.”
“인체 관련한 건 아닌데……. 닭에서 바이러스 감염이 있고 난 후 면역 반응 때문에, 아마도 그럴 거라고 추정하는 거지만 그렇겠지 뭐. 설마 바이러스가 호르몬을 분비하게 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겠지.”
“아무튼, 감염 후 그렐린 분비가 올라가서 닭의 덩치가 좀 커졌다는 보고가 있어. 그러니까…… 렙틴은 몰라도 그렐린 수치는 확인해 볼 만하다 이거지. 루틴으로 행하는 검사는 아니라 진단검사의학과에 의뢰 해야 할 거야, 이건.”
“그건 내가 할게.”
“오케이, 또…….”
박원상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목에 난 점을 긁기 시작했다.
점점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이쯤에 이르러서는 유현도 더 그를 건드리거나 자극하진 않았다.
알아서 답을 가져올 터였다.
학생 때부터 이랬다.
“그래. 코티졸. 코티졸이 올라가면 식욕이 돌지. 보통 아데노마(Adenoma, 종양) 같은 병에서 동반되는 합병증이긴 한데…….”
“그리고 또?”
“보채지 좀 마라. 이거 내분비내과 전문의라고 다 할 수 있는 얘기도 아냐.”
“알았어, 알았어. 근데 얘기는 해.”
“아, 인슐리노마(인슐리종의 전 명칭)가 있을 때도 그래. 혈당이 낮아지니까……. 먹게 되지.”
“오호.”
인슐리노마라.
확실히 감염내과인 유현이 떠올리기엔 좀 어려운 질환이었다.
내분비내과를 부르길 잘했단 생각이 들 때쯤, 박 교수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좀 애매한 것들인데. 어차피 검사 낼 거면 걍 다 내 봐. ARS-24 변종 관련 환자니까 어차피 나라에서 돈 다 대 줄 거 아냐.”
“어어, 말만 해. 낼 테니까.”
“갑상선 호르몬, 남성 호르몬, 그리고 그 뭐야. 성장 호르몬, IGF-1.”
“아하, 그렇겠네. 오케이 땡큐. 이제 가. 너 학회 준비로 바쁘다며.”
“이 자식 이거. 너 이거 결과 나오면 바로 공유해. 알았지?”
“알았어, 알았어.”
유현은 그렇게 쓸모를 다했다고 생각한 박 교수를 떠밀고는 처방을 내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아무리 봐도 검사 결과가 좀 이상했기에 그랬다.
“어, 뭐야. 아, 결과 나왔어? 어때?”
“이상해.”
“야……. 뭔 일반인 같은 답이야.”
“진짜 이상해. 네가 말해 준 거 있지. 그거 다 높게 나와. 그것도…… 너무 높아.”
“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