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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팬데믹-47화 (47/323)

47화 박태식 (1)

오예리는 유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침착했고, 또 뛰어난 면모를 보이던 사람이었다.

의사로서도 대단하던데 어찌 된 게 형사보다도 더 감이 예리할 때가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뭐지?’

사람이 어이가 너무 없어지면 할 말도 없어지는 법이지 않던가.

그에 반해 유현은 진지하게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서 잠시 테이블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열게 된 것은 오예리였다.

하여간 물었으니 대답하는 게 인지상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그게 번호를 따 달라는 게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그 왜. 영화 보면 따지 않아요?”

“아……. 진짜 영화 보고 하시는 말씀이구나. 안 돼요, 그거. 될 리가 있어요? 번호가 경찰청에 등록되는 것도 아니고……. 진짜 개인 정보로 접근해야 하는 건데, 구속 영장 없으면 사기업에서도 절대 안 내줘요.”

“아, 그렇군. 그럼 어쩐다.”

어째 답을 하고 보니 더 답답해진 상황이었다.

정말 이거 말하려고 만나자고 한 것인지, 정유현은 말없이 물만 들이켜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이번에도 오예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다에 대한 답이 되기를 바라면서였다.

“그때 봤던…… 김효상 국장. 그 사람 번호는 알지 않아요?”

“알기는 하죠. 근데……. 그날 그러고 나서 뭔 일이 있었는지 칩거 중이라고 들어서요.”

“칩거……?”

“네. 뭐 죽거나 다친 거 같지는 않다는데, 하여간 갑자기 장기 휴가 중이래요. 휴가도 아니지, 휴직이지.”

“음……. 그래도 거기를 통해서 들이파야 될 거 같은데요? 구멍이 거기밖에 없잖아요.”

“아……. 그런 거예요? 뭔가 더 신박하고 뭐 그런 건 없나?”

“교수님, 원래 경찰 업무는 거의 노가다예요. 뭔가 나오겠지 하고 들이받는 거예요.”

유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거친 말을 내뱉는 오예리를 바라보았다.

그냥 생긴 것만 보면 솔직히 이게 대학생인지 형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 외모였더랬다.

물론 이런저런 단련을 했을 테니, 자세히 보면 꽤나 근육이 잡힌 몸이긴 했지만.

그런다고 20대 중반의 앳된 얼굴이 어디 가는 건 아니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진또배기 형사지…….’

외양만 그랬다.

실제로는 죽음도 무릅쓰는, 그런 사람이었다.

“들이받아요?”

“네. 그러다 나오면 좋고 아니면 뭐 또 딴 데 파고. 근데 지금은 김효상 말고는 뭐가 없잖아요.”

“하긴……. 달리 방법이 있지는 않죠. 그 외에 제가 뭐 높은 사람을 아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러게. 진짜 아는 사람 없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대학 병원 교수들 여기저기 아는 사람 많던데.”

“그건 영화죠.”

“아까 번호 따 달라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구나, 네. 그럼…… 언제 가 보실래요? 김효상.”

오예리의 말에 유현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곧 점심시간은 끝이었다.

다행인 것은 외래는 오전으로 끝이라는 점이었다.

오후는 입원 병동만 보면 되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 중요한 환자는 이순규뿐이었다.

그는 그래도 확인을 한번 해 보긴 해야 했다.

어찌 되고 있는지 봐야 하지 않겠나?

친구이면서 동시에 유일한 검체였으니.

“한 30분 이따가 가 보죠. 그 환자만 보고 다시 나올게요.”

“아, 네. 그럼…… 뭐, 차로 이동하실래요?”

“차……. 괜찮을까요?”

“설마 또 죽일라고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데…….”

유현이 생각하기에 지금 저쪽은 정신이 없을 것 같긴 했다.

박원상이 연구에 매진하게 된 시점을 생각해 보면, 이순규를 통해 결정적인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이지 않던가.

그게 그저 시도로 끝났다면 지금쯤 집에 왔어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 말은 곧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높은 확률로 괜찮을 거 같기는 한데…….’

낮은 확률로 둘 다 죽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유현과 오예리 모두 수락 마을 생존자인데 그 둘을 한 차로 죽일 수 있다면 횡재 아니겠나.

무조건 조심하는 게 좋았다.

뭐가 되었건 이 둘은 저쪽에서 볼 때 눈엣가시일 테니.

“기차로 가죠.”

“알겠습니다. 뭐…… 그러죠. 생각보다 되게 겁 많으시네.”

“겁 안 나게 생겼어요?”

“하긴……. 그건 그래요. 무서운 새끼들. 개새끼들…….”

오예리는 잠시 잊으려 했던 죽음을 또다시 떠올린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장이 아니라, 이미 정리된 시신을 봤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 처참함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현장에 있던 모두가 결국, 사망했다는 사실이 오예리를 괴롭게 했다.

게다가 오예리는 아직도 진짜 범인이 누군지, 그 뒤에 어디까지 있는 건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여간 로비에서 기다리세요. 이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병원이라 그렇게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할 거예요.”

“모자가 이게. 털모자인데요?”

“네, 병원에서는 많이 써요. 머리 빠지면…….”

“아, 그거. 그거구나. 알겠어요.”

유현은 털모자 하나를 오예리에게 건네준 후, 식당에서 나와 병동으로 향했다.

마음이 급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 밥 더 달라고!”

센터 안에 들어가자마자 고함이 들려왔다.

당황한 간호사들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급히 오길 잘했다 싶었다.

“섬망 아냐?”

“아니……. 이 교수님 아니셔? 왜 저러시지.”

“어? 정말? 3호실 환자 이순규 교수님이야? 그 교수님이 저러신다고?”

변화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온화하기 짝이 없던 친구가 저런 모습이라니.

-우리는 모두 호르몬의 노예야.

언젠가 박원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개새끼.’

입만 살아 가지고.

아니, 어떻게 홀라당 넘어가서 거기서 연구를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국방부에서 연락 왔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 후로는 거기서 뭐 하는 것인지 알려 주기도 하지 않았나.

아니, 알려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 안에 들어간 이상 뭘 하고 있는지는 오히려 유현보다 더 잘 알게 되었을 테니까.

‘하여간……. 그 새끼…… 도덕관념이 좀 이상했어.’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연구가 좋아서 대학 병원에 남은 친구 아닌가.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 둘이 딱히 별개로 노는 게 아니다 보니 상관없었다.

어찌 되었건 박원상은 명의로서 환자를 수도 없이 살리고 있었다.

호르몬에 대한 유난한 집착으로 여태 진단이 안 되었던 환자들을 구원하기도 했고.

그래서 유현도 이 친구가 이제는 진짜 의사로서의 재미를 느끼고 있구나 하고 착각한 적도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선 넘은 연구에 대한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딱 돌변할 줄이야.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그러나 얼굴만은 침착을 가장한 채로 말했다.

“제가 들어갈게요.”

언제까지나 상념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저기서 나쁜 새끼들이 똥을 싸 재끼는데, 그 똥 치울 사람은 자기뿐이지 않나.

박원상의 도덕관념에 고장이 있다면 유현의 마음에도 적잖은 고장이 있었다.

이상한 부담감이 어릴 때부터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또 다른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별소리 안 할 때도 있지만, 이번 일만큼은 예외였다.

애써 눈 감고 넘기려고 할 때마다 어찌나 지랄을 하는지,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만 들었다.

“밥……. 아, 너 왔어. 밥 줘.”

“너 빈 그릇이 벌써 2개나 있는데.”

“그럼 어떡해! 배가 고픈데!”

안에 들어서자 이순규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 6끼를 먹게 된 지 벌써 3일째였다.

나이가 들어 신진대사가 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벌써 소화 불량에 시달렸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이순규은 소화 불량은커녕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너 이렇게 나오면…… 걸려. 그 무서운 새끼들 얘기 내가 해 줬지? 너 끌려가면……. 실험체 되는 거야.”

실제로 굶주린 느낌이 날 것 같기는 했다.

호르몬의 노예라는 박원상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긴 했지만.

하여간 호르몬의 영향이라는 게 우리 몸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는 학문적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날뛰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진짜로 큰일이 날 테니까.

“실험체……. 이런 시발.”

이순규는 실험체라는 말에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도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졌다.

아무리 남성 호르몬이 날뛰는 와중이라고 해도 실험당하는 건 겁나지 않겠나.

원래 흥분 잘하는 사람이 강자 앞에서는 오히려 분노 조절을 잘하는 법이었다.

“내가 양 선생 통해서 치킨이 됐건 뭐가 됐건 넣어 줄 테니까……. 병원 밥은 그냥 지금처럼만 먹어. 소리 지르지 말고. 아까 소리 안 지르기로 해 놓고선 이러네.”

“나도……. 나도……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냐? 미치겠다고!”

“그래도 참아. 이러다 전에 있던 환자와 행태가 비슷하다 뭐 이런 얘기 돌면 또……. 또 침입이 있을 수 있어.”

유현은 센터 내를 돌아보았다.

한번 침입이 있던 덕에 시큐리티가 확 늘어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이제 슬슬 다른 곳으로 돌리길 원하고 있었다.

대체 왜 왔는지 모를 침입이지 않나.

미친놈들로 치부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허술해진 다음에 들이닥치면……. 내가 여기 뭐 매일 있을 수도 없고……. 이번에는 더 준비해서 오겠지.’

다시 오면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았다.

“아……. 알았어. 그럼 일단 먹을 거 지금이라도 줘.”

“지금은 이거밖에 없어.”

유현은 혹시 몰라서 편의점에서 산 초코바를 건넸다.

이순규는 그걸 낚아채고는 혀를 찼다.

“고작 이거?”

“이 지경일 줄은 몰랐지.”

“노티도 안 한대?”

“야, 나 교수야. 밥 문제로 노티를 하겠냐? 네가 난동을 부린 건 아니라며. 그냥 언성만 높인 거지.”

“진짜……. 진짜 어렵게 참고 있는 거야. 화가……. 화가 너무나. 이것도……. 이것도 너무 답답하다고. 게다가…….”

이순규는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는 욕망을 떠올렸다.

‘물고 싶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것이 누가 되었건 간에.

‘안 돼. 안 돼…….’

물면 또 다른 사람이 이렇게 될 게 뻔했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고?

의사가 돼 가지고 그게 할 짓인가?

여전히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이순규로서는 차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알아, 나도. 그리고 이거……. 네가 처방한 약이야. 먹어 보고 효과 어떤지 말해 줘.”

“어……. 알았어.”

유현은 이순규가 자신의 증상을 보고 처방한 정신의학과 약을 건네주었다.

충동 조절에 도움이 되는 약인데, 지금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어쩌면 아무 효과도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댈 곳은 이것뿐이었다.

-들이받는 거예요.

왠지 모르게 오예리 형사의 말이 떠올랐다.

“하여간……. 나 오늘 저녁에는 안 와. 양 선생이 잘 봐줄 거야.”

“어, 어디 가는데.”

“지금 밖에서도 난리라……. 뭔가 좀 해 보려고.”

“음……. 조심해라. 사람 죽는다며?”

“조심해야지. 아무튼, 내일 봐.”

유현은 이순규와 인사를 마친 후, 밖으로 빠져나왔다.

로비에는 자신이 준 털모자를 쓰고, 마스크까지 낀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예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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