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완성 (4)
“끄으으으…….”
박태식은 울컥 흘러나오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자신이 만든 피 웅덩이에 놓인 채였다.
무언가 의미 있는 말을 하고는 싶은데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힘겨운 신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목소리가 안 나오지? 횡격막이 찢겨서 그래. 아마 곧 편해질 거야.”
박태식을 찌른 마스크를 쓴 사람, 그러니까 황 팀장이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죽어 가는, 심지어 자기 손으로 찌른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앞에 두고 있다고는 볼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사실 황 팀장도 직접 사람을 죽여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림은 없었다.
‘오히려…… 잘되니까 기분이 좋네.’
뿌듯한 기분만이 들 뿐이었다.
확실히 안 해서 그렇지, 자신이 밖으로 나돌았으면 김태평보다 훨씬 잘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황 팀장을 향해 다른 복면인이 물었다.
“근데……. 너무 여러 번 찌른 거 아닐까요?”
엉망.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 버린 주변을 돌아보면서였다.
복면인의 실력이면 단 한 방에 깔끔하게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황 팀장이 너무 지저분하게 찌르는 바람에 피가 이리저리 튀어 있었다.
심지어 옆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도 튀었다.
“일부러 그런 거야. 이 사람…… 정유현이나 오예리가 죽인 걸로 해야 하니까.”
“아…….”
복면인은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 나도 흥분하긴 했으니……. 오히려 잘됐지.’
어조에 비하면 퍽 놀라운 음모였으나 박태식은 이제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편안’해졌기 때문에 그랬다.
“이만하면 흥분한 사람이 마구 찌른 느낌이 들지. 여기 손잡이에 지문 묻혀.”
“네. 근데 이거……. 지문이 좀 마구잡이라, 칼을 잡은 느낌은 아닐 텐데요.”
“상관없어. 어차피 증거야 뭐…….”
황 팀장은 여전히 일상적인 어조였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폼이 어딘지 모르게 기괴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사이 다른 복면인이 병원에서 채취해 온 유현의 지문을 집 안 곳곳에 묻혔다.
칼 손잡이에도 묻혔다.
그 꼴을 보고 있던 황 팀장은 장갑 낀 부분만 닿도록 주의하면서, 박태식의 품 안을 뒤졌다.
어렵지 않게 휴대폰을 빼낼 수 있었다.
“페이스 락으로 해 놨네. 이러면 편하지.”
락이 걸려 있긴 했으나 눈앞에 박태식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푸는 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황 팀장은 박태식의 얼굴 앞에 휴대폰을 들이밀었다가, 다시 품으로 가져왔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락은 풀려 있었다.
‘어디…….’
정유현의 번호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박태식과 평소 연락하던 사이는 아닌지, 문자를 주고받거나 전화를 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뭐……. 상관없지.’
황 팀장은 바로 정유현에게 문자를 보내는 대신, 일단 박태식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문자를 살폈다.
평소 쓰던 문구나 이모티콘 그리고 단어 등이 종종 발목을 잡을 때가 있기에 그랬다.
물론 이 건에 대해서는 VIP가 직접 지원 사격에 나서 줄 것이다 보니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요새는 주의하는 게 좋았다.
인터넷 신문이나 언론사들이 범람하면서, 심지어 유튜브까지 생기면서 이런저런 루트로 의혹이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황 팀장은 충분히 문자 내용을 숙지한 후, 정유현에게 문자를 날렸다.
비슷한 내용으로 오예리에게도 날렸다.
‘김효상은…….’
김효상의 현재 소재지는 세종으로 파악되었다.
부른다고 올 수가 없다는 얘기.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놈도 박태식만큼 아는 게 많을 테니까.
그럼 어째야 할까.
‘칩거한 기간이 길다고 했지.’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아닌가.
특히 중년 남성의 자살률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충분한 근거가 있어 보이면 아예 언론 보도도 막을 수 있거나 신원을 특정하지 못하게는 만들 수 있었다.
“다, 당신들!”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가 갑자기 인근 야산에 가서 목을 매단다는 설정이 좀 어거지 같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나.
중요한 건 거물인 박태식을 어찌 처리하느냐 여부였다.
기러기가 아니면서도 기러기처럼 지내고 있는 게 신의 한 수였다.
“이, 이러면 천벌……. 천버…… 끅.”
아마 지금쯤이면 김효상도 처리했을 터였다.
내려간 애들이 그렇게 일을 잘하는 애들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간인 하나 처리하는 거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닐 테니까.
게다가 저번에 방심했다가 실수했던 놈들이지 않나.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정말이지 만전을 기할 터였다.
“다 보냈다. CCTV 통제권은 확보했나?”
“네? 아, 네.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습니다.”
“경비원들 상황은?”
“전혀……. 미세 조정이라서요.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좋아. 그럼 철수하지.”
황 팀장의 말에 마스크 쓴 인원들 모두가 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원래 이쪽을 향하고 있던 CCTV는 이미 미세하게 조정이 되어 딴 곳을 향하게 된 지 오래.
그럼에도 황 팀장은 CCTV 카메라 방향을 휴대폰 카메라로 확인하고 나서야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구두에 끼어 놓았던 방진포를 제거했다.
가격도 싸고 제조 방식도 간단했다. 무엇보다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있는 발자국을 제거해 줌과 동시에 소리까지 어느 정도 줄여 주는 물질로 요원들 일부가 애용하는 물건이었다.
‘확실히 김태평이 애용한다는 방식이나 물건은 좋군.’
황 팀장은 이제 곧 문책당해 좌천될 김태평에게 누구도 모를 감사를 표한 후, 현장에서 몸을 숨겼다.
물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현장이 왜 현장인지 저번 병원 습격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배운 덕이었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현장이었다.
그렇게 요원들이 몸을 숨기고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을 때쯤, 유현은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화를 안 받네…….’
이런 문자를 보내 놓고는 뭐 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안 받는다라.
어떻게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현은 딱히 박태식과 긴밀한 사이도 아니지 않나.
해서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지 않고 그저 앉아 있었다.
부우웅
그러고 있으려니 휴대폰이 울렸다.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선불로 지불한 휴대폰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전화는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네.”
-아……. 저 오예리예요.
오 형사였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거의 모든 일을 같이하고 있으니까.
“네, 어쩐 일이세요?”
-혹시 문자 받으셨어요?
“문자? 아……. 형사님도 받으셨구나.”
유현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리 살펴도 도청기를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해서 그랬다.
-네. 박태식 의원님. 근데 이상해서요. 갑자기 문자를 보내는 게……. 물론 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는 한데요.
“네. 당연히 김효상 국장도 연락을 받았겠거니 하고 전화를 했는데, 받질 않아요. 둘이 같이 있는 건가.”
-일단……. 가 볼까요?
“음…….”
유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의사로 살아온, 그러니까 딱히 음험한 일 없이 살아온 그에게 초대 문자는 응당 초대 문자로만 받아들여져야만 할 터였다.
하지만 최근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면 뭐든 의심해야만 했다.
게다가 한번 이상하게 생각하고 나서 보니 죄다 이상해 보였다.
‘박태식 의원이 직접 오라고 한 것도 이상하지. 김효상 국장만 불러서 얘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게다가 문자를 보내고……. 전화는 안 돼. 음. 설마…….’
죽었을까?
이 생각을 하면서 유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너무 쉽게 죽음을 떠올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연 너무 쉬운가?
그렇게 단언하기에는 이미 죽음이 흔해진 상황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유현 본인도 죽을 뻔하지 않았나.
“오 형사님. 일단 집으로 가지는 말고요…… 근처에서 보죠. 모자에 마스크 끼고.”
-아, 그럴까요? 저도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요.
“네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매일 드네요.”
-네. 저도요. 그럼…….
“그때 긴자 갈 때 보니까, 근처에 편의점이 있더라고요. 고 앞에서 보죠. 6번 출구 앞.”
-네.
해서 유현은 신중하게 가기로 결심한 채, 오예리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오예리 또한 흔쾌히 수락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도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니까.
오죽하면 늘 방검복에 삼단봉을 챙겨 다니고 있겠나.
심지어 동료 형사 중 하나가 앞집으로 이사와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후배라고 했나?’
착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후배였다.
돌이켜 보면 몇 번이나 얼굴을 봤는데, 이름도 몰랐다.
다음에 만나면 직접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되었건 위험한 일에 도움을 주고 있는 사람 아닌가.
자세한 연유도 모르고 그저 호의에서 우러나서 하는 행동이었다.
-정유현 나왔습니다.
-이럴 거면서 왜 꾸물거려서 애를 태우지? 그 새끼, 집에 있던 도청기 싹 망가뜨려서 버렸지?”
-네.
-의사가 뭐 그래. 아무튼, 알았어. 일단 방향 맞는지 확인해서 다시 알려 줘.
유현이 사는 곳은 병원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말이 오피스텔이지 소재지가 강남인 데다가, 돈 쓸 일이 없어 오로지 주거에만 쏟아부은 탓에 시설은 고급 아파트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국정원에서도 한 번은 도청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들통난 마당에 또 들어가는 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해서 요원이 아예 집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유현이 나왔음을 보고한 후,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유현의 뒤를 따랐다.
‘저 새끼……. 왜 바로 목적지로 안 가고.’
유현은 일부러 지하철역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생긴 습관이었다.
중간중간 카페에 들러 물을 사고, 편의점에 들러 물티슈를 사고, 또 약국에 들러 가글 등을 샀다.
모두 지하 또는 2층에 있는 시설만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따라붙게 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따라붙었어.’
매번 그렇게 주의를 했지만 사실 단 한 번도 미행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아니, 미행을 알아차렸던 적이 없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유현은 휴대폰 카메라를 통해 약국까지 따라온 한 사람을 확인한 참이었다.
소매 틈으로 렌즈만 내밀고 있다 보니 상대는 그저 유현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고 있다는 생각만 할 게 분명했다.
관찰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조차 모를 수도 있고.
‘함정이다……. 이건데.’
정유현 교수. 오늘 VIP와 만난 건으로 대화 나눴으면 좋겠지 싶은데……. 합정동 우리 집으로 올 수 있어요? 시간은 10시 이전이면 아무 때나 좋습니다. 뭐 하고 있을 거라 전화는 어려워요. 주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