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겨울 (5)
결과적으로 김태평은 마트 일행, 그러니까 대위의 왕국 감시가 대단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틈이 없었다.
적어도 이들의 눈을 피해 1층으로 나가는 건 불가했다.
그 사실을 김선태에게 알렸다.
-탈출 시도 시 교전 발생 불가피.
김선태는 그 보고를 받고 침음을 흘렸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군.’
마침 정찰 보고를 받고 고민에 빠져 있던 참이라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드 무리는 그 수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1호는, 그러니까 박기태는 혼자서는 절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저 마트 습격 때만 나왔는데, 그마저도 다른 놈들에게 둘러싸인 채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먹이 활동을 하지 않는 게 큰일이군…….’
반드시 무언가 먹어야 하는 놈이 먹이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 말은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맡긴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당장 김선태만 해도 요리를 맡지는 않지 않았나.
어차피 요리가 필요한 음식 자체를 먹질 않지만.
‘우리도 지쳐 가고 있어.’
김선태는 방금 보고한 이들, 그리고 미리 잠자리에 든 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최정예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대단한 이들이었지만 얼굴엔 어느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했다.
잠자리도 엉망인 데다가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심지어 적은 지척에 있지 않나.
그와 동시에 무언가 맡은 일은 단 하나도 진척되는 것이 없었다.
‘어쩐다.’
그러나 김선태는 포기나 실패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까라면 까는 인간이라서 그랬다.
그럼에도 당장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게.
김선태의 보고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은 이랬다.
뭔가 재량권을 잔뜩 몰아 준 느낌이지만, 단서가 중요했다.
-단, 김태평, 1호, 정유현의 확보는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지 말게.
결국, 부담감만 실어다 준 셈이라고 보면 되었다.
망할.
김선태는 대통령이 아니라, 상황에 대해 욕을 한 후 밖을 내다보았다.
그래 봐야 보이는 것은 폐건물들뿐이었다.
이곳은 폭격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무너진 건물들이 보이진 않았지만, 도시라는 건 사람 손이 타지 않는 즉시 허물어져 가기 마련이었다.
하여간 그는 폐건물 너머에 있을 강변 테크노 마트와 동서울 터미널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인가…….’
김선태는 작전 장교를 돌아보았다.
직급은 대위, 그러나 재량권은 대령에 준하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똑똑한 인간이라는 건데…….
그런 놈이 내뱉은 안건은 사실 좀 황당무계한 면이 있었다.
“이봐.”
“네.”
“일주일 동안 낮에는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
“네, 그렇습니다.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렇습니다. 접근이 가능하다면 침투해서라도 볼 텐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침투라.
라드 무리가 더 작고, 목적이 섬멸이라면 한 번쯤 해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했다.
절대로.
놈들은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민감하니까.
게다가 일행은 자신들이 지금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되는 입장이었다.
“밤에 습격할 때 제외하고는…… 활동을 안 한다는 건데.”
“그마저도 앞으로 나서진 않습니다. 둘러싸여 있어요.”
한 가지 성과가 있다면 박기태의 존재를 확실시했다는 점이었다.
김태평의 보고도 물론 믿음직한 것일 테지만, 김선태는 두 눈으로 본 것에 더 의미를 두기로 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네, 그렇습니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마트는 무너집니다.”
“반역자의 무리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김선태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가리고 있는 건물이 많아서, 이렇게 하는 편이 마트를 더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안에 생존자들이 적어도 3, 400명은 있을 거야.’
마트가 무너지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곰곰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너무 쉬운 얘기 아닌가.
무기도 없이, 훈련도 받지 못한 이들이 개활지도 아닌 도심에 풀려난다라…….
‘그걸 다 죽이게 생겼군.’
제아무리 김선태라 해도, 대안이 있다면 그걸 택했을 터였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공중 지원을 받아 동서울 터미널에 침투 작전을 펼칠 수도 있었다.
공중 지원이라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청와대는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위험 요소가 생겼다.
일차적으로 부대가 손상될 수 있었다.
이차적으론, 1호가 도망갈 수 있었다.
‘1호에게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우리 부대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럼 도망가겠지.’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감히 김선태 부대에 대항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할 터였다.
더욱이 1호에겐 트라우마도 있을 터였다.
라드들을 쥐 잡듯 잡아 오는 걸 봤으니.
“어찌하시겠습니까?”
김선태가 하는 게 고민이 아닌 자기 합리화라는 건 어느 누구보다도 작전 장교가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쐐기 박듯 자신만만한 얼굴로 물었다.
김선태는 그런 작전 장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와꾸 잘 짜 보지.”
“네!”
승인은 떨어졌다.
청와대의 승인까지는 필요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아니, 그 전에 청와대는 이미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인간들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껏 희생시킨 국민들의 숫자만 해도 천문학적이지 않나.
아마 역사가 새로 쓰일 수 있다면 희대의 살인마는 스탈린이나 히틀러 따위가 아니라 대통령이 될 터였다.
“밤마다 습격이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매일 10에서 20분가량의 오차를 두고 습격을 하는데, 목적은 혼란을 야기하기 위함이지 진짜 공격을 위함은 아닙니다.”
“그렇지.”
물론 여기 모인 이들도 훌륭한 죄인이었다.
죽을 이들을 걱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죄책감?
그따위 감정 또한 없었다.
오로지 효율과 성공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허나 그건 우리만 확신할 수 있는 일이죠.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공포를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어.”
동서울 터미널의 무리는 그래도 밤에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낮에도 돌아다니는 놈들이 있었다.
정찰 목적으로.
심지어 간혹, 생존자 무리가 그들에게 걸려 밤중 습격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마트에 그러는 것처럼 돌을 던지긴 했는데 그다음 스텝은 확연히 달랐다.
-아, 안 돼!
그렇게 창문을 깨고, 무리는 안으로 들어가 안에 있던 이들을 감염시켜 밖으로 나왔다.
그중 일부는 묶여서 나왔다.
아마도 식량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긴 당연했다.
저만한 무리가 그저 수색으로 찾아내는, 오래된 식량만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하여간, 그에 비해 마트 쪽은 아예 미동도 없었다.
겁을 집어먹었단 뜻이었다.
“언제든 쳐들어올 거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그걸 살짝 건드려 주면…… 과민 반응을 보이겠지.”
“대응할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만……. 와해된다면 김태평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래, 김태평은 일반인이 아니니까. 분대 하나면 충분할걸세.”
“네. 문제는 1호의 확보입니다.”
사람들이 튀어나온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이놈들이 마트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는……. 다른 생존자 무리에게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껏해야 서넛으로 이루어져 있는 무리와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우리가 봐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오히려 완전히 무너지는 걸 원치 않을 거야.”
“네?”
“라드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봤지.”
김선태는 라드 아니, 박기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았다.
솔직히 놈이 진정으로 원했다면 저 정도는 쉽게 무너뜨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무리 총을 쥐고 있다고 해도 밤에 습격을 지속하면 그냥 그것만으로 끝장이었다.
그러나 놈은 쳐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놈들은 아마 마트를 거대한 식량 창고화할 생각일 거야. 아니, 놈들이 아니라 놈이라 해도 무방하겠지.”
“그건 무슨…….”
“라드는 많이 먹지. 그리고 곧 겨울이 오네.”
“음…….”
“그런 상황에서 마트에 있는 놈들이 죄 라드가 되어 무리에 합류하게 되면 어찌 되겠나? 당장은 거대한 무리를 이룰 수 있겠지만 겨울을 날 수 있겠나.”
“아…….”
“하지만 조금씩 빼 먹거나…… 아예 장악해서 정해서 먹을 수 있게 되면 어떻겠나. 부족한 감이 있어도 겨울을 날 수 있겠지.”
“그런…….”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김선태는 라드가 아니니까.
하지만 김선태는 만약 자신이 라드라면 이렇게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거 외에 다른 합리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무너진다고 생각해 보게. 아마…… 뭐라도 하지 않겠나? 선두에 설 거란 얘기지.”
“그럼 그때 습격해서 획득하면 되겠군요.”
“그래.”
다만 그렇게 되면, 지도자를 잃은 라드 무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마 본능에 이끌린 채 거의 대부분의 무리를 라드화 시키지 않을까?
마트에 남은 이들에게는 한없이 거대한 불운이 될 거란 얘기였다.
‘하지만 무리는 무너져. 유지된다고 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식량 문제를 안고 있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일석이조였다.
최소한 김선태에게는 그랬다.
“좋아, 그렇게 하지.”
“네!”
“작전은 내일. 김태평에게 알리도록 하지.”
“네!”
반대 의견 따위는 없었다.
다른 의견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기껏해 봐야 보완하는 의미의 의견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마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도.
“컥.”
어둠을 틈탄 습격이 시작되었다.
경계를 서던 병사들은 속절없이 쓰러진 지 오래였다.
그들이 대비하고 있던 것은 날아드는 돌멩이였지, 저격수가 쏘는 총알은 아니었기에 그랬다.
“응?”
역설적이게도, 이변을 제일 먼저 눈치챈 것은 박기태였다.
그는 마트에서 날아드는 총알이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반란이라도 일어났나.’
이미 뭔가 벌어질 것이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라드라면 몰라도,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새벽 습격을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게다가 한번 제대로 된 습격까지 당하지 않았나.
‘그럼 지금이 기회야.’
겨울.
겨울이 오기 전에 무리는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와!”
박기태는 저 마트를 꿰차고 들어앉아, 살아 있는 목장으로 만들기로 작심한 지 오래였다.
비록 그 시점이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태평?”
그 시각, 김태평은 약속되어 있던 장소에서 김선태가 이끄는 부대와 조우했다.
약조했던 대로 한 분대가 도달해 있었고, 약속과는 달리 마트를 지키던 이들이 죽어 있었다.
“이건 대체…….”
“곧 라드들이 들이닥친다! 설명할 시간 없으니, 따라와!”
아마 김태평이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이따위 설명만으로 상황을 파악하긴 어려웠을 터였다.
하지만 김태평은 요원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주어진다면 김선태 못지않게 잔인한 선택 또한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다만 그 저변에 국가를 우선할 따름이었다.
‘이 개새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