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세브란스 (1)
“어…….”
“왜.”
“아니, 아닙니다. 저기 뭐가……. 착각이겠죠.”
“그렇지, 시발. 뭐가 있어. 대체 여기다 왜 세워 두는 거냐?”
서강대교.
여의도에서 출발해 밤섬을 통과하는 다리.
조선 시대에 밤섬은 왕실 소유의 목장으로 운영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뽕나무밭으로 운영되기도 하였을 정도로 상당히 비옥한 땅이라 할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잠기는 땅이었기에 습지 보전 지역이기도 했는데, 누군가 대통령에게 그따위 소리를 하는 바람에 병사들의 임무 중에 밤섬 경계 임무가 추가되었다.
“X 같은…….”
“야, 입조심해라. 그러다 뒤져……. 때가 어느 땐데.”
“밤인데 설마요.”
“그 새끼들 그거 언제 어느 때고 움직이는 거 모르냐?”
“에이……. 그제 헬기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어디 중요 인사라도 움직인 모양인데……. 일단 그거 하고 있겠죠. 당장 어제오늘 낮에 그…… 뭐냐. 소탕 작전도 없지 않았습니까?”
“하긴……. 그건 그래. 하여간, 아니…… 이게 대체 뭔 일이냐? 언제 좋아지는 거래?”
두 병사는 추운 날씨에 백화점인가 어딘가에서 빼 온 파카를 입은 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옆에 들어가서 잠자도 높은 확률로 모르긴 할 터였다.
오히려 감시 체계는 복무하던 때보다 더 느슨했으니까.
하지만 걸렸을 때의 처벌 정도는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엄했다.
문자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 도망가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 망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역시 정부 관할 지역이었다.
특히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저 여의도, 그리고 그 너머 영등포 지역은 마굴 그 자체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죠.”
그 시각, 반포대로를 건너 서빙고역을 지나 국립 한글 박물관 근처에 다다른 김태평이 입을 열었다.
이미 차량은 한글 박물관 지하에 세운 후였다.
“여긴…….”
여태 불을 끄고 달리다가, 주차장에 들어와서야 불을 켰기 때문에 나름 시야는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온 병사, 말이 병사지 사실상의 직급은 부사관 이상이 되는 이 중 하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와 본 적이 없던 모양이었다.
하긴, 애를 키워 보지 않은 이상에야 여길 뭐 하러 오겠나.
애초에 나고 자란 지역이 서울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글 박물관입니다. 아예 방치된 지 오래입니다. 일단…… 네. 전에 남겨 둔 것도 그대로 있네요.”
김태평은 이곳이 전에 박원상 때문에 왔던 길 중간임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러곤 문이 어떤 방식으로든 열리면 부러졌을 샤프심을 유리문짝 틈새에서 제거했다.
“아…….”
이런 건 병사들 수준에서는 배울 재간이 없는 재주였다.
그렇게 놀란 얼굴로 김태평을 비롯한 여러 요원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꽤 널찍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히 쾌적해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일단 1층으로 통하는 유리문은 죄 박살이 나 있었다.
군데군데 세월이 미처 지우지 못한 참살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이건…….”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총을 고쳐 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새카만 밤에 손전등을 비추며 다니는 것이 안전할 턱이 없지 않나.
제아무리 건물 안쪽이라 해도…….
이 안에 뭐가 있다면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요원들 또한 총을 쥔 채, 긴장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전에 와 봤고 또 그때는 안전했다손 치더라도 지금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됐어.”
앞장서 걷던 김태평은 어떤 철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전시회라도 열리던 곳인 모양인데, 3층임에도 불구하고 철문이 내려와 있었다.
아무래도 전시회에 있는 작품들은 도난의 위험이 있다 보니 이런 식으로 따로 또 관리하는 모양인데, 김태평은 그 문의 자물쇠를 너무도 능숙한 솜씨로 풀고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안에 꽤 쾌적해 보이는 침구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습관이 되어 놔서.”
“무슨…….”
“일종의 안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김태평이 어디 보통 인물이란 말인가.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이미 유현이 준 정보 그리고 정부가 하는 짓거리를 보면서 스스로 내린 판단 등으로 인해 여기저기 간단한 안가를 마련해 둔 참이었다.
물론 여긴 사태가 터지고 나서 급하게 마련한 안가였고, 그렇기에 안가라고 하기엔 그 시설이나 규모가 형편이 없었다.
일단 안전이 완전히 확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에 들어와 다시 철문을 내리니 다들 긴장이 풀렸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김태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벽에 기대어 주르륵 내려앉았다.
옆에 총을 내려 둔 채였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서울에 올라오는 건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엔 라드라는 적만 있었지만, 이제는 식인종으로 화한 일부 생존자들과 정부까지 적이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일부터는…… 도보로 이동해야 할 공산이 크지.’
김태평은 그렇게 널브러진 채, 요원들이 끓인 물에 육포와 잡곡 등을 풀어 넣는 것을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중간중간에도 이런저런 마른 음식을 먹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당장 교전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작전에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는지도 의문이지 않나.
장기전으로 들어갈수록 든든히 준비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김태평은 내일 있을 일을 미리 떠올렸다.
“팀장님.”
“응?”
그것도 잠시였다.
팀원 중 하나가 라디오를 들고 왔다.
“아. 박원상.”
“네. 정 교수님도 송수신이 가능하니…… 겹칠 수도 있지만, 하여간 정보는 같이 취합해야죠.”
“그렇지.”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약조한 시간이었다.
원래는 새벽 2시에 하기로 했지만, 오늘만은 예외를 둔 덕이었다.
새벽 5시.
좀 애매한 시간일 수도 있고 또 위험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박원상이 처한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면서 사실상 밤 시간이면 언제든 교신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만의 방을 쓰게 되어서 그랬다.
치직
하여간 라디오를 켜자 이내 박원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시가 느슨해져서 원하면 내부 통제 가능합니다. 감염을 강제로 시킬 필요도 없을 거 같은데……. 어쩔까요?
이틀인가 지났나?
상황이 바뀌어서 그런가…….
사람이 아주 여유가 넘쳤다.
일단 말투부터 바뀌어 있었고, 애초에 말의 길이 또한 길어져 있었다.
‘정유현 교수한테 들은 게 있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밉상이지.’
김태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다가, 이내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제일 피해야 할 것이 바로 편견이라는 것을 떠올린 채 송신 버튼을 눌렀다.
‘만약 세브란스…… 아니, 다른 곳이라도 연구가 메인으로 진행되는 곳이 생겼다면…….’
막상 뭔가 말을 하려니 유현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 그렇다면…… 남산을 차지해 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말을 들어 보니 일부러 주변도 정리해 주지 않았다던데……. 그 말은 곧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남산을 치울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차라리…….
김태평은 그 후에 이어졌던 말을 떠올렸다.
둘이 친구였다는데 이래도 되나 싶긴 했지만, 하여간 뭐…….
합리적인 방향이긴 했다.
이순규까지도 딱히 문제 삼을 기색을 보이진 않아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박원상 교수님. 우선은 당장 장악하는 것보다는 그쪽에서 얻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하지만 제 아내…….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정말 라드가 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내라.
현경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어찌 되었으려나?’
아마 뭐…….
죽거나 라드 무리의 일원이 되지 않았겠나?
애초에 그 무리에 속한 놈에게 물렸던 것 같으니…….
‘죽지는 않았겠네.’
다른 계열의 라드.
그러니까 이전 세대의 라드였다면 죽었을 터였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저 지능이 높은 놈들과 초창기 라드들은 서로 배척하고 있었으니까.
이래도 되나 싶기는 한데,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진 김태평은 그대로 말을 받았다.
“지금 진행을 멈춰 뒀습니다. 이순규 교수님 아시죠? 외형이 약간 변하긴 했는데……. 그래도 뭐…….”
-아, 그렇습니까? 하긴 유현이가…… 보통 의사는 아니죠. 지금 어딨습니까?
진행이 멈춘 건 맞지 않나?
완전히 라드가 되었으니까.
외형도 약간 변한 상황이었다.
뭐 차차 더 변하긴 할 텐데, 하여간, 잡아 두고 있던 시점까지는 밥을 안 먹여서 별로 변하지 않았었으니까.
-원상아, 나 유현이다. 재난 본부 쪽에서……. 현경이 보고 있어. 김태평 팀장님 말씀대로 지금 좋아. 현경이 행복해.
저렇게 물어 대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했는데, 저따위 답이 나가고 있었다.
미친놈…….
‘역시 저 사람은 교수가 아니라…… 요원을 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 텐데.
뭐…….
어쩌겠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다행이다……. 지금 목소리…….
-아, 그럴래?
유현은 천연덕스럽게 이전에 녹음해 두었던 것을 틀어 주었다.
애초에 음질이 개판이라 이게 녹음인지 뭔지 알아챌 도리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전화가 아니라 라디오로 송수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조금 대화가 어색해도 괜찮았다.
“아무튼, 새롭게 얻는 정보가 있다면 다 주십쇼. 지금 시점에 들어오는 정보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지위가 달라지셨으니 기존에 있던 정보 중에서도 이제 접하게 되신 것들이 꽤 있을 겁니다. 그것도 다 알려 주세요.”
-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덕분에 박원상은 속아 넘어갔다.
그것도 완전히 깔끔하게…….
좋지 아니한가.
김태평은 유현의 악랄함을 떠올리다가 이내 물에 끓인 육포를 씹어 먹곤 침구에 누워 잠이 들었다.
딱히 경계를 서거나 하진 않았다.
명색이 전시회장이니만큼 창문도 없는 방이어서 그랬다.
“휴.”
10시가 넘은 시각, 그러니까 모든 인원이 5시간가량 잠을 잔 이후에야 일행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당장 차에 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건물 옥상에 올라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폈다.
국립 한글 박물관이 그리 높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용산까지는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죄 낮은 건물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꽤나 쉬이 확인이 가능했는데, 안타깝게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구조물들이 눈에 띄었다.
“저거……. 윤형 철조망 아닙니까?”
“간이로 설치한 모양인데……. 확실히 용산까지는 내려왔군그래.”
“이렇게 되면……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니, 아냐. 일종의 전진 기지일 거야. 사방을 둘러싸고 설치했잖아. 말은 수도권 군부대를 다 장악했다고 했지만 애초에 지 똥 숨기려고 다 박살 내기도 했고……. 말 듣겠냐? 지들이 가만히 있으면 거기서 왕인데. 병력 많이 없어.”
“하긴……. 그러고 보니 확실히…….”
“우리는 용산 공원 통해서 바로 남영동 쪽으로 이동한다. 가면서 생기는 변수는 그때그때 계산해서 대응하기로 하고.”
“네, 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