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스트 팬데믹-241화 (241/323)

241화 실마리 (2)

이순규, 이진호, 박재한, 오현경.

우연히 물린 이순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조리 유현이 주도로 한 실험 대상이었다.

사실 이순규도 유현 때문에 물렸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어찌 보면 모조리 유현에게 책임이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실험체라 할 수 있는 이들을 보고 있던 덕에 유현은 그들의 경과를 떠올릴 수 있었다.

‘둘은……. 아니, 하나는 사망. 하나는 라드화가 되었고…… 나머지 둘은 라드화가 진행되다가 인간으로 남았지. 순규보다는 이진호 형사가 그 경과가 더 빠르고 수월했어. 지금까지는 그렇게 된 이유가…….’

아무래도 숙주에 원인이 있을 거란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했더랬다.

이진호도 이순규도 뭐로 보나 보통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허나 박원상의 말을 들어 보면 좀 달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감이나 다른 바이러스에 의해 병발된 개체들은 모조리 호르몬 증가에 차이가 있다지 않나?

이렇게 되면…….

‘카운터파트가 있을 거란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보다 대규모 실험 시설에서 그 바이러스를 찾는다면…… 뭐, 변이가 생기면 또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볼 일이지.’

지금까지는 사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만 그런 짓을 하지,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중론이라기보다는 유현의 생각이긴 했지만.

어차피 집단 내에 적어도 라드에 대해서는 유현의 의견에 반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별반 다른 말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보통 박원상과의 대화가 끝나면 다들 알아서 흩어졌더랬다.

왜냐.

일단 자야 되니까.

다행히 대령의 배려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중노동에 시달릴 필요가 없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아예 할 일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허나 오늘은 예외였다.

유현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그랬다.

유현은 방금 그에게 물어 온 오예리 형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아.”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 박원상의 말에 의하면 모든 병발 감염자는 라드로 인한 영향이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최우식도 더 참기 어려웠는지 말을 보탰다.

“ARS-24의 변이체가 생각보다 다른 바이러스들…… 혹은 다른 바이러스가 불러일으키는 염증 반응에 의한 면역 시스템 활성화에 대단히 취약하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또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팬데믹과의 싸움에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 아닌가.

그렇다 보니 할 말이 대단히 많았고, 동시에 도움 될 만한 말도 많았다.

이순규나 양재원도 의사긴 했지만 아무래도 둘에 비해선 이쪽 둘이 훨씬 박식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든 잘 활성화시킬 만한 방도를 찾으면 라드화 중간에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치료법이 있을 거라는 얘기가 돼. 지금으로서는 바이러스가 매개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데…….”

바이러스는 생명체라기보다는 어떤 ‘존재’였다.

생명체라고 정의하기엔 다른 생명체와는 너무 달라서 그랬다.

일단 숙주가 없이는 스스로 번식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무슨 생명체란 말인가?

아무튼, 그런 주제에 한 숙주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DNA 재조합 등의 변이가 다른 생명체에 비해 엄청나게 활발한 편이었다.

대부분의 바이러스에서 백신이나 확실한 치료제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난데…….

“병발 감염이 일어날 경우, 양측 바이러스의 DNA가 합성이 될 가능성이 있어. 원래 같으면 일어나지 않거나 극히 희박한 확률로 일어날 일이긴 하지만…….”

유현은 여태 있어 왔던 인수 공통 감염병의 기원을 떠올렸다.

지금 그런 것까지 얘기를 해 줄 이유는 없어서 떠들지는 않았지만, 뭐 어쩌겠나.

배우고 공부한 것이 그거다 보니 자연스레 지식이 떠오르는 것을.

‘따지고 보면 결핵이나 홍역, 천연두 모두 원래는 인간에게 감염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들이지.’

멀리 갈 것도 없이 신종 플루만 해도 돼지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이러한 것들의 변이에는 당연히 숙주인 인간의 역할도 있었겠지만, 드물게 원래 인간에게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역할도 있다는 가설이 있었다.

실험실에서 빈번하게 재현이 될 만한 확률이 아니다 보니 여전히 가설로 남아 있지만 현장에 있는 의료진들 중에서 이를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단 유현은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 우리가 키로 잡아야 할 것은 역시 병발 감염이야. 남산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을 거 같은데…….”

유현의 말에 이번에는 김태평이 나섰다.

“그럼 원격으로 실험을 두고 보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죠.”

“흐음…….”

김태평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좀 두들겨 보았다.

‘확실히…… 말만 잘 들어주면……. 어차피 저쪽으로도 민간인이 공급되긴 할 테니 뭔가 되기는 하겠지.’

민간인을 공급한다는 말이 좀 소름 끼치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실제로 벌어지는 일인데.

실로 악마들이나 벌임 직한 일이었지만…….

이미 불가피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 안에 들어간 민간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소비가, 그러니까 희생이 되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의미가 있는 방향으로 희생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박원상이 협조적일 때의 일이야.’

박원상.

아니, 오현경.

그녀를 잃은 지 얼마나 오래되었나.

지금이야 박원상이 일말의 의심도 하고 있지 않다지만…….

‘사람이 처지가 편안해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이지.’

누군가를 회유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공작의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나.

특히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마약류 통제를 통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가는 자금줄을 막기 위한 공작에 투입되었던 김태평으로서는 정말이지 수많은 주요 요인들을 상대로 일을 해야만 했더랬다.

그런 일을 하면서 배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제일 뼈저리게 느낀 거 하나만 말해 보라고 한다면 역시 사람은 변한다는 점이었다.

좋게 변하면 좋은데 보통은 안 좋은 쪽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박원상을 언제까지 써먹을 수 있을까요?”

아마 유현이라면 질문의 진위를 바로 알아들을 것이라는 것이 김태평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대부분 그러하듯 딱 들어맞았다.

“아.”

유현은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짚었다.

“우리 녹음해 놓은 게 얼마나 있죠?”

“뭐……. 그건 조작하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한 달? 그 이상은 어려워요. 그나마도 만약 그쪽에서 다른 증거를 요구하게 되면 큰일입니다.”

“그렇겠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잡아 오기도 그런데.”

“잡아 와 봐야 라드일 텐데요. 아니, 보통은 이쪽이 당할 공산이 큽니다.”

“그렇겠지. 흐음……. 하지만 남산을 이용하는 게 좋겠는데. 들으셨겠지만…… 이건 굉장한 실마리입니다.”

“저야 잘 모르지만…… 의미가 있을 거 같긴 합니다. 뭐…… 이쪽은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김태평은 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내다보며 답했다.

원래도 밤이 오면 어둑해지는 수원 비행장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깜깜했다.

조심성 많은 대령이 전부 다 꺼 버렸기 때문에 그랬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따라 유독 더 많은 별들이 하늘 위에 아른거렸다.

물론 이 자리에 남은 이들 중 별 보면서 낭만에 젖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오예리나 양재원 정도나 될까?

특히 김태평은…….

‘남산에서도 주변으로 수색을 내보냈다……. 그러면 이쪽은 반드시 걸려. 전면전을 걸어오게 되면…… 그건 미친 짓이니 잘 막으면 될 일이고 참수 작전…… 이라면 대령을 날려 버리고, 될 수 있으면 김선태도 잡는다.’

김선태를 잡게 되면, 대통령은 가장 커다란 칼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그래 봐야 저 위로 쳐들어 올라갈 수는 없겠지만, 남산에 보다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가 있다면 김선태가 직접 오느냐, 온다면 이쪽의 피해를 과연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 것인가 정도가 있을 터였다.

‘어쩐다.’

안전하게 가자면 대령에게 상대가 침투 시에 헬기 등을 동원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알리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비록 김태평이 이쪽 군부대 구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마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이 있지 않겠나.

만약 그쪽으로 튀게 되면 괜히 군부대 위치만 발각되고 아무 실효가 없게 될 터였다.

딱히 대령을 배반한다는 데 죄책감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쪽에서 먼저 본부를 날리지 않았나.

박중 대위가 끌고 왔던 부대가 바로 도왔다면 본부장은 물론이거니와 부하들도 다 살아 있었을 터였다.

‘일단은 두고 보지.’

김태평은 굳이 이 사안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더랬다.

어차피 박중이 밖으로 나돌고 있는 데다가, 본인도 내일부터는 어느 정도 정찰을 돌 생각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대응이 가능할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소의 유현이라면 김태평의 표정만 봐도 이 사람이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그는 오직 아까 들었던 것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순규야, 우식아. 재원이 너도. 오예리 형사님은…….”

“저도 들을게요. 어차피 잠도 안 오고.”

“네. 그럼…….”

혼자 빠져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가 감염내과를 전공했고 그렇기에 가장 전문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 의료진의 의사를 묻는 건 의미가 있어서 그랬다.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

“네,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특히 최우식의 의견은 중요했다.

“가 볼 수 있다면…… 좋을 거 같은데.”

이순규는 숫제 급진적이었다.

“가 봐? 거길?”

“그래. 아무래도 직접 본다면…….”

“직접 보려면, 잡혀 온 민간인 대상으로 직접 실험을 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우리가 안 간다고 안 물리는 게 아니잖아. 내가 있으면 훨씬 도움이 될 수도 있어. 내 호르몬 레벨 등이 참고가 될 수 있겠지. 뭐, 이미 시기가 너무 달라져서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양심 운운하면서 실험 자체를 막아섰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또한 이 망한 세상의 일원이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어, 잠시.”

이제 막 양재원에게 물으려는데, 오예리 형사가 입을 열었다.

처음엔 그저 그녀의 양심 때문에 뭔가를 제지하려는 줄 알았다.

허나 이어지는 말은 아니, 그녀가 가리킨 곳에 보인 것은 모두를 경악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기…… 저거…… 이 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촘촘히 박혀 있던 별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자리한 건 하늘 위를 밝히고 있는 새하얀 빛이었다.

그에 더해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

이것들이 가리키는 건 단 하나였다.

“헬기?”

“우리 쪽인가?”

“아니, 아직 수리도 못 했는데.”

“그럼?”

모두의 얼굴이 김태평을 향했고, 김태평은 그로서는 드물게 낭패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