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정유현 (3)
소장은 김태평의 말에 십분 동의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 외에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이기도 했다.
실제로 김선태에게 당한 바 있지 않던가?
김태평이 굳이 그놈은 따로 첩자로서의 훈련을 받은 놈도 아니란 얘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위기감이 소장의 마음속을 잔뜩 점유하고 있었다.
“그냥 감시만 하면 되는 겁니까?”
“사실 그건 중책 정도 될 겁니다.”
“중책이요……?”
“상중하로 나누었을 때, 한 중간쯤 되는 선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하책은?”
“하책은 첩자가 들어왔는데 아무 대응도 못 하는 것을 의미하죠.”
김태평은 높은 확률로 그 꼴이 났을 게 뻔한 이곳을 둘러보았다.
딱히 새로운 첩자가 올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김선태가 있으니까.
얘기를 피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김선태가 단기간에 얼마나 소장의 신임을 얻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일행에게 다가오는 이들 중 태반은 정유현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고, 딱히 김선태라는 놈이 얼마나 중요한 놈인지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곤 했기에 그랬다.
‘운 좋은 놈…….’
김태평은 강변으로 갈 게 아니라 따로 빠져서 여기로 왔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잠시 자책했다.
물론 정말 잠시뿐이었다.
그는 무용한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랬다.
“그렇다면 상책은……?”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김태평은 근심이 가득해 이대로 두면 곧 말라 죽을 거 같아 보이는 소장을 보며 말했다.
“첩자를 이용하는 겁니다.”
“이용……?”
“잘못된 정보를 습득하게 하는 것이죠.”
“아……. 가령 예를 든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경우에 따라 다를 겁니다. 우리 측에서 매복해서 적을 섬멸할 역량이 있다면 오히려 약해 보이는 것이 좋겠죠.”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수원에서 온 병사들이 더해져도……. 상대가 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역습?
전에는 정말이지 운이 너무 좋았더랬다.
그거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고.
라드 생산을 방치했다면 지금쯤 수원은 쑥대밭이 되어 있지 않겠나.
어떻게든 도망쳤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겠지만, 재수 없으면 거기서 죽었거나 더 재수가 없었으면 어디로든 끌려갔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상황이 달랐다.
뭐가 되었건 간에 생존자들이 꽤 많이 살아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앞에서는 대놓고 그런 짓을 하진 못할 터였다.
“오히려 강성해 보이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럼……?”
“수원의 병사들을 마치 이곳의 병사들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죠. 또 여러 연락 체계를 통해 많은 수의 동맹이 있는 것처럼 위장도 하고요.”
“연락이라…… 지금 그런 게 가능한 곳이 아예 없는데…….”
“있는 척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게다가 이곳은 고속터미널 아닙니까? 강남에서도 가장 물자가 풍부한 곳 중 하나였으니……. 뭐가 되었건 간에 그리 이상하게 여기진 못할 겁니다.”
“하긴, 그렇긴 하죠.”
소장의 얼굴에 잠시 그리움이 깃들었다.
확실히 평화롭던 시절에 이 근처는 풍요 그 자체였다.
물론 청담이나 압구정처럼 하이 엔드 급의 업장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더 다양한 물품들이 있지 않았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또 다양하기도 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실수하게 되면 말짱 꽝입니다. 더 많은 수의 첩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들을 색출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냥 색출하는 편이 안전할까요?”
“문제는…….”
김태평은 대통령을 떠올렸다.
그는 그냥 정치인이었다.
특수 훈련을 받았기는커녕 군대도 안 갔다 왔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이런저런 명목으로 면제되는 경우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 정부 수반을 이루고 있는 이들 중 군필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놈은 타고났어.’
정유현과 비교하면 정유현 교수가 정말 싫어하기는 하겠지만…….
둘은 상당히 비슷한 면이 많았다.
특히 이러한 공작에 대해 타고난 것이 많다는 점이 그랬다.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통찰이 있다, 이 말이었다.
“첩자들끼리도 서로 알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원래 보통 그렇게 하죠. 하나가 잡혀도 나머지가 안전할 수 있도록.”
“점조직이다……. 이 말이군요.”
“대강 알고 계시니 얘기가 편하겠군요.”
“저도 명색이 파출소 소장이었으니까요.”
나름 검문검색을 해 봤다, 이 말이었다.
사실일 터였다.
보도가 안 나갈 뿐이지, 대한민국에도 나쁜 놈들은 얼마든지 많았으니까.
심지어 중국이나 북학에서 보내온 간첩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업장을 차려 놓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일단은 색출에 더 힘을 주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지금 의심 가는 몇몇에게는 아예 이쪽을 파악할 기회를 안 주는 것이 맞을 거 같고요.”
“기회를 안 준다……?”
“네. 마침 일이 많지 않습니까? 버스 정비 같은 걸 시키거나 그 주변 청소 등을 시킨다면 실제로 이곳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파악이 안 될 겁니다. 딱히 조작하는 것도 아닐 테니 수월하기도 할 것이고요.”
“하긴, 그렇군. 그래요. 그렇게 하죠.”
“네, 그럼.”
“아, 아니. 물러나기 전에…… 식사라도 합시다.”
소장은 상당히 흡족해하는 얼굴이었다.
아직 김태평이나 유현 등이 지목한 놈들이 진짜 첩자인지 아닌지 확실한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뭔가 전문가들이랑 일한다는 느낌 때문일 터였다.
아니면 그저 혼자 결정하는 사안이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안도감 때문일 수도 있었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김태평은 소장의 이러한 면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한번 편견이 생겨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역시나 이놈이 가진 것이 재주에 비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좋죠.”
하여간, 과하게 가진 것은 맞았다.
지금 내오는 것들만 봐도 그랬다.
하몽 등과 같은 보존 식품이긴 하지만, 하여간, 고급 식재료를 아낌없이 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세상이 망한 지도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정도의 식사를 즐길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특권 중의 특권이라고 해도 좋았다.
해서 딱 먹을 때만큼은 김태평도 불만을 고이 접어 둔 채 오랜만에 맛보는 진미를 입에 넣고 천천히 굴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일행 중 유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물자가 풍부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특별 대우까지 받는 입장이다 보니 숙소 상태도 대단히 좋았다.
침대가 줄줄이 놓여 있을뿐더러 한정된 시간뿐이지만 전기도 들어왔다.
그 덕에 음악도 들을 수 있었고, 좀 부지런 떨면 이전에 받아 두었던 영상 등도 감상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독립된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커다란 장점이었다.
“뭐……. 소장이 다스리는 체재하에서는 이곳이 오래 버티긴 쉽지 않을 겁니다.”
덕분에 김태평은 부주의하게까지 들리는 유현의 큰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에야 혹시 도청 장치가 있을까 봐 주의를 했지만 아무리 뒤져도 나오질 않아서 이제는 마음을 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김태평의 눈을 피해서 도청 장치를 숨길 수 있을 만한 인재나 공간은 보이지 않다 보니 나머지도 적어도 이 방 안에서만큼은 완전히 안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흠. 그렇다고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어 보이죠?”
“아……. 네. 능력 부족인 것치고는 나름 그래도 장악은 잘하고 있습니다.”
김태평은 답을 하면서 강변을 떠올렸다.
그쪽의 리더도 계층을 완전히 나눠서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이곳에 비해 상당히 강력한 무력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던 데다가, 소위 특권층이라 할 수 이는 군인들 간의 결속력도 좋아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랬음에도 망했지, 단 한 방에…….’
외부의 강력한 공격 한 방에 날아갔다.
이곳은 어떨까.
상대가 이곳의 물자를 포기할 생각으로 쳐들어온다면…….
사실 수원의 병사들이 있건 말건 간에 하루도 견디기 어려울 터였다.
강변 때보다 정부 측의 항공유 그리고 전차 부대의 수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걸 감안해도 그랬다.
원래 현대전에서는 공격하는 측이 제대로 된 중화기로 무장만 하고 있다면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수비 측의 주거 지역이나 생활 기반 시설이 방어 시설과 인접해 있으면 인접해 있을 수로 그랬다.
‘다행인 건……. 대통령이 욕심쟁이란 건데.’
아마 김선태는 원한 때문에라도 다 부숴 버리고 싶어 하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브레이크가 있다.
대통령이라는.
이미 김태평이 나가리가 되기 전에도 VIP와 그 수반들은 사치라고 해도 좋을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 않았나.
‘미친놈들…….’
항공유가 부족하다는 데도 기어코 헬기 등을 운용해 주요 인사로 분류되는 이들을 끊임없이 데리고 왔더랬다.
뭐 정말로 그들이 주요 인사였다면 불만이 있을지언정 폭발하진 않았을 터였다.
가령 감염 내과 교수나 백신 연구원들이나 하다못해 군인들 또는 특수부대원들과 같은 이들이었다면…….
‘셰프들……. 가수, 연주자들부터 데리고 왔지.’
허나 데리고 오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생존과 연관이 있는 주요 인사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김조은 박사 등이 라드의 위력과 동시에 그들의 한계를 정의해 준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한 기조가 명백해졌다.
어차피 하루 이틀 내에 끝날 사태가 아니고 또 적어도 그들의 안전은 보장이 된 상태라면 이전에 누리던 삶을 어떻게든 누려야겠다는 것이 너무 느껴졌다.
‘그런 놈들이 여길 불태울 리가 없지. 그래, 어쩌면…….’
첩자들을 이용할 방도가 떠올랐다.
가뜩이나 소장이 진짜 최선을 다해 방을 꾸며 두지 않았나?
각종 사치품은 물론이거니와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그림도 다 모아 놨더랬다.
애초에 신세계 백화점에도 갤러리가 있을뿐더러 서래 마을 쪽으로 가면 화랑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을 터인데…….
‘그걸 보게 하면 더더욱 공격 가능성은 떨어지겠군.’
어쩌면 회유보다는 거래로 안면을 트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만 되어도 이쪽에서는 한시름 더는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저쪽의 힘이 워낙에 강하기 때문에, 또 대통령이라는 명분 때문에도 이딴 식으로 낭비를 해도 점점 더 강해지긴 할 터였다.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이 말인데.
하여간 이쪽도 시간을 벌게 되면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우선 각지에 퍼져 있는 군부대들을 규합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뭐 뜻대로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것과 시도조차 못 해 보는 것과는 차이가 아주 크지 않겠나.
“근데 여기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 않던가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유현이 입을 열었다.
꿍꿍이속이 느껴지는 얼굴을 하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