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9화 (20/326)

019화. 감독님이 왜 거기서 나와

“뒤를 봐주던 리싱이 재빨리 붙습니다! 쓰리쉬의 그랩! 아, 피하고 당구킥!”

“징크시와 쓰리쉬가, 아! 울라프가 먼저 들어간 셈이 됐습니다!”

“레오니가 버텨낼까요? 울라프가 강한데요!”

“살았, 살았어요!”

“위기를 넘겼군요!”

“바텀 듀오가 스펠 소모 없이 위기를 넘깁니다. 쓰리쉬 쪽이 도리어 점멸이

빠졌는데요. 상당히 잘 흘려냈습니다.”

킬은 나오지 않았지만 박감독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쉽지만 관객석에 앉아있었기에 다시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휴대폰을 급히 꺼내들었다.

이건 생방송 중이다.

조금만 참고 다시보기로 돌려보면 된다, 돌려보면!

“처음부터 염두에 뒀었던 것 같은데.”

박감독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돌려볼 수 있겠다.

그는 화면을 양 쪽으로 펼쳐서 크게 볼 수 있는 휴대폰을 고른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시간을 돌렸다.

아군 레오니가 다소 급한 궁극기 사용으로 빈틈을 보이자, 적은 부쉬 안에 있

던 울라프와 함께 달려들었다.

레오니가 애써 기절을 먹여보지만 적 울라프는 칼같은 라그나로크와 함께 아

군의 원딜 쪽으로 접근.

울라프의 특성상 딜 지원만 있다면 충분히 아군 원딜을 잡아낼 수 있었겠지만..

타워 아래쪽 미묘한 사각 시야에 숨어있던 리싱이 몸을 드러낸다.

방호와 점멸로 적과의 거리를 충분히 줄인 리싱이, 즉시 스킬을 사용하지 않

는다.

한발짝 사이드 스탭.

상대 쓰리쉬 역시 모습을 드러낸 리싱을 의식해 점멸과 함께 그랩을 던지지만

허공을 스친다.

아껴두었던 접근기와 궁극기로 상대 원딜과 서포터를 잠시간 무력화.

당황하는 징크시의 체력을 빼서 교전에서 이탈시키고, 딜 지원을 받지 못한

적 울라프와 아군 바텀 듀오 쪽으로 다시 합류해서 자연스럽게 갱을 흘린다.

제법 활기찬 채팅도 노출되고 있었다.

- 방금 절름발이 스탭 뭐냐;

- 오ㅋㅋㅋㅋㅋ 쉐도우 복싱 뭐누

- 방플 아니냐

- 오늘 스톰 경기 있는 날인가요?

- 레오니 뭔데ㅋㅋㅋ 리싱 혼자 게임하네

- 무슨 방플을 함ㅋㅋㅋㅋ

- 이거 2군 경기임

- 아 집중좀 하라고 ㅡㅡ 저걸 맞아주네

- 님들 이거 무슨 경기인가요???? 저 선수 누구에요?? FWX를 한명도 몰라서

“차-니! 차-니! 역시 퓨체탑! 차-니가 솔킬을 냅니다!”

해설진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FWX의 탑이 스톰의 탑을 상대로 솔로킬을 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의 장면이 꽤 인상깊었기에 경기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

았다.

그의 예상이지만, 리싱은 울라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리싱은 울라프의 동선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노림수들을 자연스럽게

흘려내왔다.

단 한번의 실수도 없었다.

레오니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오니의 궁극기는 흔한 실수

였다.

적 바텀 듀오를 적중시키지도 못했으며 사용해서도 안되는.

하지만 과감한 사이드 스탭.

저게 진짜였다.

상대의 스킬과 행동, 스펠 예측?

할 수 있지.

근데 잘 안된다.

상대도 역시 예측하기 때문이다.

박감독은 아까 전에 했던 생각을 수정했다.

‘바위게에서의 그건.. 위험한 플레이가 아니었군. 실력이.. 확실히 더 위야.’

그가 했던 생각을 관계자들이 하지 않을 리 없었다.

화면은 조금씩이지만 리싱을 중점적으로 잡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그는 깔끔한 정글링을 감상할 수 있었다.

‘리싱 잘 못한다며!’

데이터가 그랬다.

역시 직접 봐야하는 게 있는 법이다.

“FWX가 용을 가져갑니다!”

킬이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경기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정글을 갉아먹힌 울라프는 있는둥 마는둥 한 존재가 됐다.

“레벨 차이가 2가 나는데요! 권건 선수의 리싱은 꼭 탑 리싱을 보는 것 같군요.”

박감독은 점점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한 선수에게.

“라인 정리를 위해 스킬이 빠졌던 요른이 순식간에 녹아버립니다! 아직 너무

말랑말랑해요.”

“전성기가 오려면 한참 멀었는데요! 리싱과 트린 앞에서 꼭 아이스크림이 된

것 같아요!”

“아직 쌀쌀한 날씨지만 이럴 때 아이스크림이 또 각별하죠. 간식의 도시, 대

전입니다.”

“하하, 캐스터님 기분이 좋으신가본데요. 이상한 소리를 하시고. 저도 대전을

사랑합니다! 대전 FWX! 찾고 또 찾고, 자꾸만 탑으로 옵니다! 텔로 복귀하자

마자 한번 더!”

“FWX의 경기력이 너무 좋습니다!”

해설진은 으레 그렇듯 신이 나서 팀의 연고지를 언급하며 가열차게 중계를 이

어나갔다.

정글의 개입이 없었던 스톰의 탑은 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라인까지 망한 것은 아니었다.

스톰은 어떻게든 다양한 방향에서 게임을 풀어보고자 했다.

“아!”

리싱의 와드 방호에 미드에 서있던 상대 징크시의 따끈따끈한 점멸이 바로 빠

진다.

“징크시는 약간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죠?”

“맞아요. 리싱이 심리전을 건 것 같습니다.”

박감독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기세가 완전히 넘어갔다.

게임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이런게 아닐까?

상대의 마음을 꿰뚫는 것이 너무 원숙하다.

신인에 가까운 선수가 보여줄 만한 플레이가 아니었다.

처음에 그가 생각했던 ‘위험을 감수하는 플레이’를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그것

은 그대로 상대의 두려움이 됐다.

이 선수가 오늘 컨디션이 굉장히 좋다, 플레이가 뛰어나다.

그러니까 되도록 피하자.

이런 마음들이 들수록 움직임은 쏠린다.

FWX는 스톰에 비해 강한 팀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었지만 움직임이 제약된

상대에게까지 밀릴 정도로 게임을 못하는 팀은 아니었다.

“스톰이 사이드를 공략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요!”

“하지만 훤하게 읽히고 있었습니다. 잠시 백스가 초시계로 버티는 사이, 스펠

로 합류한 차니 선수가 더블 킬, 트리플 킬을 달성합니다!”

“하아.. 어느새 차니선수의 트린은 괴물이 되어버렸네요.”

“정말 독보적인 아이템 트리인데요. 오로지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돋보입

니다.”

“요른도 손을 쓸 도리가 없습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나요? 네, 끝날.. 끝날 것 같습니다..?”

“텔을 타고 온 백스가 그림자 물결로 접근합니다! 아! 따끈따끈한 존야를 못

쓰고 죽지만 경기 결과에는 아무 상관도 없죠?”

“GG!”

게임이 끝났다.

박진현 감독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평가하러 왔다가 마치 일반 팬처럼 게임에 완전히 몰입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소리를 질러서 목도 쉬었고, 꽉 쥐었던 손이 아직도 땀으로 축축했다.

후반은 다소 일방적인 느낌이었는데 이것도 시원하고 재미있었다.

권건의 리싱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히 킬을 많이 따내지는 않았지만 게임 자

체를 만들어나갔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봤다.

물론 1군 경기와 2군 경기는 다르다.

2군 경기에서 제 아무리 날뛰어도 리그 간의 벽은 크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 FWX다!

박감독은 경기 중반부터 가고 싶었던 화장실로 급히 뛰어갔다 왔다.

자리에 돌아오는 중 바라본 무대에는 POM을 받은 권건이 있었다.

훤칠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경기를 보고나니 이것 마저 좋다.

팬이 많이 붙겠는걸.

리싱처럼 머리를 민 썸네일 합성도 잘 어울릴 것 같다.

“권건 선수가 리싱을 봉인하고 연습을 많이 했나봐요.”

캐스터가 궁금했던 부분을 대신 물어봐준다.

“네. 제 플레이를 봤을 때 아쉬웠던 부분이 있어서 꾸준히 노력했습니다.”

음, 좋아.

말도 더듬지 않고 목소리도 좋다.

“FWX의 오늘 운영이 정말 좋았는데요. 누가 오더를 하나요?”

“게임은 항상 팀원들과 함께 상의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합니다.”

박감독은 2군의 감독인 양태진에게 들어서 주 오더가 권건인 것을 알고 있었다.

겸손한 대답이다.

하지만 이것도 좋다.

제가 하는데요? 같은 대답보다 훨씬 낫다.

“에이, 그래도요. 다른 선수들과 약간씩 안 맞았던 부분도 있던데요. 민초 선

수의 레오니라던가.”

FL의 인터뷰는 LKL보다 조금 더 짖궂은 면이 있다.

상대적으로 선수들이 어리거나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캐스터는

인터뷰를 조금 더 자극적으로 진행한다.

선수를 조금 놀리면서 새로운 매력을 찾아주거나,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말을

하게끔 유도하거나 하는 부분들이다.

“아, 지호 말씀이신가요? 아직까지 호흡을 맞춘 시간이 짧아서 그런 것 같아

요. 조금 더 지켜봐주시면 말을 하지 않고도 생각이 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

겠습니다.”

하지만 권건은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팀의 미래를 기대하게 말한다.

팀 승리 화면을 배경으로 둔 선수의 말이 꽤 설득력있게 들렸다.

대답이 생각과 조금 달랐던지 캐스터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방긋 웃었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다.

“아유. 말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게임도 잘하고. 인기 많겠어요?”

“그렇..그렇지는 않습니다.”

태연하던 권건이 드디어 조금 당황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캐스터와 해설자는 이때다 싶어 서로 마이크를 잡기위해 다퉜다.

그때였다.

“어?”

카메라에 바보같은 얼굴로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박진현 감독이 잡혔다.

단박에 그의 얼굴을 알아본 중계진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우리 FL 가족 여러분! 재밌는 일이 일어났네요! FWX 박진현 감독님 아니십니

까?! 귀한 FL에 어떻게 오셨나요!”

박감독은 당황한 나머지 표정을 무표정하게 바꿨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누구????

- 데려가려고 온거임???

- 뭘 데려가;; 그냥 구경 온거지

- 데려가려면 팀에서 말했겠지

- 1군 감독임;

- 근데 감독이 막 여기 있고 그래도 댐?? 이러니까 1군 밴픽이 그꼴나지

- 감독아 애들 관리나 해라

- 근데 권건이 폴리보다 나을듯;

마이크가 없어 말을 할 수 없는 박감독은 그저 당황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기만 했다.

“감독님, 우리 자랑스러운 퓨처스 리그의 선수들을 응원하러 오셨나요? 고개

만 끄덕이셔도 됩니다.”

캐스터는 이 보기드문 사건에 애교가 가득 넘치는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는 중년의 남자였기에 박감독의 긴장을 전혀 풀어주지 못했다.

박감독은 그저 당황한 얼굴로 살짝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제일 마음에 드셨나요?!”

카메라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는 박감독을 잡았다.

캐스터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 마음에 들어서 행복하시다구요? 예, 저희 퓨처스 리그의 자랑! FWX입니

다. 와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시 인터뷰를 이어가볼까요. 남은 시간이 많지 않

아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박감독은 울상을 지었지만 카메라는 돌아가버린지 오래였다.

신인이나 당할 것 같은 일을 지금 와서 당하다니!

“권건 선수, 사랑해주신 팬분들과 박진현 감독님께 한마디 드릴까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권건은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다만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

습니다. 그리고 박 감독님,”

권건은 예의바른 얼굴로 웃었다.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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