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만족 금지
커뮤니티 게시판은 시즌 초부터 뜨거운 떡밥으로 식을 줄 몰랐다.
그나마 FWX였기에 이 정도였지, 만약 이 사건이 상위권 팀에서 일어났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언성을 높였던 부분은 공식적으로는 사과문과 함께 마무리 됐지만, 팬들 사이
에서는 마무리 되지 않은거나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시즌 초 연패 중이던 FWX의 팬덤은 싸늘한 분위기였다.
그것과는 관계없이 새로운 한 주는 시작됐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니까.
3주차까지는 나는 FL소속이다.
“인사해. 이쪽은 아카데미 출신 장한울.”
새로운 정글러가 게스트 룸으로 들어왔다.
지호와 동갑인 막내 라인이었는데,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 것인지 긴장한 것인
지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이슈가 발생해서 조금 급박하게 진행됐다. 일단 이번 주 부터의 스크림은 한
울이와 함께 진행할 수 있도록 하자.”
내용 전달이 끝나자 대부분의 팀원들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사고 때문에.. 좋겠다. 운 개좋네 건이형?”
창민이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농담인 척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저 친구는 내가 자기 자리를 뺏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형, 난 알고 있었어.”
그 꼴을 쳐다보던 지호는 창민이가 멀어지자 붙임성 좋게 달려와 나한테 붙었다.
“이것 좀 봐.”
지호가 폰을 들어 커뮤니티 사이트 스크랩들을 보여준다.
- FWX 콜업이라도 해야하는거 아니냐? 대처 방안 딱 알려준다 [45]
- 2군 정글러가 백배 나음 [12]
- 사과문) “승리에 절박하다보니 감정이 격해진 것” 이새기들 정신 못차림 [26]
- 라온 트윗 [31]
FWX에 지극한 팬들부터 남의 팀의 불행을 구경하는 수많은 폭도들의 참견이
이어진다.
댓글 수가 제법 있는 것을 보니 꽤 관심을 많이 받았었나보다.
“근데 이제 형 없으면 우리 어떡해? 나 집으로 돌아가기 싫단말이야.”
지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과 동갑인 정글러가 그리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 다른게 없다.
“너도 잘 해서 올라오면 돼.”
“형! 딱 기다려, 내가 꼭 1군 갈테니까. 나 친삭하면 안돼. 진짜. 맹세?”
스톰으로 가고 싶다더니.
마음이 바뀌었나?
“지호야, 건이 잠깐 빌리자. 한울이한테 사옥 안내도 좀 해줄래? 부탁한다.”
양태진 감독님의 양해로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걸었다.
사옥은 꽤 넓어서 지금같은 추운 날씨에 좋은 산책로가 됐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네. 나는 너랑 더 많은걸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도 아쉽습니다.”
“건이 넌 정말 어른같을 때가 있네. 가끔은 나보다도 어른스러운 것 같다.”
내심 마음이 뜨끔했지만 그냥 웃어보였다.
“나 박감독님한테 이런 말도 했다. 아직 우리 컨텐츠 촬영도 한번도 못했고,
애들한테 건이 네가 가르쳐 줄 것도 너무 많다고.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되겠냐고.”
감독님은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그건 내 욕심인거고. 너는 1군에서도 잘 할거야. 1군으로는 처음 올라
가지? 너무 긴장마라. 너무 방심하지도 말고.”
“감사합니다.”
FWX가 자꾸 나한테 감동을 주네.
1군 감독을 견제하기 바쁜 스톰의 2군 감독과 너무 비교된다.
“전해들었다. 한번은 주전으로 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며?”
“네. 1군 주전 선수님만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올라갔다가 빈 손으로
내려올 수는 없으니까요.”
감독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건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
렸다.
“그 한번이면 충분할것 같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 남은 경기도 잘 부탁한다.”
그렇겠지.
겸손한 척 말했지만 나는 별로 무섭지 않다.
내가 한 요청은 하나 뿐이다.
이번 시즌 내 최소한 한번의 출전.
나를 스캔들을 덮으려고 불렀건, 팬들의 반감을 잠재우기 위한 장치로 쓰기위
해 불렀건간에.
무슨 경기든 단 한번이면 된다.
#
“미래를 향한 도전, 리그오브서머너즈 퓨처스 리그 스프링 스플릿! 퓨처스 리
그에 오신 가족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3주차로 접어든 날이자 라운드
1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죠. 오늘의 첫번째 경기는 부산 호넷과 대전 FWX의 경
기로 시작합니다!”
“1주차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2승 2패로 나쁘지 않은 출발을 했던 호넷인데
요. 지난 주에 모든 경기를 패배하면서 2승 6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FWX는 한번의 패배 외에는 전부 승리를 챙기면서 7승 1패로 현재 가장 윗 열
에 위치해있죠!”
“그야말로 기세를 탄 경기력! 오늘 부산 호넷은 FWX를 막아낼 수 있을까요?”
왠지 조금은 사람이 많아진 듯한 경기장에 입장하자 환호성이 쏟아진다.
“상대는 탑 라이너가 약한 팀이다. 챔피언 폭이 견제 쪽으로 쏠려있어. 기억
하지?”
“원딜은 1군에서 샌드다운 된 친구거든? 바텀 중심으로 오더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
감독님과 코치님은 여러번 말했던 정보도 끊임없이 주지시키려고 애쓰면서 경
기를 준비했다.
“아마 바텀 중심 조합을 짜왔을 거야.”
우리의 예측은 그랬다.
하지만 밴픽은 전혀 색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뭐야? 다리오스 픽한거야? 진짜로?”
“저걸?”
우리의 예상과 달리 상대가 4픽부터 극단적인 픽을 고르기 시작했다.
밴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후픽이었던 우리는 최대한 미뤄뒀던 미드
를 르블란으로 픽했고, 상대가 서폿 유마를 가져가는 것까지 보고 마지막 픽
을 고민했다.
“유찬, 뭐할래?”
“배인이요.”
“진심이야?”
잠시 마이크로 웅성거림이 전해진다.
원거리 딜러지만 탑으로도 사용되는 배인은 양날의 검이다.
사실 나도 썩 좋아하진 않는다.
원딜 포지션이 왜 왕자님 소리를 들을까?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딜들의 손에 쥐여지는 챔피언들은 아주 연약하다.
잠시라도 가만히 두면 대부분 손쉽게 찢겨나가기 때문에 적극적인 시팅이 필
요하다.
그런데 야만전사같은 탑의 손에 쥐여진 원딜 챔피언?
이건 정말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득보다 실이 많은.
“쟤 다리오스 장인이야. 여기서 할 줄은 몰랐는데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할 수 있어요. 일단 13분 철갑궁 타이밍까지 정글 쪽 시야 관리만 잘 될 수
있게 지원받으면 일대일로는 차고 넘쳐요. 쟤 많이 상대해봤거든요. 자신있어
요.”
이유찬은 예전보다는 훨씬 더 나은 말을 할 줄 알게됐다.
그것이 탑 배인을 허락할 이유는 되지 않았지만, 양태진 감독은 고개를 끄덕
였다.
스크림에서 보여준 적이 있기도 하거니와 요즘의 이유찬의 폼이 심상치 않았
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름 명확하게 필요한 내용을 말하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다들 괜찮겠어? 이러면 개인기 조합이나 다를 바 없어. 조심해서 해야해.”
“전 괜찮아요.”
“제가 단단하게 갈게요. 어차피 저쪽은 이니시 없어요.”
몇몇 의견이 나오면서 모든 선택이 마무리됐다.
기세를 탔으니 한번 해보자는거다.
2군은 이런 점에서 참 가볍고 즐거운 면이 있다.
부산 호넷은 우리를 당황시키고 싶었겠지만, 우리도 상대를 당황시켰다.
이러면 깜짝 픽에서는 이겼다.
좋아, 일단 우리 팀 50점.
“다아아아아리오스! 배에에에에에인! 제 티어에서도 자주 보이는 화끈한 픽들
이 선택되면서 밴픽이 마무리됩니다! 너무 좋아요!”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맞받아치는 픽! 두 팀의 기세가 만만치않습니다!”
FL만의 매력이 잔뜩 묻어나는 밴픽에 해설진들이 기세를 높인다.
이걸 다른 말로는 근본없는 조합이라고도 한다.
근본없는 조합 대 근본없는 조합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당연하지만, 잘 하는 놈이 이긴다.
“믿는다 거니거니.”
“내 챔피언 무엇?”
“울라프. 개꿀.”
가벼운 대화로 긴장감을 던 우리는 게임에 집중했다.
“나 울붕이 되기 전에 게임 끝내자.”
“오케이.”
꿀이라도 묻은 것 처럼 오늘도 아펠을 고른 일도는 자신감이 넘친다.
함께 있는 것은 지호의 레나타다.
숙련도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지호는 유틸폿을 꽤 좋아한다.
아마 충분히 잘 버텨줄거다.
“나는 전령 좀.”
르블란으로 랴이즈를 상대하게 된 창민이는 불퉁한 표정으로 주문한다.
요즘 부쩍 거리를 두는 팀원들에 대해 불만이 많아진 모양이지만 게임에 큰
지장을 줄 정도로 틱틱거리진 않는다.
“접수.”
어차피 얼마 안 볼 친구니 상관없다.
1군의 미드라이너는 어떤 성격일까?
김창민보다는 낫겠지.
유찬이는 자신한대로 정말 적극적으로 라인전을 했다.
정말 적극적으로.
거의 상대 타워 앞에서 뛰어들기 일보 직전까지.
“유찬아, 퍼블은 안된다.”
“정글 아래 바위게라며?”
“찬이형, 갱 말고. 솔로킬 따이지 말라고.”
지호가 내 말을 알아듣기 쉽게 번역해준다.
“제가요? 퍼블을? 딴다는 뜻이겠지?”
유찬이는 웃음기 넘치는 목소리로 상대 다리오스를 압박했다.
우리 탑이 자신감을 보이고 있으니 나는 적 정글이 탑으로 향할 여유가 없게
만 만들어주면 된다.
나는 빠른 정글링과 초반 주도권을 이용해서 비예고를 쫓아다닌다.
끊임없이 상대 정글을 찾아내고 괴롭힌다.
“비예고 레드 쪽. 바텀 땅굴 보려고 할 수도 있어.”
흘끗 본 탑에서는 아슬아슬한 거리 조절과 구르기가 계속되고 있다.
저레벨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배인 쪽이 유리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닐거다.
그래도 알아서 잘 할거다.
이유찬의 연습시간 만큼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테니까.
아, 나는 빼고.
“진 노플.”
“접수. 적 두꺼비까지 먹고 빠져도 돼.”
“땡큐.”
경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예상대로 탑 구도는 크게 무너져 있었고, 미드 압박도 나쁘지 않았으며 바텀
은 상대가 소극적인 픽을 가져가서 오브젝트를 차지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조금씩 킬을 주고받지만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다.
“건이형, 미드에 전령 좀.”
타이밍이 적절했기에 전령을 들고 미드로 향한다.
서폿 레나타도 백업을 오면서 자연스럽게 미드 압박이 시작됐고, 탑에서는 솔
로킬 소식이 전해진다.
“퓨-체탑! 차-니!”
헤드셋 너머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환호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나이스.”
“믿고 있었다구?”
좀 더 올라간 분위기 속에서 기세를 몰아 미드에서 소규모 교전이 일어났다.
전령을 미처 막지 못한 호넷이 빠져야할 타이밍에서 빠지지 않고 응수해온다.
와우. 젊은 혈기.
이걸 싸우네?
“싸움 난다, 싸움 난다!”
“쭉 봐. 괜찮으니까 쭉 싸움 봐!”
이럴 때 빼면 오히려 손해다.
- 더블 킬!
망설임없이 전진한 내 울라프가 미드로 합류한 상대 랴이즈와 진을 처지하면
서 기분 좋은 메시지가 떴지만, 타워의 마무리가 늦었는지 나도 회색 화면을
볼 수 밖에 없었다.
- 제압되었습니다.
현상금을 적 서포터 유마에게 넘겨주며 다른 상황을 살핀다.
유찬이, 유찬이는..
“다이브 감! 일단 궁썼어!”
깜빡했다.
우리 탑은 이유찬의 배인이다.
현상금이 후하게 걸린 배인이 덩굴째 적 포탑으로 굴러들어간다.
탑 라이너, 멈춰!
이 탑은 심각한 구르기 중독이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