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루키 헤이징
“하씨.”
박진현 감독은 아차 하는 기분이었다.
대기실에서 만났던 상대 감독 최필립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애 데뷔전이니까 살살 가자니까..”
서로 어림도 없는 말이었지만 절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첫 번째 밴 페이즈를 마치고 난 후 상대 미드라이너의 선호픽을 대비해 아자
르를 가져왔는데.
상대는 릴리야와 녹턴을 가져갔다.
“녹턴 정글인가?”
“릴리야도 같이 픽했어요. 아닐 것 같아요.”
“릴리야 탑은?”
“미드 녹턴일 수도 있죠.”
“그거 좀 지났잖아.”
“탑 릴리야나 탑 녹턴도 좀 지났어요.”
박진현 감독은 상대가 완전히 권건을 타게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엔트리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테니 구상이 완벽하지는 않을거다.
“건아, 둘 다 열고 생각해보자. 더 가면 밴 쏠릴거다. 정글 뭐 할래?”
“헤크림 하겠습니다.”
“괜찮겠어?”
“아마 정글 릴리야일 것 같아요. 괜찮아요.”
“오케이.”
생각보다 권건은 태연했다.
박 감독은 괜히 자기가 더 걱정한 것 같아 살짝 미소지었다.
FWX는 헤크림에 더해 상대를 억제하기 위한 레오니를 가져갔다.
그러나 상대의 픽은 한번 더 FWX를 흔드려고 했다.
“세츠?”
“음.. 세츠 탑 아니면 서폿. 지금 정글은 어렵고. 아자르 상대로 미드 오면
우리가 주도권 휘두르면 되고.”
“그렇겠지. 녹턴, 릴리야, 세츠. 아직 탑이 안 나왔을 가능성도 있어. 그럼
봉구, 뭐 할래?”
“음.. 저는..”
“저쪽 지금와서 해봤자 완성된 한타 조합은 안될테니 한타 기여도 있는 픽으
로 가자. 요른 할래? 만에 하나 미드 릴리야라도 아자르가 상대 못할 건 없
고. 정 안되면 라인 스왑 걸어.”
“그럼 냐르할게요.”
“냐르, 괜찮겠어?”
박 감독은 문봉구의 이런 선택이 오랜만이었다.
뭐가 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문봉구의 선택은 대부분 사이언, 그라가즈, 요른
셋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냥..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요. 음. 그리고.”
문봉구는 권건을 흘긋 바라봤다.
“예, 또. 우리 막내도 있으니까. 에. 뭐, 그런 생각이여요. 오늘 첨 나온 막
내도 상대 정글이 뭔지 모르는데 안 떨잖어요.”
박 감독은 행복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얄미웠던 상대팀 감독과 코치 박스에 앉아있을 윤도형 생각은 저
편으로 날려버렸다.
그저 요 신입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낯선 환경이나 상대의 밴픽에 놀라지도 않고 침착한 태도하며.
문봉구 입에서 저런 기특한 말이 나오게 하기까지?
승패가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박 감독은 문봉구의 말 자체가 놀라웠다.
“고맙다, 고맙다 방구야.”
“감독님. 저 방구가 아니라 봉군데..”
“그래, 냐르야. 우리 방구, 방구 하자.”
“우리 감독님 감성 터졌다. 완전 아무말.”
웃고 있던 FWX의 바텀 듀오가 생존력을 챙긴 졔리까지 더해 픽을 마무리했다.
“와, 이번 밴픽은 정말 재밌게 돌아갔습니다!”
“저희 모두 못 맞췄네요! 피닉스가 거의 전 라인에 걸쳐 밴픽 심리전을 걸었
죠? 밴픽에 선견지명이 있다는 우리 남동현 해설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
는 픽이었어요.”
“피닉스가 신인 정글러의 기를 죽여놓고 싶었던 걸까요? 결국 픽은 탑 람블,
정글 릴리야, 미드 녹턴으로 이동합니다. 바텀은 진과 세츠로 마무리했구요.
밴픽 구도를 상당히 교란시켰습니다.”
- 이게 무슨 조합이냐
- 난 이런 조합 LKL에서 자주 나오면 좋겠음 맨날 똑같은거만 나오고
- 녹턴 잘키우면 양학할 것 같은데? 해외에선 요즘 다시 뜨고 있음
- 릴리야 원툴 이니시 아님?
- 상대가 신인이자너ㅋㅋㅋㅋ
- 엄청 망하거나 엄청 잘 풀리겠는데
- 일단 신인은 망한듯;
- 상대가 FWX라서ㅋㅋㅋㅋ 별로 걱정이 안된다
- 너네들 잊고있나본데
- 피닉스도 9위임
“과감하고 좋은 전략이에요. 하지만 피닉스에게 빠른 스노우볼링이 필수겠죠.
어떤 컨셉인지는 알겠지만, 타이밍을 놓친다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어
요.”
“맞습니다. 양측 선수들 경기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
재밌다.
이 경기장으로 돌아온 게 꽤 오랜만이다.
회귀하기 전에도 한동안 월챔 시즌이었으니 LOS 파크에 앉아있는 이 기분이
새롭다.
그러고보면 나는 항상 게임이 시작될 때면 손 끝이 저릿하다.
플레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고양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뿐이다.
“상대 미드 시저는 이렐, 아칼린, 요녜같은 픽을 자주하는 선수야.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니까 조심하고. 탑도 뒤없는 타입이야. 원딜은..”
다들 알고있는 정보지만 최은호는 다시 한번 공지했다.
“녹턴 발 풀리지 않게 힘차게 해.”
“확인.”
나도 필요한 요구 사항을 뿌린다.
“저쪽은 주력 딜러가 없어요. 신입 정글러 흔들기를 하려다가 밸런스가 무너
진 것 같은데. 이런 게임이야말로 가만히 있으면 이길 수 있어요.”
“건아.. 그 신입 정글러가 너야.”
아하.
“그래서 분명히 카정 오거나 제 정글을 말리려고 할 거에요. 초반에 제가 잘
안풀렸다고해서 정글 쪽으로 과투자하면 라인전도 무너질 수 있으니까 조심하
세요. 자생할게요.”
“괜찮겠어?”
“네.”
한두번 당해본 일이 아니다.
오늘처럼 누가 정글이게, 누가 탑이게? 퀴즈를 내는 전략은 내 리그 전적이
남을수록 사라지겠지만, 정글 압박은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친구다.
오히려 익숙하다.
하지만 게임은 심리전이다.
대부분이 게임 속에서 벌어지지만 때론 다른 요소들이 크게 작용할 때가 있다.
피닉스는 FWX가 ‘랭킹 1위의 유망주’의 첫 경기에 공을 들일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며.
선수들이 ‘막내’의 데뷔를 도우라는 지시를 들었을 것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고.
오늘 처음 나온 신인이 실전 경험이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 밴픽을 혼란스러우며, 빠르게 굴리는 조합으로 짰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 정글러의 가장 큰 숙제는 나를 괴롭히는 것일테고.
이건 비겁한 게 아니다.
상대의 멘탈을 흔드는 정도로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다면 당연히 해볼만한 시
도다.
내가 정말로 신인 정글러였다면 지금쯤 눈 앞이 새하얘졌을 수도 있다.
정말로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경기 구역, 뒤에서 돌아다니는 스탭과 심판진.
자꾸만 줄어드는 밴픽 시간, 선택을 요구하는 딱딱하게 굳은 감코진의 얼굴.
모든 게 부담이다.
하지만 그 신인이 나다.
그래서 이 계획은 무의미해진다.
피닉스의 손에 남은 건 불안정한 조합 뿐.
“2레벨에 카정 올거에요.”
나를 상대로 신고식?
한참 이르지.
#
주전 자리를 양보하고 코치 박스 안에 들어간 윤도형은 자기가 비참한 신세라
고 생각했다.
불운이 겹쳤다.
퍼즈를 걸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버그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자기 잘못이 맞았다.
공부에 소홀했던 스스로가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윤도형 생각에, 정말 맹세코 심판의 표정이 너무 안좋았다.
사람을 아주 바보 취급하는 듯한 그 눈빛이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 목소리가 높아졌을 뿐인데.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개노답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팬들과도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
람이 없었다.
고작 스물 세살에 불과한 정글러는 쏟아지는 악플을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신인 정글러가 콜업되고, 아직까지 시간이 좀 있다던 감코진은 결국
신인을 무대에 올려버렸다.
“하···”
윤도형도 양심이 있다.
이를 악물고 권건의 활약 영상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FWX 게시판에서 권건
의 침투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게 된 영상은 확실히 뛰어났다.
자신보다 더 나은 피지컬.
그리고 제발 실패하길 바랬지만 결국 달성해버린 솔랭 1위.
오더만큼은 자신이 더 낫지 않을까 했지만 스크림을 해보니 이것마저도 밀렸다.
윤도형도 누군가를 밀어내고 올라왔기에 당연히 자신도 언젠가 후배에게 자리
를 물려주는 날이 올 것이라고 시원하게 말하고 다녔지만 결코 이런 식일 줄
은 몰랐다.
“씨발.. 너무, 너무 좆같다.”
권건이 진짜 미운 건 아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에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다.
그 때 매끄러운 권건의 보이스가 들려왔다.
“..초반에 제가 잘 안풀렸다고해서 정글 쪽으로 과투자하면 라인전도 무너질
수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자생할게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남 이야기 하듯이 말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윤도형이 보기에도 오늘 피닉스는 데뷔하는 정글러에게 가혹하게 대응했다.
만약 자기가 데뷔하는 날 저렇게까지 픽을 틀어서 가져왔다면?
솔직히 무너졌을 것 같다.
준비한 것들과는 너무 다르니까.
“햐, 애들 오늘 컨디션 엄청 좋네. 심상치 않다.”
“기세는 괜찮았어요.”
감코진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코치박스로 들어왔다.
그러다 자리에 멀뚱히 앉아있는 윤도형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근데 진짜 악귀같은 놈들이야. 릴리야가 재우면 탑 쪽에서는 람블 궁, 바텀
쪽에서는 진 W. 거기다 녹턴도 붙을테고. 말리지 말아야 할텐데..”
급히 말을 돌리는 박감독을 보며 윤도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와서 경기 지켜보고 선배로서 네가 피드백 많이 해주자.”
“네.”
약간 불편한 분위기였다.
게임 시작 후.
정말로 상대는 이른 타이밍에 카정을 들어왔다.
“건. 릴리야 지금 칼부 동선 타.”
“모르는 척 잘 해줘. 이번 라인 먹고나서 확인 좀.”
“알겠어.”
김예성은 차가운 스타일이다.
지난 시즌이 끝난 후 이적해왔는데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항상 다른 선수들을 불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느낌.
하지만 권건에게는 협조적으로 보였다.
“바텀은 어떻게 할까?”
“지금은 스펠 교환 괜찮아요. 정글 쪽 합류만 못하게. 예성이가 녹턴 발목 잡
아두긴 할텐데, 6레벨 타이밍 조심하세요. 은호형, 주기적으로 레벨업 타이밍
체크.”
“오케이.”
“응응.”
곽지운은 플레이에 집중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대신 서포터 최은호가 곽지운의 의사를 귀신같이 읽어내곤 한다.
그래서인지 항상 윤도형과 최은호 사이에는 묘한 오더 경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최은호는 권건의 말에 따라 이벤트 콜만 하고 있다.
“아, 나. 쫌 밀릴지도. 오랜만에 맞아보니 람블 쎈데?”
문봉구는 여느 때 처럼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근디 나 부시에다 와드 써도 되겠나? 그러면 쪼까 더 쎄게 때릴 수 있는데.”
“네. 지금은 들어갈 생각이 없어서요.”
“응, 오케오케. 땡큐.”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는 것 같았다.
권건은 초반 압박으로 상대 정글과 레벨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하.. 게임은 이기고 정글은 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윤도형의 마음과 달리 6레벨이 된 순간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