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05화 (106/326)

105화. 운명

“트페?”

“흠. 아쉽다. 우리도 좀 꼬였는데. 이럴 거면 리싱 우리가 가져와도 됐겠다. 스캬너는 2세트에 하려고 했는데.”

“그러게. 그럼 내가 좀 더 편했을걸.”

루루를 잡은 빅스의 서포터 진주호는 투덜거렸다.

“그래도 뭐. 사일 공짜로 받아왔네. 궁 뺏어 올 거 너무 많고~”

스프링부터 김예성의 자리를 차지한 미드 이지원은 기분 좋게 웃다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언제 또 이랬더라?

지난번에도 왜 아칼린을 풀었지.. 싶었는데.

쥐어박혔던 기억이 나는 것 같다.

펜타킬 쇼에, 그때 나는 거의 그림자 취급받았던 것 같은데?

뭐, 어쨌든 오늘 김예성이 잡은 건 르블란도 갈레오도 아니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아마도.

“기태 형, 오늘은 스틸 당하지 마.”

“그건 나한테 달린 게 아니지. 나는 스캬넌데.”

괜히 정글에게 핀잔을 줘봤지만 돌아오는 건 유들유들한 대답뿐.

“오늘 라인전 지는 사람 돌아가서 빠따 열 대씩.”

“빠따코코넛?”

“응, 올드하고.”

“니가 과알못.”

“나는 이길 테니까 24시 카페 스트로베리 밀크 마카롱으로 부탁.”

“나는 에그 타르트.”

“고급 입맛 지린다. 지 돈으로 사 먹을 때는 편의점 가면서.”

빅스 선수들은 제법 기운찼다.

원래부터 워낙 선수들 사이가 가깝고 유쾌한 팀인데다.

오늘은 충분히 해볼 만한 픽이었기 때문이다.

“각 섰다. 왜 트페를 하지?”

“그러게. 사리기만 해. 어차피 이번 버전에서 트페 몸 진짜 너무 약하거든? 다이브도 쉽지 않아.”

“개쓰레기임.”

“우리 라온이가 연도 착각한 거 아니야? 자기가 레전드인줄.”

“키키킥, 그럴 수 있지.”

“우리야 고맙지. 바텀은 서폿 쪽으로 견제하면 좀 잘 맞아주거든? 압박 잘 해주고, 미드는 갱만 조심해. 내가 자주 들를게. 재길이 형은 신인 압박 잘 해주면서 내 정글 좀 자주 들여다봐 줘.”

“아, 씨바. 맞다. 정글 권건이었지.”

“우리.. 그 이름은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 형, 벌금이야.”

“하..”

“나 팔에 소름 돋았어..”

“..집중하자..”

실제로 지난주부터 권건을 언급하면 벌금을 모으고 있는 빅스.

언급할 때마다 오천원.

이 돈은 멘탈을 위한 치킨 주문에 사용된다.

순식간에 빅스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그나마 김예성과 조금 가까이 지내던 원딜 강한빈만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

박 감독님이 조금은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우리를 믿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고.

“거니, 나에게 좋은 플랜이 있어.”

“뭔데.”

“일단 니가 최고로 빠른 타이밍에 갱을 와.”

“그래서.”

“플을 빼.”

“그런 다음?”

“그리고 내가 솔킬을 내.”

“어.”

“잠깐만, 아직 안 끝났어. 그런 다음 탑에 전령을 풀어.”

“...”

“그럼 초속 50km 냐르 부메랑 완성.”

이유찬은 아무 말이나 하고 있었다.

“초속 50km면 얼마나 빠른 거야?”

“음속보다 훠얼씬 빠르지. 맞으면 뭐가 남아나겠냐? 몸이 흩어지겠네.”

“소리보다 일찍 도착해?”

“근데 적에게 맞기 전에 부메랑이 흩어지지 않을까?”

“그럼 부메랑을 던지는 냐르의 신체는 얼마나 강한 걸까?”

바텀 듀오는 가볍게 과학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밥차는 바텀에 주면 초속 50km 칼리 창 보여줄게.”

곽지운이 전보다 말을 많이 하는 건 좋긴 한데.

한 명이 대화에 더 낀 것만으로도 점점 속도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고 있다.

다들 우주 진출이 꿈인가 보다.

너네 그거 로켓보다 훨씬 빠른 거 알아?

칼리는 평타가 신의 지팡이야?

이쯤 되면 김예성이 그만하자고 할 만도 한데.

오늘따라 고요하다.

먼저 픽도 요구하고, 말도 없어?

“예성. 왜 그래.”

“건아.”

“원하는 플레이 있으면 말해도 돼.”

그래도 우리 팀에서 제일 점잖고 안정적인 사람이다.

설마 빅스를 만날 때마다 불안해하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니, 흠흠. 오늘은.. 내가..”

김예성은 가볍게 헛기침으로 보이스를 이끌었다.

“..상대 사일은 우리 궁을 편하게 뺏어다 쓰면 된다고 생각할 거야.”

“음.”

“하지만 내가 라인전에서 차이 벌려놓을게. 아주 많이.”

이건 꼭 미드 라이너의 출사표 같아서 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스캬너가 누굴 납치하고 싶어 할까.”

“나.”

곽지운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운이 형이 각을 안 주면? 그럼 앞에 있는 누구?”

“제일 껄끄러운.. 건이..?”

확실히.

각을 주냐 안주냐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들어가는 챔프를 들고 있기 때문에 분명 그 순간이 올 거다.

있는 궁을 내가 삭제할 수도 없고.

빅스는 감정적인 편이라 꽤 설득력 있다.

근데 이번 조합에서는 내가 끌려가는 것도 괜찮을 텐데.

“건이..!”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팀원들은 엄숙해졌다.

“우리 정글 절대 지켜.”

뭐.

아무도 안 끌려가면 좋지.

#

“양 팀이 평이하게 경기를 시작합니다.”

“다양한 메타 속 꾸준히 ‘쉰’챔들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제는 자연스럽게 일부가 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인 선수들이나 LOS와 오래 함께하지 않으신 분들께 상대적으로 낯선 느낌은 있겠죠. 그래서 설명해 드리자면, 리메이크가 됐건 안됐건 이렇게 역사가 오래된 쉰챔들의 포인트는 원맨 타겟 메이킹이 좋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구챔들은 직선적인 경우가 많고, 최근 챔피언일수록 유틸이나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구챔의 경우 트리키한 동선을 짜기는 어렵지만 경기를 굳히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해설진은 빅스의 선택을 반겼다.

결과적으로 꽤 괜찮은 조합을 가져갔다.

물론 FWX 정글의 아이디를 가리고 봤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에 꾸준히 출석 체크를 하기보다는 드문드문 등장하는 정글 챔피언, 스캬너는 어쩌면 권건을 상대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빅스의 고민이 느껴진다.

“이 첨탑이라는 패시브가 상당히 특수한 개념이라서. 점령할 때도 골드와 시야를 얻을 수 있거든요. 오로지 이 챔피언이 등장했을 때만 나오는 새로운 요소!”

“그렇습니다. 그래서 좀 더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죠.”

“그리고 저는 항상 쉰챔이 나올 때마다 반가운데요! 스캬너 자체가 최근 솔랭에서 상당히 증명된 픽이기도 하고! 피지컬 좋은 사람이 하면 완전히 다른 챔피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중 유독 신이 난 해설가도 있다.

“진짜 두뇌와 피지컬, 둘 다 필요한 정글 구챔이다, 이 얘깁니다! 소수 전용 픽!”

“혹시 네 이야기예요?”

“아니요..”

- 그러고보니 혹시 권건도 C 가문임?

- ?와이럽니꺼?

- C겠냐?ㅋㅋㅋㅋ 퀀건이게?

- G겠지ㅋㅋㅋㅋ

- 차니가 C네

- 걔는 됐어요ㅋㅋㅋㅋㅋㅋ

“좋습니다. 빅스가 FWX에게 스캬너의 꼬리 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신인답지 않은 쉰인, 권건이 리그에서는 처음 상대하는 픽.

해설진의 시선이 정글에 꽂힌다.

“반대로 리싱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챔피언이거든요.”

“뭔가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 기대에.

“그래서 바로 보여줬죠! 권건의 리싱! 바텀에 살짝 개입하면서!”

“빅스의 바텀! 빈스, 플랜! 뒤로 쭉 빠집니다!”

“FWX의 바텀이 상당히 유리하게 시작!”

권건은 배신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 여윽시 권건이야!

- FWX가 또 자이언트 킬러지ㅋㅋㅋㅋㅋ

- 거인? 동족상잔의 슬픔..

- 무조건 후반 보면 된다 괜찮다 빅스 ㅎㅇㅌ!

- 어차피 뚜렷한 이니시 적어서 팍 터지진 않을 듯

“상대 정글도 바텀 방향에 있어요.”

빅스는 권건이 당황하길 바랐지만.

그들이 준비해온 픽은 도리어 힌트가 된다.

“동시에 스캬너 동선 읽혔어요! 사실.. 좀 솔직한 챔피언이거든요!”

“대신 빅스에서는 바위게를 그윈이 챙기면서, 최대한 상대 정글 성장 억제하려는 움직임!”

“바로 핑 찍힙니다, 바로 탑 방향으로 쭉 뜁니다!”

많이 상대 안 해봤을 거라고?

권건은 스스로가 특정 챔피언들을 얼마나 상대했는지 모른다.

숫자로 세는 것을 포기했으니까.

언제나처럼 가장 바쁜 움직임.

“지금 권건 선수! 방호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빅스 시야 다 피해서 들어가고 있거든요!”

“이거 완전히.. 완전히 스캬너를.. 아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근거는..”

LOS는 매 판 초기화된다.

회귀하듯이, 항상, 처음부터, 다시.

그래서 권건은 집중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탑에서 토이 선수의 그윈 점멸을 빼고 갑니다!”

김예성은 그런 권건을 흘긋 곁눈질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예성, 갱 조심. 10시 방향.”

미드 역시.

완벽해야 하는 라인이다.

그리고 예민하고, 섬세해야만 하는 포지션이다.

“알겠어.”

라인 관리, 그리고 일방적인 견제.

그리고 이어지는 손실 강요하기.

이것이 상대와의 차이를 벌리는 법.

“사일은 가만히 두면 진짜 밸류가 하늘을 뚫거든요?”

탑이 힘, 바텀이 협력이라면.

미드는 인텔리다.

“미드에서 라온! 스캬너의 갱을 자연스럽게 흘려냅니다! 지금 라온 선수가 사일 압박을 굉장히 잘해주고 있죠! 손실이 전혀 없어서 압박 계속됩니다! 이러면 그 밸류를 만나볼 수가 없어요!”

- 춋또 리벤지쨩 오늘 정말 최저네? www

- 라온만 만나면 왜 항상 비교되는 걸까 배 아프게 씨1발

- 얘도 친정팀 만나면 각성함???

- 사일(리벤지) CS = 브론즈(나) CS

- 아ㅋㅋㅋ 이게 강팀의 품격

- 트페 좀 불안했는데 되게 좋아 보이는데?

- 라온 지금까지 CS 하나도 안 놓친 거??

- 정글이 살짝 누워있어서 사일이 불리할 수밖에 없음 아직까지는

- 그래도 그렇지ㅋㅋㅋㅋㅋ

- 트페라 실제 골드 차는 더 날걸?

미드는 철저하게 받쳐주는 플레이를 할 수도.

하드 캐리롤을 맡을 수도 있는 팔방미인 포지션이다.

그래서 김예성은 자신의 포지션이 자랑스러웠다.

빅스에서 항상 원하지 않는 역할을 맡으면서 이 마음이 조금 꺾이긴 했지만.

이건 일반 게임과 팀 게임의 차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권건을 만나고 얻은 깨달음이 있다.

언제나 단어 그대로 ‘정글’에 불과했던 포지션에 대한 정의.

당연히 라이너보다 아이템과 레벨이 부족하고, 항상 나와 똑같이 ‘받쳐주는 포지션’이라고 생각했던 정글.

그럼에도.

여기서 만난 이 정글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라이너가 아닐까 싶은 정도의 성장을 이룩한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내 포지션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살짝 빠른 타이밍, 빅스가 용 쳐보는데! 이거 알기만 하면 무조건 막을 수 있거든요! 4레벨 타이밍!”

하지만 가만히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럼 권건에게 업혀 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 남는 시간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트페의 움직임! 알고있었나요!”

“빅스, 빠집니다! 리싱이 위에 턴을 쓴 사이에 뭔가 만들어보려고 했던 빅스의 전략을 여유롭게 실패로 돌립니다!”

“계산서 나오죠? 킬은 나오지 않았지만 탑에서는 스펠 손해, 아래에서는 용을 먹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초반 분위기를 FWX가 이끌고 있습니다!”

김예성은 밤을 새워가며 리플레이를 철저히 분석했다.

권건의 풀 보이스가 담긴 자료는 값을 매길 수 없었다.

우리 팀만 가질 수 있는 소중한 보물.

그리고 알았다.

권건은 완벽에 가까운 예측을 해내지만, LOS에 진짜 백퍼센트는 있을 수 없기에 이것이 스포츠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라.

계속해서 노력해라.

더 나은 프로가 되기 위해.

“나이스 무빙.”

권건이 가볍게 칭찬을 건넨다.

아마 권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

조금은 따라가고 있는 걸까?

김예성은 이게 승리만큼이나 짜릿하다고 생각했다.

“이 위치 와드. 굿.”

“당연하지.”

“아, 벌써 전령 타이밍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FWX가 주도권을 꽉 쥐고 있는데요! 미드는 이미 레벨 차이 나는 상황!!”

“빅스! 전령 어떻게 할 건가요? 의사 표현해야죠! 망설이지 말고 올 건지 말 건 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지금 빅스 아펠 왕자님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우왕좌왕! 우왕좌왕 왕자님!”

“이거 전령 치는 척 갔던 권건이 슬쩍 잘라보기 하려는 것 같은데요? 산개해있습니다, 빅스!”

사실 트페는 김예성의 진짜 취향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빅스의 픽을 유도하는 트페.

유도한 픽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확실한 메이커가 없는 상황에서 정확하게 타게팅을 할 수 있는 챔피언.

상대는 후반을 기대하겠지만 그 전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백퍼센트가 없을 이 게임에서, 너와 함께라면.

“불 좀 켜줄래?”

메타 불변(不變).

너의 시야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미드의 미학.

나는 가장 멀리 보는 자가 되고.

“나 맵 좀 보게.”

어디에서나 네 곁의 마법사가 된다.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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