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천마재림
박진현 감독은 아예 자세를 편하게 잡았다.
코치 박스에 있는 의자가 이렇게 편했나?
어디 브랜드지?
내려다보니 LKL에서 콜라보레이션한 제품이다.
역시 자국 리그, 국산 의자, 우리 정글이 최고야.
“지금 건이가 다 알고 컨트롤하는 거지? 아예 다 알고 있는 거야? ”
“네.”
“진짜 신인가? 이거 두 번째 세트는 볼 것도 없겠는데. 혹시 다른 선수들 마음이 다 들리나?”
“어쩌면 정말 육감 스탯 같은 거 찍은 거 아닐까요?”
“그건 어떻게 찍는 건데?”
“혹시 소설 같은 거 안 보세요? 우리 애들 많이 봐요. 봉구가 많이 전파했더라구요.”
“요즘 사람들은 소설을 보는구나. 메모해놓을게.”
박 감독은 뭔가를 적는 시늉을 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여태까지는 취미 생활할 여유도 없었다.
이제는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봐도 될 것 같다.
“유찬이 아자르는 어때. 상대가 쏠 선수라서 그런 걸까?”
“호넷 스크림에서 써서 괜찮았으니까. 최소 동부권에서는 꺼내 들 수 있는 카드라고 봅니다. 물론 조건을 많이 타지만요. 나중에 정말 한 번 정도 더 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적당할 때, 기록 남기는 정도로요.”
선수들은 의사에 따라 픽을 할지언정.
감코진은 그에 대한 평가를 정확하게 내릴 필요가 있다.
최수철 코치는 빠른 속도로 무언가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좋아.”
“근데요.”
“응.”
“우리가 아무리 플랜 X로 갔다고 해도. 이게 참. 유찬이가 놀라운 게 자기가 먼저 아자르를 하겠다고 했잖아요.”
잠시 손을 멈춘 최 코치는 신기한 것이라도 보는 양, 턱을 매만졌다.
“보통은 음식점에서 마음껏 드세요, 라고 한다고 해서 국자까지 씹어먹는 경우는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아마 충동적으로 고른 건 아닐 것 같아요. 아까 말하는 거 보니까 스왑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의외로 생각이 깊은 건 아닐까요.”
“음. 우리 유찬이는. 좀. 음. 좀. 패기로운 면이 있지..”
코치보다 늦게 퇴장하면서 자기 띠와 닭 스킨 때문에 골랐다는 것을 들은 박 감독은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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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오늘 경기, 정말 FWX가 완벽한 라인전 압박 수행 능력과 궁극기 유무를 통한 주도권을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퍼펙트 스코어에 가까운 게임이 나오고 있어요.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단 F.L.E가 오브젝트는 단 한 번도 먹지 못했구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탑에서 솔로킬이 터지지 않았다는 사실일까요? 탑 아자르가 역사적으로 몇 번 보이긴 했는데요. 여전히 지표가 많이 없어서 전투력을 측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네. 이게 차니 선수가 그렇게 미드와 인연이 깊은 선수는 아닌데, 미드 챔피언을 탑에서 쓴다는 거.. 이거 정말 범죄라고도 볼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싸울 팀들에게 부담이 커져요. 솔랭도 마찬가집니다..”
- 차니 저거 잡아가야해ㅋㅋㅋㅋ
- 여러분 제발 탑에서 하지 마세요 제발
- 얘는 [챌]입니다.. 아무리 등신 같아 보여도 명심하세요..
“그래서 어떻게든 체포해버리고 싶었을 텐데..”
“사건이 일어나질 않으니 체포가 안 돼요!”
“막상 사건이 일어났다면 신고를 못 했겠지만요..”
해설진은 막간을 이용해 FWX의 무서운 경기력을 토로했다.
“근데. 설마 FWX는 F.L.E가 바론을 간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 차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권건 선수가 경기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죠.”
“너무 늦으면 곤란할 텐데요. 방심했을까요.”
FWX가 바론 쪽을 돌아오는가 싶더니.
몇은 귀환하고 몇은 크게 돌아 정글로 들어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게 궁금한 사람은 해설진뿐만이 아니었다.
남서쪽에 둥지를 틀었던 한랭 여제 애시.
야망이 넘치는 최은호는 자신이 남부의 패권을 쥐었던 상황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항상 요구받아왔던 역할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자유로운 전투를 벌이는 오늘.
오랜만에 상대를 괴롭히는 이 순간.
살아있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낀다.
입마(入魔)일까.
자꾸 덧없는 웃음이 입가에 맴돌고 W 앞에 돌아서는 적들이 애송이처럼 느껴진다.
시야를 밝혀줄 매를 날리려는 순간.
“잠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게 하는 날카로운 신호가 울려 퍼진다.
평소 같았으면 불쾌했을지도 모르는 소리.
하지만 발신인이 권건이라면.
“왜 그래, 건아?”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해진다.
“얘네 바론 가는 거 아니니? 이른 타이밍에 아주 건방진데.”
이미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
끝내도 될 것 같은데.
대장이 팀을 뒤로 물리고 있다.
“내 매 한 방이면 모두 깜짝 놀라서 꽁지가 빠져라 도망갈걸.”
“맞아요.”
단호한 말투.
역시 우리 정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걸 네가 몰랐을 리가 없지.
“그럼.. 왜?”
“전심전력으로 부딪혀오니까, 저희도 전심전력으로.”
“아!”
최은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뜻이 있으셨구나!
“그렇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죠.”
권건은 팀원들에게 세심한 움직임을 지시하며 말을 이었다.
F.L.E라고 해도 적극적인 오늘.
아주 낮은 가능성이지만 제어하기 힘든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
김예성 못지않은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진 권건.
좀 더 많은 세계를 보고 온 이 선수는 변수가 없는 것을 선호했다.
“블루에 정신 팔린 척. 늦게 알아차린 척.”
“이해.. 이해했어!”
최은호는 자신이 구체적인 오더를 만들지는 못해도 눈치가 빠르다.
물론 자기 생각이다.
최은호는 권건은 이유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즐긴 게임.
탑은 즐기지 못했다.
종종 게임이 너무 빠르게 기울어버리면 이런 경우가 있다.
경기가 너무 빠르게 끝나기 일보 직전.
두 사람의 생각이 교차했지만 모두의 결론은 같았다.
“신호할게요. 유찬, 위쪽. 알고 있지?”
“포인트 B-13 와드.”
“좋아.”
마지막 전투다.
“셋.”
F.L.E가 공략하는 바론의 체력이 줄어든다.
“둘.”
언제나 정확한 타이밍을 신호하는 이 선수는, 갑작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
마치 정확한 계산을 하고 있다는 듯.
특정 상대의 머리 위로 붉은 표식이 새겨지고.
이들을 한데 모은 그가 입을 연다.
“전장으로.”
떨어진 명령.
이제는 익숙한 한마디에.
결사단의 수장이 앞으로 발을 뻗음과 동시에 하늘을 관통하는 은빛 매.
준 전투원이 쏘아 올린 신호탄이 모두의 시야를 환하게 밝힌다.
“FWX! FWX! 도착! 도착합니다! 거의, 거의 다 먹었는데! 거의 성공 직전인데!”
“이거, 이거, 이거! 바론! 바론! 바론! 바론! 완벽한 타이밍!”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계산.
날아오른 매의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최은호는 후끈, 목뒤가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권건은 나와 같은 인간이 맞을까?
한결같이 짜릿하고 늘 새롭다.
“은호 형. 궁.”
그렇다고 넋을 잃었던 건 아니다.
요즘은 매일 보는 일이니까.
목표에 정신이 팔린 사냥감을 쏘아 맞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간다.”
최은호는 희열을 느낀다.
오래전, 연습생이던 시절의 최은호는 서포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철이 없던 데뷔 당시에는 원딜 T.O에서 밀렸을 뿐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듀얼 포지셔닝이 가능하니까 어쩌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서포터에게 따라붙는 ‘일반적인’ 시선이 싫었기 때문이다.
좀 더 칭송받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플레이.
내 파괴력에 뒷걸음질 치는 상대.
그게 게임의 맛 아닐까?
그렇게 이어진 사파픽, 피쯔 서폿.
그래, 그때부터 나는 이미 마(魔)였고, 사(邪)였으며, 흑도(黑道)였다.
공통점은 힘을 숭배한다는 것.
전투 개시의 화살을 겨눈다.
쩌엉,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바람을 찢고.
빙결(氷結).
“나이스 샷.”
결국 시간이 흘러도 최은호는 원딜이 되지 못했고.
대단한 서포터도 되지 못했다.
그저 이 팀, 저 팀을 유랑하는 먼지 같은 객(客)일 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구음절맥(九陰絶脈) 따위를 앓고 있는 천재가 아닐까 하던 생각은 예전에 사라졌다.
손해를 보고 나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변명이 늘어나고.
항상 곽지운이 실수를 감싸주지만 그럴수록 더 까칠하게 굴었다.
연패하면 자꾸만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게 되는 자기 모습도 안다.
부끄럽지만 그랬다.
탄탄대로를 걷던 정(正)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도 있으며.
결국 내가 인간이라서 그렇다.
“스으으으으틸! 스틸! 아아아아아악! 권건! 권거어어어언! 또! 다시! 스틸했어요! 애시 궁과 함께 놀라운 타이밍! 마지막 한 틱, 완벽하게 심리전 성공하면서!”
“그냥, 자연스럽게! 그냥! 툭! 하고!”
“몸이 기억하고 있다! 몇백만번이나 뺏어왔던 바론이다아아아악!”
- 설마 몇백만번이나 되겠냐고ㅋㅋㅋ
- 아ㅋㅋㅋ 진짜 주접 진짜ㅋㅋㅋ
- 존나 예술이네;; 아.. 씨발진짜.. 진짜.. 그냥 중국 가라..
- 저 새끼 밴 좀
-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중국?
권건은 이런 구김살을 없애주는 사람이다.
오더, 플레이, 감정.
모든 것을 부담해준다.
잘난 척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래.
잘난 척이라는 건.
잘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었구나.
“궈어어어어어어언건! 미쳤어요! 미쳤어요! 아아아아악!”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
그는 나의 종교.
그는 나의 천(天).
그는 나의 마(魔).
이제 그는 나의, 교주.
피부를 타고 흐르는 환호와 열기의 오싹함.
먼지 하나로는 의미가 없던 세계가.
천마(天魔)의 재림 이후 넓어지기 시작했다.
홀로 쏘다니던 우리는 무리를 짓는다.
귀기에 물든 최은호의 입이 찢어질 듯 귀에 걸렸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지금은 내가 서포터인게 자랑스럽다.
나는 이 무리 속의 이 자리가 좋다.
의무병도 병사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F.L.E! 항전 해봐야 해요! 항전.. 쏴라아아아! 쏴라아아아아악! 쏠의 갱플, 갱플! 궁극기, 궁극기!”
“누가 앞장서야 해요! 아, 밀지 좀 마라! 앞으로 좀 가라! 으아아아! 누가 먼저 들어가요, 저렇게 칼과 창과 활과 부메랑! 너무 무서운 무기들을 들고 있는데! 여기 냉병기가 너무 싸늘해요!”
상대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드리프트 오브 탑 치킨 스매시 디바이드!”
날카로운 기합 소리와 함께 탑의 닭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일개 짐승이었던 그는 여기에서 내단을 품은 영물(靈物)이 되었다.
적들이 일렬로 밀려나며 공중에 뜨는 순간.
“...”
허공을 유영하듯 날아오른 귀검랑(鬼劍郞) 요내.
과거에 명문 세가의 자식이었을 그는 이곳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았다.
두 자루의 칼이 교차되고 적을 모두 휩쓴다.
칼날에 공기마저 빨려 들어간 양.
일순 주변이 멈추는 듯 하다.
“풍차 풀 가동!”
그저 사막에 묻혀 사라졌을지 모를 유운풍쾌(流雲風快) 시비루가 경신법으로 다시 세상을 연다.
적에게는 날카로울 이 바람이.
최은호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의 밝은 성격만큼이나 시원한 바람은.
내 두 뺨을 간지럽힌다.
그전까지는 입으로만 읊을 수 있었던 식의 재현.
이 전장이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워서.
최은호는 늘 달고 살던 손목의 고통도 잊었다.
“FWX 상체가 미쳐 날뜁니다! 전부 대쉬! 바텀은 둘 다 뚜벅이지만 상체가 팍팍 튀잖아요! 순식간에 천라지망 펼쳐집니다!”
어쩌면 이런 기재(奇才)들 사이에서, 나만이 범인(凡人)인 것을 뼈아프게 느낀다.
그래서 더 정신없이 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다시 쏘고, 또 일련의 동작을 반복한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일을 수행한 ‘그’는 어느새 교도들 곁에서 함께 싸우고 있다.
“장판파 정글! 장판파 정글 쉔, 권건! 꽉 틀어막고 절대 뚫리지 않습니다!”
“여긴, 여기이이이인! 지옥입니다악!”
눈물이, 눈물이 날 것 같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말 훨씬 더, 아주, 많이.
빛나고 싶고.
관심받고 싶었다.
잊히는 게 너무 두려웠다.
“FWX, FWX, FWX! 지금, 지금, 지금!”
“마지막 싸움! 싹! 다! 정리해버립니다아아아아악!”
“한 명도 안 죽었어요! 서포터조차 한 번도 안죽었어요!”
“완전히.. 이거.. 이거.. 이거 완전히! 이거, 설마 이대로 끝내나요?”
“퍼펙트 킬 스코어어어어어어! 이런 미친 팀이 있어요? 이게, 이게! 이게 대체! FWX!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미쳤어요? 네, 진짜 미쳤어요! 완전히 미쳤어요!”
불신자들의 비명과 고통 속에서 찾는 나의 깨달음.
매섭도록 잔인한 전장 속에서 얻은 쾌감.
혹자는 나를 폭력적이라고, 기회주의적이라고, 서폿답지 않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내 두 눈에 오롯이 들어찬 것은.
당신이 나에게 보여주는 또 다른 세상.
그 세상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서서 그에게 복종한다.
“백만 대군 미니언 몰고 들어갑니다! FWX! FWX! LKL의 잠룡! FWX가! 이런 사파픽, 아니, 그걸 넘어서, 마귀같은 픽을 들고! 완벽한 경기력으로..! 승리를..! 승리를..!”
마(魔)를 좇고자 하는 것이 혹여 무서운 결과로 이어진다고 해도.
지극히 평범한 나이기에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
“FWX의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네! 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GG!”
천마재림(天魔再臨) 만마앙복(萬魔仰茯).
나는, 여기에 계속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