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이야아아아. 어서 오이소! 반갑습니다! 인솔을 맡은 퓨처스 리그 탑 팬시입니다!”
“와. 안녕하세요. 찌세입니다.”
지세현은 조심스럽게 FWX 사옥으로 발을 들였다.
이 공기, 이 느낌.
이게 레전드가 생산한 이산화탄소?
그 꼴을 보던 문봉구가 무슨 생각인지 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아직 건이는 출근 안했어요잉.”
“아.”
쑥 들이 삼켰던 숨을 다시 뱉는다.
“아이고, 드디어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저, 아세요?”
“암요! 암요! FWX 지갈공명 지니 선수! 팬입니다!”
“저도 팬시 선수의 팬입니다. 요른 마스터 팬티.”
“팬티는 좀.. 하하하하!”
“하하하하!”
“동흔이 형..”
이제 강동흔과 말을 놓기로 한 지세현은 아직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전 프로에게 참혹한 시선을 보냈다.
“팬티라니. 잃을 것만 있는 구린 드립은 치지 마요.”
“미안.. 요즘 애들 감성 모르겠어..”
“이럴 때만 요즘 애들? 이십 대 후반이면 어린 거라면서요.”
“참으로 냉혹하구먼.”
“프로 생활과 방송 생활은.. 다르더라구요. 광대가 될 줄도 알아야 하는..”
“아따.”
문봉구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최근 FWX는 2군에 새로운 탑 유망주를 영입했다.
최윤빈,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스트리머 출신 신인이다.
그 뒤로도 예비가 한명 더 있다.
나날이 솟구치는 팀의 인기에 가용 예산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등용문도 넓어졌다.
1군과 2군의 관계가 가까운 편인 FWX의 특성은 다른 분야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FWX 아카데미 강사와 스카우터들이 모인 자리에 문봉구도 참여해 옥석을 가려내는 경합을 진행했고, 그 결과가 최윤빈이다.
문봉구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 의사를 이미 밝혔으며.
그 전에 2군 탑의 자리를 채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후임을 뽑는 데에 손을 보태게 한다면 선수의 불편감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기획.
“저도 많이 배워놔야것어요.”
그건 무척이나 성공적인 시도였다.
아직 경기에서 손을 완전히 떼지는 않았지만, 문봉구는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선수들의 구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FWX는 문봉구의 노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1군의 감독 박진현부터 코치들까지 부단히 이 선수를 추천했고.
프런트 특별히 의견이 다르지 않아 자연스럽게 선수 계약이 종료되면 스트리머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상여금을 포함한 은퇴식, 추후 FWX 아카데미에서 코치 양성 과정을 밟을 경우의 지원 역시 챙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근거는 현재 FWX가 잘나가기 때문이다.
“FWX에 충성해야 허니까.”
“아, 설마.”
“맞심다. 아직 비밀. 요거는 잘라 주세요. 엠바고.”
문봉구가 능글맞게 눈썹을 찡긋하자 지세현이 환하게 웃었다.
“형, 저렇게 하면 돼요. 아셨죠?”
“노력해볼게.”
아직 야외 촬영이 익숙하지 않은 강동흔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또. 이거 착용하시고..”
“이게 뭐죠? 머리띠?”
“크아아, 이거 한정판! 가져가도 됩니까? 이거! 수건!”
“오케이! 찌세님에게 특별히 선물 증정!”
“동흔이 형. 잠깐 이 봉 좀 들어봐봐. 받는 거 잘 보이게 찍어줘.”
촬영용 셀카봉을 든 강동흔이 메인 카메라의 동선을 피해 두 사람을 찍는다.
취미로 사진을 찍었던 것이 제법 도움이 됐는지 깔끔하다.
FWX는 굿즈 샵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지만 로비 1층에도 다양한 굿즈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번에 제품 팀에서 스페셜 태스크 포스를 운영하면서 생산된 수많은 굿즈.
그 중 몇 가지 제품이 선물로 돌아갔다.
굿즈를 FWX에서 자체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강동흔도 자취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물건들을 챙기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 LOS 파트에는 우승컵 하나 없지만 활기가 넘치는 로비.
사실 자신이 주장을 맡았던 시절의 FWX는 그렇게 잘나가는 팀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달라질 줄도 몰랐다.
그래서 그저 묘하게 기쁘고 또 아쉽다.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었더라면, 저 선수가 지금도 있었더라면.
“혹시 E세요?”
“우찌 알았지?”
“저도!”
“찌세님은 나이가?”
“저 스물입니다!”
“아이고, 우리 일도랑 동갑이네. 반말해도 될까?”
“영광이죠!”
“얘들아.. 아저씨도 끼워줘..”
“형, 방송은 야생이에요. 잘 치고 들어와요.”
지세현이 슬쩍 비켜서며 자리를 만들어주고, 문봉구는 손사래를 치며 강동흔에게서 카메라를 받으려고 한다.
“제가 카메라 들까요, 선배님?”
“아뇨, 괜찮아요.”
FWX에서 은퇴한 강동흔은 잠시 감회에 젖었지만 금세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 드릴까요, 선배님?”
“그것도 괜찮아요.”
지금은 방송에 집중해야 할 때다.
이건 은퇴 후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이니까.
“애들 집합시킬까요, 선배님?”
“아니 진짜 괜찮아요!”
#
- STM 강수달 : 안녕하세요^^
- STM 강수달 :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요? ^^
강수달은 스톰의 원딜, 니아 선수의 본명이다.
서포터 김지인과 묶어서는 ‘달인’ 듀오.
이름이 친근감 있어서 많은 팬이 본명을 부르곤 한다.
- FWX GwonGun : 네
이 선수는 나와 연결되기까지 꽤 복잡한 절차를 거쳤다.
휴대폰을 종종 압수하는 스톰이기에 곽지운이 방장인 LKL 원딜 채팅방 ‘왕자님 모임’ 소속에 들어있지 않았는데.
지난 경기 후 곽지운과 마주쳐 해당 채팅방에 입장했고, 나와 연결될 수 있게 곽지운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그냥은 아니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나도.
이제야 조금은 과거의 관계를 회복할 용기가 돌아와서 받아들였다.
강수달은 괜찮은 원딜이다.
성격이 아주 부드럽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어지간한 까탈은 받아주고, 팀원들이 요구하는 플레이에 최선을 다해 맞춰주는 편.
그래서 보살 소리를 듣는다.
- STM 강수달 : 고마워요*^^*
좀 올드하긴 하지만.
- STM 강수달 : (링크)
강수달이 보낸 링크는 보이스 채팅방.
약속대로 접속한다.
“들리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선수들은 보이스 채팅이 일상화되어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LOS와 함께 자랐다.
더욱 심화한 PC방 세대.
그래서 학교 친구들과 나란히 게임을 하는 게 일상이었고, 보이스도 그렇다.
그러고 보니 게임 내에서 종종 보이는 도를 넘는 욕설이나 패드립은.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며 성장한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런 경우,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 팀플레이로의 적응을 어려워한다.
친구들과 게임을 같이 했다기보다는 혼자 집에서 게임을 한 케이스.
그래서 일종의 적성 검사를 진행할 때 이런 부분에 대한 조사도 들어간다.
LOS를 LOS로만 즐기다가 갑자기 네명 이상의 인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솔랭과 결과가 다를 때도 있고.
게임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과 달리, 여기에도 작은 사회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프로들이 보이스를 하는 건 아무래도 채팅보다 안전하니까 그렇다.
아무리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끼리 한다고 해도, 어쨌든 솔랭에는 일반인도 섞여 있으니까.
채팅은 치다 보면 자꾸 헛말이 늘어서 엔터 키를 뽑아놓으라는 말도 있잖아?
어쨌든 그래서 친한 사람들끼리 고정 보이스 방을 만들어 놓기도 하고.
이런 방을 통해서 모르던 선수들끼리 아는 사이가 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정작 실물로 마주치면 어색해지지만.
“잘 들립니다.”
“다행이네요. 오늘 우리는 칼바람을 한 판 해볼 건데요..”
조곤조곤한 강수달의 목소리.
“준윤아, 듣고 있어?”
“어.”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마지막 멤버는 스톰의 미드, 강준윤이다.
“그럼 큐 돌릴게요~”
강수달 특유의 ^^이모티콘이 말에서 뚝뚝 묻어난다.
“오늘 이렇게 연결한 건..”
큐가 잡힌다.
“전략 빼내기, 아니구요.”
채팅창은 소란스러워졌다.
- ksm719719 : ?????
- 양파싹 : ??????
“꼭 친해지라는 거, 아니구요.”
- 양파싹 : 우리 팀에 권건?? 건신?? 이거 꿈인가? 로또???
- 양파싹 : 혹시 님도 프로임?
- ksm719719 : 전 그냥 오늘(today)따라(follow) 트롤(troll)이 하고 싶어서 들어(come)왔는데요?
- 양파싹 : 얼얼한 거 보니 ㅈㄴ 현실이네
“그냥, 서로에게 도움 되는 인터뷰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강수달의 목소리는 꽤 저음이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이 말투.
리더쉽이 있는 타입은 아니지만 팀 내의 어머니 같은 스타일이다.
“강준윤. 대답.”
조금 엄한 것도 그렇다.
“반갑습니다.”
강준윤의 목소리는 다소 멋쩍게 들렸다.
멋지게 대패하고 나서 상대 정글과 칼바람?
이 상황은 꽤 웃기다.
하지만 나도 스톰을 잘 아는 만큼, 왜 나를 찾았는지 알고 있다.
“우리 애가 하늘이 높은 줄도 모르고 자랐거든요.”
“형.”
“내가 또 생각을 말해버렸나? 나 증말 주책이다.”
강수달은 그냥 어머니가 아니라 헬리콥터 맘일지도.
“후.”
강준윤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사실 제가 부탁했어요. 이야기할 게 있어서.”
“그래그래. 준윤아. 대화는 그렇게 하는 거야.”
코스프레를 하던 강수달은 이제야 컨셉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대충 짧은 대화를 마쳤을 때.
- 양파싹 : 주사위 주사위 주사위 굴려놨는데
- 양파싹 : 스왑이라도
- 양파싹 : 아
- 양파싹 : 아 안돼
“어.”
채팅은 잔뜩 올라와 있었고, 게임은 시작됐다.
강수달은 진짜 어머니 소랴카.
강준윤은 진짜 여동생 루루.
그리고 나는 유마.
이게 되네.
“루루, 아. 이건 좀.”
강준윤은 얼굴을 안 봐도 질색하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다.
스톰 전에서 윤도형이 보여준 압도적인 플레이 때문?
아니다.
윤도형이 루루로 가장 잘하는 것은 Ctrl+4 컨.
수많은 챔피언이 나온 지금까지도 최고의 어그로.
상대가 루루의 웃음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있을 때.
재빨리 누르고 사라지거나 멈춘다.
그럼 협곡은 곳곳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귀곡산장이 된다.
시야, 아니 소리의 마술사.
괜히 프로가 아니다.
팀원들의 집중포화로 금방 그만두긴 했지만, 루루와의 날카로운 추억은 쉽게 잊히는 게 아닌가 보다.
“어. 근데?”
“뭐지?”
“상대가.. FWX인데요?”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MMR인지.
상대에는 이유찬, 김예성, 그리고 윤도형이 있다.
아까까지는 나 혼자 있었던 연습실이었는데.
언제 왔는지 선수들이 가득하다.
“끄아아아아아아앗!”
“걸렸다!”
“나도 끼워 달라고!”
“니는 칼바람 많이 돌려서 안 된다고!”
“그러니까 평소에 솔랭만 돌렸어야지!”
“부캐 있다고!”
“일단 이겨! 야! 건이 유마다! 무빙 못 한다!”
“실력 반은 빨았다!”
얘들은 왜 지금 칼바람을 돌리고 있어?
“나 AP 간다!”
“형님 그냥 뒤지실래요? 니 판테언이잖아.”
“이유찬 이 새끼 말하는 상태가? 얘 스킬 반은 AP임.”
“멍멍?”
“AP 계수 있나 없나 녹턴 내기 하쉴?”
“콜!”
“탑.. 니가 질 것 같은데..”
소리죽여 웃는 김예성.
저 팀도 큰일이고.
- ksm719719(코구모) : 이거 제(me)가 캐리(carry)해야하는 거 맞죠? AP(AP) 갑니다
- 양파싹(블릿츠 크랭크) : Ability Power 이 ** *같은 **
- ksm719719(코구모) : 욕설 신고합니다
여기도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