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왔노라, 보았노라
“귀환을 끊어?”
나는 고요하게 미친 미드의 텐션이 부담스럽다.
“그럼 죽어야지.”
도대체 얘가 오늘 왜 이래?
“이리 와, 안아줄게. 집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경기는 끝을 앞두고 있다.
사실 3세트를 이길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했다.
음, 그런데 생각보다 이유찬과 김예성의 집중력이 대단했다.
특히 김예성.
아무리 내가 예측 동선을 준다 한들.
그 위로 느린 스킬을 맞추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도망을 쳐?”
그렇긴 한데..
얘 좀 섬뜩한 거 아니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라아아아아아온!”
이제는 제라드 궁처럼 꽂히는 스킬에 미처 멀리 가지 못한 상대가 쓰러진다.
“건아. 어떻게 생각해? ”
“잘. 했어.”
안 그러던 애가 이러니까 이상하다.
“나도..”
이제 탑이 입을 연다.
“나도!”
“넌 팔이 짧잖아. 어떻게 끊게? 뭐 와드라도 꽂아서 끊어보게?”
“챔프 위에 와드 박으면 데미지 있어?”
이게 무슨 소리야?
“나 그것도 해볼래. 거니. 해도 돼?”
“아니, 너네 도대체..”
이유찬은 틀림없이 한계다.
맨눈으로도 이유찬의 손이 떨리는 게 보인다.
과하게 집중한 거다.
정신력을 너무 많이 쓰면서 체력이 바닥까지 갔다.
“그런 건 허락 안 맡아도 돼.”
“그래?”
“데미지 없으니까 하지 마. 몰랐어?”
“혹시나 했지. 완전 알고 있었음.”
다행히 경기는 말미.
“도대체 왜 이래?”
뜻밖에 이 질문에 대답한 건 상체가 아니라 바텀의 서포터다.
“건아..”
이번 세트, 별 부담 없이 여유롭게 협곡 탐험을 하던 최은호가 다 안다는 말투로 말한다.
“니가 만든 괴물들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
“너네 마지막 용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었어? 우리 아직 하나도 못 깼는데! 미드 압박 좀 하게 해줘도! 되잖아!”
“여기서! 허무하게! 빈스 선수의 졔리가 끊깁니다! 이거 미드에는 벽이 없었거든요!”
“혼자만 가게 둘 순 없어! 나도 같이 간다! 서포터마저 함께 끊깁니다!”
- 이야~ 여기 혜자네요~
- 음식이 친절하고 사장님이 맛있어요~
- 누구 맘대로 미드를 쳐? 우리 미드가 라온인데?
- 빅스 약팀이엇소??
- 듣보잡 팀한테 이렇게 쳐발리네;;
- 응 우리 팀 오래됐어~ 근데 존나 쓰레기였을 뿐이야~
- 어라? 왜 눈물이
- 뎃 8989 이제 그런 거 몰라레후
“반대로 또! 또! 아니! 작년에 왔던 레넥튼!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또 밀고 있어요! 또오오오오오오!”
“이거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습니다. 이거. 끊어야 해요. 어떻게든 이 FWX의 기세를 끊어줘야만 뭐라도 해볼 수 있습니다!”
“차니, 차니, 차니, 차니, 레넥이이이이이익! 죽을 때 죽어도 저항이 심상치 않아요! 이거! 이거! 어? 아! 시간 끌려요! 시간! 억제기! 억제기! 이거! 이거 오히려 위기에요 빅스!”
“전투에서 이겼어도 전쟁에서 이긴 건 아니거든요! 이거 오늘 FWX 손절 굉장히 빨라요!”
- 탑 내주고 억제기 두 개? 오2려 좋아
- 희생찬 ㅅㅂ 쟤 죽을 때 표정 좀 봐 마지막까지 타워 때리는 거 존나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탑이야 저 새끼
- 손절 속도 보소ㅋㅋㅋ 오늘 느낌 좀 다른데?
- 뭐지ㅋㅋ 원랜 탑도 안 죽게 하려고 되게 노력하지 않나?
- 차니독립만세
“이게 손절도 판단이고 기술이에요. FWX의 오늘 플레이 스타일, 너무 새롭습니다. 특히 권건의 몰가 플레이가 아예! 그 전까지랑 아예! 다르다고 보면 되거든요.”
“네, 그렇습니다. 그전까지는 뭐랄까. 총검술을 쓴다는 느낌이었죠. 일단 패고, 그다음에 대화하고.”
“근데 오늘은 정말 아주 살살! 멀리서! 우아하게! 딱 치맛자락이 잡히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면서! 입 안에서 사탕 녹여 먹듯이 빅스를 계속 굴리고 있거든요? 이 선수가 이렇게 달콤한 선수였나요?”
- 권건 특) 단 거 좋아함
- 과일 사탕 젤리 애호가
- 곰돌이 젤리남
- 니들이 그걸 어캐 알아 ㅅㅂ 권건맘이냐고
- 그 사탕은 빅스였구연
- ㅋㅋㄹㅇ 광고 찍을 때부터 알아봤다
“이거 차니가 없어도 FWX는 여전히 비슷한 플레이가 가능해요. 지금 잘 큰 스웨인이 앞에서 비벼줄 수 있거든요! 계속 돌려! 근데 지금 FWX가 어떤 플레이를 하던! 빅스는 상관이 없어요. 뭐 앞 라인이 두 개건 세 개건 간에! 빅스는, 해야 해요. 뭐라도 해야 합니다!”
“방금 교전에서도 빅스가 인원 차이로 밀어붙여 보지만, FWX가 아주 느긋하게 빠집니다. 궁극기 유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죠.”
“결국 FWX가 4용을 먹는 사이 지금 빅스는 돌거북 나눠 먹고 있어요! 이거 살림살이 너무 거덜 났어요. 오 남매가 따로 없습니다! 바압 좀 주세요, 네에?!”
“야. 너네 여기 우리 영역이라고 했지? 어? 어디 여기서 돌거북을 먹어. 아앙?!”
“라온이 또 눈알 빔 쐈죠. 이거. 거북이 밥상 깨끗하게 뒤엎습니다. 아.. 이거 너무 아쉬워요. 헛배만 부릅니다..”
- 빈부격차 이거 맞아? 쟤가 존나 독해 스크루지 같은 새기
- 내가 알아봤어
- 라온 빅스에 원한 있어 틀림없음
- 빅스에서 팽 당한거 모르냐?
- 속 시원하네 진짜
- 바텀은 뭐하냐
- 몰라 빠스 조오오타 이러면서 익박수 치고 있겠지
- 난 그만 볼란다..
- 사실 나는 빅스를 응원한 적이 없소
- 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쟤들 멘탈 나간 것 같은데.”
코치 박스의 박 감독은 모니터를 뚫어질 듯 바라봤다.
움직임에서 느껴진다.
첫 번째 세트에서 과거를 뛰어넘으려다가 실패했고.
두 번째 세트에서 경기를 길게 가져가려다가 오직 그것만 남기고 패배했으며.
세 번째 세트, 빅스는.
“우리를.. 한가지 스타일로만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예 트릭스터 전을 준비하고 있었어.”
모든 방향에서 완전히 터지고 말았다.
“FWX, 이거, 끝까지!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밀어붙입니다!”
마지막까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승이라는 단어가 꿈처럼 느껴졌다.
“물 샐 틈 없는 완벽한 압박! 실제로 발밑은 정말.. 지독한 장판기로 가득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트에서 경기의 주도권과 달리 경기 속도 그 자체를 빅스가 조절했다면..”
“이번에는 FWX가 확실히 호흡을 뺏어버렸습니다!”
- 우린 사실 윈나우 구단이야
- 지랄 노
- 존나 결과론적이네;;
- 감독 잘리기 직전에 날아오르네;;
- 박감 존나 전생에 나라를 구한 기운을 지닌 사나이
플레이오프까지는, 그래.
먼 과거의 FWX도 발을 디뎌본 적은 있다.
“다시 레넥 합류해주면서! 마지막!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승은 다르다.
“보입니다.. 보입니다, FWX, 인천이 보여요! 인천이 보입니다!”
“송도 센트럴 파크가! 인천 대교가!”
“눈앞에 아른아른! 아른아른 보이기 시작합니다!”
극초기 LKL서 미드로 활동하다가 서포터로 포지션을 변경한 박진현 감독은.
프로로서의 마지막 2년을 FWX에서 보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요, 빅스!”
“더블 킬!”
사실상 말년에는 플레잉 코치 역할을 겸했었지만, 그때 역시 FWX는 이런 고산지대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다.
공기가 희박한 걸까, 숨이 가쁘다.
“트리플 킬!”
- 어?
- 빅스가 한타로 뒤집는 거.. 없는 미래?
- 나 진짜 아직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 먼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갓소.
- 그런 거 몰라레후
수문장 해머스가 쌓은 마당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벽 너머 보이는 언덕이 가장 높은 산인 줄로만 알았던 과거를 벗어나서.
“마무리..!”
이제 우리는 처음 가보는 산을 개척하고 있다.
“이거 오늘.. 오늘 새 역사가 쓰여집니다, FWX!”
“..FWX에, 신인 정글이 올라온다고 했을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 어어.
- 어어어어어.
- 엄마 나 기분이 이상해
- 정상이야
- 뎃..와타시.. 눈에서 콧물이?
새로운 날개로.
“FWX에 신인 탑이 올라온다고 했을 때 역시 모두 우려를 표했습니다. FWX는 여전히 완벽한 팀이 아닙니다. 하지만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당겨주면서..”
“결국, 이 세 번째 세트! FWX가! 역사상, 처음으로! 처음으로..!”
“2025, LKL..!”
“FWX가..!”
그 산을 오르고.
“동화였던 FWX의 이야기는 신화가 됩니다!”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오를 수는 없는 무대..!”
시야가 트이는 순간.
“FWX가! 결승에.. 진출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제야 비로소 또 다른 산이 보인다.
예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아니 말로만 전해 들었던 전설.
결승.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세계라는 산.
“넥서스 파괴됩니다! GG!”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박 감독은 끝내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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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축하드립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결승 진출을 축하합니다!”
돌아온 사옥은 꽃길 그 자체였다.
오늘의 인터뷰는 모든 선수 뿐 아니라 감독님까지 함께 진행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미드 데뷔 시절 박 감독님의 시그니처였던 케낸과 감독님의 당시 사진, 그리고 ‘Perfect Best’ 이고 싶었던 감독님의 선수명 PerBe를 적은 채 치어풀을 흔들며 당신을 찾는 한 팬이 있었다.
“시그니처 픽만 보고 선사 시대인 줄 알았어요..”
“그땐 그랬지.. 갈레오가 꽃길 깔아주고 마오가 소용돌이 만들던 시절..”
“그딴 스킬이 어딨어요.”
“내 말이 그 말이야.. 하하. 하하하. 그때 너네는 마우스나 잡았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그 앞에서.
시간을 넘어온 감독님은 마치 선수처럼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감독님 어렸을 때 사진 레전드.”
“코 옆에 있던 왕점은 어디로 갔어요? 피부도 좋아지고.”
“요령이 뭐예요? 엄마 말대로 게임을 안 하면 그렇게 되나?”
뭐.
스포츠라는 게 그렇다.
나는 감독을 해본 적은 없지만, 선수 출신 감독은 선수로서의 수명이 끝나고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하니까.
물론 안 그런 감독도 있겠지만.
박진현 감독님은 이 판의 지박령.
“지금은 뺐지. 피부는 도움받은 분이 있고.. 그때 내가 점만 없었어도, LKL의 인기가 열배로 뛰었을 거라는 말이 많았어.”
“점을 찍고 돌아온 사람이나.. 점을 빼고 돌아온 사람이나..”
“어허, 얘들아. 우리 팬들은 그 점을 초코칩이라고 불렀단다.”
“와.. 진짜 죄송한데 개어이 없네요.”
와르르 웃음이 터진다.
당장 눈앞에 있는 건 결승.
그리고 월챔 선발전은 확실해졌고.
숨겨놨던 방향성을 이제야 꺼내 들면서 이것이 LKL에 ‘먹힌다’는 것을 본 이상.
우리가 좀 더 멀리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른 팀이 이제 와서 대응하기에는 늦으니까.
“나 승리 라이브 때 뭐라고 말했냐?”
“몰라. 엄청 헛소리했어.”
“도형이 너 보고 싶어 하는 분들 많더라.”
“봤지? 팬분들 장난 아닌 거. 윤도형, 멋있어! 결혼해!”
“응. 너 빨리 결혼하라고.”
“아. 그런 거였어?”
“그게 맞지. 니 결혼 못할까 봐 걱정이 많으신 듯.”
“깍지 오늘 너무 깝치는데?”
“어어. 나. 결승. 나갈. 원딜. 때려? 너 나 때려?”
“시벌.. 쥐방울만한게..”
모두 붕 떠 있는 느낌이다.
울다 웃으면 뿔난다는 격언도 못 들어봤어?
너희 이제 큰일 났다.
“나 최강차니인거 증명한 거야?”
경기 종료 직후.
애송이 이유찬이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손발을 벌벌 떠는 모습을 봤다.
체력 안배와 정신력 완급 조절에 실패한 거다.
하지만 그런 이유찬조차 팬들의 환호 속에 힘차게 손을 흔들고,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고꾸라졌다.
간신히 바나나와 초콜렛을 입에 물리고.
또 정신없이 인터뷰, 승리 라이브.
그리고 이제 사옥까지 돌아왔으니 쉬어야 하지만..
“최강차니는 아니고 그냥 이유찬이지.”
“이유? 이유식? 이유찬?”
이유찬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로 저러고 있다.
나?
나는 글쎄.
오늘은 하체 하는 날인데.
나도 체력 소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삶의 규칙을 지켜야 버텨낼 수 있으니까.
“건아.”
운동 짐을 챙기고 있으려니 오늘따라 묘하게 현자 같은 김예성이 다가와서.
“어.”
“어느 정도 자란 애들은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거야.”
알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진다.
쟤는 오늘 운동 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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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튿날.
끝자락으로 접어든 ‘미라쥬 사건’의 마지막 조사에 응하고 대회 일정에 차질이 없다는 것을 확인받은 선수들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