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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04화 (204/326)

204화. 야망 막내

“권건 저 새끼는 무슨 1깃 2창을 숨 쉬는 것처럼 하냐? 룬 확인 좀 해봐라. 아님 템을 극쿨감으로 갔냐?”

“니가 직접 확인 좀 해라. 상대 아이템은 탭을 누르면 볼 수 있습니다.”

“어, 씨부렁. 패치됐냐? 고걸 몰랐네.”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그냥 니가 각을 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건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고 올게.”

“오케이. 그럼 밥 먹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땡큐.”

미라쥬는 정글러 중심의 팀.

하지만 메타가 바뀌면서 정글러의 라인 개입 타이밍이 조금 미뤄지기도 했고.

이번 시즌, 기존 탑의 은퇴로 전력이 약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바텀 중심 팀으로 전략이 변했다.

“아니, 나는 저 벽이 무슨 탈리아 궁 같은데.. 왜 저렇게 좆같은 데다가 잘 깔지? 잠수함 패치로 영역 지정 스킬 됨?”

“응~ 패치 노트 좀 읽어라.”

“지랄 아웃.”

“그냥 사기캐 아니야? 형도 자르반 해야겠다. 다음 세트에 할래?”

정글러 이인혁은 그냥 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뱉을 수가 없다.

“생각해볼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갔지만 컨디션이 더 안 좋아 보이는 것은 서포터다.

“야. 왕쥬.”

“왜.”

“니 왜 그렇게 뿔났냐. 아까 끊겨서 그래?”

“아니.”

왕지우는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캠에 찍히는 걸 알지만 표정을 풀기가 어렵다.

“저 새끼 플레이가 너무 열받잖아.”

“뭐? 아.”

경기는 기울었다.

개같은 정글러가 3세계 픽을 들고 오지 않은 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서포터가 개또라이다.

기존 FWX 플레이 스타일과 다른데 또 잘 맞는다.

굳이 다른 서폿과 비교하자면.

좀 나대는 스타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몸을 비비는 것도 거슬리는데.

할 거 다 하고 뒤진 다음에 아크산이 살려내면 또 한타가 끝나기도 전에 달려와서 꾸역꾸역 뭉갠다.

서포터도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얘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안 그래도 불편한 챔피언인데 거슬리기 짝이 없다.

“근데 그렇게까지 짜증날만한 건 아니지 않나? 쟤가 뭐 슈퍼플레이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B급 같은데? 걍 아크산이 올타임 적폐챔인거지.”

“...”

“다음 세트 잘하면 돼. 우리 바텀이 더 강함.”

“클래스로 스왑하려나?”

“안돼.”

갑자기 끼어든 건 원딜 고수호였다.

바텀 얘들 왜 이래?

단체로 약 먹었나?

“넌 또 왜 안 된다고 해?”

“아무튼 안돼.”

미라쥬에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 사이.

FWX의 코칭 박스.

“와.. 유상준..”

팀 보이스를 듣던 최은호도 체한 표정이었다.

“저거 말 못하는 앤 줄 알았는데 완전 여우네. 저렇게 안 하면서, 저거, 저, 저, 내숭 봐라. 야망캐네. 야망캐야.”

“은호야, 뭐라고?”

“아니에요. 우리 팀 잘한다고.”

아니 무슨.

점멸 아껴?

말을 뭐 저렇게 하냐?

로맨스 소설 주인공인가?

존나 반하겠네..

최은호는 팀원들이 돌아오면 무슨 멋진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근데.”

박 감독이 입을 열었다.

“사실 부활이 아크산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니?”

이제 안정적으로 바론을 먹고 최종장으로 접어들어 간 경기.

“?”

모두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마지막 피드백을 작성하고 있다.

대부분 유상준에 관한 것이었고.

문백산은 탑 찬양을 3장 14절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탑이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레나타요? 알죠.”

코칭 박스의 분위기를 오랜만에 겪는 최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골골대던 때와는 사뭇 다른 쾌활한 분위기다.

“아니, 소환사 주문으로..”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거짓말도 참.”

“네, 다음 희망 사항.”

“진짜야.”

“감독님, 옛날 사람이라고 그렇게 아무 말이나 지어내셔도 되는 거예요? 은호가 오해하면 어떡합니까?”

“아니, 진짜라니까?”

코치들마저 모르는 눈치다.

“그럼 감독님이 들고 출전하신 적 있어요?”

“없지.”

“그럼 구라네. 그런 사기 주문을 왜 안 씀?”

“진짜라고! 그게 정말 옛날이어서..”

“그땐 혹시 아이템을 엽전으로 사고 그랬어요?”

“최고 무기 비파형 동검 시절. 물물교환으로 룬 사던 시절?”

“와. 너희 정말..”

“아.. 우리 출전하면 여기가 이런 분위기구나..”

최은호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김한빛 코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요즘 보통은..”

그리고 그 순간.

마지막 한타가 터져 나온다.

“그래, 그래, 그래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그렇지이이이이이!”

바짝 허리를 세우고 앉아있던 박 감독이 의자를 뒤로 확 젖히며 나자빠질 것처럼 고함을 지른다.

“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나이스으으으으으으! 나이스샤아아아아앗! 원 창! 깃창! 드랍 더 에어본! 권건! 권건! 우! 정! 권!”

“이거야! 탑! 악당! 물리쳤다아아아아아악! 차니! 차니! 차니! 중요한 건 싸우고자 하는 마음!”

“우리 애들 잘한다! 잘한다! 최고다! 잘생겼다! 늘 새로워! 짜릿해!”

“멋있다! 빛난다! 찬란해! 으악, 내 눈! 해가 떴나? 해가 떴어!”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 FWX!”

“갓 세이브 더 킹!”

“문 코치!”

“감독님!”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은 재빠른 동작으로 로우 파이브를 벌인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손과 위에서 떨어지는 손이 짝.

연달아 두어번을 손등과 어깨를 마주 툭툭 부딪치며 점프하나 싶더니 마무리는 댑.

“왼손은 거들 뿐..”

“불꽃의 팀 FWX..”

두 사람은 한바탕 세레머니 후 눈을 마주치며 씩 웃으며 하이 파이브를 나눴다.

“어. 오. 너무. 이거. 이 스웩 너무 힙한데.”

“나도 감당 못 해. 문 코치가 알려줬어.”

“제가 할 때도 이거 해요?”

“그럼. 물론이지.”

김 코치는 약간 눈을 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특별한 장면이 그대로 송출됐다는 게 알려진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

미라쥬의 반응이 생각보다 느렸고, 유상준의 플레이 수준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점과 반 박자 빠른 호응은 좋은 평가를 얻었다.

한 번 더 보겠다는 말.

스크림에서 서류 면접을.

첫 번째 출전에서 1차 면접을 통과하고, 이제 2차 면접.

그대로 2세트에도 출전하게 된 유상준은 한 단계 플레이어블 챔피언 단계를 높일 수 있었다.

“네가 바텀에서 요른까지도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선수들 앞에서는 태연한 얼굴을 한 박 감독이 유상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욕심내긴 일러. 천천히. 한 단계씩 가자.”

“네.”

유니폼 옷자락으로 안경을 닦던 유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폴리 소재로는 안경이 잘 안 닦일 텐데..”

이제 팀이 편해진 김예성이 종알거렸지만 붙임성 없는 서포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예민 미드는 괜히 머리를 긁었다.

“밴픽, 완성됐습니다!”

“이거, 이거, 또 교란 있었는데요.”

“오늘 FWX의 컨셉을 알 것 같은데요?”

“블루 진영에서 미라쥬가 요른, 자르반, 트페, 칼리, 레나타를!”

“그리고 레드 진영에서 FWX가 갱플, 리싱, 탈리아, 드래이븐과 애시로 마무리 짓습니다!”

- 아 뭐야

- 이거 감당 가능해?

- 전 세트 보니까 그래도 좀 하던데

- 그거랑 이건 다르지;

- ㅇㅅㅇ 또 시작이네;

“이게 재밌는 점은 정글러끼리 서로 챔피언을 바꿨다는 부분입니다!”

“예, 전 세트에서 권건 선수가 자르반으로 POM을 가져갔는데, 미라쥬는 다시 한번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죠?”

“그리고 이번에도 바텀에서는 강하게 나갈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양 팀 모두 바텀 기 싸움이 팽팽한 상황! 아까도 극초반의 그 그림, 정말 아슬아슬하게 루시언이 막타를 넣지 못하면서 아쉽게 바텀 구도가 기울어졌었거든요.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미라쥬가 훨씬 더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었을 텐데요!”

FWX 선수들은 침착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탑?”

아까처럼 권건이 마지막 컨디션 체크에 들어갔다.

“아까 부활 재밌더라. 유서폿, 이번에도 죽어라. 내가 살릴게.”

“탑. 너 갱플이잖아. 뭐 부활 스펠 들었어?”

“그딴 사기 스펠이 어딨음?”

“조선왕조실록에서 읽었다, 적폐야.”

“그럼 믿을만하지.”

1세트에서 아크산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았던 이유찬은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미드.”

“저 형은 마음 급하면 트페 하거든. 옛날 사람이라서. 충분해. 나는 보드 타고 갈게.”

메이지 신봉자를 상대하는 김예성은 꼼꼼하게 브리핑을 챙겼다.

“하지만 상대 트페라 웨이브 차이 벌어지면 골치 아프니까, 좀 더 뒤에서 합류하는 방향으로 갈게. 대신 콜을 더 할 테니 잘 들어줘.”

“오케이.”

“원딜.”

“난 뭐. 드디어 나도 하고 싶은 거 해서 불만 없어. 은호는 드래이븐 극혐하는데 상준이는 좋아해 줘서 마음이 편하네?”

언제나 방글방글 웃는 원딜은 서포터를 격려하며 말을 끝냈고.

“서폿.”

“...”

유상준은 대답을 한참 고민했다.

한 사람을 벤치로 밀어내고 앉는 것은 애석한 일인 것 같긴 하다.

제주 F.L.E 시절에도 그랬다.

FWX를 상대로 자기 대신 2군에서 콜업된 서포터가 올라간 적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마 그날 그 선수가 엉엉 울었던가?

“우리 막내 긴장한 거 아니야?”

밝은 원딜이 또 한 번 자신을 배려한다.

그 전에 함께 하던 원딜러는 이신.

이름 때문에 자신의 선수명과 포지션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콤플렉스를 가졌던 선수.

실력과는 별개로 굉장히 소심한 선수였고 그걸 탈피하지 못했다.

이것도 제법 안타까운 사연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유상준은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다만.

사회화는 거친 사람이었다.

감정이라는 게 뭐 별 건가?

남들이 웃으면 웃고, 울면 같이 울고.

대답을 해야 할 타이밍에 대답하고.

사회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의 규칙을 따르는 것.

그게 사람 사이에 섞이는 행동이니까.

팀이 못할 때마다 쏟아지던 욕.

너보다 내가 낫겠다는 질투 어린 말.

네깟 게 프로냐는 비난, 그럴 거면 자리를 열심히 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양보하라는 말까지.

그런 시기와 질투의 감정들이 피부를 찌르는 감각은 있었지만.

사실 유상준은 이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돌아갈 때도 상대 서포터 왕지우의 눈빛을 봤고, 코칭 박스에서도 최은호의 눈빛을 봤다.

그건 마치 첩실에게 황제를 빼앗긴 황후 같은 눈빛이었는데.

그 황제가 원딜을 말하는 건지 승리를 말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상준.”

사람보다 게임 시스템이 낫다.

내가 어떤 도전을 해도 묵묵하게 받아주니까.

그래서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첫 컨택도, 인상 깊었던 경기도 아니었다.

권건이 지금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콜업 초반.

자신의 주 포지션 정글이 아닌 원딜로 솔랭 바텀에서 함께 뛰었던 일이다.

그때 유상준의 서포터 픽은 이렐이었다.

이런 픽을 하면 어떤 원딜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사회악이나 트롤이라고 한다는 것도.

그런데도 권건은 원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줬다.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또 결국 함께 이겨냈다.

처음이었다.

승패와 관계없이 그들이 있는 티어까지 올라오면서 챔피언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대체 권건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렐 서폿에도 편견을 가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나와 같은 부류인 걸까?

“상준아, 혹시 사운드 문제 있어? 보이스 체크 한 번 더 해볼까? 퍼즈 필요해?”

권건이 조용히 곽지운을 제지하는 게 느껴진다.

그저 대답을 기다린다.

유상준은 다른 사람의 마음보다는 자신의 게임을 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무엇보다도 원딜이나 팀원을 괴롭히기 위해 그런 픽을 고르는 게 아니라, 스스로 꽤 오랜 시간 피드백하고 해볼 만 하다고 해서 하는 거니까.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더 긴 리플레이와 연구 노트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많은 사람이 색안경을 끼고 볼지언정, 그걸 굳이 변명하거나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실전에서도 승패와 관계없이 기댓값에 미치지 못했다면, 또다시 새로운 연구를 통해 더 나은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그가 게임을 하는 방식이었다.

남들이 인생을 사는 것처럼.

그는 게임에서 또 다른 삶을 산다.

로딩이 끝났다.

이제 곧.

또다시 게임이 시작된다.

이건 마치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을 짧은 시간 안에 다시 사는 나의 삶, LOS.

그리고 삶에는 동반자가 필요한 법.

“보여줄 수 있지?”

잔잔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현실이다.

유상준은 드디어 입을 뗐다.

“어.”

어쩐지 세상이 조금 넓어진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가. 이겨.”

성공을 거두는 게 목표다.

#

“쟤 뭐야!”

최은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뭐, 내가 이겨? 내가 언제 드래이븐 싫대? 그리고 왜 니픽쩔을 나한테 해? 저격이야?”

“형이 양보하렴.”

김 코치가 달랬지만.

“나도 집에서는 막내거든요? 쟤 내 동생 아닌데! 기 존나 쎄네, 유상준? 어어, 두고 봐?”

감수성 최강자 최은호는 바들바들 떨었다.

“애시! 애시! 내 건데! 저거! 내 건데! 내 빙궁마후! 화살 한 발로 세상을 꽁꽁 얼려주지!”

“장난감으로 다투는 걸 보니 은호랑 상준이는 좋은 형제가 되겠어.”

“그러게요. 참.. 나도.. 그립다..”

“근데 저거 대사 뭐랑 섞인 것 같은데?”

“뭐랑 섞인 거지?”

어쨌든 경기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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