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절대왕정
“뭐해요. 다들.”
잠시 침묵했던 두 사람이 서둘러 인사했다.
“선배님, 좋은 오후입니다.”
“선배님, 컨디션은 괜찮으세요?”
“이제 괜찮아요. 다들 편하게 있어, 나 때문에 불편해서 그래? 나 그냥 갈까?”
분석실에 들어온 안은우 캐스터가 트레이드 마크인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는 나이와 경력도 그렇지만 좋은 선배로서의 요건을 다 갖춘 사람이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음료수 하나 드릴까요? 이거 스폰 들어온 거.”
“좋지. 나 이런 거 좋아해요. 어디 카메라 없나? 포즈라도 취하게.”
한바탕 너스레를 떤 안은우가 두 해설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하던 얘기 계속해요.”
“어..”
“FWX 얘기하는 거 아니었어?”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남 해설 맨날 FWX 얘기 밖에 안 하잖아.”
“아니..”
“나쁘다는 뜻은 아니야. 지금 FWX는 LKL의 기준이 되니까. 나도 여러 가지 면에서 좋아해요.”
“왜, 실례지만 선배님, 왜요?”
흥분한 FWX 팬이 눈을 번뜩인다.
“글쎄.. 그건 결승을 위해서 좀 아껴둘까. 나도 레퍼토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능글맞은 캐스터는 그대로 스킵.
“넵. 좋습니다. FWX가 결승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시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휴, 저거 진짜. 직장 생활 안 해요? 자꾸 그렇게 팬인 거 티 낼 거야?”
“강 해설님도 비밀로 해주실 거잖아요.”
안은우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한 번 보고, 시계를 흘긋 본 뒤 아직 시간이 넉넉하다는 점을 두 사람에게 주지시키며 눈을 감았다.
편하게 이야기하라는 신호다.
“어쨌든 벌써 정규 시즌 마지막 주..”
“이변은 없겠죠.”
“없죠.”
“벌써 1위는 확정이고.”
“그렇죠.”
FWX는 일찌감치 완벽한 1위로 순위 확정을 지었다.
실금이 아쉽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팬들의 사정.
이대로만 간다면 득실 차 35.
이미 그들이 세운 금자탑은 너무 높아 과거를 아득하게 추월했고.
이 이후 다시 이런 기록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말이 안 돼.”
평소 냉소적인 강기수조차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남동현이 티를 내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다.
어떻게 이 팀을 응원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고작 두 시즌.
스프링 말에 등장해 서머에 세계 무대를 찍고, 이제 한국 리그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는 이 팀을.
그럼 이다음에는?
이다음에는 대체 뭘까?
“그쵸. 말이 안 돼. 그리고 어차피 권건 선수가..”
그리고 더 말도 안 되는 선수.
POM을 휩쓰는 권건.
이미 LKL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기록을 세우고 있는 개인.
그는 POM 점수 따위에 의미를 두지 않을뿐더러 모두가 나누어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다른 선수들도 POM을 나누어 가지면서 매우 드물게 권건이 인터뷰하지 않는 날이 있을 정도였지만.
“권건 선수가 뭐?”
그가 항상 완벽한 플레이를 수행하고.
FWX의 승리를 이끄는 장군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권건 선수가 말한 목표는 전승 우승이었지 무패는 아니었어요.”
남동현이 안은우 캐스터의 눈치를 살짝 살피는가 싶더니 냉큼 입을 열었다.
“언제 그런 말을 했어?”
“5주차 트릭스터전 직후 인터뷰에서.”
강기수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 아니야, 이거? 뭐가 그렇게 정확해? 너 진짜 인생 저당 잡혔나요?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도란을 흔들어 주세요?”
“극찬 감사합니다만 저는 권.건 선수와 같은 정글 출신이라 도란 신봉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봐요. 도대체 어디까지 FWX에 인벌브 되어있는 건데?”
“인벌브라뇨. 그런 문백산 코치나 쓸 것 같은 단어를..”
“진짜 인벌브 맞는 것 같은데? 그거 FWX 코치 이름 아니야?”
“어휴, 아닙니다. 정말. 찍고.”
두 사람은 최근 정보를 다시 업데이트했다.
패치 자료, 새로운 챔피언, 아이템 가격 변동, 젠 타이밍.
미묘하게 달라진 점들이 있어 새롭게 나올만한 챔피언들이 기대된다.
“이거, 이거 꼭 짚고 넘어가고..”
“오늘 경기 매치 오브 더 위크니까 좀 더 초반 텐션 올려서..”
잠시 본업으로 넘어갔던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숨을 돌리는 시간을 가졌다.
“근데,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하자면..”
이번에는 강기수가 먼저였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생각이요? FWX 생각?”
“...”
잠시 남동현을 흘겨본 강기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오늘 이어지는 두 경기 모두 주목도가 높은 경기다.
2위의 성남 스톰과 3위의 광주 미라쥬.
그리고 9위의 울산 피닉스와 10위의 수원 해머스.
상위권 싸움과 마지막 하위권의 순위 결정전.
하지만 이 경기가 선정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최근의 동향 때문이다.
“왜 오늘 경기, 성남 스톰과 광주 미라쥬의 경기가 매치 오브 더 위크가 됐을까?”
마주 앉은 두 해설은 눈을 감은 캐스터를 두고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왜 매치 오브 더 위크가 됐냐고요?”
“응. 왜일까?”
강기수 해설이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몸을 숙였다.
“갑자기요? 혹시 강 해설님은 의견 제출 안 하셨어요?”
남동현은 황당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FWX가 스톰한테 한 세트 내줬을 때. 어땠어?”
그런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기수가 말을 이었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물론 남동현도 마찬가지.
“지랄하지 말고 진짜..”
“그렇게 험한 말을? 직장 내 존댓말 원칙은 어디로?”
“해설로서.”
강기수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 모습은 반드시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남동현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솔직히. FWX가 ‘긁어서 유도했다’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1세트, 평소보다 훨씬 폭압적인 플레이와 화끈한 인장 행사를 보여줬던 FWX.
스톰이 자극될 수밖에 없는 교묘한 느낌.
스프링이 눌리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치?”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냥 편하게 말 까세요.”
“어. 스톰이 원래 그런 거 잘 안 했는데. 그날, 정말 최종 병기 보여줬잖아? 남 해설님도 생각나지? 얼음 조합.”
“네. 엄청 새로웠죠. 그리고 진짜 오래 준비한 것 같던데..”
“분명 PO나 결승을 위해 준비한 카드였던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다음 세트에 FWX한테 파훼 당했지만요.”
“아마 처음부터 FWX한테 쓸 무기는 아니었을 것 같아. 아니면 진짜 마지막 무기였거나.”
“동의합니다. 그걸 왜 썼죠?”
그 시기의 온라인의 분위기를 쭉 떠올린다.
이 역시 과열된 양상.
경기는 FWX를 상대해서 승점을 가져오겠다는 것보다 오로지 한 세트에 집중된 전략.
왠지 스톰은 ‘FWX를 상대했던 미라쥬’를, 미라쥬는 ‘FWX를 상대하는 스톰’을 의식하는 치열한 자존심 싸움.
그리고.
“그 이후로 스톰과 미라쥬가 완벽하게 적이 됐고. 오늘 결국 매치 오브 더 위크에 선정되기까지.”
“그렇죠. 살벌한 라이벌 구도 만들어버렸죠. 선수들끼리 딱히 접점도 없어서 감정 브레이크가 잘 안 잡혀요.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슬슬 순위가 결정되면 PO를 위해서 힘을 좀 빼는 게 정상인데, 두 팀이 악바리처럼 플레이하는 면도 계속 보이고요.”
“그리고 트릭스터는?”
“트릭스터는 좀 소외당하는 느낌? 공공의 적 느낌도 나고. 팀 주목도도 최근에 크게 떨어져 버렸고.”
“...”
잠시 더 긴 침묵이 이어진다.
“이거, 진짜 FWX가 의도한 거 아니야? 지금 FWX에겐 하나의 손해도 없잖아.”
“아뇨? 퍼펙트한 무패 전승을 두고? 그게 왜 손해가 아니에요?”
“왜 손해야? 결국 결과는 변함없이 1등인데. 경기 승패에 차이도 없고. 세트 패 하나로 스톰의 마지막 카드를 뺐잖아.”
“지금 저희 팀이 일부러 졌다, 승부 조작이다 뭐 이런 말씀 하시는 거예요?”
확 기분 나빠하는 남동현의 표정에 강기수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절대! 절대 그런 말이 아니고. 어차피 마지막 한 틱만 들어갔으면 이겼을 경기였는데 그건 말도 안 돼. 그냥 그 전의 자극들이 그렇다는 거지..”
확실히 그렇다.
시즌 초와 시즌 말은 분명히 다르다.
남동현도 눈이 있었기에 스톰의 ‘최종 병기’가 얼마나 오랜 기간 준비해온 것인지 보고 느꼈다.
FWX라고 해도 승패를 점치기 힘들었던 전략.
하지만 오히려 그걸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끌고 갔었던 FWX이기에 승부조작일 수가 없다.
“하지만 도대체 FWX가 왜요? 뭘 위해서?”
그래서 남동현은 강기수의 이런 예측이 황당했다.
“FWX가..”
강기수가 이제서야 본론인 것처럼 속삭였다.
“FWX가, 절대 왕정 분위기를 만들었잖아.”
“절대 왕정이요?”
“지금 미라쥬랑 스톰 어때?”
“계속 싸우죠. 스톰은 거봐라, 우리가 한 세트라도 가져오지 않았냐.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 이런 입장이고.”
“미라쥬 팬들은 스톰을 두고 결국엔 FWX한테 져놓고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 그렇게 떠들어대냐고 이야기하고 있지.”
“그럼 이 싸움의 원인인 FWX는?”
“뭐, 원인은 아니었잖아요. 유치하게 싸움에 낀 것도 아니고.”
“왕처럼 됐잖아? 최종 판결을 해주는 왕. 결국 이 승부가 끝나려면 두 팀 중에 한 팀이 FWX한테 게임 승을 따거나 계속 이겨내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귀족들끼리 서로 제 영지 지키겠다고 견제하는 사이에 완전히 왕이 된 거 아니냐고.”
“근데 원래 왕이었는데요? 킹 갓 엠페러 FWX.”
이제 남동현은 FWX의 팬인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사실 이것도 어쨌든 직장인 모드라 표현을 많이 줄인 것에 불과했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냥 구도가 그렇다고. 완전히. 귀족들이 왕위를 찬탈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이제 스톰은 새 무기를 다시 연구해야 하고, 다른 팀들은 또 저런 카드도 있었구나? 하면서 연구 개발에 몰두해야 하고..”
“그건 좋은 현상이죠.”
“맞는데, 맞긴 한데! 그냥 뭔가..”
“봉건제를 넘어서서 왕 FWX에게 권력이 집중돼버렸다?”
“그래! 그거지! 이제 좀 알아듣네!”
“강기수 해설님. 너무 가신 거 아니에요?”
남동현은 황당한 음모론에 웃음을 터뜨렸다.
“박진현 감독님 완전 순둥이예요. 진짜 그냥 착한 사람. 선수들한테 아낌없이 퍼주는 해바라기 같은 타입.”
“그건 알지. 유명하니까.”
“그걸 어떻게 해요. 못하지. 백 년 묵은 뭣도 아니고. 팀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 못하죠. 그리고 너무 아깝잖아요, 퍼펙트인데. 그건 명예라고요. 명예.”
“명예보다 중요한 게 있을 수도 있잖아.”
“한번 사는 인생인데 명예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요? 뭐 회귀라도 한대? 그러면 인정.”
“아니, 아니 진짜 들어보라니까. 동현아. 들어봐.”
강기수가 답답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혹시 누가 들을까 겁난다는 것처럼 몸을 낮추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또.. 할.. 자신이 있다면? 전승 무패 같은 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자신이 있다면?”
그 말을 들은 남동현이 갑자기 크게 동요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수 형.”
먹힌 건가?
강기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어, 왜?”
“FWX 팬클럽 가입 링크 드릴까요? 자꾸 허튼소리 하는 거 보니까 형이 더 빠지신 것 같은데..”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냥 덕후의 대답이었다.
“일이나 해라.”
강기수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누가 지배하든 간에, 우리 해설 입장에서는 한국이 세계 최고의 LOS 강대국이 되면 좋죠, 뭐.”
“그건.. 맞다. 그래. 맞아. 그건 그래. 근데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게 맞는데, 우린 해설이고 그쪽은 구단이잖아.. 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아. 이제 곧 들어갈 시간이다.”
“벌써?”
그리고 두 사람의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듣던 캐스터가 귀를 쫑긋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