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233화 (233/326)

233화. LOS강대국

정규시즌의 마지막 목요일.

전날 경기를 마친 트릭스터의 사옥 휴게실.

강기수 해설이 음모론을 떠들어대던 그 시각.

중국 귀환자, 채지한은 초조한 마음으로 오늘의 경기 중계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식을 요청하고 혼자 나와 한기가 맴도는 휴게실에 앉아 생각을 정리한다.

어제 경기 결과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산 호넷을 상대로 한 세트를 내준 승리.

꽤 만만하게 봤던 동부 대표 팀이었던 호넷이 또다시 돌리는 픽을 가지고 나왔다.

마치 ‘어떤 팀’처럼.

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FWX의 아류작.

최종 승리는 어렵지 않았지만, 이 중요한 시기에 고춧가루를 뒤집어쓰고 한 세트를 내줬다는 게 화가 난다.

“스톰, 그리고 미라쥬.”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것은 오늘 있을 타 팀의 경기에 신경이 쓰여 집중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다.

미드의 완벽주의자적 성향을 그대로 지닌 채지한으로서는 이게 가장 못마땅하다.

두 팀 모두 트릭스터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팀이다.

정확히는 미라쥬가 지난주까지 동률, 공동 3위였고.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 또다시 순위는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

손을 톡톡 두들긴다.

누가 이기는 게 나을까?

스톰?

현재 2위인 스톰이 2 대 0 승리를 거두게 되면 우리 팀이 미라쥬를 앞서 나간다.

하지만 우리 팀이 2위를 할 가능성이 사라지겠지.

그럼 미라쥬?

미라쥬가 2 대 0 승리를 거두면 우리 팀보다 앞서나가고, 2 대 1 승리를 거두면 다시 동률이 된다.

그리고 토요일에 있을 경기에서 순위를 결정할 수 있겠지.

잘만 풀리면 2위까지 상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스톰이 빅스에 진다면야.

“그럼 차라리..”

폰 메모장에 경우의 수를 적던 채지한이 문득 천장을 바라봤다.

해가 일찍 진 겨울의 천장에서 조명이 쨍하게 빛난다.

눈이 아픈 것 같아서 벽을 바라보니 벌레 같은 게 떠다니는 것처럼 헛것이 보인다.

벌레?

이건 뭘 뜻할까?

그냥 현타다.

“내가 이걸 왜 계산하고 있지?”

채지한은 내용을 몽땅 지워버렸다.

순위가 어떻게 결정되든 눈앞의 경기에 집중하는 게 진리인데.

“빡치네..”

그래도 중국 내에 있었을 때 만만하게 봤던 한국 리그의 수준이 생각보다 많이 올라왔다.

이건 좀 위안이다.

과거에 중국 팀으로 이적할 때, 한국은 피지컬만 보고 모든 걸 결정하는 성향이 강했으니까.

아마 중국에서 불었던 피지컬 붐의 영향이 부정적으로 터져 나왔던 시기였을 거다.

다른 리그에 있던 채지한의 눈에는 그게 더 선명히 보였다.

그런데 지난 서머부터 시작된 어떤 변화가 지금의 LKL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라인전 피지컬, 전체적인 운영, 그리고 그 위로 쌓이는 연계 플레이의 숙련도.

충분한 피지컬을 갖추고 있었던 LKL이 모 팀의 영향으로 다른 방향의 훈련에 눈을 뜨자 전체적인 리그의 질이 상승했다.

확실한 건.

한국 리그는 어떤 태동기를 거치고 있다는 거다.

“월즈.. 가야 하는데.”

그리고 언뜻 한 팀이 잘하기만 하면 월챔에서 우승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같은 지역의 리그가 한 조에 들어가지 않게 배치되는 월챔의 특성상, 리그가 강하다는 건 라이벌들을 대신 암살해주는 역할을 맡아주는 것이기도 하니까.

이게 바로 선수 입장에서 보는 ‘LOS 강대국’의 장점.

월챔은 개인전임과 동시에 국가대항전인 셈이다.

이 사실을 중국이 깨닫지 못한다면 올해의 월즈는 아마 한국의 차지가 될 것이다.

사실 알아도 하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음.”

여기에 더해 유독 최종 승자만을 기억하는 한국의 잔인한 특성.

그리고 지금 완벽하게 새로운 기록을 덮어쓰기 하고 있는 FWX.

그래서 모두가 잊고 있는 사실.

지난 월챔에서 FWX는 준우승을 차지했었다.

한국 팀들이 줄줄이 조기 퇴근하는 꼴사나운 환경 속에서도, 지원 사격이 일절 없는 그때도 그들은 길을 개척했고 답사를 마쳤다.

그럼 한국 리그 전체의 수준이 향상된 환경 속에서.

이 팀은 어떨까?

세 가지 요소.

리그의 수준 상승.

월챔은 국가 대항전.

그리고 채지한 생각에, 로또 맞은 것처럼 이 시류를 탄 FWX.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원인까지 찾기는 쉽지 않다.

한 사람 혹은 한 팀이 이런 흐름을 주도했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이번이 진짜 적기인데. 내가 다른 팀들을 수족으로 부렸어야 하는 건데..”

물론 아직 모든 팀이 완성된 건 아니다.

아마 msl에서도 어느 정도 판가름 되겠지.

하지만 이건 아직 먼 이야기.

그리고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근데.”

당장은.

내가 있는 트릭스터가 공동 3위?

이러다 혹시라도 4위가 된다면?

4, 5위전으로 유니버스를 만나게 된다면?

유니버스는 안 무서운데?

근데.. 이기고 나면 1위가 선택을..

그러니까 1위는..

채지한 역시 갑자기 깨달았다.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오만.

중국에 있었던 시절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진 그 감정.

당장 순위를 잊고 월챔이니 뭐니 지껄이던 자신.

그리고 그다음으로 깨달은 감정은 두려움.

“FWX를 바로 다시 만난다고?”

1위인 FWX가 플레이오프에서 우리를 고를 가능성이 높고.

“아.. 진짜. 진짜 그건.”

두렵다.

바로 탈락하게 되면 그건 최악이다.

주연이 목표였던 그가 조연조차 할 수 없게 되는 상황.

“그건 안돼.”

아직 ‘그’ 분석가를 찾는 건 지지부진하다.

다만 한 가지 명확한 건.

작년 트릭스터의 msl 시기부터 변화가 있었고, 그때 제공된 형태가 가장 완벽하며.

자신이 궁금했던 내용과 원했던 방향성을 가진 분석이 있었다는 것.

“그 사람만 찾으면 돼. 그 사람만 찾으면..”

그렇게만 된다면.

틀림없이 서머 시즌에는 트릭스터도 수직상승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면에서 제법 예리한 귀환자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

[ (LKL) 승부 예측 실패 78%.. 미라쥬의 짜릿한 ‘뒤집기’ ]

성남 스톰과 광주 미라쥬.

돌아온 두 라이벌의 대격돌은 놀랍게도 미라쥬의 승리로 끝났다.

양 팀의 라이벌리 성향이 강화된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미라쥬는 스톰이 FWX를 상대로 비장의 카드를 꺼내썼던 것처럼 숨겨뒀던 패를 선보이며 패, 승, 승이라는 역전을 이뤄냈다.

미라쥬 탑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바텀의 역할이 컸다.

올해 합류한 원딜 고구미, 고수호와 서포터 헥사, 왕지우의 역할이.

사실 고수호와 우리 팀 2번 서포터 사이에는 꽤 깊은 인연이 있다.

애당초 내가 유상준과 인연이 닿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 자세히 확인해 볼 도리가 없었던 사연이다.

어쨌든 정확히 어떤 기저 감정이 있었는지까지는 알기 어렵지만 꽤 긍정적인 자극이 됐던 모양.

그리고 왕지우의 경우에는 일단.

나를 좋아하는 온라인 여포다.

왕지우는 만약 완전히 새로운 서포터를 영입해야 한다면 이 선수를 염두에 뒀을 정도로 꽤 괜찮은 서포터인데, 왕지우를 노리고 들어왔던 침입자를 격퇴해준 사건 이후 어딘지 모르게 나에게 살가운 구석이 있다.

게임 내에서만.

낯을 가리는 건지 특별한 접점이 생기지는 않고 있는 선수.

게임이나 방송에서는 그렇지 않던데.

뭐, 프로 계에서 이런 타입은 흔한 편이니까.

어쨌든.

[ (LKL) 스프링 정규 시즌 완료! ]

[ PO 진출 팀 1위 대전 FWX, 2위 성남 스톰, 3위 광주 미라쥬, 4위 인천 트릭스터, 5위 대구 유니버스, 6위 부산 호넷.. ]

올해의 리그는 꽤 큰 변화가 있었던 편.

우리 팀을 제외하면 주전이 바뀌지 않은 팀이 없다.

심지어 같은 등급 선수끼리의 교환이 아니라 2군에서의 콜업이나 삼각 트레이드도 일어났기 때문에 결과 예측이 쉬운 시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LKL의 전체적인 체급은 제법 빠르게 올라왔다.

[ 제주 F.L.E의 성장을 확인한 시즌. “비록 지금은 7위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육성에 집중할 것.. 목표는 제2의 FWX” ]

특히 중하위권이었던 부산 호넷의 6위 유지, 그리고 최하위권 중에서도 바닥이었던 F.L.E의 성장은 칭찬할 만하다.

[ 서울 빅스의 추락.. 8위 마감 ]

[ 수원 해머스,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시즌 아웃.. ]

[ 1위와 10위의 득실 차가 ‘평행 세계’에 가깝다고? ]

물론 그렇지 않은 팀도 있고.

[ LKL 남동현 해설, “하루라도 빨리 세계 무대에 우리 선수들을 선보이고 싶다.. msl이 기다려져” ]

그런데도 전체적인 평가는 좋은 편이다.

[ 유럽에서 ‘역수입’해간 모데와 마이 ]

[ 딩거 서폿을 다시 선보인 ‘헥사’.. ]

[ 세계에서 재조명된 세주의 가능성.. 탑, 정글, 서폿 모두 가능? FWX의 활약 ]

[ 유행을 선도하는 LKL, 1부 1황의 품격 ]

분위기도 들떴고.

[ FWX, 압도적 득실 차 ‘폭격’! 35의 금자탑, 2위의 2.18배.. ]

그건.

[ FWX 그들은 신인가? FWX 그들은 신인가? FWX 그들은 신인가? ]

내가 모든 팀을 골고루 자극한 것도 있으니까 그렇다.

[ 국가를 불문하고 퍼져나가는 Gun’d 플레이 ]

그리고 우리의 업적과 플레이 스타일은 반드시 자국 내에서 먼저 퍼져나가게 되어 있다.

그다음이 세계다.

같은 국가의 팀끼리는 스크림 우선순위가 높으니까.

리그 전체에 대한 영향력.

그건 그냥 거둬내는 승리로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계속 이기는 것만으로는 그냥 혼자만의 왕조를 건설하는 것뿐.

그리고 나 역시 한 팀이 압도적인 원탑인 경우에는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독한 승자가 멋져 보이긴 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사실 혼자만 강하다는 건, 나와 국내 스크림을 해줄 상대조차 없다는 뜻이니까.

[ 호넷 감독 차규정, “FWX 플레이 스타일 분석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그 느낌이 맞다.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LKL 문화에 이바지..” ]

근데.

그럼 전에는 왜 이렇게 안 했냐고?

이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우상이 되기는 쉽지만 동기를 부여하는 건 어렵다.

그리고 내가 프로로 활동하면서 다른 팀들에게 데이터를 뿌려 댈 수는 없잖아.

‘월챔에 대비해서 전부 같이 성장해요!’라는 말을 하는 선수가 있다고 생각해봐.

이상해 보이지 않아?

FWX에서는 이런 자극이 훨씬 더 부드럽고 섬세하게 가능했다.

[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지금도 등반 중, FWX의 전설 ]

비슷한 걸로 치자면 펭귄 효과가 있을까?

남들이 사면 나도 사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

최하위권이던 FWX가 리그 상위권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 모습.

덩달아 우리를 따라하는 호넷, F.L.E같은 하위권 팀이 꾸역승을 거두는 모습.

다른 팀에서는 그걸 보면서 ‘와, 잘한다’라고만 생각할까?

오히려 ‘쟤네가 했으면 우리도?’ 같은 자극에 가까웠을 거다.

이건 내가 FWX라는 하위권 팀에 들어왔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결과다.

‘원래도 강했지만 권건 선수 영입으로 더 강해진’ 상위권에서는 불가능했었던 길.

[ 한국은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 강할 것 ]

[ ‘스크림 패왕’ 한국 리그 ]

[ (스크림 썰) 한국에서는 안 먹히던 유니버스가 이세계에서는 최강? ]

내 최종 목표는 국내 리그 우승이 아니라 세계 리그 우승.

그 무대에서 적의 적은 아군.

적당한 팀끼리 붙여서 경쟁을 심화시키고 단련하게끔 만든다.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 이 시장을 최대한 키워낸다.

이거야말로 내가 나 혼자 존나 짱 세니까 캐리했다, 가 아니라.

회귀자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히든 루트 아닐까.

곽지운이 말했던 ‘세계화’니 ‘스포츠’니 하는 것들이 키워드가 됐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도록 둘 게 아니라면 쉬지 않고 담금질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러니까 이 말은, 쉽게 말해서.

[ 불꽃의 시대, Fireworks. ]

[ FWX, 플레이오프 1라운드 상대 지명 결과 발표는 언제? ]

우리는 계속해서 이 리그 전체를 흔들어 댈 거라는 이야기다.

“건! 회의!”

“오케이.”

어차피 최종 승자는 우리가 될 거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