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스페셜 게스트
“실례하겠습니다~”
문 사이로 살포시, 발레 슈즈처럼 낮고 부드러운 신발이 보이는가 싶더니.
“안녕하세요, 여러분!”
“우.와. 연.예.인이다. 우.와아. 나. 알아. F.W.X의.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업.. 어억.. 읍.. 억..?”
척 봐도 170은 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긴 머리.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의 게스트! 연기자 에이린입니다!”
작은 얼굴과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이목구비.
“어버법..”
선수들과 같은 FWX 유니폼을 입었음에도 전혀 다른 핏으로 느껴지는 ‘연예인’이 등장한다.
“진짜야? 이거 진짜야?”
최은호는 입을 틀어막았다.
여자다!
예쁘다!
머리 길어!
영화배우!
완전 아는 사람!
심지어 나보다 유명한 사람!
“현실?”
게임에, 관심 많은, 여성, 연예인!
온몸에 FWX 유니폼과 굿즈를 둘렀으니까 이건 당연한 일이다!
“나 휴가 때 뵈었는데! 영화관에서! 그러니까 영화에서! 영화..”
“영화 지금 하는 중 아니야?”
“그러니까 촬영이 끝났다는 뜻이겠지!”
“으어버버버버.”
김예린이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최은호는 힘이 풀렸다.
“얘 왜 사람이 바보가 됐냐? 야, 정신 안 차려?”
그 꼬락서니가 황당했던 곽지운이 쿡 찌르자 최은호는 정말로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아, 아니. 내가 그렇게 세게..”
“뭐하는 거야, 은호 형?”
그것도 김예린 바로 앞으로.
모두의 입 안에서 비속어가 맴돌았지만 차마 카메라 앞이라 내뱉지 못했다.
“어머. 괜찮으세요?”
그 대신 고운 연예인이 눈웃음 지었다.
“어.. 어.. 넘어진 게 아니라.. 흐. 연예인 처음 봐서..”
“무대 리허설 때도 본 적 있지 않음? 왜 저럼?”
“그땐 남자였어서 쿨패스한 듯.”
최은호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병신같은 얼굴로 웃으며 제 엉덩이를 더듬었다.
“쟤 진짜 뭐해?”
“이거.. 이거 에이린님 드리려고.. 어허헛. 하하하.”
뒷주머니에서 나온 건 두 칸짜리 휴지였다.
언제 사용하려고 했는지 곱게도 접어놓은 두루마리 휴지.
간신히 병아리 눈물이나 닦을 것 같은 얇아빠진 휴지가 참 없어 보인다.
“우와~ 정말 너무 상냥하시다 정말~”
전문 연기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휴지를 받고 제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나머지 선수들이 입을 틀어막을 차례였다.
“저거 애드립이냐? 대본이지? 제발 대본이라고 말해 줘.”
“오늘 대본이 어딨어.. 저 분은 왜 여기기까지 와서 이런 봉사활동을..”
“말도 예쁘게 하신다.”
“혹시 성묘 마리오임?”
다만 이유찬이 틀린 말을 했을 때 지적해줘야 할 상대인 김예성이.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정말 신기하죠?”
박 감독의 옆에 다가온 사람은 김수연 단장이었다.
“예? 아, 예. 은호가 저 휴지를 왜 뒷주머니에 넣어 다녔을까요? 넣어 다니려면 좀 많이 넣어 다니지. 휴지는 네겹 더블 엠보싱 휴지가 좋은데 어디서 저런걸..”
“네겹 더블 엠보싱? 아니, 그게 아니라.”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
“잘 보세요.”
“네?”
박 감독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배우님이 우리 유니폼을 입고 있잖아요.”
“그게 왜..”
연예인.
엔터테이너.
대중문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이른다.
그중 김예린은 에이린이라는 배우명을 사용하는 연기자.
주로 영화계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고.
예능 권유는 대부분 고사하곤 했다.
주된 사유는 예능 출연을 통해 잃을 게 더 많기 때문.
뜻밖의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상 ‘캐릭터’가 주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랬다.
프로그램 PD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시청자들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오늘, SNS에도 게시하셨더라고요.”
“뭘요?”
“유니폼 인증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냥 팬 인증 올린 거 아니에요? 제가 들여다보지 못한 의미가 있나요?”
게임 세계에만 살아 바깥세상을 잘 모르는 박진현 감독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희 SNS도 두 가지로 나뉘죠. 선수 개인이 활동하는 SNS와 사측에서 관리하는 SNS.”
김수연 단장이 친절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렇죠. 선수들에게 SNS를 권장하지는 않지만..”
“저쪽 세계는 더 그렇습니다. 개인 SNS 형태를 취하더라도 티칭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왜요?”
“배우들의 경우에는 이미지가 아주 중요하니까요. 극단적으로, 매일 SNS에 술 먹고 파티하는 사진이나 욱일기를 걸친 반라 사진을 올리는 배우라면 정극 영화나 청춘 드라마에 캐스팅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어렵겠죠.”
“그래서 오히려 개인이 마음대로 올리는 경우는 잘 없어요. 에이린님의 소속사는 배우 전문 소속사이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특히 보수적이에요. 분야가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려야 하는 ‘연기’니까요. 가수나 아이돌보다 제한이 더 심한 셈이죠. 배우의 나이, 가치를 봐도 그렇고요.”
단장은 냉정한 눈으로 평가했다.
프로게이머에게도 프로의 세계가 있듯.
연기자들에게도 프로의 세계가 있다.
“그럼 인증샷은 소속사에서도 허락해서 올라온 거라는 얘기군요.”
박 감독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지만 그도 에이린이라는 배우를 안다.
그녀는 아역부터 당찬 연기로 차근히 플모를 쌓아온, 앙큼한 여동생 이미지가 강한 사람.
연기 외길.
충무로의 블루칩.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연기로 로코 퀸 자리에 등극한 사랑스러운 배우.
“그래서 저희도 이번에 게스트로 모신 거죠.”
“어떻게 캐스팅된 겁니까?”
“저희가 한 게 아니에요.”
“저쪽에서요? 아니, 보통은..”
박 감독은 말을 아꼈다.
사실 종종 개인 라인으로 오퍼가 들어오긴 한다.
박 감독도 어쨌든 이쪽 세상에 오래 있었으니까.
게임계와 가까운 건 스트리머, BJ들이다.
이쪽 세계엔 합방 개념이 있다.
결국 게임 팀에게 합방 제안이 들어오는 셈이다.
“보통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서로 시청자 교환하자는 식..”
“누이..? 혹시 알고 계신가..?”
“네?”
“아니에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박 감독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썩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항상 정중히 거절했다.
다른 건 상관없다.
그냥 선수들이 잘 나가는 스트리머와 만난 뒤 헛물이 드는 경우를 봐서 그랬다.
감독은 관리자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FWX는 고지식한 팀이었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인기가 없었다더라도 그런 가벼운 콜라보를 진행하지 않았다.
나중에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일종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박 감독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건.”
“아. 익명의 제보 말씀이시죠. 해머스 건.”
“예.”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소식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시기도 맞췄어요.”
그래서 오늘 메시지가 왔구나.
“우리 우승한 건 즐겨야죠. 안 그래요? 아, 예쁜 것들. C급 C급 하더니 진짜 C급 맞네.. 문화재 제정 시급..”
“설마 그 댓글 쓰신 게..”
“그것보다도 아직도 똥폰 쓰시는 우리 감독님?”
하지만 김 단장은 왠지 입이 간지러운 것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설명해 드렸는데, 안 궁금하세요?”
“예? 아.. 똥폰이라니..”
“그거 말고. 에이린님은 원래부터 FWX를 등에 업을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공식화하는 거. 왜일까요?”
박 감독도 이제 알겠다.
게스트란 건 결국 서로의 발목을 붙잡는 개념.
LOS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한 연기자들이 게임 채널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대중적 이미지가 아니라 작품적 이미지 때문에.
새로운 가면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FWX도 게스트를 안 쓰는 팀인데, 굳이?”
“그러게요.. 우리가 혹시 월챔 우승을 했다고 해도, 굳이? 겹치는 장르도 아닌데 팬밍아웃을?”
“물론 이 이야긴 우리 팀의 위상이 올라갔다는 대단한 뜻이긴 하죠! 대 FWX!”
“그럼 대체 왜 이런 퀴즈를?”
“아차차. 퀴즈는 하나 더 있답니다.”
“뭐죠?”
“진짜 진짜 에이린님이 나온 이유.”
어느새 박 감독은 다시 선수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연예인 구경보다는 ‘연예인에게 악영향을 받을지도 모르는’ 선수들 걱정으로 쏠려 있다는 것을 아는 김 단장은 피식 웃었다.
외골수 같으니.
“에이린님과 우리 팀 선수 중 하나가 아주 특별한 사이거든요. 맞춰보세요.”
“예? 네? 예? 특별요? 아니, 우리 애들한테 그럴 시간이..”
“힌트는 선수님들 중 한 분이 에이린님 엄마의, 엄마의, 사위의, 아들인 것.”
“엄마? 사위?”
“이모는 없고요. 후후.”
“?”
“그럼 저는 이만.”
단장이 멀어진다.
#
아아.
여기는 난장판, 여기는 난장판.
콘텐츠 팀 팀장 나와라, 오버.
“혹시 초콜릿 드실래요?”
“와, 진짜 에이린 천사다, 와..”
“아, 그쪽 말고 건님. 이 초콜릿이 아주 달답니다?”
“혹시 제 이름 아직 못 외우신 건 아니죠?”
“알죠 알죠. 휴지님. 제가 나중에 사옥 휴지 엠보싱으로 바꿔 달라고 게시판에 써드릴게요.”
스탭들도 난리.
“휴지! 휴지 업그레이드를 안 했어! 야! 벌크 휴지 다 갈아치워!”
“끼얏호우! 드디어 선수님들에게 해드릴 수 있는 걸 찾았다! 이건 받을 수밖에 없을걸?!”
“당장 퀵으로 주문해! 오늘 촬영 끝나면 돌아가서 바로 뽀송할 수 있도록!”
“화장실 구조 변경도 할까요? 뒤에 휴지 거치할 수 있게..”
“올~~"
뜻밖의 혜택을 받은 탑도 난리.
“똥잘알들. 만족스럽다.. 비데 후 휴지는 역시 두꺼운 게 좋지..”
“...”
준비된 콘텐츠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건님,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닙니다. 안면이 있는 것 같아서.”
넘어진 최은호의 꼴이 너무 좀 그랬던 건지 뭐 어쨌던 건지.
팀에서는 메디컬 체크도 할 겸 잠시 촬영을 쉬면서 서로 인사를 나눌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원래 이런 식으로 하던가?
“안면요? 제 영화 보셨어요? 예습 기뻐요.”
영화를 보긴 했다.
내 휴가 중 하루를 담당한 최은호의 SNS 만들기를 거부했다가 억지로 끌려갔거든.
그게 로맨틱 코미디 영화일 줄은 몰랐다.
좀비가 나온다고 되어 있었다니까?
근데 그 안에서 꽃피는 사랑, 뭐 이런 내용이더라.
마지막으로 제일 황당한 건 이 영화가 외화를 밀어내고 박스 오피스 1위에 자리 잡은 좋은 영화였다는 거.
이 배우가 곧 개연성이었다.
“그치만 너무 빠지기 없기에요? 큰일 나니까.”
로코의 여왕이 계속해서 제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다.
눈을 쉴 새 없이 찡긋거리는 게 상당히 불편한가 보다.
저럴 거면 묶는 게 편하지 않나?
“알겠습니다.”
“음~ 무뚝뚝해~”
어쨌든 이 연기자는 정확하게 선은 지키면서도 나에게 호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도 눈치를 못 챌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단순히 외모나 인상 때문?
아니, 상대는 로코 퀸이다.
오히려 의심스러운 상황이 맞지.
이 사람이 나라는 개인을 잘 알 리가 없으니까.
“근데 상관없어요, 나는 내가 잘해주는 쪽인 게 좋아.”
귓가에 훅 들어온 속삭임에 오랜만에 당혹스러움이 밀려온다.
이거 뭐 몰래카메라나 서프라이즈, 뭐 그런 거야?
“그.. 만..”
아까부터 긴장했는지 한마디도 말을 못 하던 김예성이 우리 사이로 끼어들어 왔다.
“이제 그만.. 라.. 친.. 돼..야.. 토할.. 까.”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다른.. 가.. 해.. 발..”
고개를 숙인 데다 귀까지 새빨개져서 뭐라고 말하는 건지 하나도 안 들린다.
저렇게까지 빨개질 일인가.
“이분은 부끄러움이? 차암 많으신가 봐요.”
연기자가 생긋 웃었다.
“그런 편이죠.”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만났던 김예성을 생각하면 좀 그런 면이 있지.
“아, 진짜요? 그런 편요?”
“네.”
근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김예성을 닮은 것 같은데?
“거짓말. 설마~ 진짜? 뭐 하나 없는 게 아니구요?”
“?”
김예성은 첫인상 미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운동과 피부 관리를 꾸준히 하는 타입이라 훤한 느낌이 있다.
우리는 거의 실내 생활을 하는데도 스타일링이나 패션 감각이 뛰어난 편이라 눈에 띄는 게 있고.
“PD님, 카메라 내려갔을 때 들어간 멘트 투입하면 배신이에요.”
“당근빳따죠! 아시잖아요, 저희 콘텐츠에 연애 테이스트 안 넣는 팀인 거!”
“알죠, 알죠~ 아쉽네요.. 좀 넣지..”
“네?”
에이린은 한눈에 봐도 예쁘지만 그렇다고 화제의 아이돌 같은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연기자답게 잘 정돈된 골격이나 둥글고 작은 두개골의 형태.
염색하지 않은 머리카락이나 눈썹의 모질, 두께.
그리고 제법 큰 키와 1 .7cm 정도의 눈 세로 길이..
잠깐만, 이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팩트인데?
“자! 이제 다시 가실까요!”
생각이 길게 이어질 겨를도 없이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팀전입니다! 아까 못 따신 상품 있죠? 남은 거!”
“네네.”
새로운 인물에 대한 흥미보다 그 사람이 가져온 새로운 간식에 대한 흥미가 더 컸던 이유찬은 아직도 입 안에 초콜릿을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고.
“그걸 걸고 진행합니다! 팬들에게 선물을!”
“드립시다!”
마이웨이 곽지운은 게임에 열의를, 지나치게 많은 대사와 연기를 뿜어낸 유상준은 멘탈이 터져서 실려 나갔다.
대신 단독 대머리 엔딩 확정이다.
“이번 게임은 팀전이고..”
콘텐츠 팀장 겸 오늘의 PD님이 손뼉을 두어번 치며 설명을 이어 나간다.
“세 사람씩 한 팀이 되어서 두 팀으로..”
“앗. 저 그럼 팀 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에이린님, 누구요? 권건 선수?”
“아뇨? 라.온 선수요!”
“예?”
어깨부터 콧잔등까지 찡긋하며 온몸으로 미소.
강력하게 뿜어져 나온 로코 퀸의 행복 에너지에.
“푸헥.”
깡 생수만 들이키던 김예성이 허공으로 물을 뿜는다.
“미.. 친.. 내 ..생에서 꺼.. 제발..”
아슬아슬한 마지막 게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