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야바위
“자자! 돈 놓고 돈 먹기! 지금 때가 왔어요. 오늘 가면 이제 안 옵니다. 잘 만하면 집 한 채 값도 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우들이 다시 한 번 초앵을 잡으러 밖으로 나가자 손님도 없는 청루에 앉아 있기가 심심해진 유성탄이 밍기적 밖으로 나갔다. 길을 잘 몰라 근처만 어슬렁거리던 유성탄의 눈에 이상한 장면과 소리가 들렸다.
‘돈 놓고 돈 먹기? 거기다 집 한 채 값?’
유성탄은 하늘이 자신이 돈을 도둑맞은 것을 알고 본전이라도 찾으라고 내려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는 돈 놓고 돈 먹는데 유난히 강하지 않았던가.
‘뭐야 저거? 너무 쉽잖아…….’
건장한 청년들이 둘러싼 탁자에 약간은 나이 든 중년의 남자가 똑같이 생긴 패를 세 개 놓고는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자, 여기에 점이 있지요. 제가 왔다 갔다 하다가 딱 놓았을 때 점이 있는 패를 맞추면 돈을 열 배를 줍니다.”
눈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유성탄이 아니었던가. 좁쌀만 한 벌레가 휙휙 날아다니는 것을 빛도 하나 들어오지 않는 충동에서 잡아내던 그의 눈을 피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으이그! 바보들 가운덴데…….’
유성탄의 눈에는 점이 있는 패가 가운데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사람들은 다른 곳에 돈을 걸고 있었다. 유성탄은 그게 너무 답답했다.
“이보쇼! 가운데에 돈 가요!”
결국 참지 못한 유성탄이 훈수를 둔다.
“어허! 돈이 가야지 옆에서 말하면 안 됩니다.”
패를 돌리던 남자가 파리 쫓듯이 손을 흔들며 유성탄에게 말했다. 서너 판이 돌았고 그동안 자신이 찍은 패가 언제나 점이 있는 패라는 것을 확인한 유성탄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은자 다섯 냥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다행히 큰 전낭에 집어넣어 놓지 않아서 건진 그의 전 재산이었다.
“여기에 은자 다섯 냥이오.”
유성탄은 결국 자신의 전 재산을 오른쪽 패에 걸었다. 쪼잔한 좀생이 기질이 있는 그로서는 확실히 딴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죄송합니다.”
패를 돌리던 사내가 패를 깠다. 그러나 유성탄이 찍은 패에는 점이 없었다. 사내는 가운데의 패를 펴 보이며 다시 말했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셨으면 은자 오십 냥을 벌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안되셨습니다.”
은자를 집어가는 그 사내를 유성탄이 얼굴이 벌게져서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이 새끼! 감히 나 유성탄에게 사기를 쳐!”
“무슨 소립니까? 내가 무슨 사기를 쳤다는 말입니까? 패를 고른 분은 손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내가 분명 이 패에 점이 있는 것을 봤다. 그런데 점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사기가 분명하다.”
“이자가 자기가 잘못해서 돈을 잃고는 누구를 사기꾼으로 모는 거야!”
사내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위에 손님으로 위장하고 있던 건장한 사나이들이 은근히 끼어들기 시작한다.
“남자가 돈을 잃었으면 남자답게 인정해야지 남자답지 않게 뭐 하는 거요?”
한 명이 먼저 유성탄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보통은 그 말이면 남자들은 창피해서 돌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유성탄을 잘못 봤다.
“이 자식이!”
퍽!
“으악!”
한 방에 말한 자를 날려버린 유성탄이 소리쳤다.
“난 여자다. 이 자식아!”
쓰러져 기절한 자에게 한소리 친 유성탄은 다시 패를 돌리던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돈은 돌려주고 다시 패를 돌려라 만약 안 하면 너는 나한테 평생 맞는다.”
말하는 유성탄의 눈에서는 살기가 쏟아졌다.
“이 자식이 어디서 행패야!”
주위에 있던 건장한 자들이 유성탄을 향해 모두 달려들었다. 그러나 몇 번의 싸움으로 유성탄은 싸움의 본질을 어느 정도 꿰차기 시작했다. 이제는 맞지도 않고 전부 다 한 방씩 날리자 모두 기절해 버린다.
“음… 음… 그러니까 요렇게 하면 점이 없어진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보기에는 여기에 점이 있지만 요렇게 하면 없어집니다. 다만 보는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채도록 손이 빨라야 합니다.”
모두 한 방에 날려버린 유성탄은 패를 돌리던 자의 멱살을 잡고 다시 패를 돌리도록 했다. 하지만 한 판도 이길 수가 없었다.
패를 돌리는 자도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지면 계속 다시를 외치는 유성탄이지만 분명 한 판이라도 지면 영락없이 은자 오십 냥을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러자 유성탄이 호기심이 생겼다. 분명 점을 보았는데 까면 없어지는 것이 참 신기했다. 그러고는 유성탄이 그답지 않게 흥정을 했다. 방법을 가르쳐주면 그냥 놔주기로.
생각보다 유성탄의 손속은 굉장히 빨랐다.
“정말 빨리 배우시는군요. 이렇게 빨리 배우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패를 돌리던 자의 칭찬에 유성탄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천재거든.”
‘헤헤헤! 내일부터 천하를 돌면서 한 판씩 벌리는 거다. 돈 놓고 돈 먹기. 히히히, 천하제일부자가 되는 거다.’
유성탄이 야바위 기술로 천하제일부자가 될 당돌한 꿈을 꾸고 있을 때…….
* * *
“낭인 따위가 감히 철검보의 무사를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습니다. 저번에는 본보의 용병이었고 공도 세운 것이 있어 놔두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당장 가서 물고를 내야 합니다.”
철검보의 내당 당주 노룡한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유성탄이 청루에서 철검보의 무사들을 때렸고 그 무사들은 내당 소속의 무사였다. 그런데도 외당에서는 아직까지도 유성탄을 잡으러 출동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노룡한이 흥분해서 떠드는 중이었다.
“맞습니다. 이놈이 어제 나가면서도 어찌나 건방지게 나가는지 제가 가슴이 벌벌 떨리더라고요. 철검보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놔두면 안 됩니다.”
총관 배장손도 어제의 수모를 생각하며 열이 받아 말했다.
“안 됩니다, 보주님. 저는 그 당시 유성탄이란 낭인이 싸우는 것을 아주 가까이서 봤습니다. 그는 분명 삼류무사 정도밖에 안 되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예 무공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일류무사에 맞먹게 빨랐고 척지경의 십 성에 달하는 장을 수십 장을 맞고도 끄떡도 안 했습니다.”
외당 당주 철검비호 정두호는 말하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버릇이었다.
“척지경은 저라 해도 십 초를 버티기 힘든 고수입니다. 그런 그의 십 성에 달하는 장이라면 아마 저라면 일장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무서워서 우리 철검보가 낭인을 피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노룡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노 당주는 그 싸움을 못 봐서 그런다니까요! 제가 단언하건대 유성탄은 낭인으로 끝날 친구가 아닙니다. 저는 어제 유성탄이 배 총관에게 남무림이 자기에게 찍혔다고 하며 두고 보자고 했다는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달래야 합니다. 달래기 싫다면 그 친구와는 되도록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정두호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 성격이 급하고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강력하게 말하자 보주 상관청도 갈등하고 있었다.
“보주님, 정 당주가 이제 늙은 모양입니다. 만약 정 당주의 말대로 낭인이 본보의 무사를 건드린 것을 그냥 놔둔다면 이번 비월문과의 전쟁으로 올라간 본 보의 위상이 다시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미 유성탄이라는 놈이 본 보의 무사를 때린 것이 다 소문이 났습니다.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내당 당주는 서열상 외당 당주보다 위였다. 그런 그의 주장을 보주라 해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무공으로 서열 이위인 정두호의 말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보주님, 그렇다면 한번 그놈을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배장손이 고민하는 상관청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험? 어떻게 말이냐?”
“그놈이 돈을 무척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들었다.”
“금자 백 냥을 준다고 살살 구슬려서 왕태산의 산적을 제거하게 하는 겁니다.”
“왕태산의 산적은 무공을 익힌 놈들이 삼십 명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우리 말을 듣겠느냐?”
“단순한 놈입니다. 분명 들을 것입니다. 만약 진짜 없앤다면 금자 백 냥을 주고 사이좋게 지내고, 만약 없애지 못한다면…….”
“없애지 못한다면……?”
“거기서 죽겠지요.”
정두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찬성을 하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 * *
초앵을 못 찾고 다시 청루로 돌아온 아우들을 보며 유성탄은 자신이 새로 배운 놀라운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다.
‘아니야! 괜히 보여줬다가 전부 달라붙어서 꼽사리 끼려고 하면 동생들이니 때리지도 못하고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따야지.’
유성탄의 표정이 떠날 때와 달리 뭔가 숨기는 듯,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복잡다단한 얼굴을 하고 있자 마동파가 물었다.
“대형,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뭐? 무슨 좋은 일? 내가 지금 얼마나 슬픈데…….”
얼굴에 웃음기를 달고 슬픈 척 행동하는 유성탄을 보며 모두는 유성탄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여기도 장사는 해야 합니다. 여기 주인도 초앵한테 준 돈이 있는데 도망치는 바람에 다 날렸다고 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까지 계속 여기 있으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만 낭인촌으로 가시지요.”
강태웅이 방에 모로 누워 있는 유성탄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아예 뿌리를 박으려는 듯한 유성탄의 모습에 불안을 느꼈다.
“맞습니다. 빨리 움직여야 만사무불통녀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낭인촌도 낭인들이 계속 떠나고 있어서 낭인막도 언제 철수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형께서도 부모님을 찾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표도행의 부모라는 말에 유성탄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내가 초앵을 꼭 잡으려고 하는 거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좋아하는 돈을 왕창 안겨주려고 했는데 지금 찾으면 뭐 하냐, 내가 거진데…….”
“그거야 우선 부모님을 찾은 다음에 걱정하셔야지요. 솔직히 지금 부모님을 찾는 것도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거냐?”
“제 생각인데 우선 혈문을 찾으면서 계속 돈을 버는 겁니다. 세상은 넓고 돈 벌 곳은 많습니다. 우선 움직여야지 이대로 이곳에 죽치고 있으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될 것입니다.”
유성탄은 죽도 밥도 라는 말을 듣자 배가 고파오는 것을 느꼈다.
“맞습니다. 우리 칠형제가 힘을 합치면 못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유성탄은 형제의 의를 맺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아우들에게는 성질을 내지 않았고 고집도 피지 않았다.
처음 칠웅을 만들자고 했을 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가족의 정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형제가 되었다 하니까 무지 착해진 유성탄이었다. 다만 그 착해진 상대가 오직 아우들뿐이라는 것이었다.
“낭인막에 아무도 없는데요.”
표도행이 낭인막 안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벌써 철수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아직 돈 계산이 끝나지 않은 낭인들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돈을 안 받고 그냥 철수할 리가 없습니다. 귀면호리 마효춘이라는 놈이 얼마나 지독한데요.”
마동파가 귀면호리 마효춘에 대해 잘 아는 듯이 말했다.
그때였다. 이십여 명의 낭인들이 유성탄 쪽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유성탄이오?”
“누구냐?”
철패가 육중한 몸으로 앞을 막으며 물어보았다.
“철 형! 전삼입니다.”
낭인 중 한 명이 철패를 아는지 말을 걸었다.
“전삼? 그래 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냐?”
“화정 대형께서 유 형을 좀 데려오라고 하셨소.”
전삼의 말이 떨어지자 마동파가 주먹을 쥐고는 때릴 듯이 자세를 잡으며 소리쳤다.
“야, 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감히 우리 대형께 너 따위 놈이 유 형? 이 자식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마 동생! 잠시 기다리게.”
강태웅이 앞으로 나서며 마동파를 말렸다.
“화정 형께서 뭔가 생각을 잘못하고 계신 것 같네. 여기 유성탄 대형은 나 강태웅이 대형으로 모시기로 한 분이네. 자네들 설마 나 강태웅이 화정 형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강태웅이 나서자 모두 잠시 머뭇거렸다. 강태웅이라면 함부로 하기에는 너무 거물이었다.
“태웅 형님께서 누구를 대형으로 모시건 우리가 알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 남쪽에 모였던 낭인들의 서열 일위는 분명 화정 대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전삼이라는 자의 옆에 서 있던 자가 인솔자인 듯 나서며 말했다.
“이거 봐라! 이 자식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누가 화정을 낭인 서열 일위라고 정해주었냐? 앙! 나 황대산이 인정하지 않는 서열 일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황대산이 그 더러운 인상을 구기기까지 하며 거칠게 말하자 나름 힘 좀 쓴다는 그들도 섬뜩한지 표정이 딱딱해졌다.
“황대산 형께서 호탕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소이다. 하지만 화정 대형을 욕보인다면 그 후환이 만만치 않을 것이오.”
유성탄이야 그들이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강태웅을 비롯 장우왕과 황대산만 해도 이미 대형 소리를 듣는 낭인들 중에는 전국구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가 셋이나 있는 곳에서 나름 큰소리를 친다면 숫자만 믿고 까부는 자들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야! 비켜봐.”
유성탄이 황대산과 강태웅을 밀며 앞으로 나섰다.
“난 이럴 때 말로 하는 놈들이 이해가 안 가.”
말을 마치자마자 유성탄은 달려들더니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악!”
이십여 명의 낭인들은 단 한 주먹에 모두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져 버렸다. 놀라운 속도였고 위력이었다.
‘이럴 수가! 아무리 낭인이지만 이들은 최소한 이류무사 이상의 실력을 가진 자들인데…….’
황대산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척지경과 싸우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맞고 도망치기 바빴지 사실 싸웠다고 보기는 어려웠었다.
하지만 척지경과 같은 고수의 장을 수십 장을 맞고도 죽지 않은 것만도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유성탄을 대형으로 삼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달랐다.
‘내가 사람을 잘 봤구나. 갈수록 달라지고 있다. 싸울수록 강해지고 빨라지고 있어. 도대체 무공도 안 익혔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속도를 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강태웅도 놀란 눈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태웅은 유성탄의 잘못을 짚어주어야만 했다.
“한 주먹감도 안 되는 자식들이 까불고 있어.”
손을 탁탁 터는 유성탄에게 강태웅이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형! 대형은 우리의 형제이기에 앞서 천하의 영웅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말도 안 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남자가 해서는 안 되는 비겁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런 짓을 해도 되지만 대형께서는 절대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강태웅이 마치 꾸짖듯 말하자 유성탄은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에 쟤는 어려워. 까불면 때리는 거지 그럼 때리겠습니다 하고 보고하라는 거야 뭐야? 에이!’
유성탄이 못 들은 척하고 걸음을 옮기자 강태웅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유성탄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아챈 강태웅은 유성탄이 못 들은 척하는 것이 이미 알아들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동안에도 유성탄은 강태웅이 얘기하면 못 들은 척 하면서도 같은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곤 했다.
자존심상 자신이 알아서 안 하는 것과 강태웅의 말을 듣고 안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유성탄의 생각이었다.
* * *
감숙성 한주현은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아직도 변방은 수시로 침범하는 오이랏트 때문에 시끄러웠고 현령은 빨리 떠나고 싶어 일은 하지 않고 중앙만 쳐다보고 복지부동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이 시골에서 썩고 싶지는 않을 것인데 괜히 일한다고 했다가 잘되어도 빛이 안 나고 잘못이라도 되면 아예 감숙을 못 벗어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사건은 많았지만 사건이 가장 없는 고을 중의 하나가 된 한주현이었다.
“하하하! 유 포장, 축하해.”
“유 포장님, 축하합니다.”
어느새 포쾌에서 포두가 되었다가 이번에 포장으로 승차한 유정삼의 집은 잔치 분위기였다. 바로 유정삼의 둘째 아들인 유성우가 감숙성에서 주최한 진시에서 장원을 한 것이었다.
나라도 아니고 일 개 성의 진시가 뭐가 그리 대단하겠느냐마는 한주현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하하하! 그놈이 나를 닮아서 머리가 좀 좋았습니다. 거기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좋아했지요. 저희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나온 문사이니 정말 영광이라고 해야겠지요.”
유정삼도 무척 기쁜지 얼굴이 벌게져서 계속 웃음을 터드리고 있었다. 주는 족족 받아먹은 술이 어느 정도 올라온 상태였다.
“십팔 년 전에 첫째 아들을 잃고 그렇게 슬퍼하더니 그래도 둘째가 첫째 몫까지 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옆집의 장 노인이 술을 먹은 김에 말실수를 하고 만다. 그러자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장 노인도 자신의 말실수를 곧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벌써 그리 기뻐서 웃음이 그치지 않던 유정삼의 얼굴이 시무룩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성탄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십팔 년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유성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성탄이 사라진 후 곧 생긴 둘째와 아내인 강추화를 놔두고 유성탄을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자신이 포청 일을 그만두는 순간 그의 가족은 굶어야 했다.
결국 아는 지인을 통해 사방으로 수소문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유성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술만 먹으면 유성탄을 부르며 우는 바람에 유정삼이 있는 앞에서는 절대로 유성탄의 탄 자도 꺼내지 않는 것이 이미 불문율이 된 지 오래였다.
유정삼의 기분이 가라앉자 장 노인이 급히 화제를 바꿨지만 아까와 같은 분위기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정삼도 이런 기쁜 날 주위의 기분을 자신으로 하여금 망칠 수는 없었는지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소피나 보고 오겠다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들 눈이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꼭 형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유성우는 근처에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다가는 유성탄의 이름이 나오자 아버지가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성우는 유정삼이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으로 키웠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한 번도 편했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뭔가 힘들고 침울한 얼굴은 착한 아들인 유성우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하나였다.
처음에는 포청의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자 아버지가 언제나 무엇인가 허전한 듯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의 형인 유성탄의 실종 때문이었다.
자신이 태어나던 해에 사라졌다고 했고, 지금 그의 나이가 열여덟 살이니 벌써 십팔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는 해에 사라졌다는 얼굴도 모르는 형을 찾을 방법을 생각하던 유성우는 포졸 정도로는 천하를 수소문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유성우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어느 정도 높은 지위에 오르면 다른 성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 살이 된 지금에야 겨우 진시에 합격했다. 실력만으로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안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자신보다 못한 자들이 오로지 돈이 많거나 높은 집안의 자제라는 이유로 이미 출사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금년에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귀한 집 자제들이 아무도 이번에 진시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처음으로 실력만으로 장원을 뽑은 것이었고 유성우는 보기 좋게 장원을 했다. 장원을 하자 유성우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아버지 유정삼과 어머니 강추화가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유성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착하고 바르게 자란 유성우였다.
“엄마!”
“다 큰 계집애가 엄마가 뭐냐, 엄마가!”
강추화는 유성우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유성화가 부르는 소리에 역정을 냈다. 열일곱이면 이미 시집갈 나이였다. 그런데도 아직도 엄마라고 불렀다.
유성화는 유성탄의 막내 동생이다. 여자지만 오히려 성격이 첫째였던 유성탄과 더 닮은 유성화는 한주현 최고의 미녀였던 강추화를 쏙 빼닮아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 덕에 여러 곳에서 벌써 혼인하자는 의사를 보내오고 있었고 이따금 밖에 나가면 남자들이 집을 쳐다보며 유성화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어 기다리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강추화가 보는 유성화는 전혀 혼인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너도 열일곱이면 조신하게 지내다 시집을 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선머슴같이 그렇게 나대면 어떡하니?”
“아버지 말씀이 엄마랑 똑같다고 하던데요 뭘요!”
말을 마친 유성화는 창틈으로 밖을 쳐다보더니 다시 강추화를 불렀다.
“엄마!”
“왜 자꾸 불러?”
“오빠가 진시에 급제했으니 이제 곧 벼슬을 하나?”
유성화의 말에 강추화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집안만 좋았다면 이미 벼슬길에 올랐을 아이인데… 아무리 진시에 급제했다 해도 쉽게 벼슬길이 열리겠니… 아버지가 나름 힘을 쓰고 있다니까 좀 두고 보자꾸나.”
강추화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장이면 포청에서는 간부급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힘 좀 쓰는 것 같지만 안을 보면 완전 빛 좋은 개살구였다. 여전히 박봉이었고 밖에 일을 안 보니 오히려 포쾌 때보다 생기는 것도 없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같이 좀 쥐어짜면 그럭저럭 챙기겠지만 유정삼은 누가 주는 것은 받지만 달라고는 하지 못하는 성미였다. 그렇다면 말발이라도 있냐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한주현은 말이 현이지 가난한 곳이었다. 현령조차도 큰 힘이 없는데 포장 정도가 힘을 쓰면 얼마나 쓰겠는가. 강추화가 한 말은 단지 희망사항이었다.
“그래도 오빠가 진시에 합격했다니까, 난 너무 좋다.”
유성화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말했다. 어쨌든 성의 진시일망정 집안에 급제한 문사가 있으면 사람들의 보는 눈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유성탄이 없어진 지 벌써 십팔 년이면 유성탄이 충동에서 벌레들과 생활한 것이 무려 십칠 년 가까이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정말 불쌍한 유성탄이었다.
* * *
“하하하! 자 돈 놓고 돈 먹기! 오세요, 오세요!”
패를 돌리는 유성탄은 너무 행복해서 입이 쫙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아우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멀찌감치 서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성탄은 인상 험한 아우들이 가까이 있으면 장사에 방해가 된다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했고 지금 열심히 코 묻은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태웅 형님! 계속 두고만 보실 겁니까?”
“맞습니다. 화정 그놈이 보통 악질이 아닌데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동파와 표도행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강태웅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슴이 뛰고 있었다.
‘뭐든 거칠 게 없다. 뭐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남의 눈도 의식하지 않는다. 무식해서가 아니다. 무서운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그릇이 다르다.’
“그냥 두고 보자.”
강태웅의 말에 모두 놀라 쳐다보자 강태웅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유성탄 대형을 보면 느껴지는 것이 없느냐? 나는 대형이 너무 부럽다. 우리는 낭인으로 살면서 너무 사방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말 한 마디 잘못해도 목이 달아날 수 있는 무림에서 가장 파리 목숨이라는 낭인이 되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솔직히 나는 싫었다. 하지만 봐라. 대형께서는 거리낄 게 없으시다.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었다.”
강태웅의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에 격동이 떠올랐다. 마음대로 살고 싶다. 모든 낭인들의 소원이었지만 이룰 수 없는 희망이었다. 그런데 유성탄은 분명 마음대로 살고 있었다.
“우리는 대형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대형께서 너무 나쁜 쪽으로 빠지지만 않게 잘 보필한다. 글과 예절은 내가 시간이 나는 대로 가르쳐볼 것이니 너희는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나 자주 해드려라.”
강태웅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그러니까 지금 난전에 야바위 패를 깔아놓고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다 이 말인가요?”
만사무불통녀 하후란은 귀면호리 마효춘의 보고를 들으며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아주 웃기는 놈이라니까요. 보고에 의하면 재미로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돗자리까지 깔고 하는데, 그 길로 가기로 작정한 놈 같답니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군요. 그런데 거기 난전이면 부자도 없잖아요? 겨우 따봐야 동전 한 문 정도일 텐데… 철검보를 나오면서 금자도 좀 받고 했을 텐데 왜 그런 짓을 할까요?”
“그게… 하하하!”
마효춘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뭐가 그리 고소한지 웃음부터 터트렸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너무 웃겨서… 하하하! 그 악질 놈이 청루에 가서 기생을 끼고 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계집이 그놈이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몽땅 들고 튀었답니다. 듣기로는 그놈 까무러쳤었다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그게 재미있어요?”
“예!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열심히 모은 돈을 다 잃었으면 안됐다고 생각해야지 그렇게 고소해 하면서 웃으면 안 되지요.”
하후란의 질책에 마효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만 나가보시고요. 계속 유성탄에 대해서는 눈을 떼지 마세요.”
마효춘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후란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 고거 쌤통이네. 하여간에 아무 여자하고나 자는 작자들은 그렇게 당해야 싸다니까, 호호호! 어쨌든 다른 계집애들이 곁에 가지 못하게 막아야겠어.”
“이거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장사가 끝나고 돈 계산을 하는 유성탄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분명 장사는 잘 되는 것 같았다. 계속 손님이 끊이지를 않았으니까. 그런데 돈은 동전 이십 문이 채 안 됐다.
“대형, 솔직히 대형 혼자서 신나서 패를 돌렸지 돈 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바위를 해도 부자한테 해야지 그런 무지렁이들에게 해봐야 하루 동전 열 문 벌기 힘듭니다. 오늘은 난전이 열려서 좀 괜찮았지만 다음 난전은 칠 일은 있어야 다시 열릴 텐데 아마 내일부터는 손님 보기 힘들 겁니다.”
마동파의 말에 유성탄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야 마동파, 너 그렇게 안 봤더니 머리가 좋구나. 맞았어! 하려면 부자를 상대로 해야 하는 건데 내가 너무 통이 작았다. 이제부터 부자를 물색해 봐야겠다.”
마동파는 야바위로는 돈을 못 번다는 자신의 말을 다른 쪽으로 해석하는 유성탄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자들이 도박장을 가지 미쳤다고 야바위 패를 하겠습니까?’
“대형!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나한테 올 손님이 있나?”
유성탄은 표도행의 외침에 이상하다는 듯이 마동파를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나가서 누군지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마동파가 훌쩍 밖으로 나갔다.
“그러니까… 왕태산의 산적을 없애주면 금자 백 냥을 준다 이 말이오?”
유성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찾아온 사람은 철검보의 배장손이었다. 배장손은 안 오려고 했지만 이왕이면 안면이 있는 사람이 가야 한다는 노룡한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온 것이다.
처음에는 철검보의 무사를 유성탄이 때린 일 때문에 온 줄 알고 바짝 긴장했던 강태웅과 아우들은 배장손이 다른 이야기를 하자 의아스런 눈으로 배장손을 쳐다보며 탐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성탄은 금자 백 냥이라는 말만 귀에 들어왔다.
“철검보에서는 누가 도와줄 겁니까?”
강태웅이 유성탄이 당장 허락할까 싶어 급히 물었다.
“철검보에서 도울 거면 굳이 금자 백 냥을 줄 이유가 뭐가 있겠나? 우리가 그냥 치면 되지. 우리는 돕지 않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왕태산의 산적들은 말이 산적이지 거의 무림방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던데 우리만 가서 어떻게 그들을 제거합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슈!”
황대산이 험한 인상을 더 험하게 만들며 덤빌 듯이 말했다.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들이었다. 철검보의 수작이 무엇인지 눈에 보이고 있었다.
“야! 왕태산 산적들이 나랑 싸운 그 늙은이보다 세냐?”
“늙은이? 누구요… 설마 척지경을 말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척지경! 맞다.”
“아이, 상대가 안 되지요. 척지경은 무림 백대고수에 들어 있는 초절정고수입니다. 왕태산의 산적 따위가 어찌 상대가 되겠습니까?”
유성탄의 뜬금없는 물음에 황대산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하하하! 그렇다면 뭐가 걱정이냐? 좋소. 내가 왕태산의 산적을 제거해 주겠소. 그러나 금자 백 냥은 너무 적소. 조금만 더 쓰시오.”
“얼마나 더 쓰면 되겠나?”
어려운 줄 알았던 대화가 쉽게 통하자 배장손도 쉽게 올려줄 것같이 말했다.
“남자가 백 냥이 뭐요! 백 냥이!”
‘이놈이 엄청 부르려고 그러나본데… 너무 많이 부르면 안 되는데…….’
“얼마를 더 주면 되겠는가?”
“많이 주시오.”
“그러니까 얼마를 주면 되는지 말해 보게.”
“말했지 않소. 많이 달라고!”
유성탄은 분명 많이 달라고 하는데 꼭 다시 얼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다.
‘하여간에 세상에 미련한 사람들이 엄청 많다니까.’
‘하여간에 짜증 나는 놈이야.’
결국 강태웅이 끼어 금자 백오십 냥을 받기로 약속했다.
“대형, 왕태산의 산적은 수도 많고 무공을 익힌 자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계획은 있으십니까?”
마동파가 아무리 유성탄이라 해도 그런 결정을 했을 때는 설마하니 뭔가 생각이 있었겠지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당연히 계획이 있다. 내가 이래봬도 그렇게 생각이 없는 놈이 아니다.”
유성탄의 큰소리에 모두 귀를 쫑긋했다.
“먼저 산을 올라가는 거야. 다음에 산채를 찾고… 그리고 산적들을 때려잡는 거다.”
“그러니까 산적을 어떻게 때려잡느냐 이 말입니다.”
“당연히 손으로 때려잡지. 혹 혓바닥으로 때려잡을 줄 알았냐!”
유성탄은 자신의 계획을 가르쳐줘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우들을 보며 다시 세상에 너무 미련한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확실히 굳혔다. 그리고 아우들은 유성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조건 돈이 탐나 일을 맡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 * *
“하여간에 어찌나 전부 다 미련한지 나의 천재적인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들을 이해를 못 하는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내가 돈도 벌고 다음 계획도 내가 짜고 하여간에 내가 끼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었다는 거 아니야!”
* * *
“태웅 형님, 아무래도 우리만 왕태산을 치러 간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아무래도 대형께 무슨 계획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 같고… 금자 백오십 냥이면 용병을 제법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낭인촌에 아직 떠나지 않은 낭인들도 꽤 남아 있습니다.”
유성탄이 초앵이 지내던 방으로 들어가자 남아 있던 아우들이 강태웅을 중심으로 의논을 시작했다.
“표 아우 말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우는 아직 대형을 모르는 것 같네. 내가 대형과 좀 같이 지내봐서 아는데 절대로 남하고 돈을 나눠 가질 사람이 아니네.”
마동파가 고개를 흔들며 안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왕태산 두령 추달귀는 부(斧)의 고수입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대형의 단단한 몸뿐인데 장에는 몰라도 부까지 견딜 수 있겠습니까?”
표도행이 다시 말하자 장우왕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도 남들한테 그리 꿀리는 실력은 아니다.”
“우왕 형님 말이 맞다. 나 황대산도 산적 따위 겁나지 않는다.”
“내가 언제 산적이 무섭다고 했습니까? 하지만 쪽수가 밀리면 좀…….”
“쪽수 따위는 대형에게 문제가 안 된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왕태산의 산적 정도는 대형 혼자서도 너끈히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강태웅이 입을 열자 모두 놀라 쳐다보았다.
“형님, 정말 대형이 그 정도입니까?”
황대산도 놀랐는지 그 흉측한 얼굴을 펴며 물었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맞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군요. 대형만 왕태산에 가서 때려 부수면 되지 않겠습니까? 금자 백오십 냥은 그냥 버는 거네요.”
표도행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우리도 가야 한다.”
“대형은 모르지만 우리는 위험합니다. 산적 수가 한둘이 아닙니다.”
표도행이 다시 말했다.
“우리가 가야 대형께서 산적을 다 해치우실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없으면 대형은 분명 그냥 도망치실 것이다.”
강태웅의 말에 전부 어리둥절해서 쳐다본다. 강태웅은 벌써 유성탄이 싸우는 장면을 여러 번 봤다. 그런데 만만하게 보이면 정말 쉽게 상대를 처치하지만 상대가 조금만 강해 보이면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대형은 옆에서 자꾸 칭찬을 해줘야 강해진다.’
강태웅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기가 막힌 것을 배우기는 한 것 같은데… 부자를 어떻게든 꼬드겨서 엮어야 한 건 잡을 텐데.’
유성탄은 왕태산의 산적은 전혀 걱정이 안 되는지 야바위 패로 부자 하나 엮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 * *
“아가씨, 철검보에서 유성탄에게 왕태산의 산적을 없애면 금자를 주겠다고 약속을 한 모양입니다.”
“철검보에서요? 어제 보고에는 철검보 무사가 유성탄에게 맞아서 분위기가 안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마 그것 때문에 의논을 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유성탄을 직접 건드리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차도살인의 계획이라고 봐야겠지요.”
“철검보와 왕태산의 산적들과 사이가 별로 안 좋지요?”
“예, 전에 철검보로 가던 표물을 왕태산에서 철검보의 체면을 봐주지도 않고 약탈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비월문과의 싸움으로 자신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을 거라는 것을 계산한 행동이었겠지만 이번에 너무 급작스럽게 싸움이 끝나는 바람에 왕태산에서도 지금 비상이 걸려 있을 것입니다.”
“누구 생각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잘 썼군요. 성공해도 좋고 실패해도 좋고… 호호호! 이번 왕태산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유성탄이라는 사람의 능력을 확실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전에 또 한 번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뭐가 있나요?”
“화정이 유성탄에게 자기에게 오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유성탄이 다짜고짜 두들겨 패서 보냈습니다. 제가 아는 화정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화정이라면… 아! 낭인 대장! 호호호! 떠오르는 신성을 그냥 놔두면 자신의 위치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군요. 재미있네요. 하여간 유성탄에 대해서는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고하세요.”
“그런데 유성탄이 맷집은 좋지만 특별한 무공도 없는 자인데 아가씨께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효춘이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만 나가보세요.”
마효춘이 나가자 하후란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본문은 너무 오랫동안 거대문파의 멸시를 받았어요. 저는 본문도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싶어요. 그런데 이미 이름 난 자는 누구도 본문에 이름을 올려놓으려고 하지 않아요.’
하후란은 유성탄에게서 싹수가 보이면 먼저 포섭을 한 후에 자신이 그의 이름을 키워줄 생각을 한 것이다.
* * *
유성탄과 그 아우들이 묵고 있는 청루에 낭인 하나가 나타났다.
“대형! 화정이 서찰을 보내왔는데요.”
낭인이 가져온 서찰을 가지고 철패가 유성탄과 강태웅이 얘기하는 곳으로 왔다.
“서찰?”
강태웅이 반문하며 서찰을 받고는 유성탄에게 전하며 말했다.
“화정은 낭인들 중에 제일 고수라는 평을 받는 자입니다. 그동안 남무림에서 가장 큰 화월문의 용병대장으로 있어서 대형이 본 적이 없을 겁니다.”
“아닙니다. 이번 병발 전투에 있었으니 어쩌면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반대쪽에 용병들이 많이 모여 있던 곳에 화정이 있었습니다.”
마동파가 부언했다.
“그런데 이 서찰은 왜 날 주냐?”
유성탄은 그들이 하는 말은 전혀 듣지도 않고 강태웅이 전하는 서찰만 유심히 보며 물었다.
“저쪽 대형이 준 서찰입니다. 당연히 대형께서 직접 읽으셔야지요.”
강태웅은 이미 유성탄이 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낭인이 글을 모르는 것은 그리 큰 흉은 아니었다. 글을 모르는 낭인은 수두룩했다. 하지만 강태웅의 생각으로 유성탄은 어느 정도 글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서찰을 보게 하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글을 배우려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유성탄에게 읽으라고 권한 것이다.
“강태웅 너, 내가 병발에서 싸울 때 뒤통수를 엄청 세게 맞은 것 기억나냐?”
유성탄은 강태웅이 서찰을 읽으라는 말에 눈을 만지며 말했다.
“그때 뒤통수를 맞았는데 이상하게 눈이 무지 아픈 거야. 그때는 몰랐는데 요새 자주 눈앞이 안 보인다.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다. 그러니 네가 읽어라.”
방금까지도 야바위 패를 가지고 열심히 놀던 유성탄이 앞이 안 보인다고 말하자 강태웅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