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혈문의 십사 (33/79)

제4장 혈문의 십사

“지금 혈문에서 열 명의 살수들이 또 왔다.”

고화월의 말에 유성탄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혈문의 열 명의 살수라면 그들로서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당장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무림에서는 혈문십사라고 한다. 우리와는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친구들이다.”

“나랑 같이 납치된 놈들이냐?”

유성탄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의 명을 듣지는 않는다. 그들은 혈문의 명령을 생명처럼 따른다.”

“어찌하기를 바라는지 말해주시겠소?”

강태웅이 그들의 말에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정중하게 물었다.

“이제 우리도 유성방의 일원이니 그들은 우리가 맡겠소.”

“방금 형제 같은 친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죽이고 싶은 친구들이기도 하지요.”

“하여간에 혈문에서 자란 놈들치고 똑바른 놈들이 없군!”

지정우의 말을 들은 유성탄이 웃기는 놈들이라는 듯이 말했다.

혈문오살이 십사를 맡겠다고 나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인 십사이지만 혈문오살에게는 쉬운 상대였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모든 수법과 행태를 알고 있었고 언제나 그들보다 상위에 있었던 그들이었다. 둘째로 고화월은 이미 형제의 의를 맺은 낭인칠웅 사이에서 자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기는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는 뭔가 공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유성방에서 어느 정도 큰소리를 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정우는 십사를 싫어했다. 그들이 언제나 자기의 말은 안 듣고 혈점사의 말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야 태웅아! 아무래도 저놈들 좀 돈 것 같은데 받아들여도 되겠냐? 저러다가 조금 더 돌면 나보고 죽이고 싶은 방주라며 달려들면 어떡하지?”

“하하하!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제 생각으로는 우리 방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들은 대형께 충성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슨 다른 목적이 있어서 우리 방에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표도행이 약간 찝찝한 듯이 말했다.

“누구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있어야 충성심도 생기는 것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충성심은 가족이나 형제 간의 의리밖에는 없는 것이다.”

강태웅은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듯이 말했다.

“무엇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혈문오살이 십사를 책임지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시 표물을 옮기기 시작한 유성탄 일행은 청호산 입구에서 갑자기 유성탄의 누구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마동파가 유성탄에게 누구를 기다리는 거냐고 물었다.

“그런 사람 있으니까 잠자코 기다려봐! 이게 약속시간도 늦고 씨! 이걸로 한 번 달라고 해봐?”

“하후 소저랑 만나기로 하셨어요?”

황대산이 묻자 유성탄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황대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 신기하네.”

“대형께서 만날 한 번 달래야 하는데 하는 여자가 하후 소저밖에 없잖아요!”

철패가 또 눈치 없이 나섰다.

“뭐야! 내가 왜 하후 그 계집애밖에 없어. 정자운도 있고 백리빙도 있고 거기다 내가 가슴까지 입으로 핥은…….”

“그만하세요. 여자 많은 걸 지금 자랑이라고 그렇게 크게 떠드는 거예요!”

‘이씨! 또 찍혔네. 이러다가 진짜 한 번 하는 거는 완전히 물 건너가게 생겼는데…….’

유성탄은 목소리를 듣자 당장에 하후란이란 것을 알고는 죄없는 철패만 노려봤다.

‘대형은 괜히 나는 노려보고 그러시네?’

철패는 유성탄의 눈초리에 고개를 움츠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대형이 생각하신 겁니까?”

“그래 왜?”

“하지만 이건 우리가 만류장주와 한 약속입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대형의 영명에 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얘 또 시작이네. 내가 이래서 먼저 말하지 않은 거다.’

* * *

너희들은 영명이 뭔지 모를 거다. 나같이 많은 영명을 떨친 사람만이 영명의 무게를 안다. 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은 무조건 책임을 지어야 하고 행동도 공명정대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면 영명을 지키기 힘들지 암!

* * *

“야 솔직히 내게 무슨 영명이 있냐? 언제나 말하지만 영명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난 내 식대로 살란다. 그리고 우리가 왜 산적들하고 싸우냐? 나같이 생각이 없는 사람도 딱 보니까 산적들과 싸우다 죽거나 아니면 호남에 들어가서 금모전인지 뭔지한테 죽게 하기 위한 방법이 뻔한데 나 그렇게 바보 아니다.”

유성탄의 말에 강태웅은 미소를 짓더니 더 이상 말리지 않는다. 아니라고 생각하면 유성탄에게 고언을 하는 것도 충성이지만 고언이 안 먹혔을 때는 그대로 대형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도 강태웅이 충성을 하는 방법이었다. 거기다 유성탄의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을 알고 한 계획이 분명했다.

“그거 다 팔면 돈은 다 나한테 갖고 와야 된다. 그래서 말도 무지 좋은 걸로 가져왔어.”

“알았어요. 천하에 누가 유성탄 대형의 돈을 떼먹을 수 있겠어요.”

말을 마친 하후란은 놀랍게도 유성탄 일행이 만류장에서 운반해 온 모든 표물을 말과 마차까지 모두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제 어떡하실 예정이십니까?”

장우왕이 약간 불안한 듯이 물었다.

“야, 장우왕 너는 개기는 게 특기인 애가 뭐가 불안해서 그러냐? 이제부터 만류장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리고 산적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서 어쩔 수 없이 도망쳤다고 하는 거야. 뭐라고 그럼 네가 나서서 개겨라.”

“하하하! 그런 거였습니까? 그렇다면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이유로 개기는 거라면 자신있습니다.”

장우왕은 유성탄의 말을 듣고는 괜히 불안해했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이 큰소리쳤다.

“그런데 만류장에서 믿을까요?”

마동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야 마동파, 너 미련한 거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 문제 있구나?”

“예?”

“세상에 누가 그런 말을 믿겠냐?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개겨야 한다고.”

“하여간에 동파 형님은 미련한 소리를 잘합니다. 저는 대형이 말하는 순간 즉시 알아들었습니다.”

철패가 처음으로 가장 먼저 유성탄의 비위를 맞춰준다.

“철패 너 다음에 두고 보자.”

당장 돌아가기에는 너무 속이 보이는 것 같자 유성탄은 어디서 좀 놀고 가자고 했다. 그러자 황대산이 말했다.

“대형, 어차피 시간이 있다면 여기서 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저를 대형으로 모시던 아우가 있습니다. 온 김에 한번 만나보고 가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너를 대형으로 모셔? 가만있자… 그러면 나하고는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거냐? 그럼 나보고 대대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냐?”

“제가 대형을 모셨으니 그 아우는 저를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너를 대형으로 모셨으면 계속 모셔야지 왜 따로 다니냐?”

유성탄이 묻자 모두 궁금한 듯이 쳐다보았다.

“낭인이 된 후 낭인촌에 갔더니 아무도 내 곁에 오지를 않더군요. 그 당시는 얼굴이 다 아물지 않아서 지금보다 더 흉측했습니다. 거기다 이곳저곳이 덧나서 고름까지 흐르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나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그런 내 모습을 보고서도 나를 따라주었던 아우였습니다.”

황대산의 말을 들은 유성탄이 말했다.

“지금보다 더 흉측했는데도 너를 대형으로 따랐다는 말이지? 흠! 그럼 아주 의리가 있는 친구라는 얘긴데 그런데 왜 그런 애를 데리고 다니지를 않았냐?”

“휴우! 그 아우의 이름이 도중명입니다. 원체 가난한 동네에 살다보니 너무 먹을 게 없어서 식구들 입이라도 줄인다고 나와서 처음에는 걸식을 했는데 다니다 보니 건드리는 놈들이 무척 많았나봅니다. 그런데 싸움을 잘했는지 뒷골목 흑도의 눈에 들어 왈패 노릇을 했는데 마음이 약해서 한 달을 못 견디고 도망을 쳤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익힌 몽둥이 휘두르던 실력으로 낭인촌에 들어온 것이지요.”

“흑도 왈패 하던 실력으로는 낭인촌에서 통하지 않았을 텐데요.”

듣던 표도행이 끼어들었다.

“당연하지. 결국 이곳에서 차이고 저곳에서 터지고 하다가는 내 밑으로 들어오면서 조금씩 낭인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당시는 나도 용병이 어떤 건지를 확실히 모르던 때인지라 용병을 구한다는 말에 다짜고짜 지원을 했고 도중명 그 아우도 나를 따라 용병이 되었지요.”

“그 실력에 용병이 됐다면 십중팔구는 죽거나 병신이 될 텐데…….”

이번에는 마동파가 끼어들었다.

“그래 동파 네 말대로 병신이 되어버렸다. 상대의 칼에 팔 하나가 잘리고 다리의 근육도 심하게 그어져서 발까지도 절룩거리게 되었지.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진 돈 전부를 주고는 고향으로 보냈는데 그 고향이 바로 여기서 가깝다.”

“여기서 백 리가 가까운 거냐? 가까운 것은 뒷간이나 옆방, 이런 것을 가깝다고 하는 거다. 백 리면… 우와, 무지 머네.”

유성탄이 말꼬리를 잡자 황대산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솔직히 낭인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마음은 있어도 가게 되지를 않더라고요. 막상 여기까지 오니까 백 리도 가깝게 느껴진 것뿐입니다.”

* * *

“여기가 그 아우의 고향이냐?”

만류장에 자신의 계획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행적을 들키면 안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황대산은 호북 출신의 낭인답게 호북의 지리를 무척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도중명이라는 황대산의 아우의 고향으로 가기로 하고는 은밀하게 걸음을 옮긴 그들은 거의 반나절이 넘게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을이 보이자 유성탄이 뭔가 불안한 얼굴로 황대산을 보며 저기 보이는 마을이 맞냐고 물었다.

“예, 맞습니다. 한창 돌아다닐 때 중명 아우와 함께 이곳에 들러 아우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마을을 요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유성탄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난 갑자기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나는 이 근처에서 잠이나 잘 테니까 너희들끼리 들어갔다 나와라.”

유성탄의 말에 황대산이 깜짝 놀라 말했다.

“대형이 안 들어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렇다면 대형은 원치 않는데 아우인 내가 대형을 귀찮게 만들었다는 말인데 저를 그런 불충한 아우로 만드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아! 걱정 마, 절대로 불충한 아우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들어갔다 와!”

“대형, 솔직히 저도 오랜만에 만나는 아우에게 자랑도 하고 싶습니다. 세상 살기가 싫어 스스로 죽을 생각까지 하던 내가 이렇게 형님과 아우가 생겼고 거기다 이렇게 위대한 대형까지 모셨다고 말하고 싶단 말입니다. 대형, 이러시면 저 정말 섭섭합니다.”

‘얘가 또 섭섭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그러는 거야? 에이, 진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갈등하던 유성탄은 황대산의 위대한 대형이라는 말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마을로 향했다.

“야, 동파야! 대형께서 왜 갑자기 변덕을 부리시는 거냐?”

장우왕이 유성탄의 마음을 제일 잘 헤아리는 마동파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글쎄요? 나도 이번 변덕은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마동파도 갑자기 유성탄이 변덕을 부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을 안에 들어선 그들은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눈을 찡그렸고 영호충을 비롯한 방도들은 낭인칠웅의 주위를 둘러쌌다.

혹시 모를 돌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럴까요? 금년은 풍년은 아니어도 이렇게 굶을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표도행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마을은 완전히 폐촌에 가까웠다. 주위에 보이는 아이들은 너무 굶어 뼈만 앙상했는데 그래도 논다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얘야! 어른들은 어디 갔니?”

황대산이 힘없이 놀고 있는 아이 하나를 잡고는 물었다.

“모두 먹을 것 구하러 산에 올라갔어요.”

“산에? 여기는 농사를 안 짓냐?”

“산적들이 다 빼앗아 가서 농사지을 게 없어요.”

아이의 말을 들은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 집입니다.”

황대산이 거의 폐가로 변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전에 왔을 때는 굉장히 깨끗했었는데…….”

말을 마친 황대산은 크게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중명아! 형님 왔다.”

문을 활짝 연 황대산은 안에서 풍기는 악취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급히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중명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안에는 다 죽어가는 사람 하나가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주위로 말라붙은 핏덩이로 보아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대… 대형…….”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사나이는 황대산의 목소리를 듣자 간신히 눈을 뜨더니 반갑다는 듯이 황대산을 불렀다.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목소리만으로 황대산을 알아보는 것으로 보아 그가 황대산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황대산은 울부짖듯이 소리치더니 도중명을 안아들었다. 곧 표도행이 물을 끓여서 가지고 왔고 철패는 자신들이 가지고 다니는 비상식량으로 죽을 끓였다.

도중명의 상태는 무척 안 좋았다. 상당히 많이 맞은 것도 그렇지만 누군가에 의해 등가죽이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황대산은 표도행이 가져온 물로 온몸을 닦아주고는 정자운에게서 받은 금창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대형, 여기서 뭐 하십니까?”

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는 유성탄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보던 마동파가 다가와 물었다.

‘이씨! 안 들어왔어야 했는데…….’

혼자 끙끙대던 유성탄은 마동파가 묻자 신경질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난 상관 말고 대산이 아우라는 놈이나 보살펴라.”

유성탄의 목소리가 안 좋자 마동파는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갑작스런 유성탄의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대산의 간호로 조금 정신이 든 도중명은 너무 원통하다는 듯이 눈물까지 흘리며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도중명의 고향 마을은 산속의 화전민 마을이었다. 어렸을 때 배고픔에 못 이겨 도망칠 정도로 가난했던 마을은 그가 돌아왔다고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가족들은 그를 반가워하면서도 오히려 병신이 되어 돌아온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용역 일을 하면서 모은 돈과 황대산이 쥐어준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기에 그는 가난한 화전마을에서 제일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거기다 한 팔을 잃고 다리를 절기는 했지만 낭인생활로 다져진 그는 싸움도 남에게 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니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던 가족들과도 점점 사이가 다시 좋아졌고 마을의 착한 처자와 혼인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몇 년이 지나 마을의 대표자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문제는 약 보름 전에 일어났다. 평화롭던 마을에 청호채의 산적들이 나타난 것이다. 원체 가난한 화전마을인지라 산적들 걱정은 전혀 안 하던 그들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산적들은 그 가난한 마을의 식량을 모두 탈취했고 기르던 가축들까지 모두 가져갔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젊은 여자들을 모두 잡아간 것이다. 그 중에 도중명의 아내도 끼어 있었다. 모두 꼼짝을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도중명은 자신의 아내를 끌고 가려는 그들에게 저항을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팔 하나 없고 다리까지 저는 그로서는 산적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청호채의 산적들은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자들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살가죽을 벗겨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아놓았다. 감히 자신들에게 저항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그러나 이미 팔 하나가 없는 병신이라는 점이 그의 목숨을 구한다. 산적들은 도중명의 등가죽만 벗기고 목숨은 살려준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죽이는 것보다도 더 잔인한 처사였다. 약도 없고 먹을 것도 다 빼앗아가면서 그를 간호할 아내까지 데려가니 도중명은 상처를 돌보지 못해 황대산이 오지 않았다면 얼마 못 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됐느냐?”

울면서 말하는 도중명을 보던 황대산이 물었다.

“불행중다행으로 부모님께서는 이 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여동생도 이번에 산적들에게 잡혀갔고 동생들은 아예 이곳이 싫어졌다고 그날로 떠났습니다.”

“아니 네가 이 꼴로 누워 있는데 그냥 지들만 떠났다는 말이냐?”

황대산이 분노한 듯 말하자 도중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아이들을 원망할 생각은 없습니다. 떠나는 그 아이들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전 압니다. 그 아이들도 아내를 빼앗겼으니까요.”

“아니 산적들이 이런 마을에 뭘 바라고 와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떨어져서 듣고 있던 유성탄이 듣다가는 성질이 나는지 다가서며 물었다. 그리고 유성탄이 다가서자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마 청호채에서 여자들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산적 놈들도 여자는 필요하기 때문에 이따금 탈이 안 날 이런 마을을 습격해서 여자들을 납치해 간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럼 여자나 데려가지. 이 가난한 마을에서 가져갈 게 뭐가 있다고 양식까지 가져가서 아이들까지 저렇게 삐쩍 마르게 만든단 말이냐?”

“산적들 아닙니까? 이런 마을은 약탈할 것이 없어서 거의 안 오지만 왔다 하면 어쨌든 싹 훑어가는 게 그놈들입니다.”

듣고 있던 유성탄은 인상을 팍 쓰더니 다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씨! 역시 오는 것이 아니었어…….’

잠시 생각하던 유성탄은 벌떡 일어서더니 갑자기 옷을 벗었다. 모두는 유성탄의 행동을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유성탄이 옷을 벗자 허리와 가슴 그리고 등까지 뭔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강태웅 너는 여기 사람들 몸이나 추스르게 보살펴줘라. 그리고 이 돈으로 먹을 것하고 약을 사와라. 그리고 농사지을 씨앗들도 좀 사와라.”

몸에 감은 보자기 안에는 유성탄이 생명처럼 아끼는 돈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을 푼 것이다.

“그리고 나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니들은 여기서 사람들이나 돌봐줘라. 그리고 내 생각인데 산적 놈들이 이 마을에만 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돌아다니면서 이런 마을이 더 있으면 거기도 돌봐주고 있어라.”

“대형! 어디를 가시려고요?”

“몰라도 돼!”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유성탄은 나가자마자 청호산 쪽으로 뛰어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도중명의 말을 듣자 유성탄은 청호채의 산적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형이 어디를 가시는 걸까요?”

철패가 묻자 장우왕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철패를 쳐다보며 말했다.

“척보면 모르냐! 청호산의 산적들에게 갔잖아!”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왜 모두 그냥 있으시는 겁니까? 우리도 당연히 따라가서 대형을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형께서 우리에게 이미 명을 내리셨다. 우리는 여기와 근처의 마을을 다 조사해서 구제부터 한다. 우왕이하고 도행이는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양식과 약 그리고 종자 씨를 사와라. 그리고 옷들도 좀 사와야 할 것 같다.”

강태웅이 지시하는 말을 듣던 마동파가 갑자기 손뼉을 치더니 소리쳤다.

“이제야 왜 대형께서 여기를 들어오지 않으시려고 했는지 그리고 계속 기분이 안 좋으셨던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마동파의 외침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대형께서는 이미 여기에 들어오면 돈을 쓰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 * *

“에이 내 팔자가 왜 이러냐? 좀 모았다 싶으면 왕창 나가고…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청호산을 향해 뛰면서 팔자타령을 하며 손을 꼽아보던 유성탄이 중얼거렸다.

“두 번째였군. 손가락까지 필요도 없었는데…….”

유성탄의 얼굴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마을을 보는 순간 감이 안 좋았다. 분명 밥을 먹을 시간이었는데 엄청 좋은 그의 코에 마을 전체에서 음식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마음을 꾹 잡고 안 쓰면 되지만 이상하게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돈은 돈이고 뭐 생기는 것도 없이 괜히 무게를 잡고 나와 가지고 이 먼 거리를 뛰어가다니… 내 이놈들을 만나기만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

유성탄은 괜히 청호채의 산적들이 더 미워지고 있었다.

“저놈 뭐야?”

만류장의 물건이 청호산을 넘는다는 말에 한 건 잡을 생각에 부풀어 있던 청호채의 산적들의 조장인 염상국은 며칠째 기다려도 표물이 지나가지 않자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정보원들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연락을 취해봤지만 분명 떠났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표물은 나타나지 않고 산적들인 자신들보다 더 산적같이 생긴 놈이 나타나자 짜증스런 목소리로 부하들을 보며 물었다.

“처음 보는 놈인데요. 어찌할까요?”

“어찌하긴 뭘 어찌해! 우리가 지금 저런 거지같은 놈 하나 때문에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야겠냐? 그랬다가 표물을 경호하는 놈들이 눈치 채고 도망가면 어쩌냐!”

염상국은 말하는 산적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 그때였다. 유성탄이 크게 말한다.

“청호산의 산적이 유명하다더니 다 헛소리였군. 내가 품속에 금자가 백 냥이나 있는데도 아무도 안 나타나는구나!”

유성탄의 말을 들은 염상국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저놈 미친놈 아니냐? 감히 청호산에 와서 녹림의 호걸들을 욕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금자가 있다고 큰소리를 쳐!”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금자 백 냥이라잖아! 당장 잡아!”

유성탄은 갑자기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산적들을 보며 허리에 찬 육모방망이를 꺼내 쥐었다.

“하하하! 간덩이가 부은 놈이로구나. 감히 청호산의 호걸님들을 욕해! 하지만 가지고 있다는 금자만 다 내놓으면 팔 하나만 자르고 살려주는 은혜를 베풀어주겠다.”

‘나도 엄청 말 못하지만 저놈은 더 하구나. 돈 뺏고 팔 자르고 은혜라는 말이 저렇게 나올까?’

유성탄은 세상에 너무 무식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야! 이 무식한 놈들아! 내가 열등감 들까봐 상대의 외모 가지고는 말하지 않는 사람인데 정말 니들 못생겼다. 그런데 머리까지 그렇게 무식하니, 도대체 왜 사니? 너희 같은 놈들을 뭐라고 하는지 아냐? 바로 인간공해라고 하는 거다.”

유성탄의 말을 들은 염상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더니 눈에 살기를 띠며 말했다.

“자식이 이상하게 생긴 게 인생이 불쌍한 것 같아 팔 하나만 자르고 목숨은 살려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살가죽을 몽땅 벗겨서 나무에 매달아놔야겠구나. 저놈 죽이지 말고 꼭 사로잡아라!”

염상국이 소리치자 백여 명의 산적들이 유성탄을 향해 달려들었다. 평상시 장사를 할 때는 십여 명에서 이십여 명으로 구성되었지만 만류장의 표물을 빼앗기 위해 대규모로 준비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이 자식들아!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나 마질대형께서 돈을 못 벌잖아!”

몽둥이와 주먹 거기다 발까지 너무 현란한 막싸움을 보여주는 유성탄을 보며 염상국의 얼굴이 굳어졌다.

“생포는 포기다. 그냥 죽여라!”

소리친 염상국은 자신도 도를 꺼내 들고는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겨우 일 각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쓰러져서 끙끙거리는 산적들이 삼십 명이 넘고 있었다.

‘이상하네? 몸이 왜 이렇게 가벼운 거야? 신기하네?’

유성탄은 싸우면서 너무나 몸이 쉽게 움직이고 휘두르는 주먹이나 몽둥이가 너무 가볍게 움직이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금자 천 냥에 가까운 돈을 온몸에 칭칭 감고 다니다 그것을 풀었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놈 이상한 놈입니다!”

싸우던 산적 하나가 유성탄의 몸에 간신히 한칼 먹였는데 칼이 외려 튕겨 나오자 그때서야 이상함을 느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 외치고는 당장 터져 나온 유성탄의 주먹에 코를 맞고는 뻗어버렸다.

“으아악! 살려주십시오!”

반 시진도 안 되어 백여 명이 넘는 산적들은 전부다 기절해 버렸다. 그러나 염상국만은 기절도 못하고 유성탄에게 엄청 터지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손해를 봤는지 아냐? 너희는 맞아도 엄청 맞아야 한다.”

“으아악! 산채에 가면 돈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손해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충해 드리겠습니다.”

염상국은 산적치고는 보기 드문 무공을 지닌 자였고 산채에서도 수뇌부에 드는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산채의 돈을 쓸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떨어지는 유성탄의 주먹은 너무 무서웠고 산채에는 아직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열 명이 넘고 산적들도 아직 사백여 명이나 남아 있으니 유성탄을 그곳으로 유인하기로 한 것이다.

“손해를 보충해 준다고? 내가 본 손해가 금자 이천 냥이 넘는데?”

잠깐 사이에 자신의 손해를 두 배로 부풀리는 유성탄이었다. 유성탄의 말을 들은 염상국의 인상이 찌그러들었다. 청호채가 크다고는 하지만 금자 이천 냥은 너무 큰돈이었다.

‘거지같은 놈이 행색을 보니 동전 이천 냥도 없는 놈 같은데…….’

하지만 어차피 돈을 줄 생각으로 유성탄을 산채로 유인하는 게 아닌 이상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드리겠습니다.”

염상국의 말에 유성탄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이게 단숨에 두 배 장사를! 히히히, 역시 착한 사람에게 복이 온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구나.’

유성탄은 염상국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가 아는 단 하나의 점혈법을 사용하여 염상국을 마비시킨 유성탄은 쓰러진 산적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니놈들은 너무 나빠!”

소리친 유성탄은 산적들의 발을 하나씩 세게 밟기 시작했다. 그러자 뼈가 부스러지는 엄청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지른 산적들은 그대로 다시 기절해 버렸다. 유성탄은 그들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가루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마 죽지는 않겠지만 모두 다리 한쪽은 쓰지 못할 것이니 다시는 산적질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가서 금자 이천 냥 안 내놓으면 너는 다리 하나로 안 끝난다.”

염상국의 혈도를 풀어주며 유성탄이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미 백여 명의 부하들의 비명소리에 얼굴이 하얘진 염상국의 얼굴이 이번에는 흑색으로 변해갔다.

‘진짜 잔인한 놈이다. 어떻게 백 명을 한 명도 안 봐주고…….’

악당들에게는 악마로 불리게 되는 마질대형의 신화가 청호산에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 * *

“지정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유성탄 일행의 뒤를 따르던 혈문의 십사는 갑자기 나타난 오살의 표식에 우선 유성탄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고 오살을 만나러 갔다. 표식은 으슥한 산속의 사당으로 이어졌고 안으로 들어선 십사는 뒷짐을 지고는 홀로 서 있는 지정우를 만났다.

지정우는 놀랍게도 십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승냥이 눈을 가진 신기전이 지정우를 노려보며 크게 소리쳤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냐? 너희는 여전히 미련하구나. 다시 설명해주마. 혈문을 따르든지 아니면 내 말을 따르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말이다.”

“지정우! 배신을 할 생각이냐?”

“배신이라고 생각하느냐? 혈문이 우리에게 해준 것이 뭐냐? 부모도 기억 못하는 어린 나이에 우리를 납치해서 거의 삼분지 일이 죽어나가는 잔인한 수련에, 그동안의 살행으로 또 삼분지 일이 죽어나갔다. 이제 우리의 형제는 이십 명도 안 남았다.”

“닥쳐라, 지정우! 혈문은 우리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사부와 같은 곳이다. 감히 배신을 생각하다니… 네놈이 혈문의 무서움을 잊은 모양이구나. 그리고 다른 사람을 따른다 해도 지정우 너를 따르지는 않는다.”

“그렇겠지. 신기전 너는 언제나 혈점사 정일호만 따랐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그냥 죽이자고 했었다. 그러나 고화월이 그래도 한번 설득은 해보자고 하더군.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정이 있다고 말야…….”

“뭐야! 고화월도 배신을 했단 말이냐?”

신기전의 옆에 서 있던 태지안이 놀라 소리쳤다. 고화월과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졌던 자가 그였다. 물론 사랑이나 그런 것하고는 달리 그것도 수련의 일종이었었다. 그래도 태지안은 혈문의 살수 중 홍일점인 고화월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우리를 따르겠느냐, 아니면 여기서 죽겠느냐?”

“지정우, 아무리 너라 해도 혼자서 우리 전부를 이길 수는 없다.”

신기전의 눈짓이 떨어지자 십사 모두의 몸이 움직이려 한다.

“아아아! 한 가지 말하는 걸 잊은 것이 있다.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오살의 살수행이 시작된다는 거다. 오살이 숨어 있고 너희는 몸을 드러낸 상황이라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너희들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정우의 말에 십사의 몸이 굳어졌다. 즉시 자신들의 독문무기를 꺼내어 가슴 위로 올리고 원을 그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아는 그들로서는 지정우의 말마따나 승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정우, 오살은 혈문에서도 가장 대우가 좋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대우가 좋았다고? 하하하! 조금 잘 먹는 강아지였다고 할 수는 있겠지. 오살은 단지 더 이상 살수로서의 삶은 살지 않겠다는 것뿐이다.”

말하는 지정우는 여전히 뒷짐을 진 상태였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십사지만 같은 살수인 오살에게는 십사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지정우, 그렇다면 너희들만 혈문을 배신하면 되지 왜 우리와 굳이 시비를 만들려고 하는 거냐?”

십사 중에서 지정우와는 그래도 가장 친했던 천말생이 물었다.

“너희도 숨어서 덤비면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후환은 제거할 수 있을 때 제거하라는 것이 혈문에서 가르쳐준 생존의 원칙이 아니더냐?”

“혈점사가 나오면 너희들은 살지 못한다. 정녕 죽으려고 하느냐?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꾼다면 오늘 일은 보고하지 않겠다.”

“혈점사가 나오겠지. 그러나 그 놈을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 그것까지 너희들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말을 마친 지정우의 손이 갑자기 높이 들리더니 확 뿌려졌다. 그러자 일곱 개의 비도가 십사를 향해 날아갔다. 십사 역시 일급살수들다웠다. 지정우의 손이 올라가자 모두는 살수기예인 잠행술을 쓰며 사방으로 숨어들었다. 지정우의 칠비도는 그들로서는 막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윽!”

숨어들던 십사 중 네 명이 신음을 흘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네 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지정우가 큰 소리친 대로 십사는 오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숨어든 곳에는 이미 오살 중 나머지 네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예 죽여 달라고 호랑이의 입으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네 명을 순식간에 처치한 사살은 그대로 남은 네 명이 숨은 곳으로 파고들었고 곧 그들도 피를 흘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너희들이 우리에게……!”

신기전과 동규는 이미 지정우의 비도에 가슴이 뚫린 후였다. 신기전은 너무 허무하게 십사가 전멸하자 어이없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낸 나머지 사살을 보며 소리쳤다.

“신기전, 미안하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희들이 혈문에 대한 충성이 없거나 조금이라도 설득할 여지가 있었다면 우리도 꼭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기전과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나야종이 약간은 괴로운 듯 말했지만 이미 신기전은 죽은 뒤였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리 쉽게 처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는 분명 혈점사가 올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라.”

고화월도 십사를 제거한 것은 마음에 부담이 됐는지 표정이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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