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기룡왕부
“저하!”
교중 왕자가 자신의 심복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왕부의 집사가 교중 왕자를 찾았다.
“뭐냐?”
“왕부에 포천망쾌란 자가 찾아와서는 왕자 저하를 뵙고 싶다고 청을 해왔습니다.”
“뭐라구? 이런 미친놈이 있나… 진짜로 오다니…….”
싸늘한 교중 왕자의 말에 집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로서는 아직 유성탄이 찾아온 이유를 몰랐다.
“기룡왕부가 언제부터 일개 포쾌 따위가 왕자인 나를 보고 싶다고 한다 해서 나한테까지 연락을 하고 했다더냐! 난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돌아가라 해라.”
“이미 기룡왕 전하에게까지 연락이 갔습니다. 그리고 저하께 만나라고 하라고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교중 왕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가 가장 어려워하는 단 한 명이 바로 기룡왕이었다. 그리고 기룡왕이 만나라고 했다면 그로서는 만나야 했다.
유성탄이 기룡왕부에 도착했을 때, 기룡왕 주청은 손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속적으로 실패를 하다니 청담답지가 않구나.”
놀랍게도 기룡왕의 손님은 대상진에서 사라진 청담이었다. 궁상개의 말대로 청담은 정말 기룡왕부에 있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전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청담이 내게 도움을 청한다? 놀랍군. 그 포천망쾌란 친구가 정말 대단한 모양이구나.”
“지밀단과 야밀단이 샅샅이 주위를 조사했지만 발견한 것은 혈문의 오살이 그를 따르고 있다는 것과 그 자가 엄청 돈을 밝혀서 그를 만난 현령들은 그를 아주 부패한 관리로 알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자가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도,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따라오는지도 아직은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천주가 실망이 크겠구나.”
기룡왕의 입에서 천주라는 말이 나오자 청담의 얼굴이 시무룩해진다.
“천주님께는 면목이 없어 연락도 못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하를 찾아온 것이기도 하구요.”
청담은 기룡왕과 잘 아는지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었다.
“말해봐라.”
기룡왕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뜨거운 차를 들어 한번 김을 훅 불더니 입으로 가져가며 짤막하게 말했다.
“마약을 중원 전체에 뿌리는 계획도 실패했고, 황실의 금을 훔쳐 상권을 흔들려고 한 계획도 실패했습니다.”
“내가 아는 청담이라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 장치를 더해 놓았을 것 같은데…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번 일도 성공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님께서 중원에 입성하는 일이 진짜로 십 년 아니 이십 년까지도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끊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렇게 된다면 너무 불충이 됩니다.”
“후후! 천주는 좋겠어? 자네 같은 충복을 둬서… 어쨌든 뭔가 벌이려고 하는 일은 더 있다 이 말이군. 내게 원하는 바를 말해보게.”
“포천망쾌는 지금 사방에서 온갖 뇌물은 다 받아먹고 있습니다. 거기다 무림인들조차도 가차 없이 때려서 옥에 가두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무림과의 마찰은 황실에서도 원치 않는 일이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에는 운하현에서 기루의 여주인을 치정살해 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습니다.”
청담의 말을 듣던 기룡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포천망쾌를 제거할 수 있도록 상소를 해주십시오. 지금 현령이나 부주는 물론 성주들조차도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도대체 포천망쾌 그놈의 진정한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소를 했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당할까 걱정이 되어서이지요. 전하시라면 포천망쾌 그놈이 아무리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라 할지라도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의 신임을 받는 자는 아니다. 내 비록 이 시골에 박혀 지내지만 황궁의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포천망쾌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자는 어디서 나타났다는 말입니까? 저도 선이 닿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아봤지만 어디서도 그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자의 황룡패가 어디서 나왔는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직접 상소를 하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으니 다른 사람을 시켜 상소를 하게 하마.”
“감사합니다.”
“전하!”
둘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갑자기 기룡왕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분명 지금 중요한 손님이 왔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황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포천망쾌란 자가 면담을 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절강을 중심으로 그자의 이름이 너무 유명해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전달은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용서하십시오.”
“포천망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을 보고도 놀란다고 청담은 포천망쾌란 말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놈이 여기까지 나를 쫓아온 모양입니다.”
“진정해라.”
조용히 말한 기룡왕은 밖을 향해 물었다.
“그자가 면담을 청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그게…….”
말하는 자의 목소리가 약간은 곤란한 듯이 말을 끌자 기룡왕이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말해라!”
“왕자 저하께서 반역에 준하는 죄를 지었다고…….”
“뭐야! 교중 왕자가! 이런 미친놈이! 반역에 준하는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상황에서도 눈썹 하나 깜짝거리지 않을 것 같던 기룡왕도 막상 자신의 자식에 대한 말이 나오자 흥분을 한다. 비록 사십이 넘은 아들이었지만 아비의 마음은 다 똑같은 것 같았다.
“그것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바쁘시다면 왕자 저하를 만나도 된다고 했습니다.”
잠시 생각을 한 기룡왕이 다시 물었다.
“몇 명이나 끌고 왔더냐?”
“혼자였습니다.”
“뭐야! 혼자……? 진짜 청담 네 말대로 겁이 없든가 아니면 미친놈이구나. 감히 과인의 아들에게 반역이 어쩌니 하면서 왕부에 혼자 나타났단 말이지?”
기룡왕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청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명을 내렸다.
“왕자에게 빈청에서 용호사노(龍護四老)와 함께 포천망쾌를 만나라고 해라. 그리고 만약을 위해서 주위에 군사를 매복시켜라. 하지만 내 명이 없이는 공격은 하지 마라. 단, 그놈이 왕자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명 없이 공격해도 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청담, 네 생각에 그 놈이 너를 쫓아온 것 같으냐?”
기룡왕이 묻자 이미 마음을 안정시켰는지 심각한 얼굴로 서 있던 청담이 다시 앉으며 대답한다.
“언제나 이랬습니다. 분명 나를 쫓는 것은 분명한데, 일을 방해할 때의 상황은 마치 우연인 것같이 보였습니다. 지금도 그 놈이 진짜 왕자 저하 때문에 왔다면 너무나 공교롭지 않습니까? 왜 내가 이곳에 왔을 때 그 놈이 이곳을 찾아온단 말입니까?”
“청담, 지금 어디 갈 데는 있느냐?”
“지금 다음번 계획이 절강을 기점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추적이 너무 심해 얼마간은 이곳에 머물 생각이었습니다.”
“알겠다. 그럼 네가 빈청으로 나가 상황을 직접 챙기도록 해라.”
“아직은 얼굴을 마주칠 때가…….”
“빈청에는 들어갈 필요 없다. 빈청을 보면서 안에서 하는 얘기도 다 들을 수 있는 비밀 방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며 포천망쾌란 놈이 원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보고 그 대처방법도 생각해봐라.”
“알겠습니다.”
* * *
“아이 씨! 정말 화려하네. 금모전인지 거기도 대단하던데 거기는 상대도 안 되는군.”
유성탄은 사실 기룡왕부를 보자마자 쫄았다. 정말 대단한 고루거각에 창을 든 수백의 군사가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거기다 뭐가 그리 바쁜지 사방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하인 하녀의 수도 엄청 많았다. 그런데 그가 안내된 빈청이라는 곳도 그 화려함이 정말 대단했다.
‘씨! 생각을 좀 달리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잘만하면 팔자를 고칠 수도 있는 거액을 뜯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 진수진도 굳이 복수를 할 필요 없이 돈을 많이 받으면 그걸 가지고 편히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잖아?’
은근히 쫄린 유성탄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자기합리화를 했다. 굳이 이런 곳과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귀찮은 것은 제일 싫어하는 그가 아니었던가… 그가 봐도 기룡왕부와 사이가 나빠지면 그에게 좋을 것이 전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 둥글둥글 살자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몇 명의 시위가 나타났다.
“포천망쾌가 그대요?”
“그렇소!”
“곧 왕자 저하께서 들어오실 것이오. 몸가짐을 정하게 하고 들어오시면 예를 갖추시오.”
“지랄! 뭐? 몸가짐을 정하게 하고 예를 갖춰?”
그자들의 말은 좋게 좋게 해결하려고 마음먹은 유성탄의 비위를 살짝 긁었다.
“나 포천망쾌는 사건의 용의자에게 예를 갖추지 않소이다. 만약 그런다면 제대로 된 수사가 되겠소이까?”
유성탄의 말을 들은 시위들의 얼굴에 살기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포천망쾌에 대한 소문은 이곳까지 퍼지고 있었고 기룡왕은 자신의 명 없이는 공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세상을 모르는 자로군. 이곳이 어디인지 아나? 바로 황상의 아우이신 기룡왕 전하가 사시는 기룡왕부가 바로 여기다. 황룡패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행동했다가는 능지처참을 당할 수도 있다.”
시위들의 등 뒤로 네 명의 노인이 들어서며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룡왕이 말한 용호사노였다.
‘뭐야? 무슨 왕부에 저런 고수들이 있는 거야?’
용호사노는 이름 그대로 용을 호위하는 네 명의 노인으로 무림에 적을 두지 않아서 백대고수니 그런 곳에 이름이 오르내리지는 않았지만 유성탄이 느끼기에는 분명 한 명 한 명이 황음삼마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투는 유성탄의 비위를 조금 더 긁었다.
“지금 죄를 조사하는 포쾌를 협박하시는 거요? 그렇게 되면 죄가 더 가중되는데…….”
“정말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로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면서도 감히 가중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느냐!”
용호사노 중 한 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자꾸 나에게 압력을 가할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교중 왕자요.”
유성탄의 말투가 삐딱해지고 있었다.
“교중 왕자? 감히 지금 왕자님께 존칭을 빼고 말했다 이거냐?”
용호사노 중의 한 명이 당장 유성탄을 공격할 듯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용의자에게는 존칭을 하지 않는 것이 특수포쾌의 법이오.”
“이런!”
“그만 두시오.”
유성탄의 말에 참지 못하고 용호사노 중 한 명이 덤벼들려고 하는 순간 중후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리고 용호사노와 십여 명의 시위들이 급히 물러서며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교중 왕자가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는 두 명의 호위를 데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저게 왕자야? 생긴 것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씨! 나이도 많은 놈이 어린 여자는 엄청 좋아하게 생겼군.’
“그대가 소문이 자자한 포천망쾌인가? 생각보다는 젊군.”
말을 마친 교중 왕자는 유성탄의 앞을 의젓하게 걸어서는 빈청의 정면 벽에 놓여 있는 태사의에 턱하니 앉았다.
‘변태 놈이 무게는 엄청 잡는군. 에이 씨! 성질대로 먼저 때리고 봐?’
진수진 덕에 교중 왕자에 대한 선입견이 엄청 나빴던 유성탄은 교중 왕자가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이 무게를 잡자 결국 비위가 완전히 상하고 말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타협을 하고 돈이나 왕창 긁어서 나가려던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 말을 들으니 나한테 반역에 준하는 죄목을 뒤집어씌웠다고 하던데, 무슨 죄를 내가 지었기에 그런 엄청난 죄목을 붙였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내가 지저분해서 죄목을 말하지 않았는데 굳이 본인이 원한다면 말해줄 수는 있소이다. 솔직히 내가 지저분한 짓을 아주 잘하는 편인데 나조차도 왕자께서 저지른 죄는 말하기가 찝찝합디다.”
유성탄의 말을 들은 교중 왕자의 눈에 살기가 언뜻 비치더니 순간 사라졌다.
‘어쭈! 이것 봐라? 왕자란 자가 무공을? 그것도 저 기분 나쁜 늙은이들보다 더 강해?’
“천하의 무례한 놈! 감히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유성탄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교중 왕자를 쳐다보는데 시위 중 하나가 유성탄을 향해 장을 날려 왔다. 유성탄의 말투에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이다.
퍽!
유성탄을 향해 장을 날린 시위는 유성탄이 전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장에 가슴을 맞자 쾌재를 불렀다. 소문이 너무 엄청나 약간은 주의를 기울였는데 너무 쉽게 공격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는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자신의 장이 분명 유성탄의 가슴을 가격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타격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그대로 쓰러져 기절했다. 유성탄의 방망이가 머리를 그대로 내리친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범인을 색출할 때! 상당히 과격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범인을 돕는 자에게도 역시 사정을 안 봐줍니다. 다시 말하지만 특수포쾌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은 그 죄가 반역에 준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유성탄이 방망이를 건들대며 쓰러진 시위를 발로 툭툭 치며 얘기하자 서 있던 시위들이 전부다 검을 뽑으려 한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손을 들어 시위들의 발호를 제지한 교중 왕자는 유성탄을 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소문대로 대단한 배짱이로군. 나는 배짱이 두둑한 남자를 아주 좋아하네. 어쨌든 죄목이나 말해보게.”
“진수진이라고 아시지요?”
“진수진? 진수진이 누군지 아느냐?”
교중 왕자는 마치 진수진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이 옆에 서 있는 호위를 보며 물었다.
“저하의 침소를 보살펴주던 하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남자 놈하고 정을 통하다가 몰래 왕부를 도망쳤습니다.”
“내 침소를 보살피던 하녀…라? 오, 그래! 그 애라면 얼굴은 몇 번 본 적이 있었지!”
교중 왕자는 그때서야 진수진이 누군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성탄을 보며 되물었다.
“그런데 자네가 그 아이를 어찌 아는가?”
“그건 아실 필요 없으시고… 왕자께서는 진수진을 아나 모르나 그것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뭔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고…….”
“오, 잘 아시는군요. 그렇다면 얘기가 잘 될 것 같습니다.”
유성탄의 말에 교중 왕자의 눈썹의 한쪽 끝이 올라갔다. 그의 말을 잘라먹는 자는 그동안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성탄은 그의 말을 자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수진을 아주 잘 안다고 대답했다는 듯이 왜곡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왕자께서 진수진을 아주 잘 알고… 그렇다면 둘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것을 부인은 못 하시겠지요?”
고남보에게 들었던 내연의 관계라는 말을 드디어 써보는 유성탄이었다.
“무엄하다! 감히 왕자님께 그게 무슨 망발이냐?”
“망발인지 진발인지 그것은 왕자께 들어보면 알 거고, 말해보시지요?”
교중 왕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연의 관계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허허, 왕자나 되시는 분이 그런 쉬운 말뜻도 못 알아들으시다니 공부를 무척 안 하신 모양입니다. 내연의 관계란 그 뭐시기냐 하면 육체와 육체가 안으로 깊게 연결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어느 정도 성숙한 사람에만 해줘야 하는 건데…….”
또다시 교중 왕자의 말을 끊으며 순식간에 교중 왕자를 공부를 안 한 무식쟁이로 만든 유성탄은 이미 사십이 넘은 그를 성숙하지 않은 아이로까지 비하했다.
팍!
교중 왕자가 앉아 있던 태사의의 손잡이가 갑자기 부서져버렸다. 대리석으로 만든 손잡이를 단지 손아귀의 힘만으로 부셔버리는 교중 왕자를 보며 유성탄이 다시 말했다.
“뭔가 자꾸 제가 핵심으로 다가서니까 심정이 좀 불안해지신 모양인데, 그러기에 세상에는 죄 짓고는 못 산다는 명언이 있는 겁니다.”
“이놈 기룡왕 전하의 명이 계셔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너의 해괴망측한 작태와 말을 들어줄 수가 없구나!”
용호사노 중 한 명이 결국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더니 다시 소리쳤다.
“뭐 하느냐? 이놈을 당장 묶어서 살가죽을 벗길 준비를 해라!”
“이얍!”
사노의 말이 떨어지자 이미 분노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있던 십여 명의 시위들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살수를 펼쳐왔다.
“어쭈! 이제 업무방해까지? 이러면 점점 죄가 가중되는데 그걸 알려나 모르겠네.”
고남보에게 치정살인의 용의자로 몰리며 배운 말을 시의 적절하게 사용하는 유성탄이었다.
공격이 날아오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딴 말만 하던 유성탄은 시위들의 검이 몸에 닿으려는 순간, 살짝 몸을 움직여 검을 피하더니 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씩 갈겼다. 시위들의 무공은 용호사노나 교중 왕자를 밀집 경호하고 있는 호위무사들보다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나자빠져 버릴 실력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십여 명이나 되는 시위들이 유성탄의 방망이를 맞고는 그대로 뻗어버리자 용호사노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포천망쾌에 대한 소문은 그들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만난 포천망쾌는 소문과는 달리 완전 양아치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소문이 너무 터무니없이 부풀어졌다고 생각하고는 자신만만하게 공격을 명한 것이다.
[저하! 아무래도 저하께서는 빈청을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 외로 굉장히 강한 자입니다.]
용호사노 중 한 명이 아무래도 조심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전음으로 교중 왕자에게 우선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너무 귀가 좋은 유성탄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귀에 들려오는 것을 어쩌랴!
“범죄자를 도피시키려 하는 자는 공범으로 잡히니까 그리 아시오.”
유성탄의 말을 들은 용호사노와 교중 왕자의 얼굴이 변했다. 이번에도 유성탄이 내공이 삼 갑자가 넘어서 자신들의 전음을 엿들었다고 오해한 것이다.
“저하! 이놈의 무공이 예상을 훨씬 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력을 다해 막을 것이니 빨리 피하십시오.”
이미 유성탄이 전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굳이 전음을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용호사노는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고는 곧장 유성탄을 향해 달려들었다.
“니들도 덤벼라!”
교중 왕자는 유성탄이 빈청의 가운데를 차지하고는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자 호위무사들에게 합공을 하라고 명한다.
“자꾸 이러면 나도 더 이상 안 참는다!”
용호사노의 무공은 실로 대단했다. 거기다 그들은 합공에 일가견이 있는지 공격이 대단히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의 유성탄의 몽둥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단한 실력을 가진 듯싶은 호위 둘까지 끼어들자 유성탄은 아무래도 그냥 싸우기는 버거웠다.
소리를 지른 유성탄은 얼마 전부터 어느 정도 조절을 하기 시작한 자신의 선천강기를 몽둥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몸을 회전하며 막무가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그의 몽둥이가 놀랍게도 그렇게 빨리 움직이고 있는 용호사노와 두 호위무사의 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용호사노와 두 호위무사는 마치 몽둥이 하나가 그들 전부를 덮치는 듯한 환영을 느끼며 급히 각자의 무기로 몽둥이를 막았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유성탄의 몽둥이를 막은 자들이 뒤로 주르륵 물러났다. 선천강기가 깃든 몽둥이는 마치 천근이 넘는 쇠몽둥이로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을 그들에게 주었다.
“으윽! 이게 무슨? 엄청난 거력이…….”
누군가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오더니 곧 입으로 피를 토해냈다.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 공력이 강한 용호사노는 입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버티고 서 있었지만 두 호위무사는 내공이 약한지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도 못 해보고 쓰러져 있었다.
“어딜 가시려구요?”
밖으로 몸을 빼려던 교중 왕자는 갑작스런 굉음에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느새 유성탄이 그의 바로 앞에 나타나서는 약 올리는 말투로 묻는 것이었다.
“무엄한 놈!”
순간 교중 왕자는 그대로 유성탄의 목을 손가락으로 찔러갔다.
유성탄이 처음에 느낀 대로 교중 왕자는 대단한 고수였다. 그의 손속은 너무 빨라 유성탄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도 쉽게 피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이힉! 뭐가 이렇게 차가워?’
유성탄은 교중 왕자의 지가 자신의 목을 찌르자마자 얼음보다도 더 차가운 기운이 자신의 목을 타고 흐르는 것에 놀라 속으로 외쳤다.
“한음지(寒陰指)라는 것이다. 건방진 놈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내 분이 풀릴 것 같지만 아쉬운 대로 얼려 죽여주겠다.”
교중 왕자는 자신의 한음지가 너무 쉽게 유성탄의 목에 박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한음지는 오백여 년 전 천하를 공포에 물들게 한 북해의 절기였다. 당시 북해의 패자였던 북천존자는 한음지 하나로 중원의 수많은 고수를 패배시켰었다. 기룡왕부의 교중 왕자가 어떻게 북해의 절기를 익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의 일지에 자신을 가질 만했다.
“왕자 체면에 내 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바닥을 기면 좋겠소?”
교중 왕자는 놀라 더욱 차가운 기운을 유성탄의 몸에 집어넣었다.
“충분히 시원하니까 그만 힘쓰시지요. 더 하면 진짜 이 몽둥이가 머리를 칠지도 모릅니다.”
유성탄의 몽둥이가 진짜 내리칠 듯이 공중으로 올라가자 교중 왕자는 급히 손가락을 빼고 뒤로 빠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은 마치 덫에 물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왕자 저하께 무례를 저지른다면 정말 온몸이 찢겨죽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용호사노 중 하나가 커다랗게 외쳤다.
“나는 무례란 걸 모르는 사람이오. 남들이 나보고 정말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청년이라고 감탄합디다. 그러니 내가 무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자극하지 마시오.”
말을 마친 유성탄은 교중 왕자의 손목을 잡더니 아직도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있는 손가락을 뺐다.
교중 왕자는 유성탄이 자신의 손목을 잡은 손에 공력을 주입하지 않고 그냥 힘으로 잡고 있는 것을 느끼자 내공을 일으켜 손목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무슨 바위에라도 끼인 듯 손목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자꾸 힘쓰면 손목이 부러질 수도 있소이다. 그리고 내가 화나면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교중 왕자는 생전 처음 당하는 치욕에 얼굴이 벌게졌지만 유성탄의 말대로 정말로 머리를 몽둥이에 맞거나 손목이 부러지는 험한 꼴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하! 그 미친놈이 감히 저하의 옥체에 손을 댄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 분명 공격명령이 있기 전에는 그자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거늘, 설마 그놈이 가만히 있는 왕자를 건드렸다는 말이냐?”
“그 놈이 너무 무례해서 시위들이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용호사노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그래서 일부러 용호사노를 보낸 것이 아니었더냐!”
기룡왕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보고하던 자의 안색이 변했다. 기룡왕이 화가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용호사노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기룡왕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그자의 실력이 저의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청담이 들어오며 말하자 기룡왕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천하의 청담이 놀랄 정도라……?”
기룡왕의 눈에 잠시 살기가 돌더니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뭔가 미심쩍은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전하! 지금 저하께서 위험하십니다. 빨리 분부를…….”
“가봐라! 그 놈이 왕자를 데리고 절대로 왕부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우선은 왕 장군에게 포위만 하고 있으라고 해라.”
“어찌하시려고요?”
보고하던 자가 나가자 청담이 급히 물었다.
“너보고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구경만 하고 왔더냐? 네 생각을 들어보자.”
“제가 보는데 그 자의 행동이 터무니없이 거만했습니다. 왕자님께 예도 올리지 않더군요. 거기다 단번에 왕자님을 용의자로 몰아가는데 홀로 온 자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마치…….”
“마치……?”
“마치 죽으려고 작정한 자가 같았습니다.”
“그래…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다. 황룡패까지 갖고 있는 놈이 왜 그렇게 죽으려고 기를 쓰는 걸까? 혹시?”
“무슨 생각이 나시는 거라도?”
“네 말대로 모든 것이 맞지 않는다. 그 놈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 만약 이 모든 것이 황제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면?”
“설마요? 혹시 황실에서 눈치 챌 만한 일이라도?”
“그런 게 있을 턱이 없지 않겠느냐? 하지만 지금 황제는 정치적으로 그리 편한 상황이 아니다. 황제는 언제나 그럴 때면 역모사건을 일으켜 반전을 꾀하곤 했다. 만약 이번에 나를 제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든 함정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지금 포천망쾌란 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 음모란 말입니까?”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무모한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유성탄의 두서없고 비상식적인 행동이 냉철한 기룡왕은 물론 음모를 꾸미는 데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는 청담까지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그럼 어찌하시렵니까?”
“확실한 것을 알기 전에 그 놈을 죽일 수는 없다. 우선은 군사들에게 그 놈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만 하고 있으라고 한다.”
“왕자님의 옥체는?”
“죽지는 않겠지…….”
“천하에 너같이 무모한 놈은 보다보다 처음 본다. 이미 황룡패까지 가졌으니 황상의 신임은 받았을 것이고 거기다가 본 왕부와 친해지면 재상이 부럽지 않을 권력을 가질 수 있는데 굳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나가는 이유가 무엇이냐? 어떤가, 자네가 협상을 한다면 내 부귀영화를 약속해 주겠네.”
교중 왕자는 용호사노가 밖으로 사라지자 곧 군사들이 천라지망을 칠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유성탄에게 넌지시 협상을 하면 어떻게냐는 말을 건넸다.
“난……!”
유성탄은 부귀영화란 말에 귀가 번뜩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지만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단어가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에 완전히 몸과 마음에 피폐해져 가여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진수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에이 씨! 왜 이렇게 중요한 때에 걔 얼굴이 생각나는 거야.’
교중 왕자는 유성탄이 말을 끌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성탄을 쳐다봤다.
“변태가 싫소.”
그리고 유성탄의 말이 끝나자 교중 왕자의 두 눈에 살기가 확 돌았다. 대중 앞에서는 점잖고 덕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을 밥 먹듯이 하는 그였다. 교중 왕자는 반드시 유성탄을 사로잡아 살가죽을 벗기고 뼈를 갈아 마시겠다고 속으로 결심했다.
“나란 사람은 말이오. 진짜 남자 중의 남자로서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않는다는 대나무 신조로 살아온 사람이오. 난 한 번 마음먹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하는 사람이란 이 말이지요. 내 인생에 협상이란 없소.”
말을 마친 유성탄은 몽둥이로 교중 왕자의 등을 밀며 빈청 밖으로 나왔다.
‘으익! 뭔가 시끄러워서 어느 정도 몰려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했지만 이게 뭐야? 씨! 완전 똥 밟았네…….’
유성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얼굴이 찌그러졌다. 마당에는 적어도 이천은 넘어 보이는 군사들이 빽빽이 모여 빈청을 포위하고 있었다. 일백은 됨직한 군사들이 활을 잰 상태에서 유성탄을 겨누고 있었고 수백이 넘는 군사들이 창을 앞으로 겨눈 상태로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거기다 상당히 무공이 높아 보이는 무사들도 일백 명 가까이 검을 들고는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었다. 거기다 수백이 넘는 군사들이 사방으로 퍼져 창을 하늘로 곧추세우고 있었다. 무림고수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포진이었다.
“하하하! 하긴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인데 내가 너무 꼬장하게 굴었지요? 그러고 보니 내 인생에도 이따금 협상이란 것이 있었지요.”
갑작스럽게 달라진 유성탄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 것은 오히려 교중 왕자였다.
‘뭐야 이 자식… 방금까지 대나무 신조가 어쩌니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교중 왕자는 갑자기 다른 말을 하는 유성탄을 보며 겁을 먹은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나야 자네가 협상을 하고 나를 돕는다면 무조건 환영할 것이네.”
유성탄의 작태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교중 왕자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원체 무식한 행동을 보이는 그가 당장 겁을 먹고 행동이 달라졌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왕자님께서 잘못을 하기는 하셨지 않습니까? 거기다 오늘 저는 정말 모든 것을 대화로 풀려고 했는데 먼저 시비를 거셨구요? 그쵸?”
‘이 자식이……!’
교중 왕자는 유성탄의 말에 당장 손을 들어 한 대 갈기고 싶었지만 우선은 몸을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먼저였기에 억지로 참는다.
“그렇다고 치고 방법이나 말해보게.”
“솔직히 이런 경우 저보다는 죄를 지은 사람이 뭔가 성의를 보이는 것이 공식 아니겠습니까?”
“공식? 그런 공식은 누가 만들었다던가!”
“솔직히 공식을 만든 사람까지 이곳에 부를 필요는 없겠지요.”
“황금으로 열 근을 주겠네.”
유성탄과의 대화가 너무 짜증스러운 교중 왕자는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하하하! 황금 열 근이라… 솔직히 황금 열 근 정도는 저한테는 열흘 정도의 간식 값밖에 안 됩니다. 그렇지만…….”
유성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 좋아서 승낙하려고 했다.
“황금 이십 근 주겠네.”
꿀꺽!
그렇지만 그 정도로 받아주겠다고 말하려던 유성탄은 이어지는 교중 왕자의 말에 나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열 근이 순식간에 이십 근? 그렇다면…….’
“하하하! 이십 근이라… 글쎄요? 황금 이십 근은 제가 아주 작은 협상을 할 때나 나오는 액수인데…….”
교중 왕자는 한 번 기회를 잡았다 하면 그 욕심이 끝간 데 없이 올라가는 유성탄의 본질을 몰랐다.
“황금 삼십 근이면 되겠나? 그 정도면 금자로 따져 적어도 삼천 냥 이상의 가치가 될 걸세.”
‘사사사… 삼천 냥? 히히히, 땡 잡았다. 안 되면 그냥 도망치려고 했는데…….’
“왕자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니 그 정도로 협상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이제야 말이 통하는 것 같구먼. 그럼 이제 이 손을 좀 놔주어야 되지 않겠나?”
“예? 아, 그렇지요. 놔드려야지요.”
대답을 한 유성탄은 놔주기는커녕 더욱 힘을 주어 교중 왕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말해보게.”
“제가 사실은 너무 겸손해서 이런 말을 잘 안 하는데 다들 천재라고 그럽니다.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천재보다 더 좋은 말이 있으면 그 말을 써야 하는데 그런 말이 없는 게 안타깝다고요.”
“진짜 겸손하군. 그래서?”
교중 왕자는 자신이 이런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하는 자체가 너무 짜증났다. 하지만 당장 제압을 당한 쪽은 자신이었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약간 미친놈은 아닐까 싶은 유성탄을 상대로 속마음을 내보이기도 어려웠다.
“이 천재적인 머리로 생각해보니 왕자님을 먼저 풀어준다면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난다 이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풀어주고 왕자님이 저 군사들 뒤로 숨어서는 ‘나는 그런 협상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저놈을 죽여라!’ 그러면 나는 뭐가 될까요~?”
‘미친 놈! 진짜 천재적인 머리다, 이놈아!’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건가? 설마하니 황금 삼십 근을 먼저 가져오라는 말은 아닐 테고…….”
“그 말입니다. 헤헤헤! 황금 삼십 근을 먼저 가져와서 제가 진짜 금인가 아닌가도 한 번 봐야 하고… 솔직히 덥석 가져갔다가 가짜면 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궁상개에게 한번 당한 사기가 유성탄을 엄청 똑똑하게 해준 것 같았다.
“가져온다고 해도 어차피 자네가 짊어지고 갈 수도 없을 것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거기다 나는 왕자네. 내 한마디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란 말일세.”
“말이 무겁고 가볍고는 뭐…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요. 황금만 무거우면 됩니다.”
교중 왕자는 그때서야 드디어 유성탄의 실체를 알아챘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이었구나.’
“총관 있나?”
교중 왕자는 더 이상 유성탄과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느끼고는 총관을 불렀다.
“예, 저하!”
“당장 황금 삼십 근을 가져와라.”
“당장 말입니까?”
총관은 무슨 말인지 몰라 다시 한 번 반문했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아 자식아! 귀를 잘라줄까!”
“알겠습니다.”
유성탄에게 화난 감정을 죄도 없는 총관에게 터트리는 교중 왕자의 말에 총관의 얼굴이 흑색으로 변하여 후다닥 사라졌다.
“저렇게 말 안 통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계시려면 속 좀 터지겠습니다.”
씩씩대는 교중 왕자를 보며 유성탄이 안됐다는 듯이 말을 건네자 교중 왕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울화에 다시 유성탄을 한 대 갈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가 공격을 생각하자 유성탄이 잡은 손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와 그의 몸을 경직되게 만들고 있었다.
‘하는 짓은 완전 개차반인데… 이런 무공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인가?’
교중 왕자는 올리던 진기를 다시 풀며 속으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왕자가 황금 삼십 근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예, 지금 총관이 창고로 황금을 가지러 갔습니다.”
“이유는?”
“아무래도 그 포쾌 놈이 돈을 원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룡왕은 왕부 호위장의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또 자신이 예상한 바와 다른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청담, 너는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아직까지도 그 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처음부터 돈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런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아도 황룡패의 주인이라는 한 가지만으로도 전하께 얼마든지 용돈 정도는 받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를 상황을 만들어놓고 갑자기 돈을 원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를 않습니다. 거기다 왕자님께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죄목을 뒤집어씌웠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생사를 결판낼 각오가 아니고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런 죄목보다는 다른 죄목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식이나 보편적인 행동에 맞지를 않는다는 말인데… 설마… 원래부터 저런 놈일 확률은 없나?”
“그럴 확률은 없습니다. 황제가 누굽니까? 말 한마디조차도 허투로 지껄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 황제가 자신도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를 자를 황룡패까지 들려 강호에 내보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렇다면 저 놈은 뭐야 도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