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소원성취
‘으악! 큰일 났다. 이게 아닌데…….’
정자운이 잠시 일을 보러 간 사이 유성탄은 급히 몸에 간직하고 있던 춘약을 장 안에 집어넣었다. 보통 고급 객잔은 손님들을 위해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는 서랍이 여러 개 있는 장을 놔두고 있었고 그 서랍 안에는 여인들이 머리를 씻을 때 사용하는 수액이나 세수를 할 때 사용하는 세안분을 놔두고는 했다. 물론 유성탄이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여러 종류의 차도 비치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온 정자운이 손에 들고 온 것은 두 잔의 뜨거운 물이었다. 그러고는 서랍을 열어 거기에 든 것으로 차를 탄 것이다.
문제는 유성탄이 계속 머릿속으로 어떻게 만리장성을 쌓을 방법이 없나만 생각하느라고 자세히 보지를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자운이 차에 탄 것은 차가 아니라 춘약이었다. 보통 춘약은 차 봉지에 담아놓았다. 만약 걸려도 차인 줄 알았다고 발뺌하기 좋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차를 마시고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던 유성탄은 현저하게 달라지는 정자운을 보고는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차가 아니라 춘약을 탔다는 것을 알았다.
‘일을 만들어도 이런 식으로 만들면 안 되는데…….’
자기가 바라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춘약으로 인하여 일을 치르는 것은 생각 없는 유성탄이라도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벌개져서 요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정자운을 보며 자신도 춘약의 효과가 있는지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고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절대로 안 그러실 것 같으시던데… 오늘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려나?”
유성탄과 정자운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위를 빙 둘러서서 망을 보던 아우들은 밤이 늦어가는데도 정자운이 갈 생각을 하지 않자 입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불이 꺼지자 서로 손까지 마주치며 축하를 하고는 자신들도 이 장 넘게 객방의 주위에서 떨어지더니 아예 무기까지 꺼내 들고 망을 서기 시작했다. 혹시 들려올지도 모르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읍!”
잠에서 먼저 깬 정자운은 자신이 알몸으로 유성탄을 안고 자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자 놀라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비명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잠시 인상을 쓰고 생각을 하던 그녀는 어젯밤에 일어난 일들이 다 생각나자 후다닥 일어서더니 옷부터 챙겨 입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어떻게 이런 일이…….’
옷을 입으며 계속 자신을 타박하며 중얼거리던 정자운은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잡는 유성탄의 손을 느끼고는 멈칫하고 말았다.
유성탄은 아무 말도 없이 정자운의 몸을 끌어당기더니 그녀의 몸을 꼭 껴안아주었다. 그리고 정자운은 유성탄의 몸에서 나는 달콤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다시 취하고 말았다.
“뭐 해?”
새벽에 다시 한탕 뛴 유성탄은 곤하게 자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정자운이 뭔가를 조사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 일어나서 물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요. 이미 제가 낭군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은 분이니 오늘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어제 일은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요.”
말을 마친 정자운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차 봉지를 들어서는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안색이 확 변했다.
“어떤 자들이 상공을 암살하려고 한 모양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차에 춘약이 섞여 있었어요. 그 말은 누군가가 상공을 시해하려고 상공에게 춘약을 먹이려고 했다는 거지요. 그리고 잘못해서 제가 먹게 된 거고요. 당장 아우님들을 불러들이세요. 범인을 잡지 못한다면 계속 그자가 무슨 짓을 상공께 저지를지 알 수가 없어요.”
유성탄은 정자운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결정을 하지 못했다. 거짓말과 뻥을 아예 입에 달고 사는 그였지만 이상하게 정자운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이른 아침부터……?”
교대로 유성탄의 객방을 망을 보던 아우들이 자러 들어가자 장우왕과 같이 대신 망을 보던 강태웅은 방도들과 같이 밖을 지키던 전화생의 전언을 듣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니들 대형 일어났냐?”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아니, 이놈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까지 자고 있다는 거야! 당장 깨워라!”
입에서 냄새를 풀풀 풍기며 궁상개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지금 깨우면 대형의 노여움을 저희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깨워!”
궁상개가 이렇게 일찍 온 것은 바로 흑혈신마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제까지 쉬쉬하던 무림은 북천존자의 이름이 누군가의 입에서 퍼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완전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사방에서 전서구가 날아다니고 무관들이며 각 파의 제자들은 정보를 취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림의 감초 격인 개방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총단의 전서를 받아 든 궁상개는 유성탄을 먼저 떠올렸다.
“그러니까… 상공께서 정력제로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춘약을 내가 실수로 먹었다는 말인가요?”
유성탄의 설명을 다 들은 정자운의 목소리가 완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정말 난 아니야! 알잖아, 차를 탄 것도 자운이었고 먼저 달라붙은 것도 자운이었다고!”
정자운의 달라진 목소리에서 엄청난 위기를 느낀 유성탄이 급히 변명을 했지만 그것은 불에다가 기름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정자운같이 고상한 여인에게 먼저 달라붙은 것이 너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유성탄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은 유성탄에게 아주 행운의 날이었다. 갑자기 궁상개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저 영감이 아침부터 왜 왔을까?”
유성탄은 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정자운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누군데요?”
정자운도 온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즉시 알았다. 분명 객잔 밖에서 하는 말인데 마치 방 안에서 말하듯이 그들의 귀에 그대로 울린다는 것은 일부러 천리전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천리전성을 사용한다면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궁상개라고, 엄청 궁상맞게 생긴 거지 영감이야. 얼마나 귀찮은데…….”
“궁상개 선배님이요? 지금 개방의 궁상개 장로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운이도 알아?”
“알다마다요. 노구를 이끌고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 세상 안 가는 곳이 없는 아주 좋으신 분을 제가 왜 모르겠어요.”
‘얼라… 그 영감이 아주 좋으신 분? 자운이 얘가 조금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 같은데. 이러면 안 되는데.’
유성탄은 정자운이 자기 몰래 사방에서 사기나 당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잠시 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주 급한 일이신 것 같으니 빨리 나가보세요. 그리고 어른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정자운의 말을 들은 유성탄은 얼씨구나 하고는 급히 옷을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휴우! 이렇게 될 인연이었던 모양이니 누굴 원망할까. 이렇게 된 이상 저분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잘 보필하는 수밖에 없다.’
유성탄의 말에 잠깐 크게 화가 났었지만 정자운은 아주 현명한 여인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지고 화를 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마음을 주었고 혼인까지 결심한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유성탄의 곁에 머물면서 유성탄을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왜 궁상을 떨고 그러는 거요?”
유성탄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하자 궁상개의 인상이 찌그러들었다.
“이놈아! 궁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나 하는 거냐? 여기서 왜 궁상이 들어가!”
“내가 보기에 궁상이 틀림없구먼, 뭘 그러쇼! 어쨌든 왜 자꾸 나를 귀찮게 하는 거요?”
궁상개가 너무 시끄럽게 굴어서인지 자던 아우들은 물론 사살과 방도들까지 모두 일어나서는 주위에 몰려들었다.
“너! 흑혈신마 죽었다는 말은 들었지?”
“들었시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냐?”
“그 영감하고 나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내가 뭐 해야 하는 거요?”
“너랑 동업하기로 했다며?”
“내가 미쳤소! 그런 영감하고 동업을 하게! 어디서 말이 와전된 것을 듣고 온 모양인데 난 그런 적 없소이다. 그리고 그 영감 죽음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그 영감 죽을 때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 달라면 말해 줄 것이고, 증인을 대라면 증인도 수십 명은 댈 수 있으니까 내게 누명 씌울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시오.”
“내가 언제 니가 죽였다고 했더냐! 네가 흑혈신마하고 동업을 하기로 했다는 말은 나도 듣고 여기 니 아우들도 듣고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수십 명은 들었다.”
“난 들은 적 없소!”
“당연히 들은 적이 없겠지! 네가 한 말이니까.”
‘씨! 내가 언제 이 영감한테까지 그런 말을 했지? 에이…….’
“어쨌건 뭐 때문에 온 거요?”
“지금 흑혈신마를 죽인 자가 북천존자라고 소문이 나고 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포쾌인 네가 그자를 막아줘야 할 것 아니냐?”
‘이놈의 영감이… 완전 물귀신이네? 왜 고요하게 사는 나를 진흙탕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거야? 씨!’
“이보쇼! 영감이 보기에 내가 너무 순진하고 착해 보이니까 미련까지 한 줄 아는 모양인데, 잘못 안 거요. 내가 겸손해서 말은 잘 안 하지만 사람들이 나보고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합디다. 왜 그런 줄 아쇼? 바로 이 머리 때문이요.”
“머리?”
“그렇소. 천재라는 것이 바로 머리가 좋은 사람을 말하는 거요. 무식해서 이렇게 말해 줘도 이해나 할지모르겠네.”
“하여간에 네놈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까지 조금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 것 아냐? 얘기를 하려면 현재 하고 있는 대화하고 좀 맞는 말을 해야지, 전혀 지금 상황하고 상관없는 얘기만 하니. 그래, 하고 싶은 얘기의 핵심이 뭐냐?”
유성탄은 궁상개가 얘기의 핵심이 뭐냐고 묻는 말에 순간 말이 막혔다. 자신도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는데 얘기의 핵심을 알 리 만무했다.
“영감 하고 싶은 얘기나 하시오.”
결국 유성탄은 궁상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 듣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북천존자는 정말 무서운 자다. 그자는 비무라는 미명하에 사람 죽이기를 마치 벌레 죽이듯 하는 자로 그자가 다시 나타났다면 현 무림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그리고 솔직히 내 생각으로는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벌레가 얼마나 맛있는 건데 벌레에 비유를 하시는 거요? 하여간 그래서요?”
‘이그, 드러운 놈… 거지인 나도 벌레는 안 먹는다, 이놈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냐?”
“엄청 강한 자가 있다, 이거 아니오! 그래서 어쩌라고요!”
“네가 그자를 맡아줘야겠다.”
‘이 영감이 정말 돌았나, 씨!’
“영감! 나는 말이오. 마누라만 셋이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냐?”
“마누라 먹여 살리기도 만만치 않다는 말이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데?”
“그자를 맡으라며요! 한마디로 난 그자까지 맡아서 먹이고 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외다.”
‘아이고, 두야! 내 이놈하고 얘기하다가는 복장이 터져 죽겠구나.’
궁상개는 유성탄의 대답을 듣자 목 뒤를 손으로 잡으며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잠시 비켜주시겠어요.”
갑자기 정자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유성방도들이 쫘악 물러서며 길을 만들어주었다.
“아니! 너 신녀궁의 자운이 아니냐?”
“안녕하셨어요?”
“아니, 네가 여기에? 아차, 참, 네가 궁주가 되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제 함부로 이름을 부르면 안 되지.”
“호호호! 그러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지금 대화를 들어보니까 무척 중요한 얘기인 것 같은데 안에 들어가서 대화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뭐 하시는 거예요? 나이 드신 어른이 오셨으면 우선 안으로 모셔서 차라도 먼저 권하는 것이 예의랍니다. 빨리 안으로 드시라고 하세요.”
궁상개는 생각지도 않은 정자운을 이곳에서 만난 것도 뜻밖이었지만 유성탄에게 마치 가르치듯 말하는 그녀에게 더 놀라고 말았다.
‘에이 씨! 저 영감 방 안에 들였다가 벼룩이라도 방 안 전체에 퍼지면 안 되는데…….’
유성탄의 인상이 꽉 찌그러졌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뭔가 사단이 날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정자운을 쳐다보던 유성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리고 니들은 가서 좋은 차 한 잔 내와라.”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저 망종이 어떻게 네 말을 따르지?”
‘이 영감이 방 안까지 들어오게 해줬더니 하고많은 말 중에서 망종이 뭐야, 망종이. 쯧! 그런데 망종이 무슨 뜻이지? 어쨌든 좋은 말은 아닐 거야.’
방 안에 들어서자 가운데에 있는 탁자에 털썩 주저앉은 궁상개가 다짜고짜 정자운에게 물었다.
“유 방주님께서 너무 솔직하시고 천진난만하시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처럼 착하신 분도 세상에 많지 않을 거예요.”
정자운의 고상한 입에서 유성탄에 대한 칭찬이 나오자 궁상개의 눈이 더 커졌다.
“자운아! 아니… 신녀궁주, 혹시 요즘 진땀을 흘리고 그러지는 않는가?”
“호호호! 그냥 말하세요. 혹시 정신 나간 거 아니냐고요.”
“의술의 최고봉인 신녀궁의 신녀가 정신이 나가기야 했겠냐마는 그래도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구나.”
“영감! 뭔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겸손해서 잘 말하지는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나보고 너무 착해서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무법자라고 합디다. 좀 사람을 알려면 정확히 아시오.”
‘무식한 놈! 무법자를 착한 사람으로 해석하는 놈은 천하에 너밖에 없을 거다!’
“호호호!”
정자운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상하게 유성탄이 뭔 말만 하면 왜 그렇게 웃음이 터져나오는지 그녀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궁상 어르신께서 여기 오신 이유를 말씀해 보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흑혈신마의 죽음 뒤에 북천존자가 있는 것 같다는 중론이다. 문제는 십대고수 중 가장 강하다는 대하 선사도 흑혈신마를 이길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죽이지는 못한다고 하더구나. 그 말은 십대고수의 실력이라는 것이 거의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밖에 안 난다는 말이다.”
정자운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녀도 북천존자에 대해서는 그녀의 사부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적이 있었다.
‘무식한 영감… 비유를 해도 종이 한 장 차이가 뭐야? 무공의 실력을 비교하는데 종이는 무슨… 나 같으면 빈대만 한 차이라고 하겠다. 씨!’
“그런데 흑혈신마가 죽기 전에 피로 유성탄의 이름을 옷에 써놓고 죽었다는구나.”
“뭐요! 이 장의사 영감, 죽으면서도 나를 끌고 가려고. 씨! 안 되겠다. 푸닥거리라도 한번 해야지.”
유성탄이 흑혈신마가 죽기 전에 그것도 피로 자신의 이름을 썼다는 말에 흥분해서 외쳤다. 혼자 가기 심심하니까 자기까지 끌고 가려는 심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요?”
정자운은 유성탄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다시 궁상개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당의 검선께서도 현 무림에 북천존자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유성탄밖에 없다고 했다는 거다.”
“무당의 검선이 어떤 놈이야. 씨! 지가 날 언제 봤다고! 이런 말에 현혹되면 안 돼! 지금 어떻게든지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내가 흑혈 영감까지 죽인 사람을 어떻게 이겨! 왜 이렇게 사방에서 이 착한 유성탄을 못 잡아먹어서 난리인 거야. 씨! 자운이 너, 과부 되기 싫으면 이런 말은 그냥 이쪽 귀로 들어서 저쪽 귀로 흘려버려라.”
“검선께서 그런 말을 공식적으로 했다는 말인가요?”
그러나 이번에도 정자운은 아무런 동요 없이 다시 물었다.
“그건 아니고 무당에서 소림의 대하 선사에게 그런 서찰을 보낸 것을 우리가 알아낸 거지.”
“이 영감이 공갈까지! 남의 서찰을 영감이 어떻게 알아내?”
“이놈아! 소림에서 본 방의 방주에게 유성탄이란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봐 달라고 연락을 해서 안 거다. 아직은 아는 사람은 본 방에도 방주와 나 그리고 수석장로인 극빈개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안이다.”
“아이 씨! 궁상개도 짜증나는데 극빈개는 또 뭐요? 도대체 얼마나 극빈해야 그런 이름을 갖는 거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못 참는 유성탄이 자신의 얘기도중 나온 극빈개라는 이름에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럼 어르신께서 여기 오신 이유는 뭔가요?”
하지만 이번에도 정자운은 모른 척하고 궁상개에게 물었다.
“자운이 너, 자꾸 이러면 난 섭섭하다.”
유성탄이 정말 서운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자운이 입에 미소를 띠고는 유성탄을 쳐다보며 말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판단을 해야 정확한 법입니다. 상공께서는 대화 도중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는 것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보이는지 아셔야 합니다. 우선은 궁상 어르신의 말을 다 들어본 이후에 하시고 싶은 말을 하세요.”
‘이 씨! 분명 엄청 유식한 말인데… 내 한 번 참는다.’
막상 정자운의 미소 띤 얼굴을 본 유성탄은 그냥 참고 말았다. 그리고 궁상개는 유성탄을 움직일 수 있는 직효약을 발견했다.
‘이것 봐라. 저놈이 자운이를 좋아한다, 이 말이렷다. 낄낄낄! 이놈, 이제야 약점을 하나 잡았구나.’
궁상개는 유성탄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요리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드디어 요리법을 발견한 것이다.
“대형!”
갑자기 강태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부르지 말랬지!”
유성탄이 짜증난 목소리로 말하자 강태웅이 다시 불렀다.
“아무래도 대형께서 나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에이, 뭔데? 귀찮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태웅이 저렇게 부를 때는 분명 유성탄이 나가야 해결될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자 유성탄도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아쉬운 눈으로 정자운을 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으잉! 쟤가 어떻게 여길?’
설명도 하지 않고 급히 유성탄을 객잔의 식당으로 데려간 강태웅은 유성탄만 놔두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정자운도 그에게는 형수가 될 사람이었고 화설군도 형수가 될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주군의 집안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왜요! 내가 온 게 안 반가운가 보네? 그냥 가요?”
‘어떻게 정자운이하고 말하는 게 똑같냐?’
여인이 정인을 찾아왔을 때 조금 과한 표정으로 반가워해야 여인은 좋아하는 법이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설군이를 보고 싶어했는데.”
화설군은 유성탄의 입에 발린 소리에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유성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조게 무슨 뜻이지? 설마 나보고 가까이 오라는 건가?’
유성탄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가까이 다가가자 화설군이 유성탄의 품에 뛰어들더니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나를 놔두고 그런 식으로 사라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 유랑이 도망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유랑? 히히히, 아이구, 예쁜 거!”
“나라고 너를 놔두고 오면서 좋았는지 알아? 천요궁을 떠나오면서 피눈물을 흘렸다니까!”
“호호호! 거짓말도 참 잘 치시고.”
“거짓말 아니야!”
“제가 보고 듣기로는 희희낙락하면서 나갔다고 하던데요.”
“아니! 어떤 놈이 그런 허위 사실을! 데려와, 씨! 내가 당장에 반역죄로 집어넣을 거니까.”
“호호호! 상관없어요. 남자가 거짓말도 좀 치고 그래야지 너무 도덕군자처럼 굴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우리 서로 거짓말 치면서 누가 안 걸리나 시합하면서 살아요.”
유성탄은 화설군의 말을 들으며 인상이 요상하게 변했다.
‘이것 참. 어떻게 같은 여자가 요렇게 다르냐? 도대체 누가 좋은 마누라인 거야? 알 게 뭐야! 하루는 자운이하고 좀 고상하게 놀고 하루는 얘하고 애들같이 놀고 하루는 빙아하고 싸우면서 놀면 되지 뭐.’
화설군이 알아서 안기자 자신도 모르게 남자다움을 보이고 싶어진 유성탄이 으스러지게 화설군을 안으며 살짝 들었다. 키가 큰 유성탄이다 보니 가볍게 화설군의 몸이 떠올랐고 화설군은 그녀의 코에 들어오는 달콤한 냄새에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래, 바로 이 냄새였어.’
화설군이 행복한 듯이 두 팔로 유성탄의 목을 감싸자 유성탄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포개졌다. 천요궁의 궁주답게 남자가 어떻게 해야 좋아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건 유성탄으로서는 화설군이 유랑이라고 부르며 애교를 떨자 이상하게 아랫도리가 불끈하는 것이 좋기만 했다. 그에게는 북천존자도 반역의 무리도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지금 계속 생기는 것이 많고 이 일을 잘 끝내면 아우인 유성우의 출셋길이 열릴 거라는 엄마 강추화의 말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쏘다니고 있지만 그는 빨리 마누라 데리고 고향에서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가장 큰 꿈이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다급하다는 둥 위기라는 둥 하는 호들갑이 유성탄으로서는 흥미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유성탄에게 위기란 없었다.
“흥!”
갑자기 유성탄의 귀를 울리는 코웃음소리에 유성탄은 순간 엄청난 위기를 느낀다.
‘으잉! 아니, 하필…….’
“눈알을 뽑아줄까? 아니면 거기를 뽑아줄까? 어떻게 잠깐 헤어진 사이에 벌써 바람을 피울까?”
유성탄은 백리빙이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화설군이 안은 목을 놓지 않고 입술도 떼지 않자 밀치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의 뒤통수에 커다란 충격이 떨어졌다.
“이 자식아! 너 왜 사니? 이렇게 여자 마음에 못이나 박고 만날 배신 때리면서 그러고도 살고 싶냐?”
칼집으로 유성탄의 뒤통수를 호되게 때린 백리빙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도 떨어지지 않는 유성탄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어떤 계집이 감히 나의 낭군의 몸에 손에 대는 거냐?”
화설군도 무엇인가가 유성탄의 머리를 친 것을 알자 후다닥 유성탄의 몸에서 떨어지더니 자신의 채대를 풀어냈다. 그녀의 독문무기였다.
“낭군? 흥! 어떤 계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려라! 저 작자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덜떨어진 작자인지 알고 그런 소리 하는 거냐!”
백리빙으로서는 여자에게까지 나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유성탄이라는 색마에게 걸려든 가엾은 여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화설군의 입에서 낭군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순간 살기가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호오! 신녀궁의 백리 총사?”
“아니? 당신은……?”
“빙아야, 바람이라니? 이미 우리 약속이 되어 있었잖아? 너도 허락해 놓고는…….”
백리빙은 유성탄의 말을 듣자 갑자기 예전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뭐예요? 그럼 그렇게 불쌍한 여자라고 강조했던 여자가 바로 천요궁주였다는 말이에요!”
“허락?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누가 누구의 허락을 받아요!”
화설군에게서도 찢어지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유성탄은 곧 자신의 생애에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알았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평생 도망쳐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백리빙이나 화설군이나 그로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공격을 할 수 없는데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 상대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계속 달려든다면 그로서는 도망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 뻔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유성탄은 그대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우선 위기를 모면하고 볼 심산이었다. 어릴 때부터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치는 것을 본능적으로 확실하게 몸에 체득한 그가 아니었던가.
“어딜 도망가? 이 치사한 놈아!”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 가야지요!”
백리빙과 화설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쏜살같이 도망친 유성탄은 골목을 발견하고는 그 속으로 우선 숨어들었다.
“휴우!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구나. 가만! 아이 씨! 자운이까지 만나면 문제가 더 커질지도 모르는데.”
우선은 피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질 수는 없었다. 현재 그에게 그녀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지 이미 오래였던 것이다.
“여기에 숨는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얘는 또 왜 여기 나타난 거야?’
“너 나 여기 있는 거는 어떻게 알았냐?”
“나 고남보의 수사망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성탄은 말하는 수사포쾌 고남보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 자꾸 뻥치면 나한테 죽는다.”
“포쾌를 죽여서 사건을 은폐하려고 드는 사례는 상당히 많았지요. 그리고 그런 범인은 능지처참으로 사형을 당했고요. 자, 나리 때문에 두 여인이 슬픔에 빠졌습니다. 이제 누군가를 한 명 죽이실 계획이시겠지요?”
“아이 씨! 짜증나게… 소설 쓰지 말고 저리 가라. 그렇지 않아도 지금 머리가 빠개지는데 너까지 속 긁지 말고!”
“흠, 양심의 가책을 받으시고 있으시군요. 좋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해 벌은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가책을 느끼시는 김에 제게 죄를 털어놓으시지요. 어떻게 반 루주를 죽였… 으악!”
고남보가 유성탄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길을 가는데 유성탄이 갑자기 이층 주루의 창에서 뛰어내렸고 곧이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두 여인의 얼굴이 창가에 나타났다. 그리고 유성탄이 멀리도 아니고 가까운 골목으로 숨는 것을 본 것이다.
고남보는 직감적으로 또 하나의 살인 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느꼈다. 그러고는 유성탄에게 깐죽대다가 결국 못 참은 유성탄의 주먹을 맞고는 뻗어버린다.
“자식이! 안 때리려고 했는데. 하여간에 엄청 짜증나는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