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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미약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29/77)


29화. 미약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2023.03.10.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조그만 꼬마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더니 마티어스에게 다시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응, 시엔?”

“저 아저씨 불쌍해……. 고구마 원래 10개에 1 실버인데……. 완전 호구야.”

심복이 몸을 움찔했다.

마티어스가 기억하기로 저자가 차고 있는 시계만 벌써 천 골드를 호가하는 고가의 제품일 텐데. 물론 그 사실을 시엔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본전도 안 남으니까, 무릎까지 꿇고 많이 사 달라고 부탁한 거구나. 워낙 성격이 착해서……. 역시 아빠 친구답다.”

“그랬나 봐.”

“웅……. 휴우.”

시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복을 힐끔 바라보았다.

시엔의 저 시선만 봐도 마티어스는 알 수 있었다. 저자를, 시엔은, 우리 아빠랑 같은 처지구나. 하면서 짠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엄, 고구마 10개만 사 주자. 1 실버로. 그런데 아빠!”

“응?”

“고구마가 왜 필요해?”

순수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마티어스는 지금까지 화술에 있어 누군가에게 밀려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엔의 저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마는 것이다.

제 사랑스러운 딸의 순진한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 주고 싶어져서.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보니까.

마티어스가 연신 다음 말을 고르는 사이 시엔은 마음속으로 무언가 확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의 조그만 딸은 무람없이 크게 소리쳤다.


“아빠도 근육 키워? 시녀 온니들은 고구마, 닭가슴살 먹던데!”

‘……그 시녀들이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군.’

일이 술술 풀려 가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육체의 시녀들을 떠올린 마티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엔을 안아 들었다.


“응, 아빠 건강해지려고. 아빠 너무 약하니까.”

“쿠, 쿠, 쿨럭. 케켁.”

마티어스의 뻔뻔한 말에 심복이 사레가 들린 듯 콜록거렸다.

하지만 시엔은 달랐다.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맞아! 아빠 너무 약해서 요절하면 어떡해. 백 살까지 살아야 하는데! 고구마 많이 머거!”

저 말에 그치지 않고, 시엔은 마티어스의 몸 이리저리를 살폈다. 사랑스럽고 순수한 말에 절로 웃음이 났다.

심복은 마티어스의 흉악한 미소를 힐끔 보다가 딸꾹질까지 하는 모양이었지만…….

마티어스에게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그는 시엔의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이제 젖은 옷 갈아입고 아빠랑 맛있는 거 먹을까?”

“웅! 압빠랑 맛있는 거 먹을래!”

마티어스가 픽 웃으며 시엔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실로 오랜만의 평화로군.’

그의 표정이 편안하게 변했다.

눈치 빠른 심복이 바깥으로 나가고, 마티어스는 책상 옆의 줄을 당겨 시종을 불렀다.

눈치 빠르고 손끝도 여문 시종들은 빠르게 다기 트레이를 가져 왔다. 그동안 시엔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마티어스의 무릎 위에 잽싸게 앉아 마티어스가 보는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나 열심히 집중하던지, 시엔의 눈동자가 도륵도륵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압빠아, 이건 모야?”

시엔이 말꼬리를 늘리며 배시시 웃었다.

마티어스는 시엔이 손에 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델피아 미르모드 관련 서류였다.

물론 시엔이 읽을 수 없도록 암호 처리를 해 두었으니 확인은 못 하겠지만…….

마티어스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택 정비 서류야. 이 저택이 아주 좋은 곳이거든.”

“……그래?”

“응. 그래서 아빠가 정비를 좀 하려고. 벽지 도배도 좀 하고. 예전 시골집처럼 만들어 줄게. 멋있겠지?”

뛸 듯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엔은 한숨을 폭 내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 막. 무서운 건 안 해?”

“……응?”

“남들 위협하고! 괴롭히고!”

물론, 그건 마티어스의 주특기다.

하지만 자신이 숱한 자들에게 공포스런 존재라는 사실을 시엔이 알아서는 안 되지. 그는 과하게 부정하기로 했다.


“절대 그런 일 안 해. 아빠는 착한 사람들과 좋은 시간만 보낼 거야.”

제 측근들이 들으면 기절할 문장을 산뜻하게 내뱉은 그가 시엔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시엔은 귀여운 무표정을 지었는데, 이상하게도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쩐지 경직된 조그만 어깨가 안쓰러워질 지경이라 마티어스는 시엔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아, 시엔.”

“웅?”

“혹시 델피아라는 이름의, 웬 여자가 널 찾아오면…….”

“우웅?”

시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람 만나지 마, 시엔. 그 이름 듣자마자 도망쳐야 해.”

“왜? 왜 도망쳐야 하눈데?”

시엔의 순박한 눈동자가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위험한 사람이니까.”

“웅!”

주먹을 불끈 쥐면서 시엔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겨 버릴게!”

“……뭐?”

“말이 헛나와써! 시엔, 피할게! 착한 아빠처럼!”

마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시엔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엔에게 위험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먼저 갈아 버릴 테니, 딱히 이 조그만 꼬마가 바쁘게 움직일 일은 없으리라.

몇 분간, 평온하면서도 특별한 시간이 유유히 흘러갔다.

그런데 마티어스가 한참 힐링을 느끼던 그때였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의 바깥에서 커다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너……. 뭐……. 위험…….”

“싫……!”

“저리…… 꺼…….”

소년들의 앳된 미성이었다.

순간 휴식을 방해받은 마티어스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그러나 시엔 앞이었다. 상식적인 가정교육을 해야 한다.

그는 시엔을 향해 다정하게 속삭였다.


“……바깥에 못된 무뢰배들이 있는 듯하니 창을 닫을까?”

그러나 시엔의 반응은 의외였다.

창문을 닫고 무시하려 했던 마티어스와 달리 시엔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어어! 안 대!”

“응?”

그리고…….

시엔은 조그만 뱁새처럼 톡, 하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러더니 쪼르르 창가로 간 다음 아래를 빼꼼히 내려다보았다.

무릎의 온기가 사라지니 순간적으로 허전해졌다.

시엔은 창 바깥을 내려다보더니…….


“헉, 허억!”

다리를 달랑거리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시엔?”

“얼른 가 봐야 해!”

“응?”

“압빠랑은 다음에 놀아 주께! 기다려!”

단말마 같은 소리를 지른 다음 시엔은 쏜살같이 문을 열고 떠났다.


 
마티어스는 그 자리에 남겨졌다.

……아주 초라하게.

아직 무릎 위에 남아 있던 온기도 다 가시지 않았는데…….

그는 으득, 이를 갈았다.

오랜만에 시엔과 평온한 티 타임을 즐기려 했는데. 대체 어떤 놈들이 방해를 하는 걸까.

마티어스는 창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야에 시엔이 공작저로 돌아와 사귄 친구 둘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애시드, 레온하르트라고 했었던.

***

나는 헉헉거리며 애시드와 레온하르트가 있는 산책로로 뛰어갔다.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아기님! 다치셔요!’, ‘세상에, 어떻게 저 조그만 다리로 뛰시는 거지!’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 시국에 시녀들의 걱정이 중요한 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애시드와 레온하르트가 싸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건…….

열심히 휘적휘적 뛰면서 나는 바보 아빠의 상처받은 표정을 떠올렸다.

우리 아빠는 나와의 시간을 매우 중시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나를 보는 게 제일 신이 난다나.

하지만 오늘 아빠와의 행복한 시간은 아쉽게도 빠르게 파탄이 나고 말았다.


‘바보 아빠, 삐칠지도 모르는데!’

소심하고 순박한 아빠이니만큼 오래 꽁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빠의 순수한 마음은 나중에 달래 주는 걸로 하고! 레온하르트와 애시드,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는 수밖에.


‘레온하르트와 애시드, 둘 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놓칠 수 없는 꼬마들이니까.’

나는 재게 발을 놀렸다.

마침내 그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는 산책로가 보였다.

다행히 아직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발로 열심히 뛴 나는 학학 숨을 몰아쉬며 그들이 대치하는 중인 산책로 가까이로 다가갔다.


“허어억, 대체 무슨, 헉, 일이야!”

애시드와 레온하르트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목소리가 분위기를 깬 모양이었다. 내가 오자마자, 애시드는 급하게 내 등 뒤로 숨었다.


“시, 시엔 님.”

“아기!”

나는 아기 같은 애시드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애시드의 발갛게 달아올랐던 뺨이 조금 더 붉어졌다.

그 모습을 심술궂게 입꼬리를 올리며 지켜보던 레온하르트가 나를 호명했다.


“밤톨!”

“웅!”

레온하르트가 애시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뭐야?”

레온하르트는 악당의 양자였다. 그런 그가 배울 만한 말씨는 거친 것뿐이었을 터다.

하지만 애시드는 그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래서, 애시드는 내 등 뒤에 숨어 옷자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하긴, 조그만 애시드가 이곳에서 의지할 사람은 나뿐일 테지.

레온하르트는 가면까지 썼으니까 딱 봐도 무섭게 생겼고.


‘둘이 친해지면 좋을 텐데.’

나는 도로록도로록 눈을 굴리며 고민하다가 박수를 짝, 쳤다.


“웅, 레온하르트! 얘는 내 친구 애시드, 아니, 아기야! 우리 집에 같이 사라!”

순간적으로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년의 얼굴을 빈틈없이 감싼 가면마저도 떨릴 지경이었다.


“쟤가 밤톨 천재, 네 친구인가?”

“웅!”

‘왜 화가 난 거 같지?’

나는 레온하르트가 무슨 말을 할지 잔뜩 초긴장했다.

아무래도 꼬마 악당인 데다 자라면 최고의 악당이 될 예정인 만큼, 그가 어디로 튈지는 나도 몰랐다.


‘레온하르트, 대체 뭐라고 할까?’

그리고, 내 긴장 상태를 인식한 듯 그 역시 진지한 표정이었다.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가 있었다.


‘너희들은 오합지졸이니까 저리 가라고 하려나?’

나는 두근두근 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꿀꺽.

내 침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간 순간.


“……나는…… 너한테 뭐지?”

……으응?


“……으응?”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레온하르트는 놀랍게도 말이 없어졌다. 조용해진 그 대신 애시드가 내 소맷귀를 꾸욱 잡아 왔다. 레온하르트의 날카로운 시선이 애시드 쪽에 닿았다.

묘하게 둘 사이에 신경전이 있는 것 같은데…….


“레온하르트도 당연히 내 칭구지!”

나는 히힛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와 애시드는 웃지 않았다. 여전히 내 옷소매를 잡고 있는 애시드를 힐끔 본 레온하르트가 나를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밤톨.”

“응?”

“내가 너의 첫 번째로 소중한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으응……?”

레온하르트는 묘하게 굵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내가, 저 뒤에, 너랑 같이 사는 저…… 녀석보다 더 좋은 존재가 될 거란 말이야.”

소년의 눈에서 미약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약간 거리끼기는 했으나, 어쨌든 미래의 악당이 될 존재가 내 친구가 되어 준다고 선언하는 건 나한테는 몹시 좋은 일이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아. 열심히 해!”

내 대답에 레온하르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래.”

등 뒤에서 애시드가 내 옷깃을 힘주어 잡으며 속삭였다.


“저도…….”

“으응? 아기, 왜?”

애시드가 내 귓가에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열심히 할게요!”

슬슬 내 친구들이 생기고 있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엄, 우리 가치 맛있는 거 먹을까?”

이 조그만 꼬맹이랑 레온하르트가 더 좋아졌으니까.

나는 해맑게 웃으며 애시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애시드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네. 친구……님.”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지만.

이 정도면 둘의 갈등이 어느 정도는 봉합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른, 둘의 손을 꼬옥 잡으며 웃어 보이려고 했는데 말이다…….

해맑게 웃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게 있었다.

등 뒤에 아빠가 서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달랑거리는 내 몸을 한 손에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시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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