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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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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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2023.06.13.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들의 면면은 상당히 화려했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 할머니와 델피아 언니가 영혼까지 끌어 모아 줄 기세로 귀부인들을 은밀히 선별했으니까.
‘멜피른은 사교계의 명사인데, 예전부터 꿀빵이 널 보고 싶어 하더구나.’
‘우웅?’
‘귀여운 것엔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거든.’
……할머니는 사교계의 명사를 ‘녀석’ 정도로 비하하는 간덩이 큰 모습을 보여 주었고.
‘흠, 요렌 영애 어때? 얘는 다이너마이트라고 폭탄 제조에 특화되어 있어. 여차하면 터트려 버릴 수 있게 데려가자.’
‘허억…….’
‘다혈질까진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델피아의 친구, 다이너마이트 개발자 요렌 영애가 합류했다.
라인업이 정해지고 난 다음 델피아와 할머니는 머리를 맞대고 골몰하기에 이르렀다.
‘신성력 쪽엔 아는 사람 있나, 델피아?’
‘상단은?’
‘약사도 좋겠군. 혹시 모르니까.’
‘후견인 목록은 대충 다 준비된 것 같은데. 마지막 한 명은 누구로 하지?’
천재 약사 멜랑을 포함해 사교계에서 힘깨나 쓴다는 멜피른 후작 부인, 델피아의 절친한 친구이자 마도공학의 천재 요렌 영애, 신성력이 있지만 성녀 자리는 마다했다는 신시아 영애, 평민 출신이지만 굴지의 상단을 이뤄 낸 거상 만델, 그리고…….
‘아무리 생가캐두, 방해할 거 가타요.’
‘방해를 할 것 같다고?’
‘웅! 그러니까…… 법적으루.’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할머니가 장탄식했다.
‘그러게 말이다. 처음에 법의 허점을 이용했던 놈들이니, 이번에도 법의 허점을 이용하려 들 수도 있겠지.’
‘구러니까…… 법조계 종사자.’
델피아가 입술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
‘법조계 종사자라는 말을 다섯 살짜리가 어떻게 아는 거지…….’
……라고 말해서, 조금 나를 당황스럽게 했지만.
어쨌거나 찾아냈다.
델피아와 공작 부인의 인맥은 정말 황금 인맥이었다.
“무슨 법이라고?”
법학 전공자이자 제국 헌법 재판관, 뮤르샤 백작.
감히 법을 운운해 내 앞길을 막은 게 열이 받는 건지, 그녀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빡 섰다.
“그, 그게.”
“말해. 내 앞에서 법에 대해 운운해 보라고.”
이 행정관들도 알 것이다.
‘뮤르샤 백작은 아카데미 법학과 교수도 지냈었거든.’
수도 행정관이라면 뮤르샤 백작의 수업 한 번쯤은 청강했을 터.
“그, 그러니까…….”
행정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 헌법에 따라, 소급된다는 특별한 조항이 없다면 소급 적용되지 않지. 안 그런가?”
소급 적용이란, 법률이 개정 시행되기 전의 사례에도 적용한다는 뜻이었다. 이전 사례 전부 다 거슬러 올라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번거로워졌다.
그러니 상업 문제에 있어서 ‘소급 적용’을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 내 상황으로 예시를 들자면, 나는 이미 상단 개업을 완료한 상태.
그러나 저 법이 소급 적용이 된다면 나는 상단을 폐기해야만 한다.
만약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후견인만 있으면 상단을 개업할 수 있는 것이다.
“헌법에도 적혀 있지 않은데, 감히 네 뜻대로 미르모드의 상단을 폐업하려고?”
“…….”
“행정 소송 들어가야 하나?”
행정관, 조르주는 몸을 웅크렸다. 행정 소송이 걸리는 게 두렵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긴, 대법관 출신인 뮤르샤 백작에게 소송이 걸린다면 행정관으로서 목을 내놔야 할 테니까.
그 순간 멜랑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행정관을 향해 물었다.
“말해 봐. 자네 이름이 뭐야?”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옆구리에 양팔을 올리며 씩 웃었다.
법을 잘 아는 귀부인을 데려와서 참 다행이었다.
그때까지 내내 입을 열지 않는 행정관을 보면서 나는 얄밉게 말했다.
“조르주예요!”
그다음, 마침내 준엄하게 말했다.
“조르주, 허가 내 조, 당장.”
내 말에 조르주는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나…….
“안 하나?”
……대법관 뮤르샤 백작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당해 내지는 못했다.
그는 우물쭈물 입술을 삐쭉거리더니 겨우 내 사업의 허가에 도장을 찍었다.
마침내 시엔 미르모드 상단이 진짜로 출범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뮤르샤 백작은 그의 손에서 사업자 등록증을 빼앗아 내 품에 쏙 안겨 주었다.
“축하한다, 아가.”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 있는 후견인들 모두에게 배꼽 인사를 건넸다.
“녜! 감사함니다!”
집중포화를 당한 말단 행정관과 달리 과장은 그래도 노련한 축에 속했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몇 없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럼 이제 끝난 것, 아닙니까. 정리해야 하니 나가 주십시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우웅?”
과장이 나를 바라보며 미미하게 괴로운 음성으로 반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있자나.”
과장의 표정은 거듭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 옆의 말단 행정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나 아직 할 말 남아써.”
나는 상큼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들은 다음 말이 무엇이 나올지 두렵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내 말에 그들이 침묵하던 찰나. 다이너마이트 개발자이자 델피아 언니의 친구인 요렌 영애가 턱짓했다.
“빨리 아가리 열어야지.”
“뭐, 뭔데…….”
“어쭈.”
“……뭔데요.”
역시 요렌 영애.
아주 찍소리도 못하게 밟아 놓는 것 전문인 듯하다.
그럼 이제 슬슬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날려 볼 때였다.
나는 발랄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 봉투, 모야?”
나는 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후견인들이 와르르 몰려온 탓에 당황해서 그들이 미처 치우지 못한 신전의 봉투를 날쌔게 잡았다.
조르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신전에서 보내 주신 짧은 기도문입니다. 봉헌을 조금 한 덕분에 보내 주셨죠.”
옆에서 과장이 넌지시 말을 이었다.
“조르주를 위한 개인적인 기도문이 왜 궁금하십니까?”
“그냥.”
“……그건 그저 평범한, 기도문일 뿐입니다. 만약 저 편지봉투 안에 담겨 있는 게 기도문이라면 어찌하실 겁니까?”
과장이 짧은 승부수를 던졌다. 나는 그를 향해 반쯤 조롱조의 어조로 반문했다.
“그냥 보는 곤데, 왜 안 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내용물을 읽어 보았다.
[신의 성실하신 조르주 형제님께.
신전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부터 형제님을 위한 기도를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옐례니아 님의 석상 위, 조그만 천사의 날개가 당신의 하루를 응원할 것입니다.]
아무리 꼼꼼하게 읽어 보아도 정말 신전의 기도문이 맞았다.
하지만 뭔가 수상한데…….
내가 말이 없자 과장과 조르주는 이 틈을 타 공격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입을 열어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그것 보십시오.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주십-.”
조르주가 성질 급하게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
타악!
뒤에서 잠자코 있던, 너드처럼 안경을 쓰고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기른 후견인 언니가 음산하게 그의 손을 내려쳤다.
그리고 내 손에서 빠르게 편지를 받아 갔다.
“기도문은 개뿔. 암호 해독은 내가 또 전문이지.”
조르주가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아무래도 내가 암호 해독 쪽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을 거라고 느낀 모양이다.
‘암호 전문두 데려가야 댈 거 가타.’
‘암호는 왜?’
‘막, 막. 나뿐 짓 해쓸 수도 이쓰니까.’
혹시 증거가 있을까 봐 이 관청을 전체적으로 다 수색해 보려 했는데 흔적이 남지 않아 다행이었다.
“옐레니아 석상이라. 이건 아마 포르친 신전을 의미할 거고.”
“……뭐, 뭣.”
“조그만 천사의 날개면 아기 신녀상.”
“……대체,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하루를 응원한다는 건 일 년 치의 연봉을 숨겨 놨다는 거겠군. 암호도 이렇게 쉽게 만들어 놓다니.”
전문적인 암호 해독가, 피엔이 피식 웃으며 봉투를 흔들었다.
“이제 네 행적 조사하면 되겠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턱짓했다.
“구럼 이제 이 아조씨들, 어떠케 되는 고야?”
이제 암호 해독가는 뒤로 물러나고, 대법관 할머니가 나섰다.
“행정 소송부터 민·형사 소송까지 전부 시작하지. 대법관의 명예를 걸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의 말에서, 델피아나 할 것 같은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끝까지 조져 줄 테니까 기대하거라.”
와, 이게 바로 법적으로 조져 주는 거구나. 나도 법 공부를 해 보고 싶다, 할 정도로 좀 멋있는 멘트였다.
‘하지만 법으로만 조질 순 없지. 내 곁에는 요렌 언니도 있는 걸.’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르주 쪽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아조씨들. 다이너마이트, 자수. 둘 중에 하나 선택해.”
조르주가 떨리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급격한 동공 지진을 보면서 나는 입꼬리를 쭉 올렸다.
솔직히 말하자.
선택하라고 했지만, 답은 정해져 있고.
“자, 자수…….”
넌 대답만 하면 돼.
***
“요즘 들어서는 어딜 가나 시엔 미르모드, 그 멍청한 계집애 얘기뿐이에요!”
“아, 가브리엘레.”
멜로디아는 다정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문 가브리엘레를 바라보았다.
“그 멍청한 계집애가 운 좋게 상단을 하나 갖게 되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그 조그만 게 뭘 한다고. 그리고 대체 뭘 안다고요!”
종알종알 성토하는 가브리엘레를 지켜보던 멜로디아가 느긋하게 말을 얹었다.
“가브리엘레, 아쉽게 되었어요. 행정관들이 모두 자수를 했더군요.”
“그 영악한 계집애가 또 한 건 한 거죠! 요사스러운 입으로……!”
“영악하다니, 똑똑하다고 해야지.”
가브리엘레는 서러워서 눈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았다. 분명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믿어 왔고, 그렇게 살아온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시엔 미르모드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있었다.
‘쉽게 봐서는 안 될 상대겠지.’
멜로디아는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미동도 없이 경직되어 있었다. 얼핏 위화감마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가브리엘레.”
“네, 멜로디아 님!”
교황의 지지를 얻어 유력한 성녀가 된 멜로디아는 이제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떨치는 인물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가브리엘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긋나긋하고 상냥하게 웃었다.
“시엔 미르모드는 위험한 아이라는 거, 저도 알게 되었어요.”
가만히 놓아두면 안 될 만큼 지극히 위험할 정도의 아이였다.
마티어스에게는 암살자를 보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실패했고, 시엔의 상단은 손쓸 새도 없이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여러모로 멜로디아의 패배였다. 둘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으니, 석패도 아닌, 완패를 하고 만 셈이었다.
“아…… 마, 맞아요! 신경 쓰실 필요 없이 하찮지만, 위험하긴 하죠!”
멜로디아는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뜨며 잠시, 싸늘한 무표정을 지었다.
“뿌리를 뽑아, 제거를 좀 해야겠어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러자 멜로디아가 상냥하게 말했다.
“제일 먼저, 미르모드 가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멜로디아는 다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를 느끼게 하는 다분히 청량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차분히 준비해야겠어요. 미르모드를 상대하려면, 꽤 오랜 시간을 준비해야겠죠.”
“그건…….”
“천천히, 그들이 다시 성장하지 못하도록 차근차근 시작해 볼 거예요.”
미르모드의 씨를 말리고, 시엔과 마티어스를 모두 처리한 다음, 멜로디아와 신전의 완벽한 목표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찬란한 미래를 떠올리는 듯,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좋아요, 멜로디아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