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너는 경계심이 너무 없어
(4/51)
4. 너는 경계심이 너무 없어
(4/51)
#4. 너는 경계심이 너무 없어
2023.03.14.
벤하민이 나른하게 숨을 삼켰다.
“포도주 좋아하나?”
나른한 물음이 떨어졌다. 나긋나긋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윈저가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들 포도주를 좋아하던데, 그대는 어때?”
“저도 어머니 닮아서 좋아해요. 생전 어머니께서도 자주 즐겼고요.”
“……샤를로프랬나?”
샤를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피는 정말 짙어. 서로서로 입맛 취향까지 빼닮았어.”
“그랬나요?”
“맞아. 그 존재감이 확연하거든. 내가 처음 본 너를 윈저가로 알아보듯 말이야.”
그가 이야기한 대로다. 윈저가의 피는 짙다.
겉모습이나 사소한 입맛 취향까지, 제 친부가 극도로 혐오하던 윈저가의 피가 샤를로프에게도 짙게 섞여 있었다.
“추천해주실 곳 있어요?”
“뭐를?”
“포도주 좋아하느냐고 물어서요.”
“평소에 가는 곳은 있고?”
벤하민은 셔츠를 군더더기 없이 입고 단추를 채웠다.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따라붙었다.
샤를로프는 숨을 한 번 더 참았다. 뭔가 숨을 꽉 조여오는 것 같았다.
그의 말끔한 몸짓 덕분일까? 벤하민이 다쳤다는 사실조차 잊을 뻔했다.
샤를로프는 벤하민이 재킷까지 마저 챙겨입도록 기다려주고 답했다.
“로스켈라의 술집이라고, 포도주가 유명한 곳이 있죠.”
전생에 당신 수하가 관리하던 곳이잖아요.
벤하민의 손짓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보더니, 재킷 소매도 단정히 했다.
처음 윈저가의 저택을 밟았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말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갔었나?”
“아니요. 오늘 가보려고요.”
벤하민은 말없이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거기는 아일리아 포도주가 맛있어. 30년 산이면 윈저가의 입맛을 충족시키기에도 괜찮겠지.”
벤하민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 왜일까? 멀거니 내려다보는 저 시선이 유난히 짙다.
샤를로프는 눈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벤하민은 가벼운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샤를로프가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데, 벤하민도 그런 시선을 느낀 듯 느지막하게 몸을 돌렸다.
“또 봐.”
우리는 예감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
“또 봐요, 전하.”
그날 벤하민은 상처만 치료하고 떠났다. 윈저가는 다시 고요해졌다.
벤하민이란 존재를 잊어버린 듯, 사람들은 그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이런 일상에 익숙해졌다.
“샤를로프.”
벤하민이 떠나고 아스터는 샤를로프를 불러두고 이야기했다.
“전하께서 딴 이야기는 안 하셨냐?”
“또 보자고 말씀하신 게 다예요.”
“뭐, 또 봐? 뭘 또 본다는 게냐! 그분이 지금 누구를……!”
“네?”
“아니다. 아니야. 내가 괜한 걱정을 했지.”
아스터에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자, 그는 ‘그냥 성격 나쁘니까 어울리지 말란 말이다.’라고만 일축했다.
* * *
“아가씨!”
누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마부가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무슨 생각을 하신다고 불러도 듣지 못하십니까?”
샤를로프는 마차 창문 너머로 시선을 멀리 던졌다. 깜빡 졸았던 것 같다.
“도착했습니다.”
샤를로프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익숙한 길목이라고 이곳저곳 두리번거릴 것도 없었다.
저번에 한 번 왔었던 길목 앞이었다.
말이 푸드덕하며 고개를 한번 떨었다. 마부가 그런 말을 진정시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돌아오시는 길은 정말 혼자 돌아오시는 겁니까?”
“아마도. 일단 예상으로는…….”
그래서 홀로 베레모를 쓰고 외출한 참이었다.
“늦지는 않을 테니까 먼저 가봐도 돼.”
샤를로프는 눈인사로 답을 대신했다. 마부가 떠난 걸 확인하고, 그녀는 입술을 더듬거렸다.
“여기가 맞나?”
좁은 길목이 익숙했다. 벤하민과 마주쳤던 그 길목이었다.
제 친부가 가장 혐오하던 사람이자, 훗날 황가의 주인이 될 지배자.
그 사람이 지금 이 앞에 있다.
그 존재만으로도 제 친부가 입에 거품을 물고, 극도로 예민해지고, 그냥 죽어버리라 저주하던 사람.
도덕적 결함으로 패륜아라 불리던 ‘그’
설령 그가 패륜아여도 괜찮다. 그뿐이랴. 그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어도 괜찮다.
그 도덕적 결함이 내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될 일이잖아. 내게 영향을 끼쳐도 뭐 어때?
제 친부가 그를 질색하는 이유면 충분하다.
그거면, 뱀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을 이유로 충분하다.
‘로스켈라의 술집’
벤하민이 황궁 밖 정보를 다루던 기관인데, 그의 책사가 관리하던 곳이었다.
벤하민과 마주쳤던 곳도 이 근처였다.
‘여기 근처에서 부딪쳤던 것 같은데…….’
그러면 여기가 맞다.
그녀는 숨을 찬찬히 골랐다. 폐부 깊숙이 스며든 한기를 몰아내듯 가슴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좁은 길목은 성인 남자 하나만 겨우 지나갈 만큼 비좁았다. 그 길목을 지나자 술집 하나가 나왔다. 어렴풋한 기억을 되짚는 거라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이 길목 이쯤이었던 것도 같고.
샤를로프는 베레모를 벗고 간판을 올려다봤다.
‘로스켈라 술집.’
아담한 술집이었다.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짤랑
술집 안에서 포도주 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입구 종소리에 유리컵을 닦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어어. 그러니까 손님이시오?”
샤를로프는 문턱에 서서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손님 맞고, 여기 앉으면 되나?”
그녀는 베레모를 탁자에 올려두고, 아일랜드 탁자 한쪽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메뉴판은 저기 있소. 보고 먹고 싶은 거…….”
“아일리아 포도로 만든 포도주 한 잔 부탁해. 30년 산이어야 해.”
술컵을 닦던 사내는 바텐더인 프란츠였다.
“아일리아 포도주를 찾는 손님이라고? 뭐야? 이 아가씨 보기 드문 애주가인가? 일행은 혼자요?”
“일단은 혼자.”
“포도주에 기가 막히는 과일 치즈도 있는데, 그것도 드릴까?”
“치즈에 건포도 들어간 거면 그거만 빼고 줘.”
“뭐, 건포도를 왜 빼? 건포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아일리아 포도주를 먹으면서, 건포도 들어간 과일 치즈는 생략한다는 건가?”
프란츠가 아일리아 포도주와 과일 치즈를 내왔다. 건포도를 빼달라 했더니, 그는 말린 사과로 만든 과일 치즈를 가져왔다.
과일 치즈를 입에 넣자 뭉근하게 입안에서 녹았다. 그녀는 포도주를 손으로 작게 흔들고 입안에 머금었다.
“여기 주인은 어디 가고 없어?”
“어, 로스켈라 님을 아시오?”
“직접 아는 건 아니고. 술집 이름을 사람 이름을 따서 지었잖아.”
“아아. 그랬지! 잊을 뻔했군.”
“포도주 질이 좋다. 구석진 곳에 있어서 퍽 기대는 안 했거든.”
그녀는 포도주를 한 잔 더 마셨다. 그쯤, 등 뒤로 그림자가 졌다. 그는 그녀가 누군지 안다는 듯 머리에 로브를 씌웠다.
“샤를.”
벤하민이 탁자 옆을 짚으며 몸을 수그렸다.
“또 뵙네요.”
나를 망쳐줄 사람.
“또 보자고 했는데, 내가 너무 일찍 찾아왔나요?”
“예상보다 이르긴 했지.”
우리는 서로를 가만히 살폈다. 그리고 대번에 알아봤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는 샤를로프를 놓고 이용가치를 계산했다. 꼼꼼히 닿는 눈짓은 그녀를 놓고 샅샅이 분해했다.
그래. 너도 이때 느꼈을 거야.
우리는 진창 속에서 같이 구르게 될 거라고.
나는 기꺼이 그 진창 속으로 굴러 들어갈 거야.
샤를로프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눈동자만 굴렸다. 유리잔에 입김이 맺혔다.
“아스터에게는 이야기하고 왔나?”
“제 외숙부께서는 제가 여기 온 줄 모르세요.”
“그러면 혼자 왔다는 이야기군.”
“돌아갈 때도 혼자 돌아갈 예정이에요.”
샤를로프는 포도주를 비우는데, 벤하민이 유리잔을 빼앗아갔다.
“윈저가 핏줄은 하나 같이 포도주에 환장하는구나.”
벤하민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여기는 어떻게 찾았고?”
“나름 유명한 집 아니던가요?”
“로스켈라 녀석이 포도주 수집은 잘하지.”
“네. 포도주 품질이 아주 좋았어요. 아일리아 포도주 추천해주셔서 그거로 마셨어요.”
벤하민이 그런 그녀를 빤히 살폈다. 그는 지금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다. 너를 어쩔까. 그런 눈이다.
그녀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데, 입구 문이 다시 또 열렸다. 프란츠가 그 이름을 불렀다.
“로스켈라 님 오셨습니까?”
“쯧. 앞에 다 와서 웬 비야?”
로스켈라가 옷에 잔뜩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투덜댔다.
“고용주님, 우산도 큰데 왜 혼자 쓰고 가시는 건데요? 사내 놈이랑은 둘이서 우산 쓰기 싫다 이거죠! 에잉! 속옷까지 홀딱 젖어버렸잖습니까! 정말 피도 눈물도 없으신 분입니다! 제가 팔뚝 으깨진 거 한땀 한땀 꿰매드렸던 날은 잊었습니까?”
“로스켈라 님 앞쪽에 손님 와 계십니다.”
로스켈라도 샤를로프를 막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프란츠, 안쪽에 자리 하나 마련해드려라.”
그녀는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문드문 빗소리도 들렸다.
* * *
“숙취음료제입니다. 쭉 마시십시오.”
로스켈라가 초록색 병에 담긴 숙취음료제를 건넸다.
“취중에 전하와 대화하다간 이리저리 휘둘리실 겁니다.”
샤를로프는 숙취음료제를 받아서 혀끝만 살짝 담갔다. 쌉싸름한 박하 향이 퍼졌다. 고작 포도주 몇 잔으로 숙취음료제까지 마실 필요는 없지만, 그의 측근이 괜히 권유하는가 싶어서 일단은 다 마셨다.
“어휴. 맨정신에 대화해도 정신줄 잡기가 힘든 분이 이분이신데, 우리 아가씨 부주의하셔라…….”
로스켈라가 벤하민을 눈짓하며 혀를 찼다.
“전하. 사내놈들 대하듯 대하면 안 됩니다.”
“너는 그쯤 해두고 나가.”
“어휴! 저한테 좀 친절해지시면 안 됩니까?”
그녀는 다 마신 숙취음료제를 내려놓고 로스켈라를 눈짓했다.
“나름대로 긴밀한 사이 같은데요? 전하, 팔뚝 으깨진 것도 한땀 한땀 꿰매준 분을 너무 홀대하시는 거 아니에요?”
로스켈라가 벅찬 표정으로 제 상관에게 하소연했다.
“전하? 들으셨습니까? 여기 처음 보는 이분도 제 생각을 해주는데, 이건 좀 너무하잖습니까? 제가 그쪽 팔뚝, 저쪽 허벅지 안쪽까지 직접 한땀 한땀 꿰매던 기억을……!”
“로스켈라 시끄럽다.”
벤하민은 로스켈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샤를로프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로스켈라를 흘끔거렸다.
‘예상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구나.’
전생의 로스켈라는 잔혹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
‘폐태자 옆에서 살생부를 만든 사람이었지.’
현 황제는 병세가 깊어서 앓아누운 지 오래고, 그 내부도 어수선했다. 황비 외에는 황제에게 접근하는 일조차 불가능해졌다.
폐위됐던 폐태자가 제 가족과 친지를 죽이고 황위를 잇는 건,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다.
벤하민은 반대세력을 척출해서 황권을 드높이고, 그때 반대세력을 척출해낸 게 로스켈라로 그 살생부를 쥔 책사였다.
“그럼 쉬다 가십시오. 샤를로프 양.”
로스켈라가 나가고 벤하민이 손깍지를 끼고 앉았다.
“샤를.”
그 애칭이 이 정도로 정답게 들리는 건, 그만큼 그에게 익숙해졌다는 뜻일까?
“너무 겁 없이 다니는 거 아니야?”
“내가 그랬던가요?”
“너는 경계심이 너무 없어.”
샤를로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앞에서 경계심을 푼 건 사실이다. 가장 경계심을 품어야 할 사람 앞에서 경계심을 풀어버렸으니, 그걸 벤하민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는.”
벤하민이 느릿하게 읊조렸다.
“조금 더 경계심을 품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스터가 그의 성격이 나쁘다고 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저분이 숙취해소제부터 주고 떠난 이유가 있었네요.”
넋 놓으면 휘둘리기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