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내 가정은 파탄 났고. (6/51)


#6. 내 가정은 파탄 났고.
2023.03.21.



 


“뒷말은 괜히 덧붙였나?”

샤를로프는 구불거리는 머리를 꼬아서 헝클였다. 골반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게 거추장스러웠다.


“괜히 외삼촌 심경만 복잡하게 해드린 건 아닌가 모르겠어.”

“아스터 님이요? 오늘 사업처 둘러본다고 나가시던데, 평소와 똑같던데요?”

베키가 가닥가닥 꼬인 머리카락을 잘 풀어서 빗질로 풀어냈다.


“그래서 외삼촌께서는 자리를 비우셨고?”

“네. 아가씨께서도 오늘 어디 나가시는 거예요?”

“오늘은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날씨도 좋잖아.”

“아가씨. 머리 모양 망가져요. 그만 만져요.”

샤를로프가 빗질한 머리를 손가락을 꼬고 앉아 있자, 베키가 약하게 어깨를 툭툭 쳤다.

골반까지 흘러내리는 게 번거로울 법도 한데, 베키는 능숙하게 머리를 고정해서 땋았다.

베키가 구불구불한 적발 사이에 백합을 닮은 꽃핀을 꽂자, 우울한 인상이 조금은 옅어졌다.


“치장은 끝났어요. 그럼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베키가 자리를 떠나고, 곧이어 테라스창 문이 열렸다. 테라스창 너머로, 선선한 바람이 응접실 내부를 훑었다.

벤하민이 응접실 테라스 창 너머로 들어왔다. 테라스 창에 걸터앉은 그는 곧장 샤를로프에게 다가왔다.


“집이 비었더라.”

“네. 외조부와 외삼촌 모두 자리를 비웠거든요.”

“세자르 윈저도?”

그는 샤를로프의 큰 외숙부였다.


“그분도 집에 안 계세요.”

“사업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더니, 아직 안 왔나 보군.”

그래도 곧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들었다. 벤하민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벤하민에게는 함부로 특정 짓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었다.

체격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일까?

그런데, 그 자체로 시선을 이끄는 미묘함이 있었다.

사람을 붙들고 끌어당기는 악력이랄까? 그런 미묘함이 우리 둘 사이의 경계심을 무너트렸다.


“샤를.”

벤하민이 고개를 가까이 가져 왔다.


“넋 빼두고 뭐 보는 거야?”

“당신이요.”

“이젠 좀 편해진 모양이야.”

처음부터 당신이 어려운 적은 없었다. 우리 둘의 간극이 오히려 미묘한 이끌림을 가져다 줬지.


“부탁한 건 알아봤어요?”

벤하민이 탁자에 쪽지 하나를 내려놨다.


“네가 부탁한 사람 주소지다. 헨리에타는 현재 5세. 클로에의 아들이라는데, 일단은 튜텨가는 단순한 후견인 신분으로 된 듯 보여.”

벤하민은 주소지를 쪽지에 적어서 넘겼다.


“고마워요. 찾았네요.”

비록 샤를로프의 친모는 죽고 없지만 그런 집구석도 가정이었는데, 그 가정이 파탄 났다.

내 어머니는 이미 죽었지만, 너희들이 아직 남았잖아.

내 가정이 파탄 났는데, 네놈들은 어디 속 편히 지내려고?


‘그 목숨줄 붙어 있을 때까지는 내 통제하에 있는 거야.’

시야 밖에 놔두면 통제만 어려워진다. 그냥 손아귀에 올려두고 움켜쥘지 버릴지 고민해보는 게 낫다.


“가까이 있었네요.”

“두 집 살림 같이하려면 집이 가까워야지. 튜텨 후작이 성실한 편도 아니잖아.”

샤를로프는 그 쪽지를 건성으로 읽고 다시 벤하민에게 넘겼다. 벤하민이 그런 샤를로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검지로 뽀얀 뺨을 만지작거리더니, 검은 잉크를 닦아내고 웃었다.


“얼굴에 왜 잉크가 묻어 있어?”

“아, 만년필을 오랜만에 썼거든요.”

샤를로프는 옷소매로 뺨을 한 번 더 닦아냈다. 그런데 또 엉뚱한 곳이었는지, 보다 못한 벤하민이 티슈를 꺼내서 마저 닦아줬다.

한번 죽었던 몸이라고. 전생에 크고 작은 대소사를 미리 겪을 수 있었다. 그래서 손글씨도 익숙해질 겸 이것저것 수필로 적었더니 이 꼴이 됐다.


“손글씨가 익숙지 않은 모양이야.”

“그러게요. 아직은 손글씨가 낯설더라고요.”

아직도 뻣뻣하게 감각이 굳어가던 느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 루퍼틱 병 때문이더라도 한번은 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을까.

그래도 이십 년은 더 지난 뒤의 일이니까 여유는 있다.


“샤를?”

샤를로프는 겨우겨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네. 말씀하세요.”

“어째서? 교양수업의 기본이지 않나?”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잖아요.”

벤하민은 이해하지 못한다. 샤를로프는 루퍼틱 병으로 사지가 마비되면서 손가락의 신경도 모두 굳어버렸다. 이 감각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외출할 건가?”

“네. 나가야죠.”

“그럼, 아스터에게 허락부터 받아야겠군.”

“호위 필요하세요?”

“딱히. 그건 왜?”

“호위 없어도 되면 그냥 나가요.”

벤하민은 그럼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에게만 이야기해 둘게요.”

샤를로프는 하인에게만 잠시 외출한다고 말을 남겨두고 곧장 나왔다.

* * *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어느 한적한 저택 앞이었다. 흰 울타리가 저택을 감싸고, 대문이 닫혀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몇 년 뒤에나 튜텨가에 발을 딛겠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건 없다.


“아아. 이것 참 거지 같기도 해라.”

작위적인 목소리가 은은히 흘러나왔다. 샤를로프는 대문 앞에서 내려서 문고리를 손등으로 툭툭 두들겼다.

대문 이음새가 헐거웠다. 그녀가 문 앞에 서 있는데, 웬 아이가 제 발치로 걸어왔다.

대문을 작은 손으로 쥐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를로프는 저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안녕.”

아이가 그녀를 따라서 웃었다.


“헨리에타! 얘가 혼자서 어디까지 간 거니!”

샤를로프는 클로에의 표정을 눈에 찬찬히 담아냈다. 그녀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젊다. 아아. 곱고 예쁘기도 해라.

어머니. 당신은 병든 순간에는 손발이 우그러들어 걷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누구십니까?”

샤를로프는 아이를 빤히 내려다봤다. 클로에는 수상쩍은 기류에 아이를 번쩍 안아 들더니 보호하듯 감쌌다. 지금 헨리에타는 뽀얀 피부에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클로에 양 되십니까?.”

“맞는데 누구세요?”

“튜텨 후작께서 보냈습니다.”

샤를로프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비틀었다. 클로에가 서둘러 되물었다.


“후작님께서 보냈다고?”

기뻐해. 예정보다 일찍 그 집구석으로 던져줄 테니까.


“아이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아아아! 다행이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요즘 후작님 발걸음도 뜸하고, 헨리를 더 이상 보러 오지도 않고……!”

클로에가 아이가 귀엽다는 듯 콧등을 툭툭- 두들기며 답했다. 샤를로프는 대문 창살을 손으로 움켜쥐고 고개를 기울였다. 너는 아빠를 닮았구나. 그 핏줄을 닮았으니 네 인생도 아주 고달프겠어.


“그런데, 늘 오던 사람은 어디 가고.”

클로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는 누구니?”

“…….”

“처음 보는 얼굴인데 후작님께서 보낸 건 맞아?”

클로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샤를로프가 친부를 닮지 않은 탓이 컸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도 너는 나를 알아봐야지. 내가 그 집안 딸이라는 건 몰라도, 내가 그 자식 핏줄이라는 건 알아봐야지. 적어도 내연녀라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할 것 아니냐. 그녀는 이마를 짚고 입매를 비틀었다.


“그게 중요한가?”

그녀는 그길로 말을 놓았다. 너희는 말이다. 내가 동정심을 보이며 후작가로 밀어 넣어주면, 입 다물고 들어가면 될 일이야.


 


“당신은 기회가 왔으니 튜텨가로 들어가면 될 일이야. 내게 묻지 마. 그쪽 스스로 떳떳한 처지라도 되는 줄 아나? 자존심 작작 부리라는 뜻이야. 애 명줄 가지고 장난칠 게 아니라면, 애 데리고 튜텨가로 가.”

샤를로프는 눈을 감았다.

이것도 전생의 지식이었다. 헨리에타는 열병을 앓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된다. 물론, 이것도 교정을 받고 고치지만 바로잡을 수 있다면 바로잡는 게 좋겠지. 지금도 미열로 아이의 뺨이 붉다.

네 존재가 네 죄는 아니니까. 그런데 말이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 또한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그 순수함이 싫어.’

아이가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망울이 순수했다.


“어차피 곧 가게 될 거,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야.”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가려는데, 클로에가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그쪽 아가씨는 이름이 뭐야?”

“샤를로프.”

일부러 이름을 알려주었다.

언젠가 아버지를 만나거든.

그 이름 한 번 언급해 달라고.

그녀가 집에서 나온 지 며칠이 지났건만.

딸아이를 찾지도 않는 그 인간에게 새삼스러운 제 소식 한번 전해 달라고.


“샤를로프야.”

샤를로프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 * *

억울해도 참아라. 샤를로프.

네 존재를 죽여.

그래서 그 목숨만 부지한다면 엄마는 그거면 된다.

죽기 전 친모가 해준 이야기였다.


‘이제는 기억에서 거의 지워졌지만.’

내게 뭘 참으라고 이야기했던 거죠? 내가 뭘 참아야 했나요? 내가 뭘 더 참아야지, 그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숨을 쉬느냐고요.


“아가씨?”

레안드로의 부관이 급하게 몸을 피했다.


“할아버지는 안에 계시니?”

“레안드로 님이라면 집무실에 계십니다.”

샤를로프는 꽃핀으로 고정했던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어서 풀었다. 그리고 입술 한쪽을 비틀었다.


“할아버지께 이야기 좀 전해줘. 드릴 말씀이 있어.”

그의 부관이 집무실로 들어가서 샤를로프의 방문을 레안드로에게 알렸다.

지금부터는 썩은 인연을 도려낼 때다.

썩은 살을 도려내야 새살이 난다. 썩은 뿌리를 잘라내야 새싹이 돋는다.

그 일로 뿌리가 휘청일지라도, 애초에 썩은 뿌리는 그 기능을 다 하지 못한다.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말을 왜 하지 않느냐?”

그래서 레안드로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 썩은 뿌리를 잘라줄 칼날이 그의 손에 있었다.


“저 파양 당하고 싶어요.”

양육권은 기본적으로 친부에게 주어진다.

지금 샤를로프가 열아홉 살이니, 스물을 앞둔 지금 이 시점에도 1년간은 더 친부의 통제를 받는다.

그 양육권을 빼 오려면, 친부가 직접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좀 더 전후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레안드로는 손깍지를 끼고 그런 그녀를 눈짓했다. 좀 더 부연설명을 덧붙여라.

샤를로프는 입을 열기 전부터 꾸준히 고민했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지 외가댁 식구들이 덜 상처받을까.

답은 없다. 그래서 되도록 덤덤히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아버지께 내연녀가 있어요.”

이 관계는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이어져 왔다.

샤를로프가 어렸을 때부터 이들은 내연관계였다.


‘더러워.’

기분이 너무 더럽다.


“곧, 그 사람들이 튜텨가로 와요.”

레안드로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빌어먹을 집구석에 내연녀를 들인단다.


“사람들, 이라고?”

“아들이 있어요. 나이는 다섯. 오 년 전에 태어난 아이니까, 짧으면 육 년 전부터 만났던 사람이죠.”

레안드로는 그 이야기를 의심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들을 굳이 벌해 달라는 건 아니다. 적어도 그녀만큼은 그 집안에서 빼달라는 뜻이었다.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할 일이었어. 샤를로프 너도 할 도리를 다한 거야.


“너는, 그 사실을 언제부터 알았느냐?”

그녀가 알게 된 건 아버지가 내연녀를 데려온 시점이었다. 이것도 전생의 기억이었으니, 지금으로서는 까마득한 기억이었다.


“오래됐어요.”

“네 아비는 도대체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게 다였다.


“파양되게 도와주세요.”

레안드로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던 모양인데, 그의 입술은 다시 맥없이 닫혔다.

그러길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내게도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레안드로가 침묵 끝에 답했다. 표정 변화도 미미했다. 그는 지친 기색이 다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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