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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짐승처럼 물어뜯고. (9/51)


#9. 짐승처럼 물어뜯고.
2023.03.31.



 


“눈먼 칼에 안 맞도록 조심하랬더니.”

샤를로프는 포도주를 따고 유리잔에 담았다.


“어깨 상처는 어때요?”

“누가 네게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

“굳이 이야기를 들어야 아나요? 볼 때마다 다쳐오니까 그러죠.”

벤하민은 지금도 팔뚝 한쪽에 붕대를 감아놨다.

흰 거즈에는 핏자국이 선연했고, 짙은 약초 향도 풍겼다.

쌉싸름한 향은 마취제 역할을 해주는 꽃제비에서 축출한 꽃잎에서 나는 향이었다.


“약 냄새가 더 심해졌네요?”

“그러는 너는 환자한테 술을 주는 거야?”

벤하민이 포도주병을 잡고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입술을 약간 벌리고 포도주를 병째 마셨다.


“역시 윈저가야.”

“뭐가요?”

“아스터도 내가 이러고 온 첫날, 포도주 한 병부터 던져버리더라고.”

“그거 나름 비싸요. 나한테 아일리아 포도주를 추천한 게 당신이잖아요? 그 가치를 모를 리는 없고……. 그런데도 그걸 병째로 마셔요?”

벤하민은 술병 주둥이를 붙잡고, 술이 그래 봐야 술이라며 일축했다. 포도 향이 아득하게 풍겨왔다.


“포도주는 나랑 안 맞아.”

저 입이 저런 실없는 말을 할 때가 다 있다.

샤를로프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서 벤하민을 올려다봤다.

검은 머리칼에 덮인 눈가가 유난히 어둑했다.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가 탁한 빛을 띠어서 더더욱 섬뜩했다,


“……왜요?”

“그냥.”

벤하민이 답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응어리짐 없이 또렷했다.

다만, 맥없이 흩어지는 공기 같았다.

벤하민이 손가락을 뻗어서 붉은 머리칼을 감쌌다.

손아귀에 감긴 머리칼이 곱슬곱슬하게 흘러내렸다.

목 안이 간지러웠다. 깃털로 기도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샤를로프는 고개를 내밀어 그의 뺨에 가까이하고 물었다.


“그럼, 나는 어때요?”

“무엇이?”

“우리는 잘 맞아요?”

우리는 서로를 닮았다. 그래서 이끌렸고.


“그 약혼 나랑 할래요? 외조부나 외숙부 허락도 받아야 하겠지만요?”

“…….”

“나랑 하는 약혼은 아니에요?”

전남편과 재회한 게 샤를로프를 더욱 자극했다.


“너, 계속 이럴 거야?”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뺨을 당겼다.


“그만해. 샤를.”

벤하민도 조금은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샤를로프는 그의 손을 적당히 떼어냈다.

내가 당신보다는 오래 살았어요.


“네 나이에 지을 법한 눈짓은 아닌데…….”

“세상 오래 살았죠. 너무 오래 살았어요. 죽었어야 할 사람을 여기에 데려다 놨으니까요.”

짐승보다 못한 친가와, 시댁 아래서 사람보다도 못한 삶을 살다 죽었는데.

내가 그 꼴로 죽었잖아.

그럼 그놈들 앞길에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좋잖아.

벤하민은 검은 눈동자를 내려서 샤를로프를 지켜봤다.

두꺼운 비늘을 지닌 뱀이 스산하게 혀를 날름거렸다.


“흘려들으세요.”

샤를로프는 마지못해 이야기했다.


“그냥 꺼내본 이야기였어요.”

전남편과 만났던 게 내심 속을 긁어둔 모양이다.


“샤를.”

벤하민이 샤를의 머리칼을 정돈해줬다.


“이만 내려가 봐.”

벤하민이 옥탑방 문 너머를 보더니 혀를 찼다.


“아스터가 오는군.”

“외숙부요? 밑에 계셔요?”

“계단 밑에서 기척 하나가 올라오는데 아스터가 맞아.”

삐거덕거리는 계단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샤를로프는 밤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벤하민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담요 밖으로 꺼내줬다.


“나가 봐.”

샤를로프는 포도주만 떠넘기고 빠져나왔다.


“포도주는 다 먹고 알아서 치워요.”

옥탑방에서 내려오는데 계단 아래에서 조명등이 빛났다.

아스터가 아래층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외숙부 아직 안 주무셨어요?”

“거기서 내려오냐?”

아스터는 샤를로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랑 있었냐?”

“태자 전하랑 있었어요.”

왠지 알고 묻는 것 같은데, 여기서 괜히 숨길 것도 없겠지.


“아, 위에서……? 그랬구나. 샤를, 침의 차림으로 안 춥냐? 담요로 좀 더 가리고 응……? 아니다. 아니야. 네 집인데 편히 입으면 좋지. 손님이 조심해야지, 집주인더러 뭐라 하면 안 되는구나. 됐다.”

아스터가 급하게 내뱉는 말들이 쉴 틈 없이 흘러나왔다.

외가댁 식구들은 유난히 샤를로프에게 조심스러웠다.

저 조심스러운 눈길은 여전히 눈치만 살피고 있고.


“내가 주책이었다. 날이 추우니 따뜻하게 입어라.”

“왜 묻지 않아요?”

“뭐가 말이냐?”

“위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요.”

“혹시 뭐 진지한 이야기라도 했냐? 그만큼 진지해졌나? 네게 캐묻는 게 아니고. 나는 그냥 궁금하다는 거지.”

지금쯤이면 물어볼 법도 한데, 아직도 조심한다고 저런다.

저것도 누군가의 죽음에서 시작된 죄책감 때문이겠지.


“그냥 안부인사만 나눴어요.”

샤를로프는 머뭇거리다 팔을 뻗었다.


“어두워요. 방까지 데려다주세요.”

아스터는 옥탑방 위를 한번 올려다보고 샤를로프의 팔을 잡았다.


“다 큰 녀석이 어쩐 일로 어리광이야?”

그는 투덜대면서도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샤를로프는 침실 안에 와서야 혼자가 됐다.

엄마, 내 앞날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그곳에 엄마는 없지만요.

* * *



“태자 전하께 약혼 이야기를 꺼냈다는 게 사실이냐?”

레안드로가 샤를로프를 불러놓고 물었다.

약혼 이야기 꺼낸 지 하루도 안 돼서 외조부께 이야기한 거야?


“네. 제가 꺼냈어요.”

“네가 부쩍 전하와 가까워진 건 나도 잘 안다. 두 사람이 비슷한 연배인 것도 잘 알고, 전하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며 내심 안심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렇다고 약혼 이야기가 직접 거론될 사이는 아니었어.”

레안드로는 묵직한 무게감을 풍겼다.

그는 가문의 가주 자리에 앉은 어른이다. 그 무게감이 가벼울 리 없다.


“내가 납득할 이유를 말해줘라.”

레안드로는 고요한 눈길로 샤를로프를 살폈다.


“네가 이유 없이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건 안다. 이유를 이야기해라. 그냥 이야기했다는 그딴 이유일 리 없으니, 네게 직접 듣고 싶다.”

레안드로는 짧은 시기에 제 손녀딸을 파악했다.

저 눈은 당장 눈앞만 보는 게 아니었다.

세월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너는 세월을 다 얻어맞은 이들이 지을 법한 눈짓을 짓고 있구나.

레안드로는 샤를로프에게서 괴리감을 느꼈다.

샤를로프에게는 저 나이에 설명하기 힘든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창백한 낯빛은 울분에 젖었고, 암울하게 가라앉은 눈은 적당한 거리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내가 너를 어쩌면 좋으냐? 나는 너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코제트 그 애가 그 꼴이 났는데……!”

너까지 망가지면 어떡하냐?

그 삶이 망가지면 어떡하느냐고. 레안드로가 묻는다.


“망가지지 않아요.”

샤를로프는 뜸을 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할아버지.”

샤를로프가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레안드로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저는 그분 곁에 서고 싶어요.”

샤를로프는 음울하게 젖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너무 많은 걸 잃었어요. 제 손으로 어머니 묘지를 덮어드렸고, 제 손으로 어머니 무덤을 파냈고, 유골함을 꺼냈어요. 손톱이 다 까지도록 흙을 파냈고, 그 속에서 꺼낸 유골함을 끌어안고 윈저가를 찾았어요.”

“뭘, 어쨌다고?”

저 아이가 제 친모의 무덤을 파내서 유골함을 챙겼단다.

저 아이는 무슨 심정으로 이곳에 섰던가? 지금 무슨 심정으로 저런 눈짓을 짓는단 말이냐?

레안드로는 탁자를 박찼다.


“어머니 병간호도 제가 도맡고, 꾸역꾸역 버텼습니다. 그런 내게……. 남은 게 어머니 유골함 하나였어요. 그 집구석에서……! 내게 남겨준 게 친모의 유골 하나였단 말이에요.”

사람의 죽음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아니냐고?

내연녀와 그 사생아가 무덤을 짓밟는 꼴을 보고,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의 죽음을 모욕하는 꼴을 지켜봤다.

그런 나더러 도대체 뭘 더 참으란 말이냐?


“그분 곁에 서야겠어요.”

지난 죽음이 억울해서라도 그분 곁에 서야겠다. 그분 곁에서 저들 모두를 내려다보며.


“가장 높은 곳에서.”

그들의 무덤을


“밟고 올라서야겠어요.”

샤를로프는 제 가슴을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충분한 답이 됐나요?”

레안드로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는 저분의 뭘 믿는 거냐? 뭘 믿고 너를 내던졌어?”

“단단하신 분이에요.”

“곧 폐위된다는 말이 나오는 분이다.”

“폐위되어도 좋아요.”

조금의 의심도 없다. 저분은 황위에 앉는다. 그리고 칼을 빼든다.


“튜텨가는 저를 파양했고, 저는 이제 부모가 없어요.”

“샤를, 너……!”

“다행이에요. 제 약혼 소식에 아버지가 난입할 일은 없으니까요.”

화난 친부가 길길이 날뛰며 제 딸을 내놓으라 해도 이제는 권한이 없다.


“너는……. 네 아비에게 칼을 꽂을 생각이냐?”

레안드로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이었다.

가문 하나를 이끈다는 건 그만한 노련함이 필요했다.


“먼 길을 내다봤구나.”

샤를로프는 배시시 웃었다.


“예전에 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본인은 할 만큼 했으니, 내 살길은 나더러 알아서 찾으랬거든요.”

“그놈은 뚫린 입이라고……!”

“각자 살길은 알아서 찾는 거죠. 그분 사정 따위 내가 고려해야 할 영역은 아니에요.”

이 악의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어디서였을까?

아, 빌어먹을 친부가 어머니께 죽어버리라 할 때였던가?

아니다. 그때도 아니야.

내 죽음 앞에서였지.


‘두 모녀가 나란히 개죽음당하는군. 네게는 유감이야.’

 
모겐스. 네 입으로 이야기했지.

그 죽음은 개죽음이 됐다고.


“똑같은 실수 두 번은 안 해요.”

샤를로프는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 * *

샤를로프는 어두운 복도를 지났다.

복도에 그림자가 지고, 그녀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엿들었어요?”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커다랬다.

굳이 등 뒤를 돌아볼 것도 없다. 벤하민은 이미 지척에 다가왔다.


“뭐라고 이야기하나 궁금해서.”

“어때요?”

“내가 폐위된다는 이야기는 진실이야.”

샤를로프가 혹시나 흘려들었을까. 벤하민이 한 번 더 되짚었다.


“당신이 폐위된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폐태자가 된다면 저도 폐위되겠죠.”

“그러다 죽는다면, 그것 또한 개죽음이야.”

샤를로프는 웃어버렸다.


“그렇다면 내 목숨이 거기까지겠죠.”

그렇다고 이 목숨을 쉽게 놓겠다는 뜻도 아니었다.

당신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겠지. 그런 당신을 직접 겪은 게 나였어.


“그렇다고 뒤로 도망갈 길은 없고요.”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대로 후회 없겠어?”

“내 걱정할 것 없어요.”

샤를로프는 은은히 웃었다.

벤하민도 탁한 미소를 짓는다.

전생의 폭군.

당신은 황위에 오른다.

모두를 물어뜯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서 적대세력과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칼을 휘둘러라.


“물어뜯고 빼앗아요.”

그녀가 바라는 건 하나다.


‘좋게 끝낸다고?’

누구 좋으라고 좋게 끝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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