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재주껏 버텨 봐.
(16/51)
16. 재주껏 버텨 봐.
(16/51)
#16. 재주껏 버텨 봐.
2023.04.25.
두 외삼촌은 선물 받은 손수건을 보며 감탄했다.
“확실히 자수에는 솜씨가 없구나. 네 엄마도 손재주는 없었다. 너무 낙심하지 말아라.”
“아스터 너는 네 조카에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샤를로프가 매듭을 단단히 짓자, 세자르가 심오한 표정으로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언제 준비했냐?”
“사냥대회 며칠 전부터 준비해 뒀었어요.”
두 분 모두 말없이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두 분께 드린 손수건 외에도 하나 더 남았다. 이건 벤하민의 몫이었다.
“갖고 싶은 사냥감이 있느냐?”
“어차피 태자 전하께 다 빼앗길 듯싶은데요?”
샤를로프가 웃으며 대꾸하자 세자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냥터 안에 희귀한 파랑새를 풀어뒀다더구나. 잡아다 줄까?”
“기회가 된다면요. 괜히 숲 깊은 곳에서 무리하진 마세요.”
가볍게 나누던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 지었다. 두 외삼촌은 기사단을 점검하느라 분주했다.
사냥터는 전반적으로 어수선했다.
“검은 늑대를 사냥터에 풀어놨다던데 들었소?”
“일반 늑대보다 체격이 두 배는 더 크댔나?”
“검은 늑대가 다가 아니야. 흑표범과 백표범도 잔뜩 풀어놨댔으니 목숨 관리 잘해둬. 방심하다가 사냥감한테 목덜미 물어뜯기는 일 없도록 하란 말이야.”
이번 사냥터에는 희귀한 사냥감들도 잔뜩 풀어뒀다.
검은 늑대와 흑표범 백표범, 외에도 백담비 적담비와, 백호와 흑호도 있었다.
담비처럼 작은 소동물은 초입에 있고, 표범은 중간쯤, 늑대와 호랑이는 숲 깊숙한 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특히나 폰트리아 숲에 서식하는 흑곰도 있댔으니, 어중간한 마음으로 숲 깊숙한 곳에 잘못 갔다간 곰의 먹잇감이 되기 좋았다.
“살벌하네요.”
샤를로프는 입술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아스터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호승심에 죽고 사는 게 기사이다. 이대로 막사로 돌아가냐?”
“아직 손수건 하나가 더 남았어요. 이것만 마저 챙겨 드리고요.”
맞은편에서 벤하민이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태자 전하께도 다녀올게요.”
벤하민은 적색 제복 차림이었다. 황실의 문양을 수놓은 견장에는 흰 망토가 걸려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추장스럽지만, 일단은 공식행사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샤를로프와 일행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한테 줄 거 없어?”
“어떤 거요?”
“잘 고민해봐. 너는 내게 줄 게 있어. 네게 없다면 윈저가에 깊은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어지는데…….”
샤를로프는 벤하민의 손목을 이끌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숨었다. 막사 뒤쪽으로는 비교적 한산했다.
“샤를.”
벤하민이 잡힌 손목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손을 겹쳐 왔다.
“언제까지 잡고 있으려고?”
“사냥대회 곧 시작하잖아요.”
“그래서 나랑 손잡고 같이 가자는 건 아닐 거고.”
벤하민이 잡힌 손목을 빼냈다. 부드럽게 손목을 감싸서 밀어내는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그의 손짓은 가벼웠고 표정에 깃든 감정도 무던했다.
벤하민은 제복 바지에 검집을 고정하고, 거기에 한쪽 팔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그는 느릿하게 샤를로프를 살폈다.
“석궁은 어디 놔두고?”
“카타리나에게 잠시 맡겼어요.”
벤하민이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리며 되물었다.
“석궁 연습은 해뒀어?”
“네. 조작법도 그럭저럭 익숙해졌어요.”
“그럭저럭으로는 안 돼.”
그가 경고하듯 하는 이야기는 단호했다.
“싫어하는 놈의 머리를 맞춘다는 기분으로 방아쇠를 당길 때는 과감하게.”
“……뭘 맞춘다는 기분으로요?”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뺨을 은근히 만졌다.
“어떤 사냥감을 가져다 줄까? 사냥대회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네가 있다면 괜찮아. 사냥감을 물어다 줄게.”
“무슨 말씀을…….”
“기다려. 샤를.”
벤하민이 샤를로프의 목덜미에 뺨을 가져다 댔다. 얕은 숨이 목덜미에 닿고 흩어졌다.
샤를로프가 어버버 하는데, 벤하민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짧은 거리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오묘한 숨이 흐르고, 벤하민이 귓바퀴에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그럼 사냥대회의 여왕은 네가 될 거야. 샤를.”
벤하민이 붉은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읊조렸다.
“그만 좀……. 벤하민 간지러워요.”
“간지러움을 많이 타나 봐.”
“귀에 바짝 대고 숨을 뱉는데 그럼 어떡해요?”
“샤를은 상냥해.”
“당신한테 줄 게 있어요. 잠시만요.”
샤를로프는 마지막 남은 손수건을 꺼내서 벤하민의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직접 자수를 놓았어?”
“…….”
“보잘것없는 솜씨를 가졌어, 샤를.”
벤하민이 손수건에 수놓은 자수를 보더니 작게 웃었다.
“싫어하는 놈의 머리를 맞춘다는 기분으로 방아쇠를 당기랬던가요?”
샤를로프는 카타리나를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카타리나, 석궁 가져와.”
“샤를, 그건 반역이다.”
벤하민이 그녀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직접 묶어줘.”
샤를로프는 벤하민의 검집에 손수건을 묶어주었다.
* * *
사냥터는 한산했다. 기사단과 귀족들이 사냥터로 떠났다.
“다들 떠났네.”
“금방 오실 겁니다.”
샤를로프는 빈 집결지를 내려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그쪽이 아닙니다.”
샤를로프는 불현듯 걸음을 멈춰 세웠다.
“길을 잘못 왔나?”
반대쪽으로 왔구나. 샤를로프는 눈짓으로 길을 되짚으면서도 되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무언가가 발목을 붙들고 땅밑으로 잡아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마님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밖에서 아이를…….”
길을 잘못 왔더라니, 튜텨가 막사 쪽이었다. 튜텨가 하녀도 드문드문 보였다.
“돌아가자. 카타리나.”
샤를로프가 막 돌아가려던 때였다. 그녀는 저들의 다음 말에서 숨을 멈췄다.
“가주님께서 죽은 마님 무덤까지 파헤쳤잖아. 일단은 흙을 덮긴 했어도…….”
“조용히 좀 해! 누가 들을라!”
샤를로프의 표정이 악귀처럼 구겨졌다.
‘누가 누구 무덤을 파헤쳐?’
물론, 어머니 유골함은 거기 없다. 저 무덤에서 직접 유골함을 꺼낸 게 누구인데…….
그녀가 이 손으로 직접 무덤을 파헤쳤고, 어머니 유골함을 끌어안고 외가댁으로 향했다.
샤를로프는 제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머릿속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고개를 홱 쳐들고, 나무껍질을 손톱으로 긁었다. 나무껍질이 바스락대며 부스러졌다.
“무덤을 파…….”
아버지가 무덤을 파헤친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다.
유골함을 덫으로 놓고, 내 목덜미를 잡을 생각이었겠지. 지난 삶에서, 내 존재로 어머니 삶을 옭아맸듯 말이야.
“너희는 나를 기어코 끌어내는구나.”
샤를로프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튜텨가의 막사 쪽으로 걸음을 디뎠다.
“아, 아가씨?”
“아가씨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하녀들이 샤를로프를 막아 세웠고.
“비켜라.”
카타리나가 검집으로 녀석들을 밀쳤다.
“잠, 잠시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 되는……!”
천막을 손으로 젖히며 들어가자, 곱슬한 갈색 머리칼을 늘어트린 귀부인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웬일인가요?”
“또 뵙네요, 부인.”
“내가 정말 깜빡 속아 넘어갔지 뭐예요. 그 댁 아가씨인 줄 못 알아봤잖아요?”
클로에가 튜텨가의 막사에서 입가를 가리고 웃고 있었다.
아버지의 내연녀이자, 어머니 자리를 꿰찬 여인이었다.
“모두 나가라.”
클로에가 자연스럽게 하녀들을 물렸다.
“내 의붓딸 얼굴 좀 볼까요?”
샤를로프는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카타리나 나가 있어.”
샤를로프가 밖을 턱짓하자, 카타리나가 막사 입구를 지키고 섰다.
“내 딸아이니 말은 놓아도 될까? 가주께서는 내가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던데, 이 엄마도 오롯이 너를 품을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하잖니?”
죽을 자리를 못 보고 달려드는 부나방이 내 앞에서 날개를 퍼덕인다.
“그 애 명줄이라도 부지하려면 똑똑히 들어둬.”
애석하게도 지금 당장은 네 날개를 꺾을 마음이 없다.
“한 번만 더 내 엄마라거나 딸아이라는 호칭을 들먹였다간, 내가 당신을 산 채로 묻어버릴 테니 처신 똑바로 해.”
엄밀히는 남이다. 남보다도 더한 남이다. 양육권 마저 포기한 아버지께 무슨 가족 노릇을 기대한다고.
“내가 왜 이러는지 조금도 이해하기 힘들 거야. 내 행동에 이유 따위 찾지 못할 테고, 이해를 바라는 것 또한 아니야.”
샤를로프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덤에서 기어 나온 나를 이해해 달라는 건 내 욕심이잖아.”
튜텨가를 잘라내려고 마음먹었는데도, 당신들은 왜 계속 내 앞에서 기웃거릴까? 내가 끊어낸다고 끊어냈는데, 아직까지도 왜 이어져 있을까?
샤를로프가 걸음을 디뎠다.
당신은 짐작도 못 해. 죽음 속에서 허우적대던 아이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괴롭게 버둥댔다고.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튜텨가를 다시 찾아갔던 날.
내 친모의 무덤을 파헤친 당신들이 거기 있었잖아. 모녀는 그렇게 죽었다.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다 너덜너덜 찢겨 죽였다.
“왜, 그랬어?”
“뭘?”
“왜, 왜? 도대체 왜 그랬어?”
“오지 마.”
“…….”
“가까이 오지 마!”
클로에가 발악하듯 이야기하고, 밖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돌아왔다.
“부인?”
샤를로프는 눈시울을 붉히며 속삭였다.
“손에 쥔 것 잘 움켜쥐고 버텨.”
저 집구석에서 더 일찍이 나왔어야 했다. 더 일찍이 나왔다면 누군가의 비참한 죽음을 막았을지도 모른다.
샤를로프에게 튜텨가란 지난 후회의 흔적들이었다.
내가 태어난 사실이 누군가에게 죄악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줬다면…….
‘엄마를 그렇게 잃지도 않았어요.’
우습다. 우스워서 눈물이 다 난다.
“오지 말란 말이다!”
클로에가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찻잔을 던졌다. 찻잔은 카타리나의 검에 닿아서 깨졌다.
검에 맞고 깨진 유리 파편이 샤를로프의 뺨을 벴다. 그녀는 느릿하게 뺨을 만지작거렸다.
“아파.”
쓰라리다.
“아가씨!”
어머니. 어머니. 이들은 나를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합니다.
벤하민 당신이 이야기했던가요. 눈앞에 누가 거슬리거든, 싫어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머리를 조준해 쏴버리라고.
“카타리나. 석궁 가져와.”
“…….”
“석궁 내놓으라고.”
석궁에 총탄을 장전하고 그대로 과녁을 조준했다. 샤를로프는 클로에의 머리에 초점을 맞추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관자놀이를 빗겨나간 총탄이 맞은편의 도자기에 꽂혔다.
쨍-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도자기가 깨져서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몹쓸 손버릇 어디 한 번 다시 도져 봐. 머리에 총탄을 박아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