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비 맞은 강아지가 됐어.
(18/51)
18. 비 맞은 강아지가 됐어.
(18/51)
#18. 비 맞은 강아지가 됐어.
2023.05.02.
흑곰이 땅을 박차고 울부짖었다.
‘우어어어!’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리고, 웬 흑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시커먼 악귀 같았다. 붉은 안광이 번뜩이고, 한쪽 눈은 찢어져서 더 섬뜩했다. 집결지에는 비상상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기사단이 모여들었다.
“이, 이게 무슨 소란이요!”
흑곰이 입을 쩍 벌리고 침을 뚝뚝 흘렸다. 누군가 외쳤다.
“이 새끼 사람 먹는 놈입니다!”
“목을 노려라! 흑곰 이빨에 찢겨 죽기 싫으면……!”
샤를로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귀가 먹먹해지고, 고요한 세상에 홀로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빗소리에 모든 게 묻혔다.
저 아래는 아비규환이었다.
흑곰이 아가리를 벌리고 고개를 처박았다. 곰 아래 깔린 사내가 놈의 입속에 칼을 찔러 넣고 울부짖었다.
“여기서 사망자는 없었는데…….”
샤를로프는 석궁에 총탄을 장전했다.
솨― 빗소리에 총성이 묻혔다.
총탄이 곰의 머리 정중앙을 꿰뚫었다.
“엉망이구나. 모두.”
샤를로프는 총탄 한 발 한 발에 울분을 담아냈다.
하나에 애도를 담고, 둘에 슬픔을 담고, 셋에 미련을 담는다.
전생에 죽어버린 ‘나’ 샤를로프에게 보내는 애도이자 슬픔이며 미련이었다.
총성이 세 번 연이어 울렸다. 숨 멎는 정적이 이어졌다.
아니다. 이건 샤를로프에게만 허락된 정적이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빗줄기가 사납게 쏟아졌다. 빗물을 먹은 머리칼이 허리 아래로 흘러내렸다.
“감기 걸립니다.”
카타리나가 우산을 들고 섰다.
“쓰십시오. 비 때문에 시야가 흐릿합니다.”
“…….”
“비가 오잖습니까.”
“너는 이상해.”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미련하다고 혼날 줄 알았어.”
“그런 부분은 제 권한 밖입니다.”
카타리나는 제 아가씨에게서 서글픈 울분을 느꼈다. 응어리진 감정들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뭐냐? 이건 뭐란 말이냐?’
제 아가씨는 나약하지만 단단했다. 여리디여려 보이지만 꼿꼿하고 굳셌다.
카타리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은 어떤 말이라도 좋다. 이 아가씨의 의식을 붙잡아두는 게 우선이었다.
“흑곰도 움직임이 둔해졌군요”
“……그런가?”
“석궁 솜씨가 좋으십니다.”
“응. 여분 총탄도 다 썼어.”
“저 정도는 근위대가 해결할 겁니다.”
“…….”
“무리하지 마십시오. 몸도 차갑습니다.”
샤를로프는 신음하듯 앓았다. 숲 안쪽이었다.
“……왔다.”
“누가 말입니까?”
샤를로프는 석궁을 쥔 팔을 떨궜다. 몸의 힘이 맥없이 풀렸다.
“벤하민.”
빗물이 머리를 적셨다. 점점 더 고요해진다.
벤하민은 흑곰의 등에 올라타서 놈의 목을 벴다. 가죽이 질기고 단단했다. 그는 눈매를 좁히고 칼날을 비틀었다. 흑곰이 몸을 옆으로 구르고, 벤하민은 등 뒤에서 뛰어내렸다.
빗물로 질펀해진 흙탕물이 튀었다. 벤하민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사람은 아직 안 먹었나?”
“네. 전하!”
“그럼 다행이군.”
흑곰이 날뛰던 와중에도, 수습기사 몇몇이 흑곰에게 얻어맞은 것만 제외하고는 피해도 적었다.
“부상자는 밖으로 빼라.”
세자르가 땅밑에 널브러진 부상자들을 끄집어냈다.
“흑곰이 왜 여기 있습니까?”
“짐승 무리가 한 번씩 내려오는 건 자주 있던 일이잖아.”
벤하민이 부상자의 목덜미를 잡고 세자르에게 던졌다.
“전하. 부상자는 조심해서 다루십시오.”
“우리 애는요? 우리 애는 어디 있습니까?”
아스터는 뒤늦게 나타나서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샤를로프야! 어디 있느냐!”
독기에 찬 짐승은 마지막 걸음을 디뎠다.
‘우어어어어!’
죽어가던 곰이 몸을 납작 낮췄다.
“끝났군.”
벤하민이 흑곰의 목덜미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가 손목에 힘을 줘서 칼을 비틀자, 칼끝이 안쪽에서 비틀렸다. 벤하민이 손끝으로 칼등을 툭 누르자 그대로 숨이 끊겼다.
“부상자는 다 옮겼고.”
벤하민이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망자는?”
세자르가 검을 갈무리하고 답했다.
“없습니다. 다들 부상자 수준으로 끝났습니다.”
“형님! 우리 애가 안 보입니다!”
“막사 쪽에 있겠지…….”
“아이가 혹시나 휘말렸으면 어떡합니까!”
“아스터 말 끊지 마라. 막사 쪽으로는 피해가 없는…….”
“샤를로프! 샤를! 어디 있느냐!”
“진정 좀 해라. 비도 오는데, 아이가 설마 밖에 있었겠느냐?”
벤하민이 아스터를 흘끔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막사 쪽으로 사람을 보낼…….”
말끝을 흐리던 그가 눈매를 좁혔다. 곰의 사체가 이상했다. 곰의 머리에 난 총상. 이건 총탄 자국이었다.
“또 무리했구나.”
벤하민은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야 할지 잘 안다는 듯. 단번에 샤를로프를 찾아냈다.
“저기 있군.”
벤하민이 검을 내려놓고 머리를 쓸어올렸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샤를.”
샤를로프는 빗속에서 작게 웃었다.
“왜 위험하게 여기 있어?”
“잠시 걸었어요.”
“소동물이나 사냥하랬더니, 곰이 먹음직스럽게 소화해둔 샤를을 맞이할 뻔했어.”
벤하민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와 샤를로프 앞에 섰다. 조금은 속상해하는 것도 같다.
“비 맞은 강아지가 됐잖아.”
벤하민은 온통 젖은 샤를로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여기 세워놨어?”
빗소리가 솨― 하고 울렸다.
두 외삼촌은 빗물에 젖은 그녀 모습에 질색하며 외쳤다.
“샤를! 너 꼴이 왜 그러느냐!”
* * *
“모두 비부터 피해라!”
사냥대회는 일사불란하게 마무리됐다. 그 순간까지도 빗줄기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또르르- 빗물이 눈썹을 타고 흘렀다.
‘외삼촌이 그 정도로 화내는 건 처음이었나?’
아스터와 세자르가 막사에 다녀갔다.
‘이 무지렁이처럼 쓸모없는 것들! 우리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뭣 하던……! 이게 뭐냐! 아이 얼굴이 반쪽이 됐잖느냐! 이 연약한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읍! 형님, 잠시만요. 왜 그러십니까!’
‘전하. 우리는 사냥터부터 수습하겠습니다. 아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비에 젖은 몸이 덜덜 떨렸다. 샤를로프는 한기에 넋을 빼놓았다.
“이리 와. 샤를.”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이끌었다.
“감기 걸리겠어.”
“네?”
“다 젖어서는. 이게 뭐야. 응?”
벤하민이 마른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아냈다.
“미련하게 뭐 하는 짓이야?”
“살살 좀 닦아요.”
“이런 미련한 것 같으니라고.”
“벤하민 살살요.”
“우산은 뒀다가 어디 쓰고. 온통 다 젖어서 안색은 창백하고, 낯빛은 어둡고.”
벤하민이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꾹꾹 눌렀다. 샤를로프가 버둥거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데, 벤하민의 손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다친 곳은 없어?”
“괜찮아요.”
“총성이 들려서 놀랐잖아.”
“흑곰이 사람을 먹으려고 하는 거 같아서……. 곰이 사람도 먹어요?”
“곰도 육식이니까. 저놈은 몇 놈 먹은 것도 같고.”
샤를로프는 손을 뻗어서 수건을 끌어 내렸다.
“샤를 가만히 좀 있어.”
“내가 닦을게요. 수건은 저한테 주세요.”
벤하민이 낮게 숨을 터트렸다.
“이마가 뜨거워.”
샤를로프가 멈칫하는데, 벤하민이 이마를 맞대고 숨을 뱉었다.
“얼마나 서 있던 거야?”
“잠깐요. 벤하민…….”
“물속에 담갔다가 꺼낸 것 같잖아.”
벤하민은 미소 지으며 수건을 끌어 내렸다.
“잔뜩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했더니.”
숨을 길게 내뱉던 그가 속삭였다.
“속상하잖아.”
하녀가 천막 입구에서 목을 큼큼대며 인기척을 냈다.
“아가씨 여벌 옷 가지고 왔습니다.”
하녀가 뒤늦게 갈아입을 옷을 가져 왔다. 젖은 옷이 점점 무거워지던 참이었다.
샤를로프가 젖은 옷을 주섬주섬 벗으려는데,
“안 나가요?”
벤하민이 그런 샤를로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붉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자, 벤하민도 그제야 떠났다.
“아이고! 아가씨 어쩌자고 이런 모습으로……!”
하녀들은 서둘러 젖은 옷부터 벗겨냈다. 온통 젖어서 무거워진지라, 혼자서는 꼼짝도 하기 어려웠다.
“두 분께서도 걱정 많으셨습니다. 미친 흑곰이 날뛰는데 혹시나 아가씨가 휘말렸을까 봐서.”
“다치지 않았어.”
“않았어도 비에 홀딱 젖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샤를로프가 여벌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자 비도 그쳤다. 공기에서는 습한 비 냄새가 났다.
샤를로프가 물웅덩이를 구두로 살포시 딛자 웅덩이에서 물결이 일렁였다. 천천히 걸음을 딛던 그녀는 그대로 휘청거렸다.
‘좀 어지럽나?’
석궁 몇 번 쐈다고 어깨가 뻐근했다. 팔뚝도 아프고. 전생에도 그렇고, 이생에도 건강하기는 글렀다.
* * *
숲 입구는 지난 습격으로 엉망이 됐다.
“숲에서 흑곰이 빠져나온 것 같은데, 다른 피해는 없었나?”
“큰 피해가 벌어지기 전에 마무리됐습니다.”
벤하민은 고요해진 일대를 눈으로 훑고 웃었다.
“작은 소란이 있었으나 잘 마무리된 것 같고.”
“…….”
“이번 대회도 이대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군.”
벤하민은 주변을 찬찬히 훑고 이내 샤를로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것으로 오늘 사냥대회는 끝내지.”
샤를로프의 뺨에 보조개가 작게 파였다.
“다 됐나?”
벤하민은 거추장스러운 과정은 모두 생략한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저 애를 담요로 말아서 마차에 집어 넣어놔.”
아스터도 뒤늦게 샤를로프를 발견했다.
“저, 저 미련한 것!”
벤하민은 사냥터를 수습한다고 떠났다.
아스터는 그런 벤하민을 배웅하고, 곧장 달려와 샤를로프를 담요로 꽁꽁 감쌌다.
“이 아이를 당장 마차에 집어넣어라! 아이 표정이 이렇게 창백한데, 밖에 데려다 놓으면 어쩌자는……!”
아스터가 악귀처럼 표정을 구겼다.
“외삼촌?”
아스터가 샤를로프를 담요로 감싸서 안았다.
눈앞이 한순간에 깜깜해졌다. 시야가 가로막히고, 아스터가 그녀를 두 팔로 단단히 끌어당겼다.
“저놈 저 자식!”
샤를로프는 눈을 끔뻑거렸다.
“외삼촌 잠시만…….”
샤를로프가 담요를 끌어내리려는데, 아스터가 큰 손아귀로 머리통을 부둥켜안았다.
“외삼촌 숨 막혀요.”
“샤를. 가만히.”
“저 괜찮아요.”
“제발 가만히 있어라.”
하인이 당혹스럽게 아스터를 만류했다.
“아스터 님 밖입니다.”
“그래서!”
“표정을 좀 더 온화하게…….”
“온화? 온화하게? 얼어 죽을 놈의 온화하게다. 내가 여기서 칼 들고 저놈한테 뛰어들지 않은 부분에 손뼉 치면서 감탄하거라. 내가 그만큼이나 온화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곧 누군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