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뼈를 깎아오겠다. (19/51)


#19. 뼈를 깎아오겠다.
2023.05.05.



“딸아이와 잠시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뭣 하러요?”

표트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 됩니다.”

아스터는 단호하게 한 번 더 거절했다.


“숨 막혀요. 외삼촌.”

샤를로프는 꽁꽁 싸매둔 담요부터 끌어 내렸다. 그녀가 말간 낯으로 고개를 들자, 아스터는 난처한 표정으로 눈매를 찌푸렸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으냐! 절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저놈과 말 섞는 꼴 따위 절대 못 본다!”

“숨 막힌다니까요.”

“네가 숨이 막히더라도 저놈은 안 돼.”

하인들은 떨떠름하게 상황을 살폈다.


“세자르 님을 불러오겠습니다.”

가주께서 자리를 비웠으니, 대리인인 세자르 님부터 불러오는 게 좋겠다.

하인들 몇몇이 세자르를 찾으러 떠나려던 때였다.


“아스터. 과보호는 좋지 않다.”

세자르가 이들을 먼저 찾아왔다.


“세 살배기 아이처럼 감싸면, 샤를로프가 민망하지 않겠냐?”

그가 넓은 등으로 샤를로프를 가리는데, 절제된 무게감이 흘렀다.


“우리 애한테 무슨 용건입니까?”

“……우리 애?”

“제 호칭에 문제 있습니까? 우리가 아이를 잠시 홀로 뒀다지만, 엄연히 보호자가 있는 애 앞에서.”

세자르는 입술을 나른하게 달싹였다.


“아직도 저 아이의 보호자라도 된다는 듯 행동하는데, 우리가 퍽 불쾌해지려는군요.”

그만 기웃대고 꺼져라. 단 몇 마디로 축객령을 내렸다.


“샤를로프!”

표트르는 고개를 획획 내젓고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그 사람한테 석궁을 쏜 게 사실이냐?”

“그쪽이 이야기하던가요?”

“네가……. 내가 알던 아이가 맞느냐?”

표트르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네가 요즘 달라졌어도.

인간 본질이라는 게 대뜸 바뀌는 게 아니다.


“어째서?”

“어째서라고 물을 게 아니죠.”

표트르는 말을 대뜸 멈췄다. 숨이 멎은 듯한 정적이 오고 갔다.

서로를 보는 눈은 똑같았다.

무엇 하나 달라진 곳 없고, 서로를 향한 감정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애정을 갈구하던 딸아이의 눈동자는 텅 비었고, 무언가가 서서히 엇갈렸다.

표트르는 무언가 퍼뜩하고 떠올랐다.


“그 무덤, 판 게 진짜 너냐?”

불신이 확신이 되던 때.

표트르는 등줄기를 훑는 오싹한 한기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네 엄마를 네가 직접 그랬다는 게…….”

표트르는 텅 빈 눈을 보고 확신했다.


“사실이었군.”

아스터가 샤를로프를 등 뒤로 숨기더니, 벌레라도 보듯 혐오스럽게 표정을 구겼다.


“다 지껄였나?”

“이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그 집안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란 말이오! 비록 내 사정이 있어서 파양했어도, 나는 이 아이를 낳은 아버지입니다. 내가 이 아이를 이십 년 가까이 보호해 왔던……!”

표트르는 말을 멈추고 뒷걸음쳤다.

무언가 서서히 내려앉는다. 발아래서 흙이 질척하게 엉겼다.

표트르는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나를 왜 벌레 보듯 보느냐.

왜 사람을 벌레 보듯 봐.

까마귀가 귀가 저릿하도록 울었다.

아스터는 눈매를 좁히며 중얼거렸다.


“사냥터도 아닌데, 짐승들이 아직도 짖어대는군. 내가 여기서 짐승들 입단속까지 해야겠나?”

표트르는 순간 혼이 빠져나갔다. 악에 받쳐 턱 끝까지 올랐던 무언가가 맥없이 꺼졌다.


“지금 누구한테 하는 이야기입니까……?”

“사냥터라고 짐승들 울음소리가 들리니 어수선하군요. 까마귀가 짐승들 사체 냄새를 맡고 몰려든 모양입니다.”

세자르는 어수선한 사냥터를 한번 둘러보고 뒷짐을 졌다.


“오늘은 여기서 갈라서는 게 어떤가요?”

표트르는 어금니를 깨물고 답했다.


“오늘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나중에 때가 된다면 다시 찾아오지요. 너는 내 아이고, 나는 너를 되찾으러 오겠다.”

표트르는 저렇게 해두고 떠났다. 세자르는 고개를 돌려 샤를로프를 흘끔 하고 내려다봤다.


“너 괜찮으냐?”

아스터는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너희 부녀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어.”

샤를로프는 은은히 웃어주었다.


“저도 오늘은 지치네요.”

겉으로는 웃어도 속에서는 서서히 삐걱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어머니 무덤을 팠대요.’

모두가 미쳐가는 것 같다. 나도. 아버지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늦은 밤.

딸아이가 친모의 무덤을 판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죽음이 너무나 선명했다.

이 손으로 죽음을 만지고 더듬었다. 어머니를 다시 묻어드리면서 그 죽음을 오롯이 품었다.

애정에 굶주렸던 딸아이는 죽었다.

샤를로프는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 죄송해요. 억울함과 울분을 지금은 묻어둘게요. 아주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꼭, 저들을 어머니 무덤 앞에 데려다 놓을게요.

내 살을 내어줬다.

그러니 나는 네놈 뼈를 깎아오겠다.


 

* * *



“꼭, 다른 아이라도 보는 것 같군.”

표트르는 앓듯 중얼거렸다.


“설령 내가 버렸어도, 내가 저 아이 생부다.”

제 존재감을 보인 적 없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한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보라고.

제 친모 병간호를 들며 성숙하게 지낸 건 알았어도.


“제 엄마 무덤을 파헤쳐서 거기서 유골함을 꺼낼 마음을 먹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건 꼭.

저승에서 사자(死者)가 기어 나왔다는 말처럼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 * *



“방금 전에는 비에 젖은 솜뭉치 같더니, 이번에는 눈물 먹은 솜뭉치냐?”

아스터가 끌끌대며 혀를 찼다.


“아아.”

샤를로프는 멍하니 고개를 떨궜다. 눈가는 이미 젖어 들었다. 눈시울은 먹먹하게 물들고 점차 젖어 들지언정 눈물은 끝끝내 흐르지 않았다.


“괜찮으냐?”

아스터는 머뭇대던 손길로 팔을 뻗었다 접길 반복했다. 담요로 샤를로프의 머리를 덮고 팔로 감싸자, 아이가 그대로 폭 안겼다.


“네 엄마는 편히 자고 있다. 네가 커가는 모습을 누구보다 기쁘게 보고 있을 거야. 물론! 약혼자는 마음에 안 든다고, 금쪽같은 제 딸아이에게 저런 망나니를 붙여두냐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이다.


“네가 잘 지낸다면 그거로 됐다. 샤를. 샤를. 괜찮아. 괜찮다. 모두 다 괜찮아질 거야.”

누구보다도 화났을 윈저가가 샤를로프를 감싼다. 그런 사실이 미치도록 죄송스러웠다.


“괜찮으냐? 샤를?”

“샤를로프. 왜 그러냐?”

차례로 아스터와 세자르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 있었냐?”

“왜 그러는지 말로 해줘야 알지.”

아스터가 샤를로프의 턱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공허한 눈이 마주치고, 아스터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무슨 아이가…….’

저런 눈짓을 짓는단 말인가?


“샤를, 어디 아프냐? 형님,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세자르는 뒷짐을 지고 샤를로프를 내려다봤다.

제 여동생을 빼닮은 외조카는 성격마저도 빼닮았다. 모질고 억세다.


“내 조카님께서는 이 숙부들 속을 단단히 썩이는구나.”

세자르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제 입으로 세 살배기 아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세자르 또한 샤를로프를 아이처럼 여겼다.


“샤를 너를 이해한다. 우리가 네 슬픔 또한 끌어안겠다. 그러니까, 네 아비에게는 미련 품지 마라. 네 가족은 여기 있잖느냐?”

샤를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속이는 게 아니다.

그저, 이들이 겪을 아픔을 줄여주고 싶다.


‘엄마. 조금만.’

우리 조금만 더 견뎌요.


“어디 아프냐? 응? 샤를 이야기해라.”

눈시울은 붉어지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먹먹했지만, 미소는 아름답게 퍼졌다.


“왜 그러냐?”

“괜찮아요.”

“샤를, 너 괜찮은 게…….”

눈이 까무룩 잠겼다. 샤를로프는 그대로 잠들었다.

* * *



“사흘이다. 사흘! 아니지. 오늘로 나흘이구나. 애가 나흘이나 의식이 없는데……!”

아스터가 윽박지르며 주치의를 독촉했다.


“아스터 님 일단은 진정을……. 아가씨 깼습니까?”

샤를로프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고.


“샤를? 깼느냐? 깼어? 깬 것이냐?”

“외삼촌.”

“정신이 드냐? 정신이 들어?”

“저 들려요. 한 번씩만 말씀하셔도 돼요.”

샤를로프는 침대를 더듬거리며 팔을 뻗었다. 손끝에 아스터의 옷자락이 감겼다.

그녀는 손가락을 뻣뻣하게 꼼지락댔다. 손끝의 미세한 감각을 세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천천히 물으셔요. 하나씩.”

“네가 며칠씩이나 의식 없이 잠만 자는데,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샤를로프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며칠이나 됐다고요?”

“나흘이다. 나흘!”

“시간이 많이…….”

“너는 왜 그 지경이 되도록 비를 맞고 서서.”

아스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샤를로프의 손등을 감쌌다.


“이 부주의한 녀석아.”

“벤하민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전하께서 사람을 똑똑히 봤어. 너는 네게 각박해.”

이 나이대 아이는 제 손가락에 박힌 가시 하나에도 벌벌 떤다는데, 이 아이는 그런 기색도 없다.


“린턴! 좀 더 꼼꼼히 살펴보아라!”

주치의가 샤를로프를 꼼꼼히 살폈다.


“감기몸살입니다. 아가씨께서 타고나길 몸이 허약했는데, 비를 너무 많이 맞았잖습니까? 지금은 회복된 것 같습니다.”

“회복된 게 맞다고?”

“일, 일단은.”

“샤를로프 저 아이 꼴을 보아라. 저게 어디 사람 얼굴이더냐? 어디 길가에 내놓은 아이도 아니고, 피죽도 못 챙겨 먹은 꼴이잖아.”

며칠 앓았다고 안색이 창백했다. 여동생이 죽고 남긴 유일무이한 흔적이다.

이 아이가 잘못된다면……. 아스터가 한 번 더 이야기하려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들겼다.


“가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녀가 레안드로의 방문을 알렸다.


“며칠 내도록 잠만 자더니 잘 잔 거냐?”

“네. 편히 잤어요.”

“남은 식구들 생각은 안 하고, 또 한 번 이런 무모한 짓 해보아라.”

너를 어쩌면 좋으냐. 내가 어쩌면 좋으냔 말이다. 제 엄마 피를 물려받았다고 제 몸 귀한 줄 모르는 건 마찬가지구나.


“열은 떨어졌고?”

“네. 지난밤보다는 확연히 떨어졌습니다.”

“고생했다. 샤를. 누구보다 네가 고생했어. 이젠 괜찮으니 쉬어라. 모두 괜찮다. 괜찮지 않더라도 내가 괜찮게 할 테니, 너는 쉬어도 좋다.”

무언가 한쪽 가슴을 꽉 막는 것 같았다.


“쯧……. 이 아이는 뭣 하러 앉혀 놓았어. 침대에 다시 눕혀라. 집사는 이 아이가 한동안 바깥출입을 못 하도록 단단히 살펴라.”

샤를로프는 절대안정을 이유로 며칠간 바깥출입을 금지당했다.


“할아버지?”

샤를로프는 반쯤 정신을 빼놓았다.


“너희는 내가 보호자라고 따라 보냈더니, 이 아이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데려왔느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린턴은 아이를 더 면밀히 살피고, 아이에게 필요한 약재가 있다면 이야기해라. 이 아이 기력 회복이 최우선이다. 약재는 모두 최상품으로 하고, 저 아이가 답답하다고 어디 나가려고 해도 안 된다. 이번에는 너희가 책임지고 살펴라.”

하녀 무리가 눈을 부릅떴다.


“저희가 잘 살피겠습니다.”

레안드로는 엄중히 이야기했다.


“샤를로프는 듣거라. 어른들 눈을 피해서 침실 밖으로 나왔다간, 네가 아니라 하녀들을 혼낼 테니 알아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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