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데리러 왔다, 샤를.
(22/51)
22. 데리러 왔다, 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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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데리러 왔다, 샤를.
2023.05.16.
“그 소식 들었는가? 폐하께서 임종을 앞뒀다는군.”
황제는 오랜 병상 생활을 이어왔다.
언젠가부터 광증을 앓더니, 죽은 선황이 보인다며 무덤을 파헤쳤다.
그 무덤을 파헤치고 무덤을 옮기더니,
황제는 그 뒤로도 서서히 미쳐가더니 이지를 잃었다.
눈과 귀를 막았으며,
광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시들었고, 신하들의 목을 하나둘 쳤다.
옳은 말을 하던 이들의 혀를 잘랐고 그 목을 벴다.
황제는 미쳤고 친족들은 부패했다.
중앙장로와 주요대신은 선황의 일가친척들이 자리했고.
영면궁 꼴만 봐도 그랬다.
영면궁은 선조의 유해를 모셔두는 곳이었다.
초대 건국왕의 유해를 여기에 묻고, 죽음을 기리며 위로한 곳이 영면궁이었다.
“황실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초대 건국왕께서 지금 황궁을 본다면 기겁하시겠군.”
영면궁을 지키던 보초기사는 앓으며 숨을 삼켰다.
황족으로서 위엄도 명예도 잃었다.
“쯧. 조용히 해라. 여기는 영면궁이다. 선황들의 묘비를 모셔두는 곳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나?”
“선황 폐하의 무덤이 빈 무덤인 걸 아나? 폐하께서 선황이 꿈에 나온다며, 무덤을 파헤쳐……무슨 소리 안 들렸는가?”
“빌어먹을! 그런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겁주려는 건가!”
영면궁 입구를 지키는 기사는 둘이었다.
“바람 소리였군.”
“날이 점점 추워진다고 바람도 사나워지잖아.”
“영면궁 당직은 왜 우리만 하나?”
“보통은 견습 딱지를 막 뗀 막내 기사에게 영면궁 당직을 맡긴다잖는가? 우리 아래로 기수가 들어오길 기다려야지 별수 있나?”
초대에는 명예스러운 자리였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쉿. 진짜 누가 온다. 조용히 해라.”
곧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태자 전하 아닌가?”
“전하를 뵙습니다.”
벤하민은 황궁을 홀로 걸었다.
기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벤하민은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말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하께서 홀로 영면궁을 보시려 한다. 뒤따르지 마라.”
로스켈라는 그런 벤하민의 뒤를 따랐다.
“전하, 어디로 가십니까?”
벤하민은 영면궁 묘지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의 생모는 처형되고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으며, 조부의 무덤도 없다. 묘비도 없다.
“영면궁이 많이도 비었군요.”
로스켈라가 넋 놓고 영면궁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무슨 짓을 해놨는지…….”
영면궁의 무덤을 파헤치고, 임시로 덮어둔 꼴이 처참했다.
“미쳐가는군요. 이걸 눈 뜨고 본 이들은…….”
“몇몇 이들은 죽었고, 몇몇 이들은 살았고.”
벤하민은 빈 무덤을 내려다봤다. 선황, 그의 조부의 무덤이었다.
“진혼제를 올릴 준비를 해둬라.”
죽은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
곧. 때가 도래한다.
* * *
[제도가 어수선하다. 그렇다고 네가 걱정할 일은 없다.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너도 잘 지내야 한다. 쯧쯧. 식사는 잘 챙겨 먹느냐? 너는 마음이 복잡할 때면 꼭 끼니부터 거르는 버릇이 있잖느냐?]
황성에서 우편엽서가 도착했다.
샤를로프가 휴양차 영지로 내려오고 시간은 두어 달이 흘렀다.
그녀가 제도를 떠나고, 제도에서는 황제가 임종을 앞뒀다는 소식이 퍼지며 급격히 혼란스러워졌다.
비록 임종을 앞뒀다는 황제는 5년간 목숨을 이어나갔지만.
‘이 끝도 온다.’
샤를로프는 편지를 펼쳐서 마저 다 읽었다.
[너는 또 코제트를 닮아서 술을 너무 좋아하잖느냐? 빈속에 술 먹지 마라.
내가 이 나이를 먹고 외조카 술버릇 단속까지 해야겠느냐? 쯧쯧. 세자르 외숙부가 찾는구나. 나도 말을 줄인다. 연락이 뜸할지도 모른다. 몸조심하거라.]
샤를로프는 편지를 덮어두고 뒤뜰을 걸었다. 뒤뜰의 나무는 나뭇잎을 헐벗고 점점 황량해졌다.
정원사가 땅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닦고, 하인들이 부지런히 지나다녔다.
“아가씨 바람이 차갑습니다. 이만 안으로 드시죠.”
“카타리나가 방에만 있는 건 안 좋다고 해서 잠시 산책이라도 할 겸 나왔어.”
샤를로프가 눈을 슬그머니 감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날이 차갑다고 방 안에서만 지내면 기력이 쇠약해집니다.”
“너도 요즘 잔소리가 많아졌어.”
“아가씨를 보호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카타리나는 직속 호위로 샤를로프 곁을 지켰다.
“나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가 아니야.”
오 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루퍼틱 병이 남대륙에서 기록됐던 정황을 발견했다. 그래서 남대륙에 다녀오려는데, 시일이 조금 걸리더라도 기다려다오.]
아론은 약방을 닫아 놓고 잠시 남 대륙으로 떠났다.
그것도 좀 됐다. 이상하리만큼 위기감은 안 든다.
여기서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 들면, 시한부였던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딱히 아픈 곳이 없어서인가.
이런 일상이 너무나 당연해져서인가.
루퍼틱 병은 아직 이유도 치료방법도 찾지 못했다.
“저번 생처럼 죽는다면 죽겠지.”
그래도.
샤를로프는 허공을 올려다봤다.
“적어도 그때처럼 혼자는 아니겠구나.”
샤를로프는 고요히 미소 지었다.
그 뒤.
연락이 한 통 도착했다. 발신인도 출처도 없다.
[곧 끝나]
단 세 글자.
[샤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 *
모두가 벤하민이 폐위되리라 여겼다.
황태자는 황궁에 섞이지 못했다.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그의 지지세력도 미미했으며,
황태자는 생모를 잃고 팔과 다리가 꺾이는 와중에도 가만히 숨죽였다.
그런 구도가 뒤집힌 건 단 5년 만의 일이었다.
폐위됐던 황태자가 황위에 올랐다.
“황자와 그 세력들 모두 처리됐습니다.”
그는 폐위된 자리에서 이복동생과 친척의 목을 벴다.
그 냉철함은 곁에서 보는 이들까지 섬뜩하게 몰아붙였다.
“이런 나라도 나라라고, 누군가는 명줄을 붙여서 살려놓아야 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지금 나라 꼴을 본다면, 건국왕이 무덤에서 칼을 빼 들고 뛰쳐나오겠군.”
벤하민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폐위되길 기다린 건 명분 때문이었다.
저들 모두가 그의 목을 옥죄어야,
황비와 선황의 일가친척들, 중앙장로와 주요대신까지 한꺼번에 무덤으로 끌고 갈 명분이 된다.
놈들 하나만 치워서는 끝도 없다.
모두를 치우려면 벤하민이 스스로 무덤에 몸을 파묻고,
놈들도 기어 들어오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 중입니까?”
“칼끝이 유난히 무겁군.”
“아, 칼날이 무뎌진 모양입니다. 제 칼을 드리지요. 이제는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걸음을 옮기시지요.”
벤하민은 느릿하게 걸음을 디뎠다. 조금도 성급한 기색 없이 고고한 발걸음이었다.
“유폐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유폐궁은 황족이 죄를 저지르면 임시로 유폐하고 가둬두는 곳이었다.
모두 끝났다.
로스켈라는 제 주군을 흘끔거렸다.
그의 걸음은 단조로웠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옷깃도 피가 조금 튄 게 다일 뿐.
처음부터 깔끔한 태를 유지했다.
새까만 머리칼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부작댔다.
“황비가 스스로 독을 마셨습니다.”
“…….”
“독을 챙겨두었더군요.”
릴리아나 황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벤하민은 유폐궁 문을 열었다.
바닥에 여린 여체가 쓰러져 있었다.
“죽었군.”
“살려두라 분명히 언질 줬었는데도…….”
“품속에 품어온 독을 누가 알았겠느냐?”
릴리아나는 그대로 숨을 거뒀다. 정말 고요히 죽었다. 그 표정도 편안했다.
“히끅!”
시종장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벤하민은 넋 나간 시종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놈이 모셔야 할 주인은 저기 죽은 이들이냐?”
“황……!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저는 황가에 충성하는 몸, 이 황궁의 주인이 곧 제 주인입니다.”
벤하민의 눈이 고요히 잠겼다.
‘뭣 하느냐! 폐후의 시신을 불에 태우고 처형장에 내걸어라!’
‘황태자를 철저히 감시하거라. 헛짓거리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살피란 말이다!’
‘선황의 무덤을 옮겨라.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계속 꿈에 나온다. 노인네가 무덤에서 기어 나온단 말이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똑똑히 들어주십시오. 전, 하……. 이 죄인의 죄를 묻더라도 부디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전하, 황비를 조심하십시오. 그녀에게 무언가 있습니다. 저는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벤하민은 권태로웠고 약간은 지쳤다.
예리하게 날이 선 칼날은 그의 적을 벴고, 그의 손아귀도 벴다.
시일이 지날수록 무언가 곪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공포로 사람들을 옭아맸으며,
제국민들은 경외심과 배척감을 같이 느끼며, 그를 존경하면서도 거리를 뒀다.
그의 존재가 주는 거리감이 있었다.
-덜컥.
죽은 죄인들의 유품들이 담긴 관이 알현실에 놓였다.
벤하민은 귀족들을 뱀굴 속으로 몰아넣었다.
다음으로 저 관속에 잡아넣을 것들이 뭔지 훑으려는 듯.
“죽은 이들의 개로 남겠느냐. 사람으로 남겠느냐. 개로 남겠다면 개로 남고, 사람으로 남겠다면 사람으로 남으면 된다. 너희가 택하거라.”
* * *
폐위됐던 폐태자가 황위에 올랐다.
제 이복동생과 친족들을 죽이고.
* * *
“제도에서 진혼제를 지낸다는군요.”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는 진혼제가 황성에서 열린다.
“폐하께서 직접 참관하신답니다.”
하녀가 샤를로프의 머리를 만져주며 이야기했다.
샤를로프는 손끝이 멈칫했다. 전생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진혼제 이야기는 처음인데…….
“시기가 어머니 기일과 겹치는구나.”
“저도 기도를 드릴게요.”
샤를로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이 떨리면 마음에서 동요가 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저 이야기를 듣는데 왜 눈물이 흐르는가.
샤를로프가 홀로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아, 아가씨!”
하녀가 다급하게 샤를로프를 찾았다.
“다 듣고 있으니 목소리 낮춰도 돼.”
“그게 아니라……!”
하녀가 샤를로프의 어깨를 흔들었다.
“데리러 왔다, 샤를.”
아스터가 샤를로프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벽에 기대 선 아스터가 손등으로 문을 두들기며 기척을 냈다.
오 년 만의 재회였다. 긴 기다림이었고 긴 헤어짐이었다.
“너 우느냐?”
“…….”
“누가 울렸느냐?”
우리 애 왜 저러냐? 아스터가 묻지만 하녀도 해줄 말은 없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냐?”
“아, 곧 제도에서 진혼제가 있다고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혼란이 끝났으니 죽은 이들을 위로해줘야지.”
“아가씨께서 심약한 부분이 있으시군요.”
진혼제 이야기를 듣고 동요하던 샤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을 되찾았다.
하녀는 제 아가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미소 지었다.
“곧 제도로 돌아간다고 그랬는가 봅니다.”
“이 심약한 아이를 어쩌냐. 나이를 먹어도 아이는 아이구나.”
샤를로프는 약간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이 나이를 먹고도 아이라는 말을 듣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