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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눕힌 다음에는 (34/51)


#34. 눕힌 다음에는
2023.06.27.



 
큰 몸이 머리 위로 드리웠다.


“재워줄게. 이만 자자.”

벤하민이 검붉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머리칼이 손아귀에 엉켜 들자, 그의 입술이 느슨하게 풀렸다.


“난롯불이 약한가? 뺨이 차갑구나.”

“복도가 추웠잖아요.”

“이런……. 얇게 입고 나와서 그렇잖아.”

샤를로프는 그의 손아귀에서 머리칼을 빼냈다. 이불을 끌어 올린 샤를로프는 벤하민을 먼저 눕혔다.


“재워 달라고 부른 게 아니라 재워주려고 불렀나?”

“당신을 일단 눕혀두고 고민할게요.”

샤를로프는 그를 눕혀놓고 옆에 자리했다.

이불을 그의 어깨까지 올려 덮어주었다.


‘어, 이거로는 부족한가?’

샤를로프가 그의 이마를 손등으로 짚는데, 곁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하는구나.”

“그것 외에는 내가 뭘 해야 할지를 잘 몰라서요. 조금 서툰가요?”

“괜찮아.”

“다행스럽게도 열은 없네요. 감기 기운이 있는 건 아니에요.”

“칼 쓴다는 기사가 감기에 걸린다면 나가 죽어야지. 제 몸 관리 하나 못 했다는 뜻이 아닌가?”

몸관리가 그렇게 허술해서야, 누가 누굴 챙긴다는 말인가?

벤하민은 가벼운 농담이라도 나누듯 가벼운 어조였다.


‘지금 이거 나 들으라고 한 이야기인가?’

네 몸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네가 나를 돌본다고?

어쩐지 질책하는 것도 같다.


“눕힌 다음에는?”

“저도 자려고요.”

샤를로프는 그의 곁에 자리했다.


“밤바람이 요란해서요. 혼자 자면 잠이 안 올 것 같거든요.”

“혼자 자기 무섭구나, 샤를.”

샤를로프는 촛불을 불어서 마저 껐다. 탁자에 촛대를 다시 올려놓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이불 아래를 더듬거렸다.

이불이 사부작댔다.

샤를로프는 누울 자리를 찾아서 몸을 비집고 넣었다.

등을 돌리고 눕는데, 그의 몸이 닿았다.

그가 팔을 뻗어서 누울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가까이 와.”

그가 이쪽을 보는 것 같다.


“어차피 같이 자려고 왔잖아.”

벤하민이 샤를로프를 당겨 안았다. 등 뒤로 그의 가슴팍이 닿았다.

성난 바위에 부딪힌 듯했다. 그의 품은 뜨겁고도 단단했다.

샤를로프는 등을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졌다.

역시나 벤하민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새까만 동공이 어둠 속에서 빛을 띠고 번뜩였다.

그가 샤를로프의 잔머리를 쓸어넘기고 팔을 허리에 둘렀다.


“네가 데려다 놓았으면서 등을 돌리고 눕는 건 아니잖아.”

그가 속삭였다.


“그 뒤는?”

이제는 어쩔까.


“나를 잘 다독여 옆자리에 재우려고 한 게 다였나?”

그가 샤를로프의 배를 톡톡 다독였다.

마치 ‘이게 다인가?’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은 아이의 배를 토닥이듯이 보드라웠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그가 아랫배를 감싸고 손끝으로 건반을 누르듯 두들겼다.


“이것뿐이었군.”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팔을 괸 그는 손짓을 그대로 멈추었다.

잠들기라도 한 듯, 그의 숨은 점점 고요해졌다.

그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단정한 자세였다.

속눈썹은 길게 뻗었고, 그 아래에 숨은 눈도 섬뜩함을 감췄다.


“왜?”

그 시선을 느낀 듯, 벤하민이 눈을 떴다. 졸음에 잠긴 눈이 어둑했다.

샤를로프는 그의 턱을 감쌌다.

턱이 매끄러웠다. 손은 굳은살에 흉터도 많은데, 그의 뺨은 희고 창백했다.

마음이 쓰였다.

샤를로프는 눈을 감고, 입술을 가져갔다.

두 입술이 맞닿았다. 시린 온기가 있다면 이것과 닮았으리라.

뜨거운 숨이 터졌다. 입술을 베어 물고 척척하게 적셨다.

입술을 우물거리자, 앞니가 말캉하게 살을 짓이기듯 한 움큼 베어갔다.


“너는 사람을 애태워.”

너는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하듯 줄을 당기다가도 놓고, 끌려오다가도 멀어진다.


“샤를.”

속삭이는 이름이 입안에서 흩어졌다.

* * *

벤하민은 잠든 샤를로프를 내려다봤다.

침대 맡의 촛불도 꺼졌다.

그는 이불을 끌어올려 샤를로프에게 덮어주었다.

옆자리에 누워 다독이자,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는 두 손을 겹쳐 배꼽 위에 올려놓고 잠들었다.

꼿꼿하게 누워서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내가 괜한 약속을 해놨어.”

초야 때 그런 약속을 할 게 아니었어.


“아주 속이 편안하구나.”

샤를로프가 등을 돌리고 누웠다.

흰 이불 위로 그 흔적을 흩뿌려놓듯, 검붉은 머리칼이 흩어졌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옆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서. 한쪽 뺨만 어렴풋하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피부는 희고 창백했다. 가는 목선이 도드라졌다.

그는 그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아직.


“혼자 두지 말라는 건 너였어, 샤를.”

그 속삭임이 들린다는 듯, 샤를로프가 마주보며 돌아누웠다.

아주 깊게 잠들었다는 뜻이었다.

잠든 너는 모르겠지만, 네게는 잠버릇이 있다.

너는 온기를 찾듯 이불을 더듬거리며, 사람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그녀가 작게 속삭인다.


“가지 마.”

혼자 두지 마. 그건 애절한 애원이었다. 저를 혼자 두지 말라고, 잠결에 속삭이는 본심이었다.


“나만 놔두지 마.”

제발. 다시 돌아와. 그 속삭임은 서서히 묻혔다.

이런 모습을 봐두고, 혼자 놔두기는 힘들잖아.

혼자 두지 말라는 약속을 지켰다.

잠결에 홀로 속삭이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지금도 곁을 지킨다.

샤를로프가 팔을 뻗어왔다. 하얀 손가락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에 힘이 없어서인지, 셔츠 끝자락에 미약하게 매달렸다.

벤하민은 그런 샤를로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샤를로프는 따뜻하면서도 서늘했다.

손발은 차갑지만, 목덜미와 이마는 뜨거웠다. 뜨뜻미지근한 그 온기를 손등으로 훑다 관뒀다.


“이런 네 곁에서 짐승 새끼처럼 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를 어쩌면 좋을까.

그는 여린 등을 다독였다. 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리자, 숨소리도 한층 가벼워졌다.

그는 선잠에 빠졌다. 고른 숨소리가 그를 재웠다.

새벽녘이 밝고.

그 뒤.

시간은 계속 흘렀고.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바깥에서 소식이 들렸다.

황태후의 유해를 돌려보냈던 노인이 생을 마감했다.

제 할 몫을 다하고 이젠 떠난다는 듯 고요히 떠났다.

* * *

낡은 오두막은 좁았지만 아늑했다.

나무로 지어 올렸고, 마른 장작 냄새가 풍겼다.


“노인은 유해봉환식을 끝내고, 며칠 뒤에 바로 숨을 거뒀습니다.”

황실에서 파견 보낸 관리인이 보고했다.

마지막 생을 이어오던 게 황태후 때문이었다는 듯.


“다른 가족들이 없나?”

“네. 여기서 혼자 살아온 듯합니다.”

“장례 절차는 모두 밟았고.”

“네. 폐하. 부족함 없이 치렀습니다.”

관리인은 멋쩍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야기했다.


“노인도 오두막으로 돌아오던 날 예견했답니다. 자신은 곧 죽는다고요. 그럼, 언젠가 죽는다면 자신이 칠십 년 넘도록 지내온 이곳에서 죽겠다고.”

“노인이 그걸 제 입으로 이야기했나?”

“네. 노인들에게는 깊은 혜안이 있다잖습니까? 본래 삶보다 더 긴 삶을 살았다더군요. 황태후 폐하를 돌려보내려고 이승에 발을 붙여놓았고, 제 할 몫을 끝냈기에 이제 눈을 감겠다고 하더군요. 임종은 다행히 지켰습니다.”

그날 황궁에서 저택을 하사했는데도, 그걸 거절한 게 노인이었다. 그는 제 죽을 날을 이미 엿봤다.


“그럼 됐다.”

저녁때가 다 됐다. 벤하민은 털망토를 덮어썼다.


“국혼 뒤로 오랜만에 나왔는데, 좀 더 걷는 게 좋겠어.”

“야시장이라도 보고 가겠어요?”

“아……. 마침 나왔으니 그것도 좋겠어.”

샤를로프는 저택을 나오며, 숲길에 시선을 뒀다.

숲길은 노인이 모두 깎아놓았다. 굽은 등으로 풀을 베고 또 벴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산속 오두막이라고 그러나?’

마른 장작 냄새가 어쩐지 코끝에 오래 남아서 맴도는 것 같다.

근위대장이 벤하민에게 다가왔다.


“폐하, 야시장에 따르는 호위 인력은 어쩌시겠습니까?”

“적당히 몇몇만 뒤따르거라.”

“그럼 호위는 몇 명만 추슬러 맡겠습니다.”

야시장은 넓은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신년제가 다가온다고 야시장도 분주했다. 합판을 올려 상점을 차리고, 그런 합판 포차들이 줄지어 섰다.

등불을 올려 거리를 밝히고, 길목마다 사람이 북적댔다.

이 사이에서 호위를 어떻게 하나?

샤를로프가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면, 벤하민은 이렇게 답했다.


‘네게 기척을 잡힐 정도라면, 기사단 직위 반납하고 시골로 은퇴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만 돌아봐.’

 
야시장은 길거리 음식들로 이런저런 냄새가 다 섞였다.

고기에 잔뜩 뿌려둔 향신료 향에 코가 알싸했다.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과, 바람개비 같은 것들을 손에 쥐고 뛰어가는 아이들까지.

잠시였지만 넋을 놓게 됐다.

어린아이들이 샤를로프를 스치고 지나갔다.

샤를로프가 목을 틀자, 작은 머리통들이 닭꼬치를 하나씩 들고 멀어졌다.


“저거 먹어볼까요?”

“향신료 때문에 입맛에 안 맞을 건데.”

“궁금하잖아요. 저 애들은 뭐가 즐겁다고 저렇게 웃으면서 뛰어가는지요.”

나는 어려서 저런 걸 못했잖아.


“닭꼬치 하나 드릴까요?”

앞치마를 입은 아주머니가 닭꼬치에 매콤한 소스를 듬뿍 얹어서 내밀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닭고기가 먹음직스러웠다.

길거리 특유의 불량식품 느낌도 났는데, 그게 막 나쁜 건 아니었다.

한 입 베어 물자 계피 향이 올랐다. 그녀가 한쪽 눈매를 찌푸리자, 벤하민이 입을 벌렸다.


“안 맞나?”

그가 한 입 베어 물고 값을 치렀다.


“이리 줘.”

“괜찮아요?”

“길거리 술안주로 자주 먹던 것들이라서.”

벤하민이 닭꼬치를 가져갔다.

그는 꼬치를 모두 해치우고, 이 뒤로도 문어구이 오징어구이 따위를 대신 해치웠다.


“이리로 와.”

사람들 사이를 바쁘게 지났다.

겨울옷을 단단히 입을 행인들이 노름판에서 기웃댔다.

그 틈을 흘끔거리던 샤를로프는 어느 한 곳에서 멈춰 섰다.


“안 오고 뭐 하고 섰어?”

그 걸음이 멈춘 건 중앙탑 앞이었다.

번화가에서 이어진 골목길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었는데, 곧 누군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폐하, 잠시 납셔보셔야겠습니다.”

 

* * *



“사, 사람이 칼에 찔렸다! 사람이 칼에 찔렸다고요!”

누군가 비명처럼 외쳤다.


“쫓아라!”

놈은 골목길로 도주했다. 그 길목이 점점 어두워졌다.


“네놈은 포위됐다. 순순히 투항하거라!”

놈이 눈을 까뒤집었다. 끅끅대며 딸꾹질을 삼키는데, 그 호흡이 을씨년스러웠다.


“……머저리 새끼들. 다 뒈지거라.”

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투명한 병이었다. 그 안에서 검붉은 액체가 출렁거렸다.

놈이 그걸 바닥에 내팽개쳤다.

유리병이 깨지고, 액체가 바닥에 스몄다. 독기가 땅을 부식했다.


“우욱! 이 악취는 뭡니까?”

곧, 땅이 출렁거렸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파동이 일었다. 딱딱한 벽돌이 흙처럼 으깨지고.


“다, 다들 뒤로 물러나거라!”

‘크르륵?’

땅에서 뼈가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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